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러스님 페이퍼로 촉발된 서평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생각난 김에 몇 자 끄적거려 봅니다.
사실 이에 대한 논쟁은 2007년에서 2010년 사이에 알라딘 및 제가 가입한 몇몇 독서 카페와 제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웃들 간에 간간히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번에 촉발된 사이러스 님의 글을 보니, 2011년 여름 즈음이 생각납니다. 당시도 사이러스 님은 비슷한 고민(리뷰, 독후감, 서평에 대한 차이)을 하고 계셨고, 제가 페이퍼를 보고 댓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 뭐,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죠. 약간 가필했습니다.
리뷰와 독후감 그리고 서평은 구별해서 쓰는 것이 좋습니다. 2년 전에 한 매체에서 기사를 쓰면서 배웠습니다. 일단 리뷰는 독후감과 서평을 아우르는 가장 넓은 개념입니다. 책을 읽고 기록하는 거의 대부분이 리뷰라고 보면 됩니다.
감상문(독후감)이 리뷰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 서평은 말그대로 책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는 글입니다. 책을 읽고 객관적으로 쓰는 글이 서평입니다.
뉴욕타임즈 서평 기사를 보시면 서평이 어떤 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현 우리나라 신문지 상의 서평은 60퍼센트 이상 서평이라는 형식에 미달합니다. 그래도 신문사 기자들이 쓰는 서평이 그래도 낫습니다.
책을 객관적으로 평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렵습니다. 독후감 또는 감상문은 책의 내용이 없이 느낌만 써도 됩니다. 이게 보편적으로 리뷰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 수 있습니다.
리뷰는 책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만 독후감은 내용이 전혀 없이 그 상념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독후감이 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현 인터넷 상에서 대중을 상대로 책을 뿌리면서 서평을 요하는 글들은 거의 대부분이 '서평'이 아닙니다. 10중의 8, 9는 '나는 책을 이렇게 읽었고, 이런 부분이 너무 좋다'는 식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서평은 주관적인 생각을 가능한 배제하고, 평가가 가능한한 객관적이라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을 요합니다. 책에 대한 좋고 나쁨을 알려, 3자가 책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평가가 객관적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지만요~)
물론 독서감상문을 평가형으로 쓸 수 있지만, 그 평가가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에 따라 서평이 될 수도 있고 리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평, 리뷰, 감상문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것 같아(엔날에 제가 고민했던 것처럼) 몇 자 남겨봤습니다.
오래 전 한국언론문화재단에서 신문에 나온 서평에 대한 분석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이 신문지 상에 쓰는 서평이 형편없다는 보고서 였습니다. 하물며, 이런 블로그에서야 더말하면 뭘할까요.
학부 4학년 때 파이낸셜 타임즈를 구독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그냥 무료로 보내줬죠. 한창 영어 공부하던 때라 아주 고맙게 받아 봤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거의 모든 분석 기사나 기획기사를 관심있게 보았고 또 스크랩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스크랩했던 기사가 서평란이었습니다.
얼마나 심도있게 책을 평가하는지, 당시 우리나라 신문들의 북섹션 리뷰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서평 자체가 소논문 수준으로 밀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책의 장점과 단점, 특히 단점을 항상 명확히 짚어줬습니다.
위에서 평가의 객관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파이낸셜 타임즈의 서평 필자들은 최대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상당한 근거를 확보하며 책을 평가했습니다.
'이주의 읽을 만한 책은 이거 밖에 없어!'라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책의 장단점에 대한 세세한 근거를 보고 독자가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글을 씁니다.
근데, 서평을 읽고 있으면 책을 사서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매력적입니다. 책의 인용 문구를 자신의 글에 자연스럽게 녹여 써서 최대한 책을 부각시킵니다.
책의 핵심 내용은 그대로 인용하는 게 아니라 매우 압축적이고 간견하게 요약하여 중학생이 봐도 어떤 내용인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사실 저는 이게 가장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정말 읽을 가치가 있다!'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감상)은 최대한 자제한 채, 소개하는 책을 중심에 놓습니다.
분명히 서평자가 주관적으로 책을 소개하기 위해 주된 논점을 잡지만(이를 '야마'를 잡는다고들 하죠), 그 논점이 '책의 내용'에 갈무리 됩니다. 그래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책을 평가하게 되고, 독자를 설득시킵니다.
