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쇼펜하우어의 빠였다. 학부 시절 열렬히 추종해 마지 않던 3명의 철인이 있었으니, 비트겐슈타인, 키에르케고 그리고 쇼펜하우어였다. 영문과 전공 영어 수업시간에 독일 출신의 미국인 담당 교수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난 쇼펜하우어라고 답했다. 하하, 그 정도였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쇼펜하우어는 내게 점점 잊혀져가는 철학자가 되었다. 아마도 내 저자 리스트 중에서 강준만 정도의 위치를 차지했던 거 같다. 시간이 가면서 강준만 저서들은 더이상 읽지 않았으니.

 

하지만 내가 쇼펜하우어 저서들에 흥미가 떨어져서 그런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쇼펜하우어 저서의 번역본은 극소수였다. 대체로 <쇼펜하우어 행복론>이 무수한 출판사들에 의해 중복 번역된게 쇼펜하우어 저서의 대부분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번역도 안 된 상태였다.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집문당 판본과 곽복록 씨가 번역한 을유문화사 판본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곽복록 씨 번역본을 집어들어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던져 버린 후 쇼펜하우어의 주저는 읽을 염두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문당 판본도 대체로 곽 씨 번역과 대동소이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축소 편집본이!) 그래서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읽는 것을 유보했다. 그리고 점점 잊혀져 간 듯하다.

 

그러던 것이 2008년 동서문화사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번역본이 나오고 2009년 을유문화사에서 역자를 달리하여 출간되었다. 2012년에 김미영 역자에 의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와 <충족이유율의 네겹의 뿌리에 관하여>(나남, 2010)가 나온 것을 본 후, 다시 쇼펜하우어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까지 난 베르그송 철학의 위대함에 빠져있었기에 쇼펜하우어의 주저를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지 김미영 역자의 번역이 매우 빼어나서 나중에 번역본을 사서 읽어봐야 겠다는 다짐만 했더랬다.

 

 

 

 

 

 

 

 

 

 

 

 

 

 

 

근데, 며칠 전 알라딘 신림점에서 을유문화사에서 새로 번역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홍성광, 2009)를 입수한 것을 계기로 읽을 당위가 발동했다. 구매한 그날 집에 와서 서문과 함께 5장까지 스트레이트로 읽어나갔다. (그래봤자 64페이지밖에 안 되는 분량이다.)

 

매우 매끄럽게 번역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어색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난 이 쇼펜하우어의 주저 번역본들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어떤 번역본이 그나마 가장 읽을만 한 책인지.

 

나는 동서문화사본과 을유문화사본을 가지고 있기에 도서관에서 지만지고본을 빌렸다. 이게 현재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번역본 전부다(집문당본 포함). 발췌된 곳을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가장 좋은 번역본을 나름대로 선정해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어떤 번역본이 잘 된 번역본인지 그 정보가 현재 인터넷 상에서 전무했기에. 여러 번역본이 있다는 건 언제나 선택의 어려움이 따른다. 경험상 가격이 비싼 책이 번역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선택을 위한 최소한의 유용한 정보가 없으니 그걸 내가 하기로 했다. 그냥 최소한의 지침이다. 엄한 선택으로 불량 번연본을 사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사람을 정말 열받게 하는 일이기에.

 

비교 판본은 3권으로 했다. 을유본, 동서문화사본 그리고 지만지고본. 곽복록 씨 번역과 집문당본은 옛날에 읽다가 던져버렸기에 제외했다. 너무도 많은 비문들과 번역투의 문장으로 읽는 이를 짜증나게 하는 번역본들이다. 알라딘에 누가 곽복록 씨 번역본이 그립다고 했는데, 전혀 아니다. 완전 그지 발쌔기다.

