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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여행이라는 닳고 닳은 장치를 소재로 삼은 이 소설을 혹 서점에서 본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뜬금 없는 제목 탓에 선뜻 고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혹 이 책을 골랐다 할 지라도 책표지의 '시간여행을 소재......'라는 말을 보고 '시간 여행? 또?'라고 생각하며 도로 제자리에 꽂아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그러한 독자들의 예상과 선입견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일단 제목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웰즈의 '타임머신', 폴 앤더슨의 '타임패트롤'처럼 노골적으로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았음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처럼 은근히 암시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런 예상을 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개'라는 동물이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보다 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개가 타임머신을 타고 이러저러한 모험을? 천만의 말씀이다.
추측컨대 작가는 원고를 마감하고 제목을 달면서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부제로 나오는 주교의 그루터기도 이 소설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데 제목을 뭐라고 달지?'라고 생각하다가 마감에 쫓겨 이걸 제목인양 넘기게 되었고,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작가가 워낙 수다스럽고 정신이 없기 때문에 원고를 넘기는 중에 이것의 일부가 제목으로 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것이다. 농담이다.
시간 여행을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엉뚱한 제목을 가진 이 소설 속에는 유쾌함과 수다스러움이 뒤죽박죽 엉켜있다. 셰익스피어와 호메로스로부터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작가는 주인공들의 입을 빌어 끊임없이 지적인 수다의 향연을 벌인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뒤죽박죽이 되지만 수다는 계속된다. 하지만 칠백 페이지를 넘는 이 장편소설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상황을 막판에 정리해내는 작가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작가가 인용한 수많은 인용구는 사건을 푸는 암시가 되고 마지막에 이르면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의 역사관을 드러낸다. 물론 수다스럽게.
필립 K. 딕의 단편 '오르페우스의 실수'에서처럼 시간을 거슬러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면 누굴 선택할까. 만나고 싶은 사람은 무지하게 많지만 SF 작가들에게만 한정시킨다면...... 아시모프를 만난다면 로봇에 대한 그의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을 내내 듣다가 올 것 같고, 아서 클라크를 만난다면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한 그의 끝나지 않는 강연을 지겨울 때까지 듣다가 결국 끝을 듣지도 못한 채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럼 하인라인? 아니면 앤서니 버제스? 스테니슬라프 램? 몇 년 전이었으면 이런 선택을 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겠지만 지금 해야 한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코니 윌리스를 선택할 것이다. 그녀의 수다가 타임머신의 이륙시간까지 끝날 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