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7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데뷔작인 '퇴원'을 포함하여 여섯 편의 중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소재는 '질병'이다. 아마도 작품 '잔인한 도시'가  예외가 될 것 같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질병 또는 의학은 이청준이 흔히 사용하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을 몇개 열거한다면, '병신과 머저리', '귀향연습' 정도를 들 수 있다. 장편들을 한 번 살펴보자.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나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축제'에서는 알츠하이머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은 원인불명의 포도막염을 앓으면서 시력을 잃게 된다. 세부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이청준의 작품 속에 의학적인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의학이라는 관점에서 여기 실린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퇴원'은 위궤양으로 치료받는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가 앓고 있는 실제 질병은 정신적인 것이다. 작품 속의 용어를 빌어서 말하면 자아망실증(간호사 미스 윤이 장난처럼 붙여준 병명) 환자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다. 친구인 의사 준과 미스 윤은 위궤양을 치료하려 하지 않는다. 의사 준은 '나'를 불러내어 술을 권하고 미스 윤은 거울을 주며 대화를 요구한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의도는 하나이다. '대화'를 하자는 것. 그들이 원하는 대화는 '나'의 과거의 정신적 내상과 관련되어 있고, 의사 준은 '나'의 정신적 내상과 연관되어 있다. '퇴원'은 데뷔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하게 짜여져 있다. 이 소설을 읽어내는 방식은 평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해석은 평론가들이 아닌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분석이라는 틀로 분석한 글이었다. 이 글 속에서는 이청준의 개인사(이청준은 어렸을 적에 거의 모든 형제들을 잃었다)와 '나'가 겪은 유년의 기억(광 속에서 잠이 든 사건)과 위궤양이 뜻하는 허기와 복통의 의미가 연결된다.

나머지 작품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표제작이기도 한 '소문의 벽'이다. 이 작품 집에 나온 세편의 소설, '소문의 벽', '황홀한 실종', '조만득씨'은 정신과 의사와 정신과 환자의 관계를 축으로 소설을 진행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소문의 벽'은  정신과 의사들의 도구인 '말'과 글쟁이들의 도구인 '글'을 고백이라는 틀로 묶어서 교차시키면서 소설을 진행시킨다. 진술 공포증과 전짓불 공포증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는 박준의 과거를 추적하는 '나'는 소설가인 박준의 말과 글을 막고 있는 것이 전짓불과 얽힌 과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신과의사인 김박사와 편집자 안형은 과학적인 원리와 편집원칙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세상과 소통을 하려는 박준을 좌절시킨다.

소통할 수 없는 박준이 선택한 것은 더이상 미친 척하는 것이 아닌 진짜 미쳐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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