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볼 것이다. 이것이 영화 <매트릭스>의 카피였나? 누군가 이 카피를 이 소설의 20자 평에 쓴 걸 본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맞는 얘기다. 이 소설은 여러 형식들이 뒤섞여 있다. 대개 이런 식의 혼종적인(hybrid) 소설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닐 가능성이 많아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시모프의 로보시리즈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SF와 추리소설을 혼합한 이 시리즈는 언제봐도 '딱'이다.

이 소설은 형식적으로는 두가지 정도가 섞여 있다. 하나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중남미 소설 풍이 들어있고 다른 하나는 추리소설적인 요소들이다. 형식적으로는 이 두가지가 가장 눈에 띄고 내용을 보면, 보르헤스를 비롯한 중남미 작가들에 대한 오마쥬에 해당하는 이야기 속의 설정들이 눈에 띈다. 잊혀진 책들의 묘지, 장님인 연상의 여인에 대한 소년의 풋사랑 등등은 어디선가 본 것같은 설정들이다.

작가는 이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요소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근본적으로는 추리소설이지만 중남미 소설의 외투를 입은, 조금 낯선 혼혈 장르를 탄생시켰다. 에르네스트 만델이 <즐거운 살인>을 쓰기 전에 이 소설이 나왔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은 읽었겠지만, 마술적 사실주의 풍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해서도 언급했을 것이다.   

추리소설이 갖고 있는 박진감과 중남미 소설이 갖고 있는 '알쏭달쏭한' 분위기를 지닌 이 소설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 두 가지를 모두 기대하고 보는 독자들이 '무엇을 기대했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설에 대한 내 불만을 하나만 짚고 넘어가면, 이 소설이 엄청나게 재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추리소설이 갖고 있는 통속성과 상투성도 고스란히 갖고 있다는 것이다. 콩심은데 콩나는 법이니까. 절대로 이건 이 작품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를 잘 혼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 만큼 원래 장르의 본성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의 끝을 보라. 얼마나 상투적인가! 지나치게 의도된 해피엔딩, 빤한 B급 영화의 엔딩 같은 에필로그는 아예 없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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