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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표지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배 한척에 남겨진 호랑이와 나'에 관한 것이다. 우선 책장을 넘기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상상을 해본다. 물론 이미 여기저기 입소문을 들었을 것이며, 어딘가에 있는 책의 줄거리를 당신은 이미 읽었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는 책을 읽는 재미를 빼앗아 가기만 할 뿐.
책표지의 그림이 너무 평화로워서인지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상상한 것은, 나는 이미 인터넷과 입소문과 기타 등등의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호랑이와 인간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뻔한 스토리라인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읽어봤다니 속는셈 치고 한 번 읽어보자라는 것이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라면 동기였다.
이 소설은 크게 세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파이의 가족들이 캐나다로 가는 배를 타기 전의 이야기이다. 이슬람교도이면서 기독교인이면서 불교도이면서 힌두교도인 파이의 엽기적인 범신론적인 신앙관과 이를 설득하려는 각 종파간의 경쟁(?)이 재미있다. 소설을 막 읽고나서는 첫번째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두번째는 '호랑이와 나'가 살아남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중심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우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을 보내는 파이의 믿기 힘든 생존기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세번째 이야기는 살아남은 파이를 취재하러 온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책을 끝까지 읽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장이 잘 넘어가는 소설이고 그만큼 이야기가 참신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몇가지 의문이 남았다. 소설가가 자신이 서술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주인공을 통해서 비판하는 이유가 뭘까? 소설이라는 것이 어차피 허구이고 그걸 믿고 안 믿고는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굳이 소설의 지면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진짜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어달라는 얘긴가?
이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생각하고 나서야 굳이 세번째 이야기를 넣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결론은 이 소설이 '희망'에 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믿음이건, 생존에 관한 믿음이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 관한 믿음이건 간에 상관없이.
믿음이 없다는 것, 그건 곧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