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를 놀라게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소식. 예상했던 작가가 아니라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뭐, 노벨상이 언제 예상대로 수상작을 배출했던 적이 몇번이나 있었다고.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한강 작가가 수상했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 한강 작가 <채식주의자> 단편 1개 읽고 그냥 덮었기에. 당시 내 느낌에는 소재의 참신성은 좋았지만 그걸 천착해 들어가는 깊이가 좀 부족해 보였다.


처음 <채식주의자>를 읽고나서(소설집 <채식주의자>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3작품이 수록되어 있음) 주위에 한강 소설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당시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공통된 점이 아이디어와 문체는 좋으나 소설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거였다.


물론 당시 지인들과 한강 작가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소설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기에, 자연스럽게 한강 작가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지인들은 한강 작가 주요 저작들을 다 읽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그들 역시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꽤 의외라는 의견을 피력했었더랬다. 뭐, 우리 문학이 세계문학계에 어필할 수 없다는 건 번역 장벽 때문이라는 오랜 통설(?)이 작용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 소식은 놀라웠다.


헌데 이건 내가 이전 페이퍼에도 언급했지만, 영국 번역가 데보라 쓰미쓰 씨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이 번역이 없었더라면 한강 작가는 절대 맨부커 인터내셔날 상을 수상할 수 없었을 거다. 이건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어로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해 세계시장에 내놓은 실적에서 증명됐다고 본다.


주요 세계문학상 후보에 오른 우리나라 소설 해당 번역작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 이승우 작가의 작품은 불어로 번역되어 프랑스에 내놓았지만 반응이 미미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누가 번역했는지 잘 모르지만 데보라 씨만큼 작가 지향적 번역가가 아니었겠지)


단 하나의 예외가 데보라 쓰미쓰 씨가 번연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다. 영국 토박이가 자신이 한국어를 배워 영어로 이 작품을 번역했기에 심사위원들에게 한강 작가의 그 독특한 문체가 부커상 심사위원들에게 먹혔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런 문체와 서사를 영어본으로 본적이 없었기에 그 새로움에 큰 점수가 주어졌다고 사료된다.


이를 통해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다수 영어본으로 번역됐다. 데보라 쓰미쓰 씨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공동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데보라 씨는 자신의 번역회사를 새운 모양이다. 여기서 한강 작가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한 듯하다. 영국인이 자신들의 언어로 한강 작품을 번역해서 영국 문단에 내놓으 거.


이번 노벨상 수상은 이 공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노벨상 심사위원들 손에 이 영어판본이 들려졌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 유일하게 한강 작가만 이런 행운을 누렸기에 그가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판단된다. 그 새로움에 맨부커 심사위원들이 느꼈던 그 강렬함을 노벨상 심사위원들도 느꼈을 거란 얘기다. 


어쨌거나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우리 번역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시금석을 보여준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으로서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는 아무계 씨의 발언, 즉 한국 문학은 아직 노벨상 깜이 아니라는 거는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빈말임이 드러났다.


우리나라 문학 작품도 이젠 노벨 문학상 근처에 가 있다는 반증. 근데 이 요체가 번역이라는 점. 이젠 더이상 번역이 창작이 아니라는 편견을 버릴 때다. 그리고 해당 언어를 전공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작품을 해당 언어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해당 언어의 국민이 우리 작품을 자기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펼쳐야 할 때다. 


우리나라 사람이 평가하는 것과 외국이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를 수 있으니까. 드라마만 봐도 우리나라에서는 별로인 작품이 해외에서 대박난 작품들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문학도 예외는 아니지 않을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우리 문학의 성과라기 보다는 데보라 쓰미쓰 씨의 공이 절반 이상이었다는 걸!!


참고로, 2020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후 재독한 짧은 단상을 부가한다. 당시 채식주의자만 읽고 덮었기에 리뷰를 쓰지 않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한강 작가의 작품군은 나와 맞지 않아 그 불평을 좀 부가해 놓는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 이 작품이 육체에 대한 것임을 대번 알 수 있다. 고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육체를 거부한다는 건 타자성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한다. 자신의 육체를 거부한다는 건 어떤 삶을 지향하는 것일까? 식물이 된다는 건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 작가는 이런 문제 의식을 스케치만하다가 끝낸 느낌이다. 문체만 좋고 내러티브가 허술하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에게 철학적인 논증이나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타자성을 극복하는지 그것이 식물이 된다는 거라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작가라면 비중있게 파고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게 없는 캐릭터 스케치는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2020, 어느 겨울날)


[덧] 

1. 참고로 노벨상이라고 다 재밌고 좋은 작품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욘 포세 후기로 남긴 바 있다. 한강은 포세 포다는 훨씬 낫지만 사실 여전히 내겐 재미 없는 작가인건 변함 없다. 