 

 

 

 

 

 

 

 

 

 

 

 

 

 

번역의 질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은 1장~2장 중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부분을 택했다. 기준본은 동서문화사본으로 하고 지만지고본을 통해 비교한 다음 홍성광 씨 을유본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동서문화사본이 처음 읽을 때 술술 읽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완역된 책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팔리고 있는 책이기도 했기에. 을유문화사본인 홍성광 씨 번연도 술술 읽혔는데 비교해 보니 전자가 쪼금 이상한 부분들이 많은 거 같았다. 그래서 다시 철저히 읽어 보니 동서문화사본은 문제점이 매우 심각했다. 그래서 동서본을 기준으로 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인용된 부분을 통해 어떤 판본이 읽을 만한지 판단하면 되시겠다. 분량의 압박이 좀 있지만....그래도 시작하겠다. 하나, 둘...

 

 

1장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살아서 인식하고 있는 모든 존재에 해당하는 진리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반성하고 추상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인간이 실제로 그렇게 인식할 때에 인간의 철학적인 사유가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태양을 알고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양을 보는 눈이 있고, 대지를 느끼는 손이 있음에 불과하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자기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고 하는 표상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 <동서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살아있으면서 인식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그러나 인간만이 이러한 진리를 반성적으로,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데, 인간이 진정 그렇게 의식한다고 하면 그는 철학적인 신중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 태양과 땅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 그리고 땅을 느끼는 손을 아는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단지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세계가 오로지 완전히 다른 존재, 즉 인간 자신이 표상하는 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지만지고본, p31>

 

책을 처음 펼쳐 읽으면 이 번역이 이상한 줄 눈치채기 쉽지 않다. 하지만 지만지고본을 보면 어떤 부분을 이상하게 번역했는지 대번 나타난다. 줄친 부분을 비교해 보면 지만지고본이 훨씬 매끄럽게 번역된 것을 알 수 있다. 동서판의 줄친 부분은 호응이 잘못된 문장이다. 동서판의 마지막 문장도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 문장이다. 하지만 지만지고본을 통해 보면 무슨 내용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이 말은 살아 있어 인식하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이고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으며, 인간이 정말로 이를 의식할 때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에 인간은 태양이며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 진다.   <을유본, p39>

 

을유본은 확실히 지만지고본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동서판보다는 그래도 의미파악이 수월하다.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 본다.

 

이와 반대로 이 근본 진리는 인도의 현자들이 이미 신식했던 것으로, 비야사(Vyasa, 인도의 전설적 성자)의 설이라고 하는 베단타(Vedanta) 철학(우파니샤드에 근거하여 일원론을 주장하는 철학)의 근본원리로서 나타나 있다. 윌리엄 존스는 이 사실을 그의 마지막 논문 <아시아 연구 : 아시아인들의 철학에 대하여)>, 4권 164쪽에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베단티학파의 근본 교리는 물질의 존재, 즉 그 고체성·불가입성·연장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관한 일반의 관념을 바로 잡는 데 있고, 물질이란 것이 마음의 지각에 의존하지 않는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피지각과는 교환할 수 있는 명사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다.

 

이 말은 경험적 실제성과 선험적 관념성과의 양립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동서본>

 

 

이에 반해서 앞서 이러한 근본적인 진리가 베다의 지혜에 의해서 인식되었듯이―이 지혜는 브야사에 의해서 쓰인 베다 철학의 기본명제로서 나타나 있는데―윌리엄 존스는 자신의 논문인 <아시아 철학에 관하여>(4권 164쪽)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베단타 학파의 근본적인 교리는 고체성, 불침투성, 연장으로 이루어진 물질을 부정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인데―물질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을 바로잡고 물질은 마음의 지각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즉 존재와 지각 가능성은 서로 호환 가능한 용어라는 점에 있다." 이 말은 경험적인 실재성이 선험적인 관념성과 함께 있다는 것을 좀 더 장황하게 설명한 것이다.

<지만지고본, p33> 

 

이 부분은 정말 심각하다. 동서본의 줄친 부분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후반부의 내용을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지만지고본을 읽으면 쇼펜하우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그런데 지만지고본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확실히 동서본이 내용을 오해하고 번역하지 않았는가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미심쩍어 을유본을 열어봤다. 