저는 이게 가장 모범적인 '서평'의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매체에 서평을 기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위의 방식은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리뷰나 독후감은 아주 자유롭게 써도 문제될 게 없겠죠. 남들에게 보이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라, 나의 독서활동 기록이 1차적인 목적이니까요. 보다 자유롭게 독창적으로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는 '소개하는 책'이 중심이 되느냐, 아니면 '읽은 사람'이 중심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듯합니다. 이건 무우 베듯 싹뚝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마지막으로 매체에 서평을 기고할 때 매체의 대표가 강조한 좋은 서평의 요건을 부가하고, 그 매체의 대표가 쓴 그 요건에 부합한다고 하는 리뷰를 첨부합니다.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매체 **대표가 밝힌 [좋은 서평의 요건]
●개인의 비판적 생각은 자제하고 쉽고도 명료하게 쓰라.
●'아, 그래서 이 작가가 위대하구나'라고 느끼게끔 서평을 쓰라.
●서평을 보니 '~한 이유가 너무 다가오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쓰라.
●서평을 읽고 나니 새삼 '~의 소중함이 느껴지네'라는 생각이 들도로 쓰라.
●색다른 토픽, 뛰어난 묘사, 감동을 줄 수 있는 글감과 전개로 쓰라.
* 당시 매체의 대표가 밝힌 [좋은 서평의 요건]에 맞춰 서평을 쓰려고 하니, 도무지 그런 서평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특히 '읽고 난 뒤 기억에 남는 글'이라고 하는 조건을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을 거 같아 좌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평을 쓴 뒤 다시 엎어 버리길 수십 번. 그리고 나서 에라, 모르겠다~ 될데로 되라지..라는 생각으로 서평을 썼다는..
위 조건을 내건 대표가 모델로 보여 준 서평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 서평이고 매체에 기고한 게 아니라 그대로 가져와 봤습니다. (매체와 기고자 이름은 모두 블라인든 처리했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대한 서평입니다.
하늘에서 별따기 `초신성` 찾는 귀재
[◇◎○☆] `우리 태양보다 훨씬 큰 거대한 별이 수축되었다가 극적으로 폭발하면서 1,000억개의 태양이 가진 에너지를 한순간에 방출하여 한동안 은하의 모든 별을 합친 것보다 더 밝게 빛나는 상태`
초신성에 대한 정의다. 밤하늘에서 이 초신성을 찾기란 한마디로 `하늘에서 별따기`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설명하면 이렇다.
검은 식탁보를 덮은 식탁 위에 한 줌의 소금을 뿌린다. 흩어진 소금 알갱이들이 수많은 별로 이뤄진 은하다. 이 소금 뿌려진 식탁 1,500개가 이마트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식탁에 소금 알갱이 하나를 뿌린다. 그 알갱이가 바로 초신성이다. 그것을 찾아내라고 하면 어떨까.
더 쉬운 비유를 들면 이렇다.
`63빌딩 전망대에 올라서서 망원경으로 서울 시내를 둘러보면서, 어느 집의 생일 파티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
하지만 그 초신성을 아주 쉽게 찾아낸 이가 있다. 호주 시드니 근처 불루 마운틴에 사는 에번스 목사다. 그는 1980년에서 1996년 사이에 한해 평균 두 개의 초신성을 찾아냈다. 1980년 당시까지 과학자가 찾은 초신성은 60개가 채 안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깜짝 놀랄 일이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유명 저술가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03. 까치)에 나온다. 우주에서 생명의 탄생, 그리고 현재 인류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지구 35억년의 역사를 알기쉽게 풀이한 책이다. 기자출신인 빌 브라이슨은 3년에 걸쳐, 어렵고 골치아픈 `과학`을 알기 쉽게 풀어냈다. 책은 에번스 목사 에피소드처럼 흥미진진하다.
에번스 목사는 왜 초신성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과 씨름했을까.
"나는 우주공간을 통해서 수백만 년을 지나온 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에 누군가가 하늘의 바로 그 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정도의 사건이라면 당연히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겠지요."
에번스가 초신성 찾는 데 귀재가 된 데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책에 따르면 그는 많은 천문가들이 북반구에 살고 있는 것과 달리 그 반대에 있었기에 혼자서 하늘 전부를 찾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각고의 노력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별들의 밭을 기억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에번스가 다른 일엔 재주가 별로 없었고, 심지어 물건 넣어둔 곳도 잘 기억 못했다는 점이다. 어떻튼 그는 밤하늘에서 그토록 어려운 초신성을 찾는 `재주`를 가진 덕에 천체물리학에서 한 장을 장식했다.
한가지. 이젠 에번스의 재능이 더 이상 필요없다. 왜냐하면 과학의 발전에 따라 컴퓨터가 알아서 초신성을 찾아 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을 세지 않는 세상, 에번스의 말은 흐르는 유성처럼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제 초신성을 찾아내는 일에서도 낭만이 사라져버렸지요."
[○○○○ ○○○기자]
사실, 저는 이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끄덕 했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