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핀터 전집 8
해롤드 핀터 지음, 권경수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전집을 사지 말자는 내 나름대로의 원칙을 어기면서 까지 결국 해롤드 핀터 전집을 사게 되었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인데, 하나는 당연히 해롤드 핀터의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무작정 전집을 사지 않는 평소의 성향을 감안하다면 아홉권을 다 산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두 번째 이유이다. 장르가 희곡이라면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 하더라도 잘 팔리지 않는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조차도 읽은 사람은 드물다. 혹 셰익스피어가 20세기에 태어나 노벨문학상을 탔다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리라. 그래서인지 출판업계에서는 극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다시 말해서, 희곡은 잘 읽히지 않기 때문에,  난 200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해롤드 핀터의 전집을 사기로 했다.  물론 그 결심마저도 굉장히 늦게 이루어 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근데 잘 읽히지 않는 거랑 내가 전집을 산거랑은 대체 무슨 관련이? 좀 자세히 설명하면,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안팔릴 거라는 것이고 잘 안팔리는 것은 곧 절판될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다 읽을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몇 년간의 망설임끝에 해롤드 핀터의 전집을 사게 됐다. 절판될까봐. 

핀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생일파티' 일 것이다. 물론 '생일파티'도 좋지만 8권에 실려있는 '배신'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 연극은 작품에 등장하는 네명의 주인공이 서로를 철저하게 속이는 이야기이다. 이 철저한 속임이 곧 배신이며, 이 배신은 서로가 잘 아는 사이에서, 십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루어진다. 로버트와 에마는 서로가 불륜을 저지름으로써 배신하고, 제리는 로버트의 아내인 에마와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로버트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제리에게 숨김으로써 서로를 배신한다.

이 연극은 제리와 에마가 헤어진 후 다시 만나는 1977년에 시작해서 점점 과거로, 때로는 같은 해의 다른 시간으로(1973년, 1973년 나중)이동하면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시간적인 선후 관계는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몇가지 사소한 사건들-에마의 고백, 제리의 편지, 토르첼로행, 모터보트, 스쿼시, 네드-은 서로가 어떻게 속고 속이는 지를 관객과 배역들이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관객이 아닌 독자로서도 이 연극의 전후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일이다. 나 또한 몇가지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앞 장면을 여러번 다시 뒤적였다. 독자로서는 자주 확인해야 하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집중을 해야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나는 두 종류의< 배신>을 갖고 있다. 하나는 박철완씨가 번역한 것이고 또하나는 정경숙씨가 번역한 것이다. 두가지 번역본 모두 극을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고 대사들이 매끄럽게 처리되어 있다. 하지만 한가지, '시간'적 배경을 기술하는데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박'의 경우 '1973년 나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이 '정'의 경우에는 '1973년 후반'으로 되어 있다. 원본을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문맥상 '박'의 경우가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1973년 후반이라는 번역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1973년 후반이라면 계절상 여름이 지난 10월 이후 정도를 의미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시간적 배경의 장면은 여전히 '여름'이기 때문이고 '후반'이라는 의미자체가 애매모호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일년 중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후반이란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