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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전쟁 -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생명과 권력의 투쟁사
핼 헬먼 지음, 이충 옮김 / 바다출판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의학의 역사를 다룬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하는 생각에서 사게 된 책이다. 대중들에게 과학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학이나 물리학같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딱딱한 분야도 대중을 위해 쉽게 씌어진 책들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대중을 위한 책이지만 그 책 속에 소개된 내용을 일반인들이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략적인 의미만 전달된다면 책의 목적은 다한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의학이 수학이나 물리학 보다 결코 더 복잡한 학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학이 수학이나 물리학보다 더 이해시키기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는 재미있는 수학이야기나 재미있는 물리학이야기는 읽어봤지만 재미있는 의학이야기를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경험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분야의 책들을 찾아본 독자라면 내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의학사를 다룰 것, 그리고 재미있을 것. 이 두 가지가 내 요구조건이지만 이런 책을 찾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냥 재미있는 책을 찾는 것 만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내 선입견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 책의 내용이 과거에서 출발해서 현재로 끝나는 의학사의 흐름을 지루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간에 따른 단선적인 서술은 자칫 지루해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책은 시시콜콜한 역사적인 사건을 미주알 고주알 주워섬기는 대신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갈등을 위주로 서술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이 책의 내용이 과거보다는 현재를 훨씬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소아마비 백신 논쟁이나 에이즈는 의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귀가 솔깃해 질만한 소재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책의 참신한 구성방식에 비해 내용이 기대이하라는 점이다. 사건을 위주로 서술한 이야기는 박진감도 없고 왠지 신빙성도 떨어져 보인다. 이 책이 좀더 흥미진진해지려면 저자는 의학적인 발견에 비중을 적게 두고 인물들에게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뒀어야 했다. 설명보다는 묘사에 충실했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풍부한 자료,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된 자료들은 너무 빈약하다. 번역의 문제를 떠나 원서 자체가 꼼꼼한 조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다.
역사라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이야기다. 하지만 지나간 것을 근거없이 횡설수설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나도 왕년에는 말이지......'로 시작하는, 술좌석에서 오가는 무용담처럼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되기 십상이다. 역사가 읽는 이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것의 현재성 때문이다. 따라서 흥미있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펄떡펄떡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마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인양. 그렇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풍부한 자료이다. 이것 없이는 누구도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의학사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소 안이한 책의 내용에 실망하며 책을 덮었다. 아마도 의학사를 소재로 한, 재미있는, 책을 읽기 위해서는 당분간 더 기다려야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