 

반면에 이러한 근본 진리는 비아사가 주창한 것으로 간주되는 베단타 철학의 근본 명제로 등장하면서 인도의 현자들이 일찍이 이를 인식했다. 윌리엄 존스는 자신의 마지막 논문 <아시아인들의 철학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베단타 학파의 근본 교리는 물질의 존재, 즉 고체성, 불가입성, 전충성(물체가 공간을 메우는 성질)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걸 부정하는 것은 미친짓이겠지만), 물질에 대한 일반의 개념을 바로잡아 그것이 인간의 지각과 무관한 어떠한 본질도 갖고 있지 않으며, 존재와 지각할 수 있는 성질은 동의어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데 있다." 이러한 말은 경험적 실재성과 선천적 관념성의 양립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을유본, p41>

 

베단타 학파의 근본 교리 중 마지막에 언급되는 교리를 을유본은 '전충성'으로 옮겼다. 동서본과 지만지고본은 이 마지막 교리를 각각 '연장'과 '연장으로 이루어진 물질'로 번역했는데, 이 부분은 을유본이 더 나은 거 같다. 그리고 을유본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 내용이 동서본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원문을 대조해 보기 어려워 확신을 할 수 없지만 흐름상 '양립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는 번역이 더 잘 이해된다. 확실히 가독성은 을유본이 좋다. 

 

 

2장

 

그런데 다른 측면인 주관은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관은 표상작용을 하는 모든 존재 속에 전체로서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일지라도 현존하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객관과 더불어 표상으로서 이 세계를 보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단 하나라도 소멸해 버리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면은 사상에 있어서도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도 그럴것이 이 두 가지 면의 어떤 쪽도 다른 한쪽으로 말미암아서만, 또 다른 한 쪽에 대해서만 의미와 존재를 갖고 있으며, 그것과 생멸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 경계가 서로 공존한다는 것은,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식들인 시간, 공간, 인과성은 객관 그 자체에 대한 인식 없이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고 또 완전히 인식될 수 있다는 것, 즉 선험적으로 우리 의식에 존재한다는 칸트의 말을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동서본>

 

 

다른 하나의 측면은 주관인데, 이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관은 전체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모든 표상하는 존재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표상하는 존재 중의 유일한 존재는 현존하는 수많은 존재들처럼 객관과 함께 완전히 세계를 표상으로서 채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일한 존재가 사라진다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객관과 주관은 사유를 위해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지만지고본, p37>

경계의 공통점은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며 보편적인 형식들―이것은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인데―은 객관 자체의 인식 없이도 주관에 의해서 시작되거나 발견되며 완전히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 즉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형식들이 우리의 의식 속에 선험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에 있다. <지만지고본, p38>

 

3판본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주관과 객관 그리고 표상과의 관계를 기술한 2~3번째 문장이다. 특히 3번째 문장은 5번 연속으로 읽어보아도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지만지고본은 비교적 의미있게 번역해 놓았지만 역시 동서본의 3번째 문장 부분과 비교해 보아도 좀처럼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한 을유본의 번역은 이렇다.

 

그런데 다른 측면인 주관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은 표상하는 모든 존재에 나누어지지 않은 채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들 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현존하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객관과 더불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완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사라져버리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측면은 사상에 있어서조차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략)

이러한 경계가 서로 접한다는 사실은, 모든 객관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형식들인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은 객관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도 주관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고 완전히 인식될 수 있다는 데서, 즉 칸트의 말을 빌면 우리의 의식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을유본, pp43-44>

 

을유본은 동서본의 번역과 거의 똑같다. 서술어 호응이 맞지 않는 것까지!(서로 대조해 읽어 보면 난해한 부분은 번역된 문장들이 서로 비슷하다. 추정하는 바이지만 홍성광 씨도 동서본을 참조하면서 번역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는 호응이 맞지 않는 부분까지 잘못된 문장을 쓸리가 없을 거다.) 이 부분은 여전히 쇼펜하우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히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다. 이런 부분은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젠장!