2. 한강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서 내가 실망스러움을 느낄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작가는 항상 그렇게 쓴다고. 문제의식을 통한 주제의 천착은 하지 않는 작가라는 걸.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인데...나와 맞지 않는 작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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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4-11-02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이 몇 사람 모여서 결정하는 상보다는 수백년간의 독자들의 평가로 그 작품성을 인정 받는 것이죠 .참고로 똘스토이도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잖아요 ㅎ

yamoo 2024-11-04 17:24   좋아요 1 | URL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라도 출중한 작가들이 많다는 건 사실이죠. 사람이 모여 결정하는 문학상...이거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성향이 절대적이라 운빨이라 하겠습니다. 그 위대한 도스토옙스키도 아니었지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는 모두 1900년 이전 사람으로 노벨상 자체를 수상할 수 없었지요. 1901년에 1회 수상자를 배출한 노벨문학상이니..

stella.K 2024-11-02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한강이 번역자에게 적지 않은 상금을 나눴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당연하겠죠.
<채식주의자>는 호불호가 있는 것 같더군요. 저는 모셔만 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 작가가 받은 건 기쁜 일이긴 하지만 원래 노벨문학상이
재밌는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수여한 적이 있나요? 그냥 누가 받았나 보다하는 거죠 뭐.

yamoo 2024-11-04 17:27   좋아요 1 | URL
맨부커 인터네셔널상은 번역가에게도 상금을 반반씩 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자...호불호가 있는 작품이란 걸 들었지만...전 아주 안좋았습니다.
저도 한국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거에 대해 기뻤지만 그게 한강이라서...한강의 영역본이 훌륭해서 탔기에(여러 요소가 있지만) 번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페크pek0501 2024-11-03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재미가 덜한 것이 채식주의자, 라고 알고 있어요.
소년이 온다, 를 읽고 울었다는 독자는 많더라고요. 5.18을 다룬 소설 중 최고로 찬사 받았음.
작가 한 사람만의 힘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기보다 다음의 여러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걸로 짐작됩니다.
1) 말씀하신 번역의 문제
2) 한류 열풍과 케이팝의 영향력 : 이런 배경이 없었어도 심사위원들이 한국 작가의 작품에 주목하여 꼼꼼히 읽었을지 의문이 듦.
3) 한강 작가가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한국 작품들의 영향 : 이 토양 없이 오늘날의 수상은 없었을 걸로 생각. 그러므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대한민국의 쾌거!!!

yamoo 2024-11-04 17: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한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쾌거, 맞고요..
저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의 결정적 계기로 데보라 쓰미쓰 씨의 번역을 꼽습니다. 한류 열풍과 케이팝의 영향력과 그밖의 한국 작품들의 해외 번역본들은 부차적이라고봅니다. 작년 재작년 한류 열풍과 케이팝 그리고 한국 작품들의 해외 판본은 꾸준했죠. 단 하나의 예외는 데보라 쓰미쓰 씨 같은 번역가가 한강 작품을 택해서 번역했다는 거였습니다. 만일 데보라 씨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나 전문 번역가가 번역했으면 절대 부커나 노벨상 후보에도 못올랐을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그 판본과 데보라씨가 번역한 한강 작품이 노벨상 선정 위원들에게 읽혀질 수 있었기에 수상은 가능했다고 보여지는데...이걸 한국 문학의 쾌거라고 자화자찬하는 게 주객이 전도된거 같아 이에 대해서 밝혀 보고자 쓴 페이퍼 였습니다~

yamoo 2024-11-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쾌거는 맞지만, 이를 계기로 번역도 창작의 일환으로 받아들여 졌으면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우리 문학의 쾌거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말은 바로 하자. 순전히 데보라 쓰미쓰 씨의 영어 판본 때문에 수상의 영예가 있었던 거다. 그가 아니라 우리나라 작가나 전문 번역가가 한강 작품을 번역했다면, 수상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데보라 씨만큼 번역에 공을 들이는 사람은(창작하는 정도로) 우리나라에 없다시피하다.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번역을 제발 창작으로 인정해 주자. 이게 진정한 한국 문학의 세계화가 아닐까.

박균호 2024-11-04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똘스토이는 1910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ㅎㅎ

yamoo 2024-11-06 16:04   좋아요 0 | URL
음....그렇군요.

