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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채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4월
평점 :
품절
서른 셋은 운명적인 사랑을 액면 그대로 믿기엔 좀 많은 나이야. 그가 탁자 위에 쌓인 열 다섯 개의 맥주병들을 천천히 센 후에 말했다. 맞아. 약간 취기가 오른 나는 앞서의 그의 주장을 안주 삼아 찬 맥주 거품과 함께 목울대로 쿨렁쿨렁 넘기면서, 약간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맞장구를 쳐줬다. 물론 서른 셋의 그와 서른 둘의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우리들이 운명적인 사랑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주장을 펴기에는 서른 둘과 셋은 너무 어리지 않은가!
서른 셋의, 결혼하고 싶어하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는 홍상수의 '오! 수정'이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열렬한 팬인, 서른 살의 여자 친구를 둔 친구의 당시의 관심사는 '결혼'이었다. 이 여자가 과연 운명이 정해준 그 여자일까. 운명론자들은 결혼을 앞두고 항상 이런 질문을 할 것이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친구는 이런 운명론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그의 고민 또한 결혼이라는 현실의 관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다소 엉뚱하지만 난 그와 헤어지면서 채영주의 <웃음>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물론 당시에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피엔딩. 이것이 내가 친구에게 <웃음>을 권한 유일한 이유였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대부분 청춘남녀의 사랑의 행보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극단적이지도 않고 '오! 수정'처럼 냉소적이지도 않다는 내 평소의 생각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전자도 아니고 후자도 아닌,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차갑지 않은 사랑의 방식,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채영주의 소설 '웃음'이었다.
미리 밝혀두지만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채영주의 소설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독자들이 읽기에 그의 소설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평범함과 단순함. 이것이 이 소설의, 혹은 작가 채영주의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만약 작가의 이 점이 맘에 든다면 <웃음>은 언제 어디서 읽어도 편안한 읽을거리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웃음>은 뻔하고 지루한 사랑타령이 된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연출가인 '민재'가 배우인 '영인'을 파트너가 아닌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축으로 시종일관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이야기의 긴장을 유지한다. 거창한 주제의식을 설교하거나 현학적인 문장을 구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웃음>의 내러티브가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때문이다. 원래 사랑이나 소설이나 본질적으로 '밀고 당기기' 아닌가!
우연이지만 <웃음>의 해피엔딩은 현실 속에서도 유효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해가 바뀌어 서른 넷이 된 그 친구의 청첩장을 올해 초에 받은 것이다. 서른 셋의 그 친구 말이다. 그는 유월의 첫날 63빌딩에서 결혼했다. 물론 '결혼'이 개인사의 '해피엔딩'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에게 권한 <웃음>은 나름대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결혼하는데 <웃음>이 정말 영향을 미쳤을까? 어쩌면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게 훨씬 더 가능성이 있다.
모든 작품은 유고작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은 비장하면서도 쓸쓸하다. <웃음>의 작가 채영주의 모든 작품은 2002년 6월 15일 그의 죽음과 함께 모두 유고작이 되었다. 웃음과 해피 엔딩. 이 두 단어가 쓸쓸하게 울린다, 유고작이라는 타이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