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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병원 2.0 - 호모 인펙티쿠스
박재영 지음 / 청년의사 / 2008년 10월
평점 :
의학 드라마는 무지하게 많다. 심지어 나같은 드라마 문외한도 이름만 알고 있거나 본 적이 있는 드라마들이 꽤 있을 정도이니까. 'ER', '하우스', '그레이아나토미'...... 비단 미국 드라마 뿐만이 아니다. 최근들어서 한국도 부쩍 많아졌다.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이', '뉴하트'...... 하지만 양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삶, 좀더 정확하게는 일상,을 다룬 드라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일반인들이 의사들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은 그들이 희귀한 병에 대해서 '놀라운' 진단을 하고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눈부신' 치료를 하는 순간일 것이다. 하우스는 '놀라운' 진단과 '눈부신' 치료를 하면서 자신의 동료들을 조롱하고 환자들을 궁지로 몰아 세운다. 그게 아니라면 의사들만의 지식과 경험을 무기로 모종의 '음모'를 꾸미거나 새로운 약이나 치료를 위해서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순간일 것이다. 로빈 쿡 소설에 나온 의사들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근데 고작 이게 일반인들이 의사들에게 갖고 있는 관심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국의 의학드라마는, 이렇게 싸잡아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의사들의 일상이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사들과 병원의 하루하루는 제대로 보여지지 않는다. 매번 그 드라마가 그 드라마일 뿐아니라 저번에 저질렀던 사소한 실수들도 역시 대부분 똑같이 사소하게 반복된다. 그들이 관심있는 것은 시시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놀랍고 눈부신 것들이다. 하지만 놀랍고 눈부신 것은 드물기 마련이고, 그래서 작가들의 머리 속에서 나오는 소재는 한정되어 있고, 또 그래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 된다, 이야기나 인물이나.
왜 의사의 일상은 다른 이들의 관심이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주 쉽게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추론이 가능하다. 시청자의 대부분은 의사가 아니고, 드라마는 의사가 아닌 대부분의 시청자를 위한 것이고, 그러니까 의사의 일상은 드라마 작가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 만약 이런 식의 이유로 여태껏 대부분의 한국드라마가 비정상적으로 착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악한, 또는 비정상적으로 폭력적인 의사들의 놀랍고도 상상을 초월하는 진단과 치료를 행하는 이야기만을 소재로 써왔다면, 그건 엄청난 오산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조폭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화판에 조폭 영화가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실 알고보면 정반대의 이유,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가 아닌 '그들'의 일상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역설적인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다름' 안에 묘한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이잖아?
누군가의 일상을 다루는 일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그것도 비밀이 많은 이들의 일상은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그래서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것이 아닐까? 의사들도 자기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의사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른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자기들끼리도 비밀도 많고 감추고 싶어하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는 내과의사들의 일상을 모르고, 내과의사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일상을 모르고,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마취과 의사들의 일상을 모르고..... 물론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들 모두는 실수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심지어 자기 동료들에게 조차도.
사족이 길어졌지만 이 소설의 의미는 이토록 비밀이 많은 집단의 '일상'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소설은 술마시고, 연극하고, 사랑하고, 친구를 떠나보내고, 또 술마시고, 시기하고, 결혼하고, 취직하는-덧붙여 성희롱하는 것 까지!-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이 모든 동사들의 주어가 '의사'라는 것이다. 작가는 의사들의 일상을 최대한 꼼꼼하게 그려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록을 나열하고 이야기를 연결한다고 해서 반드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달리 말해보면, 일상을 '기록'하고자 하는 기록자로서의 욕망이 소설을 창작하고자 하는 창작가로서의 욕망을 앞서고 있다. 전자는 아마도 저널리스트인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소설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제시하고 설명하였지만 이야기의 열거만 있을 뿐 이러한 '열거'가 독자들을 긴장시키거나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플롯(plot)'은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엮이고 꼬이고 쌓이는 것이다.
최근에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설명한 어느 책에 써있던 말이다. 사실을 '기록'하는 것보다 결말을 창작하고 꾸미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혹 작가가 원한 것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기록하는 것, 또는 남기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