이환한 2024-11-19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혁신상 수상자가 갖는, 노벨상 수상의 의의에 대한 글을 요즘 많이 보게됩니다. 대체로 노벨재단이 밝힌, 이러이러한 이유로 선정했다 라는 가이드라인 제시에 순응할 뿐 반항한 흔적이 안 보여요. 심지어 몰라뵈었다고 반성하는 글도 있더군요(교수님아, 교수님아...).
님은 번역 덕분이라고 적었네요. 교보에 가서 스쳐 지나는데 ‘깊게 읽기‘가 보였어요. ‘얕으면 그런 안내서, 깊으면 해설서‘,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지만 순간 빵 터졌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에 죽비를 내리는 님의 글은 소중하군요.
죽고싶지만 재밌는 책은 찾고싶어요. 못 써도 의미있는 작품이나, 잘 쓴 좋은 문학작품을 찾는 독자사람으로서 제 견해는 이러합니다, 마이도 썼네, 그러나 그 집 벨란 아바이는 못 뛰어넘었군, 이런 사이트에 와서 습작기간을 좀 가지면 좋을 텐데...
사랑하는 밥딜런이 아직 살아있어 좋습니다. 담배를 뽀꼼뽀꼼 피워가며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헤헤거리는 유튜브를 가끔 보며, 낭만에 대해 생각합니다. 다음번에는 노벨측이 댓글에 상을 수여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네요.그것이야말로 노벨이 제시해나가고 있는 힘, 진정한 크리에이티브 아이겠나요.

이환한 2024-11-19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웨덴 대사관 앞의 시위, 불온서적이니 자녀들이 못 보게 도서관에 비치하지 말라는 학부형들, 선풍기 발언, 역사왜곡이라 얼척없는 소리 해대는 우리의 애타는 이웃들, 상이 주는 우월감에 갑자기 기쁜 사람들, 하느님의 참된 종이고자 하는 어린양하는 3춘, 이런 이유들은 정작 노벨상 후에 생겨난, 노벨상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들이 되었죠.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므로 이제 정당성이 획득되었어요.
가슴 아픈 것은, 책 안의 주인공들과 가족 등 관련자들입니다. 상처는 치유되지도 않는데 한을 풀었어,이제됐어 이제됐어, 이러시니까요...

이환한 2024-11-19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중요한 말씀을 안 드렸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기술이 가장 높이 받들려야 합니다. 있는 거에 더해서 뭘 하는 게 쉽겠나요, 맨 땅에 헤딩이 쉽겠나요.
제 지론은 글 쓸 사람은 학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란도 그 이유죠. 원천기술을 못 만드는 영국박사는 그 이후의 것은 뛰어날 수 밖에 없어요. 박사에 교수를 하면 과학적 글쓰기를 하는 게 뇌에 단련되어 문학작품은 발로 쓴 것 처럼 보입니다. 님은 그것이 보인 것이고요. 그치만 재밌는 게 ‘박사자‘들이 뭐를 잘 쓰나면 상 후기나 선언문이나 집회후기는 잘 쓴단 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그들의 문학적 역량처럼 보이게 되죠.
지금 현재 떠받들려지는 우리문학의 원천기술은 번역이 쉬운 것에 달려들어 마케팅의 성공을 꾀하는 번역노력파와 우주의 신비한 기운이 닿은 결과가 아닐런지요. 원혼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고, 좋은 작품을 썼거나 쓰고 있을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희망을 주는 점은 참 좋습니다. 그리고 야무님이야 책을 많이 읽고 어느 정도의 안목이 있지요. 그러나 아직 제대로된 독서에 입문하지 못했거나 무독가들은 이번 기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노 저을 때 물이 들어와야 하니, 폄훼만 하기보다 눈을 그들에도 좀 맞춰주시고, 너무 먼 사람이 되기보다 그들 동포들과도 함께 걸을 생각도 의무적으로 좀 하셔야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문열이 최고 잘 쓰는 사람입니다. 허나, 개인적 상처를 못 뛰어넘어 상이 쪼매 어렵네요. 죽으면 아부지, 산 동안 이문열, 만나고 싶은 사람 한 명씩을 꼽으라면 그렇습니다. 사과를 하고 위로를 하고 싶어요. 우리 역사의 슬픔을 우리는 이런 해법으로 서로 풀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싶으니까요.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했던 김수영.
중동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는 다시 토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와집이 뭔 죄가 있다고 불 태우노, 비열하고 비겁한 인간들아 아- 들이 뭘 보고 배우겠노, 중동이 네타냐전과 후로 나뉘듯이, 파괴자들은 목적을 위해 악을 가르치는 자들이므로 안돼안돼, 하며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인부들이 얼매나 죽을 고새을 했는데 어예 그랠 수가 있노, 더러운 기왓장도 나무도 파괴자보다는 더 깊은 영혼일텐데...
이상으로 이이상상은 십 억짜리 댓글을 달아보았습니다. 정작 노벨상 수상이 되면 의견이 분분해질 것도 같군요.n분의 1을 할 지, 댓글 단 자에게 돌아갈지 댓글을 달도록 한 원글을 쓴 자일지, 그 때 되어 생각하고요. 머리를 썼더니 머리가 조금 아프네요.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일단 돈 생각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