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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 그리폰 북스 018 ㅣ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의 나이는 몇 살일까? 혹은 최초의 인류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다. 비록 빅뱅이론과 진화론이 현재까지는 우주와 인류의 탄생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이론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도 완벽하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완벽하지 않다기보다 별로 극적이지 않다. 흙먼지가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 폭발한 후 계속 팽창하여 상상할 수조차 없이 넓은 우주가 되었다는 것이나 원숭이가 계속 허리가 펴지면서 인류가 되었다는 설명은 왠지 거창한 답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좀 시시하게 들린다. 그것보다는 빛이 있으라하니 빛이 있고, 땅이 있으라하니 땅이 생겼다는 창세기의 우주론(?)이나 흙으로 빚은 후 숨을 불어넣어 탄생한 아담의 이야기가 훨씬 극적이다.
이론의 진위여부를 떠나 성경의 창조론보다 훨씬 극적인 게 없을까? 언뜻 생각나는 게 없다. 확실히 여기까지가 보통 사람들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다. 이쯤 되면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펼쳐 볼 마음의 준비는 끝난 것이다. 인류의 시작과 지구의 운명에 대해 거장 아서 클라크는 누구보다도 황당한 가설을 내놓는다.
그가 서술한 바에 의하면, 고도의 과학 문명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지구라는 별에 인류를 번식시키고 자신들이 정한 시기까지 인류의 진화를 지켜보다가 다른 별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의 핵심이자 전체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특수 기구의 등장이나 박진감 넘치는 우주전쟁을 예상하는 독자들에겐 다소 지루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느끼고 있거나 좀 색다른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유년기의 끝'은 최고의 선택이다. 일단 작가의 화두를 공유하기 위해선 독자들의 상상력의 범위를 좀 확장시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 우주적 화두를 풀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읽는 이의 상상력의 용량을 훌쩍 뛰어 넘기 때문이다.
비록 작가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지구의 미래'라는 수준을 한 번 벗어나 보자. 그러면 그 순간부터 '유년기의 끝'은 작가의 허황된 가설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인류의 역사로 다가온다. 작가는 인류의 종교들이 묘사했던 지구의 첫날이 창조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버로드'라는 외계생물체에 의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게 작가가 주장하는 창조론이다.
황당한 가설이지만 작가가 워낙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탓에 그의 가설은 상상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종교적 믿음처럼 들린다. 아니, 그는 실제로 '유년기의 끝'에서 서술된 이 창조론을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독자 자신도 작가의 믿음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