그런데 문제가 더 심각한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 동서본과 을유본은 처음 읽으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문장의 호응도 전혀 맞지 않는다. 2-3번 읽어야지 겨우 의미파악을 할 수 있는 정도다. 문장이 매우 길기 때문에 번역자가 짧게 끊어 번역하면 명확성을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지만지고본은 줄표를 사용하여 전체 문장의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번역했다. 물론 지만지고본 번역이 좋다는 건 아니다. 최소한 독자로 하여금 의미파악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준이다.

 

많은 부분을 점검해 본 것은 아니지만 경험상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내가 번역본을 고를 시 사용하는 방법이다. 번역본에서 이상하게 의미파악이 안되게 끔 번역된 곳을 찾아 다른 번역본은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해 보면 얼추 읽을 만한 번역본을 선택할 수 있다. 내용 파악을 전혀 할 수 없는 부분을 다른 번역본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끔 번역했다면 후자본을 택하는 것이 유익했다. 많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2-3부분의 몇 문장들만 비교해 보면 된다.

 

같은 방법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번역본 3개를 확인해 봤다. 완역된 본은 1권이 16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만지고본은 이중 4장(4절)까지만 번역돼 있어 그 부분만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동서본에서 이해 되지 않은 많은 부분을 지만지고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지만지고본은 동서본의 해석판이었다. ㅋㅋ 하지만 지만지고본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좋지 않은)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잦은 줄표의 사용과 긴 호흡의 문장들 역시 짜증을 유발한다. 매 순간 집중해서 읽어야 하기에. 뭐, 그래도 동서본이나 을유본보다는 훨씬 낫다. 발췌본이라 완역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을유본을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을유문화사본으로 보는 게, 현재로서는 차선의 대안이다. 이상한 부분을 건너 뛰면서 읽는다면 슥슥 읽히는 가독성 하나는 장점이니까. 3권째에 이르면 아주 읽을만 하다. (뒷부분을 간간히 들춰봤다.) 김미영 역자의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을유문화사본으로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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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12-15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니체와 보르헤스 등 수많은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은 책으로 워낙 유명한 줄로 알고 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사람들은 모국어인 독일어와 스페인어로 쓰여진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번역`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던 `무척 행복한` 독자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권기철 님이 번역한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는데, 어려운 대목들을 만나면 같은 문장을 여러 번씩 읽으며 이해하려 애쓴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번역`이 문제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답니다.(예전에 yamoo 님께서 대우고전총서에서 나온 베르그송의『창조적 진화』에 대해서 `번역 문제`를 짚어 주셨을 때에도 저는 그 책의 번역에 대해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 채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보니 제가 `번역`에 무척 둔감한 지도 모르겠다 싶네요.)

어쨌든 쇼펜하우어 자신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한 번 읽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고 거듭 경고하면서 `여러 번` 다시 읽어 볼 것을 권할 정도였고, 저 또한 그 책을 거듭 읽고 난 뒤에,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와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까지 찾아 읽어 보고 나서야 겨우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는 느낌이 들더군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인식론이나 존재론뿐만 아니라 미학을 비롯한 예술철학과 종교철학 등에 이르기까지 매혹적이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지만, 저는 특히 그의 생각이 후대에 찰스 다윈이 쓴『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까지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걸 발견하는 재미가 여간 크지 않더군요.

이 글을 통해 yamoo 님께서 학창시절에 쇼펜하우어를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로 꼽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문득 보르헤스가 이 철학자를 두고 했던 말도 떠오릅니다.

