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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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게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사. 황지우 중에서

<게눈 속의 연꽃>은 황지우의 네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이 나온 것은 90년대이지만 그는 분명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아니 이었다. 한국의 80년대 문학의 주류는 민중문학이었다. 물론 이건 나의 견해가 아니라 어디선가, 또는 누구에겐가 주워들은 이야기이다. 내가 별로 좋아한 적도, 좋아할 기회도 없었던 민중문학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다. 단지, 아니 오로지 알고 있는 것은 박노해라는 이름 석자와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이다. 민중문학,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민중시를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박노해이다. 그의 이름 '노해'는 가명이다. 노해가 노동해방의 약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무슨 일을 했을지 대강 감이 잡히지 않을까. 한때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던 그는 사노맹의 주도적인 인물이었고 91년 사형이 구형되었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물론 박노해 말고도 수많은 시인들이 민중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숨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감방에 들어갔었지만... 정작 현재 그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시인들의 시가 과연 읽히고 있을까? 때론 시간이 좀 무섭다는 것이, 그 수많은, 얼마인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몇백편의 어쩌면 몇천편의 시들 중에서 지금까지 읽히는 시가 고작 몇십편밖에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시인의 수를 꼽으라면 그보다도 훨씬 더 적을 테지만!

하지만 놀랍게도 그 수많은 민중시들을 제치고 지금 읽어도 당대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는 시인들이 있으니 딱 두 명만 꼽으라면 그 중 한명은 황지우이고 나머지 한 명은 이성복이다. 아마도 문학사를 정리하는 이는 1980년을 민중 문학의 시대로 명명할 것이지겠지만 정작 내가, 혹은 우리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기억하는 이들은 민중시인들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박노해는 예외이다. 
사실 위에 언급된 시는 내가 개인적으로 무지하게 좋아하는 시이기는 하지만 황지우를 대표할 만한 시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황지우는 '묘사'에 능한 시인이다. 시인이 '묘사'에 능하다는 것이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진짜 그렇다. 황지우는 묘사를 통해 자신이 묘사하는 상황과 정반대의 또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한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시집에 나오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라는 시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시집에 나오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를 보라.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역시 '너를 기다리는 나'를 묘사하면서 '너에게 가고 있는 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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