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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건축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드 보통의 눈이 무엇을 포착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늘상 존재하지만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는 달콤한 풍경과 사물이 속삭이는 말들.
옮긴이의 후기처럼 드 보통의 글의 중심엔 늘 "나"가 있다. 소설이든, 에세이이든 그의 글은 늘 "나"의 입장에서 타인 혹은 세상이 어떻게 다가오고 해석되는지 세세하고 재치있게 풀어놓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선 "나"를 중심으로 건축을 바라보기 보다는 "나"와 "건축"사이의 "관계"에 주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일정시간 머무르는 어떤 공간적 구조물로서의 건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에게 속삭이는 -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 외관, 손과 발에 닿는 벽면과 바닥의 감촉, 코끝에 스치는 나무냄새,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거나 붕 뜨게 만드는 전체적 분위기 - "주체"로서의 건물을 이야기한다. 나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건축물과의 만남은 내가 마음을 열어놓는 한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로서 다가오게 된다.
"...고립된 개별자로서의 나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주체가 될 수 없다. 그 때 나는 그냥 존재자요 실체일 뿐이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은 오직 내가 너와 함께 우리가 될 때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자들이 결속하여 이룬 합성물 같은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다만 나와 너의 만남의 현실성을 표현하기 위한 이름이다.....만남은 언제나 관계로서 활동으로서 일어나는 것이지, 결코 실체나 속성으로 현전하는 것이 아니다." (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도서출판 길. 2007)
책에 실린 많은 흑백사진들을 그에 대한 드 보통의 해석 - 적절한 시공간속에 위치하여 엄숙한 감동을 준다든가, 보는사람을 지루하게 만든다든가, 전통과 현대가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다든가, 소통 불가능 앞에 체념하여 공존에 의미를 둔 듯 한다든가 등등 딱딱한 분석이 아닌 서정적 감수성으로 마치 문학작품을 평가하듯 건축물의 인상을 묘사한다 - 과 함께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건축물 - 혹은 건축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 이 속삭이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땅에 세워진 큰 덩어리가 아니라, 자신도 일정한 시공간을 차지하고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일원이라며 가만히 우리를 응시하는. 어떤 "생명체"같은 느낌으로.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라는 원제는, 사실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건축물"에 대한 설명만은 아니다. 건축물이 차가운 '사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행복이나 우울을 안겨줄 수 있는, 우리와 상호작용 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이상과 희망을 '표현하는' 대체물이자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상과 희망을 '안겨주는' 주체일 수 있다는 것. 실용성과 외관만을 강조한 건축물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 르 코르뷔지에의, 류머티즘과 폐렴을 불러일으킨 건축물을 예로들어 - 담담히 서술하며 건축과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말한다.
책 내용 외에 외형적 면에서 덧붙이자면, 먼저 플라스틱으로 표지를 두른것이 신선하다. 단순 하드커버가 주는 답답함이 없으면서도 표지의 각은 살려주는, 또 큰 사이즈임에도 '가볍다'는 느낌을 주는 장점이 있다. - '건축'의 다양한 소재들이 주는 효과와 일맥상통한다! - 아쉬운 점은 같이 실린 건축 사진들이 페이지의 일부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한 페이지, 혹은 양쪽 면을 다 채우는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것 같다는 것이다. - 귀퉁이의 사진은, 위아래에 쓰여진 글들이 건축물에 집중하는것을 방해한다. 한 면을 채우는 사진을 가만 보고있으면 잠시 책에서 빠져나와 딴 곳에 가있는듯한 효과를 준다.
드 보통의 글은, 읽는 사람에게 일상의 감각이 트이는 예민한 짜릿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