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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풍경들 - 고종석의 우리말 강좌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창작도 아니고 평론도 아니고 뭐야? 잡문 아냐? 별 시덥지 않은 걸 가지고 글을 다 쓰는구먼. 아니 요즘엔 이런 시시껄렁한 걸로도 책을 쓰나? 나 원 참. 돈독이 올라도 단단히 올랐어. 기타 등등. 이런 갖가지 선입견과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제목과 내용을 가진 책들을 사람들은 '에세이'라고 한다.
여하튼, 뭐라고 이름 붙이던 간에, 에세이라고 하면 에세이고 잡문이라면 잡문인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 다시 말해 좋게 말하면 에세이스트고 좀 얕잡아 얘기하면 잡문가(?) 중에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 고종석은 수다체(?)의 글을 가장 잘 쓰는 에세이스트다.
어찌 보면 현학적인 횡설수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넘치는 박학다식을 주체 못하는 이의 글 같기도 한 것이 그의 글의 일관된(?) 특징이다. 굳이 그의 글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수다스러움과 산만함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의 글을 요약하든 간에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따라서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의 주제와 관련된 그 무언가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책을 읽는 것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책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이론을 쉽게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책들의, 아니 내가 읽어 본 그의 책들의 일관된 주제는 '언어'이다. <언문세설>, <감염된 언어>,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같은 책들도 다소 산만하긴 하지만 어쨌든 알맹이는 '언어'이다. <국어의 풍경들> 역시 그의 전공이자 일관된 얘기꺼리인 '언어', 구체적으로 '한국어' 변두리의 풍경을 자신의 방식으로 써내려 간 책이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저자의 수다스러움이 다른 책들에 비해 현격하게 줄면서 훨씬 더 질서정연하고 의젓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와 한국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또 말과 얽힌 재미난 야사(野史)나 자기 경험의 고백이 적기 때문에, 독자들은 오히려 좀 지루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 만큼 한국어에 대한 애정이 훨씬 돋보이니까. 저자는 책 속에서 한글 전용이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말 그대로 한국어의 풍경을 담담하게 서술할 뿐이다.
물론 한글전용에 대한 논의가 불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런 화두에 귀기울이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더 필요한 법이다. 그걸 좀 유치하고 원색적인 표어로 대신한다면 '국어 사랑'쯤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주장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다. 한국어가 단점도, 부족한 점도 많은 언어지만 정말 사랑스럽고 소중한 언어라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글이 산만하다는 앞서의 내 주장이 저자의 글쓰기 방식을 비하하기 위한 것도, 책의 가치를 깎아 내리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 실은 난 이런 책들의, 혹은 저자 고종석의 이런 산만함이 좋다. 산만함이라는 것이 바꾸어 얘기하면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한국어'라는 무거운 주제로 이 정도의 지적인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넘버 쓰리, 혹은 알맹이 없는 삼류 공박(攻駁)이 양적으로만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뭐가 똥이고 뭐가 옥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요즘 '한국어'라는 무거운 주제로 풀어내는 그의 입담은 질적인 면에서 가히 넘버원이라고 할 만하다. 덧붙여 그의 입담이 단순한 수다를 넘어서 진지한 논의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니는, 어찌 보면 '국어사랑'이라는 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