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피스 공화국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최근에는 '오랜만에'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된다. 오랜만에 여행을 가고, 오랜만에 연극을 보고, 오랜만에 감동을 받고, 오랜만에 장정일의 소설을 읽고 등등. 그런데 참, 또 오랜만에 하일지의 소설을 읽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장편소설 <진술>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적어도 5-6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경마장가는길>을 비롯한 하일지의 모든 소설들 속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다. 건조하고 깔끔한 문체와 지식인 냄새를 풍기는 주인공의 성격이 늘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소설이 차용하고 있는 장르와 스타일은 항상 변하는 것에 속한다. <위험한 알리바이>에서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고, <새>는 환타지 소설의 형식을 차용했으며, <진술>은 모노드라마의 형식을 따라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하일지라는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형식들을 실험하면서도 스타일에 매몰되거나 무리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참,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건 '낯선 것들의 익숙함과 익숙한 것들의 낯섬' , 좀 유식하게 말한다면, 데자뷔(deja-vu)와 자매뷔(jamais-vu) 의 혼선이다.  

<경마장 가는길>의 R과 J는 파리에서 가능했던 섹스가 서울에 와서 불가능해진다. R에 따르면, 파리에서 가장 후진 섹스가 서울에서 최고보다도 나았다는 것이다. 파리지앵의 삶을 버리고 돌아온 고국은 R이 보기에는 거짓말과 위선으로 가득하다. R은 이 낯익은 곳의 낯선 광경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아내와 가족, 부모가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소설 속에 언급된 <안나카레니나>처럼 인습의 굴레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J라는 파리의 연인 역시 서울에서는 더이상 연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울은 파리가 아니니까, J의 말이다.  

소설 <우주피스 공화국> 역시 우주피스공화국이라는 상상의 나라를 찾아가는 '할'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할은 검은 새에 쫓겨 다니던 공중전화박스 안의 <새>의 주인공이면서, 서울에서 파리의 삶을 찾는 R이면서, 장님이 되고자 하는 <경마장의 오리나무>의 주인공이면서, 다중인격으로 현실감을 상실한 <진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없으며, 그가 과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현재가 되어 있고, 추억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의 자신과 만난다.  

할에게 우주피스 공화국은 낯익은 곳이면서 현존하는 나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겐 상상속의 또는 한낫 호텔의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도착한 나라 리투아니아에서 이방인이면서 추방자이면서, 국외자이다. 모든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파리보다 낯선 한국처럼.   

잔뜩 기대를 하고 읽어서 그런지 좀 싱겁다.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반가운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