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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의학, 따뜻한 의사
로렌스 A. 사벳 지음, 박재영 옮김 / 청년의사 / 2008년 2월
평점 :
최근 몇년 동안에 여기저기서 인문사회의학이니 PDS(Patient-Doctor-Society)니 하면서 주워들은 것이 많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도대체 이놈의 학문이 뭘하는 것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이 분야를 한 번 파보라고 권유한 은사님의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뜬구름 잡는 얘기로만 들렸을 뿐...... 우선 인문, 사회, 의학이라는 이름이 맘에 안든다. 이름만 보면 인문학과 사회학과 의학을 다 섭렵 해보겠다는 얘기 아닌가! 이건 마치 인식론과 윤리학과 미학, 덧붙여 존재론까지 '통섭'하겠다고 나선 괴물 생물학의 의학버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데 이상한 것은 이 괴상한, 아니 좋게 말하면 거창한 이름의 학문을 교육하는 것이 외국 의과대학들에서는 꽤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통섭을 주장하는 괴물 생물학이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모조리 섭렵하려는 과욕의 학문은 아닐 것 같다. 설마 '괴물 생물학'과 '과욕의 학문'을 외국 의과대학들이 정식 커리큘럼에 넣어서 가르치겠어?
이름 때문에 생긴 애꿎은 누명은 어느 정도 벗었지만 여전히 정체는 알 수 없는, 의학계의 카이저소제?, 인문사회의학의 이름을 다른 식으로 풀어보면, 의학이라는 학문 안에 존재하는 인문학적인 요소와 사회학적인 요소들에 관한 학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뭔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내 짧은 지식으로는, 자연과학이란 원리와 법칙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대상을 해석하고 현상을 예측하는 학문이다. 이들이 해석하고 예측하려는 대상이 '자연'이기 때문에 이들이 하는 것은 자연과학이 된다. 자연과학 중에서도 특히 의학은 원리와 법칙을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다른 자연과학과 다를 바가 없지만 이들이 해석하고 예측하려는 대상이 '인체'라는 점에서 다른 것들과 다르다. 하지만 '인체'라고만 말하면 뭔가 모자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의학이 다루는 것이 '인체'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전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인체'가 아닌 '인간'이라고 말하는 순간, 뼈와 근육과 살만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일부가 말하고 울고 웃고 화내는 사회적인 존재로 바뀌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그러니까 임상의사들은 이러한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그러니까 '환자'를 다룬다. 그래서, 인체가 아닌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의학은 자연과학임에도 인문학적, 사회학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의학은 굳이 '인문사회'라는 긴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아도 이미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의과대학들은 인문사회학적인 의사보다는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의사들을 만들어내는데 총력을 기울이며, '이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르는데 왠 인문?사회?' 라는 반문을 하기 일쑤다. 근데 '살짝'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그놈의 인문사회의학이라는 것이 안 나오는 시간을 억지로 짜내고 없는 시간을 새로 만들어서 억지로 끼워넣어야 할 정도로 복잡하고 철학적이고 심오한 분야일까? 물론 며칠 전 까지는 나 역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었다. 책을 읽었으니 저자의 말을 빌어서 얘기한다면,
'인문학으로서의 의학'이라는 주제는 의학이, 비록 방법적으로는 기술적인 측면이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다루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38쪽)
의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환자들은 질병 앞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드러낸다.(89쪽)
의사는 환자와의 신뢰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그들 앞에 놓인 불확실성에 대해 환자와 함께 고민할 수 있다. 의사가 환자의 요구를 잘 이해하고 환자의 지성을 존중하고 충분한 설명을 해 줄때, 환자는 불확실성을 기꺼이 수용한다.(115쪽)
의사에게는 말하자면 다음 세가지 역할이 있다. 나는 전문가이다. 나는 의사이다. 나는 아무개(자신의 이름)이다. 각기 다른 이 역할들은 저마다 특정한 가치관을 갖는다. (261쪽)
저자는 쉽고 단순한 정의로 부터 시작하여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열쇠들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의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인문학으로서의 의학의 출발점은 환자이며,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모든 의학적 행위가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환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저자는 의사와 환자 앞에 놓인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법을 제시하고, '질병'에 걸린 환자가 아닌 나쁜 소식을 접한 '개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라고 충고한다. 저자가 책 속에서 강조해서 얘기하는 내용은 진단과 치료에 관한 지식이 아닌, 질병이라는 은유, 관계, 협력, 의사소통, 가치관, 전문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이러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인문학적 가치들을 다루는 저자의 방식이다. 본문 속에서 저자의 경험은 여러가지 증례로 제시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가 덧붙여 진다. 저자는 자신의 개별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를 일반화 시킨다. 결국 이 책의 핵심은 '일반화'에 있다. 이런 항목을 다루는 책들이 빠지지 쉬운 함정은 너무 일반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끝나거나, 너무 심오한 얘기를 해서 독자를 졸게 만들거나, 하나마나 한 견해를 덧붙이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다. 길고 잦은 증례들과 뻔한 견해, 이 책의 서두 부분을 읽을 때까지는 그러한 위험이 다분히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지루함과 식상함이 곳곳에 설치해 놓은 지뢰밭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나간다. 독자가 초반부분에 매설되어 있는 지뢰밭 속에서 졸거나 자폭하지 않는다면, 저자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으리라. 그 메시지란 다름 아닌 질병이 아닌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천재일 필요는 없다. 정확한 판단력과 선량한 마음만 있으면된다. (399쪽)
저자가 내린 결론이 너무 비현실적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읽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