* * *

······ 나는 스위스에서 머물던 시절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했다. 만일 나에게 한 명의 철학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만일 우주의 수수께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언어가 그의 책 속에 쓰여져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책을 독일어로 읽었고 나중에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도 읽고 또 읽었다. ······

yamoo 2014-12-15 23:54   좋아요 0 | URL
네, 쇼펜하워 자신도 그렇게 말했지요. 한 번 읽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적어도 2번 이상 정독하라구요. 내용이 심오하여 한 번 읽어서 이해 안되는 부분이 분명이 있어요. 사상서 중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은 그런 부분들이 많다는 것 인정합니다. 학부 초년생 시절 노자 도덕경 1장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의 해석부분을 보고 이해가 가지 않아 되풀이 해 읽고 또 읽어도 모르겠어서 그냥 덮은 적이 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어려움은 엉터리 같은 번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심오해서였습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해석본은 문장이 난삽하고 비문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라 그 사상의 심오함에 있었습니다. 논리적인 면도 그렇구요.
하지만 현재 서구 사상의 번역본들은 이런 사상적인 난해함이나 논리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그 심오한 사상적이고 논리적인 면을 우리말로 제대로 표현해 주지 못하는데서 오고 있습니다. 문장이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것과, 명확하지만 논리적인 깊이 때문에 이상하게 이해하여 번역기 돌린 문장과 같은 번역을 하여 어려운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인것 같습니다. 제가 계속 번역이 거슬려서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번역자들이 명확한 우리말 구사를 못해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렌님도 이해가 안된 부분을 여러번 읽으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올바른 우리말 문장을 사용하지 못해서 입니다.

항상 좋은 인용과 댓글로 제 서재를 빛내주셔서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랜님의 이런 댓글 나눔은 알라딘 서재의 댓글 문화를 한 차원 높여주는 것 같아 존경스럽습니다!^^

그렇게혜윰 2014-12-15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댓글을 달만큼의 지식이 없어서 댓글 달기도 민망합니다만 철학사책 읽다보면 쇼펜하우어 궁금하더라구요.어려운 책들이니만큼 좋은 번역이 중요한 것 같아요. 번역가분들 성함을 기억해두어야겠습니다!!!^^

yamoo 2014-12-15 23:57   좋아요 0 | URL
지식이 있어야 댓글을 다나요?^^ 저도 지식이 없기는 헤윰님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철학사에서 쇼펜하우어는 매우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의 책 <인생론>을 읽어보세요. 매우 쉽고 평이합니다. 이 책으로 소펜하우어 사상의 진수를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습니다. 꼭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니 헤윰님의 리스트에 올려두었다가 시간 되시면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오쌩 2015-01-0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지만,입문서 위주로 읽은지라,개괄적 지식밖에 없고,저는 주로 정치철학 쪽에 관심이 생기더군요.

야무님 글 읽으니,쇼펜하우어에도 관심이 생기네요, 전 예전에 친구랑 쇼펜하우어 중화이론 가지고 키득거리던게 생각나요
`네가 사랑에 실패한건 상대의 생에 대한 의지가 이상적인 상대로 인식되지 않은것 뿐이야. 너와 결합되었을떼 좋은 아이를 가지지 못할꺼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거지`하면서 패배자들 끼리 서로 개똥철학자 흉내내던게 생각나네요ㅎ

알라딘에 오니,좋은 책을 소개해주시고
책과 연애하는 분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올해가 다가기전에 쇼펜하우어
즐독하고싶네오ㅎ 좀 늦었지만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yamoo 2015-01-04 20:13   좋아요 0 | URL
오쌩님 반갑습니다! 오쌩님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입문서 위주로 여러 권 읽으면 원전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쇼펜하우워 입문은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부터 봐 보세요. 쇼펜하워가 자기 책에서 자기 책 읽는 순서를 알려주는데, 자기 철학의 핵심은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녹아 있으니 이거부터 읽으라 하네요. 김미영 역자의 번역아 아주 좋습니다. 이 책으로 입문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ㅎㅎㅎ 2017-12-25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을유문화사 꺼 읽고 있는데 술술읽히는 부분은 좋으나 간혹 우리말로 이해하려해도 무슨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는 것 같아서 짜증을 참고 여러번 읽고 있습니다
글쓰신 내용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상처받은작은새 2021-10-25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김미영님 번역이 안 나온 건가요 ㅠ ㅠ 2019년도 을유문화사본으로 보려고 하는데 홍성광 역자님이 얼마나 업그레이드하셨을지 감이 안 오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