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경계에 선 사람이, 중심부에선 볼 수 없는 핵심을 꿰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야가 닫혀있지 않기 때문일까. 박노자의 글을 읽으면, '당연한'것들이 순간순간 낯설어 진다. 새로운 것을 깨치는 즐거움보다, 머릿속에 이미 자리잡은 것들을 옮기느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그의 책은 - 관심사 밖의 주제라도 - 나오는 종종 읽게되니, 확실히 중독성 있는 글이다.

고등학생때, 역사를 보는 두 관점 - 사실의기록, 현재의 반영 - 에 대해 배우며 '그냥 그런가 보다' 흘겼던 기억이 난다. 더 정확히는, "다음 중 역사에 대한 관점이 다른 하나를 고르시오"라는 뻔한 문제유형에 길들여져, 역사서술의 의미에 대한 어떤 심각한 고민도 없었다. 아니, 그 당시의 나에겐 역사는 그저 배우기 위한 역사였을 뿐.    

'짐은 이것을 역사라 부르리라'는,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역사를 "새로 썼던" 여불위에 대한 소설이다. 이 책이 단순히 허구의 소설인지, 진실에 근접한 역사물인지는 제쳐두고 잠시 역사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역사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이용된다면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을 제한할 수 있는, 뒤집어 보면 근원을 알수없는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심어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특히 판단능력이 부족한 어린시절부터 주입된 역사라면.

이 책은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등장하는 주요 "애국자"들의 "다분히 친일적"인 이면에 대해 폭로하기도 하고 - 아직도 기억난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만화로 나와있던 '이준'열사. 비분강개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던 "열사"가 사실은 친일파였다니! 중고등학교 국사 시험에 주관식문제로 출제되던 '장지연'과 '민영환'역시! -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름모를 - 하지만 당대에는 꽤 중요한 일들은 한 - 운동가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각종 전쟁시 칼을 들고 나선 승려들이, 사실은 울며 겨자먹기로 끌려나갔다는 등 '민족주의'과 '애국'의 이름아래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배워왔던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이쯤 되면 머릿속이 핑핑 돌면서 아득해진다. 대체 내가 배워왔던 것들이, 당연히 '사실'이라고 믿던 것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거야!! 아니,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배워왔던거지?

요즘은 '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이 아니라서 딱히 관심있는 학생이 아니면 한국사에 대해 잘 모를거다. 인물과 갈등관계 중심의 사극에 길들여져 어떤 아이콘이나 영상물로 표현되는 역사를 배울테고. 갑자기 늙은이같은 노파심이 든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서 어떤 '깨임'의 과정을 겪는다면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어야 할까. 물론 아는것은 상처받는 것이라 했지만. 또 아는거 없긴 나도 다를바 없지만, 갑자기 왜 이런 건방진 염려가 드는건지.

여담이지만 어제 두번째로 "화려한 휴가"를 봤다.  감독은 역사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사람'을 다루려 했다고 한다. 정치적 의미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관객이 궁금하면 찾아보게 되어 있다고. 주인공 '민우'는 윤상원 열사를 모티브로 출발했지만 민초의 힘을 표현하고자 바꾼것이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어쨌든 200만을 훌쩍 넘어섰으니 "광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이제 남은건, 광주를 '알게 된' 사람들이 영상물에 표현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스스로 찾아보길 바랄수밖에.

 "언론의 '숨은 의제'를 파헤쳐 언론이 강요하는 세계관을 거부할 줄 알아야만 체제의 거짓에 그대로 놀아나는 '선량한 국민'의 처지에서 벗어나 상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p.351)

문득 '상식'을 회복하기에도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눈으로 들어온 텍스트들이 곧바로 각인되지 않게 열심히 물고 뜯어 에둘러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는 "쓰라고" 있다는 진부한 진리를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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