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언어의 정원 (16p 설정집) - 한국어 더빙 수록
신카이 마코토 감독, 이리노 미유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별의 목소리>를 보고 단박에 빠져버린 신카이 마코토 감독. 단 25분여의 러닝타임으로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감독의 역량에 혀를 내둘렀다. 매우 젊은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의 강렬함은 대단했다.

 

이런 체험 후에, 감독의 작품들은 거의 내 두 눈을 훔쳐갔다. 작품들 모두 좋았지만 항상 <별의 목소리>에 비해 2% 정도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어 아쉬웠다. 콕 집어 뭐라고 할 수 없는 그 느낌. (뭐, 그런거 있지 않나.. 가슴이 먹먹하고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피부를 통해 올라오는 전율감에 휩싸이는 그런 느낌말이다.^^)

 

헌데, 오늘 만난(그제 토요일) <언어의 정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듯 보였다. 그 연유는 이러하다. 주말마다 나는 공공도서관에 간다. 책을 빌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목적은 DVD를 빌려 보기 위해서다. 집에서 나온 김에 항상 들르는 곳이 알라딘 중고 서점. 철학코너와 역사 코너에서 둘러보고 흥미진진한 두 권을 사서 도서관으로 갔다.

 

원래는 <빅 피처>를 빌려보려고 했다. 헌데 누군가가 빌려갔단다. 그래서 차선으로 덴젤 워싱턴 주연의 <플라이트>를 신청했는데, 그것도 역시 대출 중. 그래서 그냥 예약을 해 놓고 나올 찰나, 누군가 반납하고 갔는지 사서가 <언어의 정원>을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걸 보겠다고 하니, 사서가 그러라고.

 

이 작품에 대해서 여러 말들이 많았다. 아쉬워하는 소리가 많았는데, 아마도 짧은 러닝타임 때문인 듯했다. 많은 것을 담으려 했는데, 분량상 한계에 봉착했다나 뭐라나. 하지만 짧은 시간으로도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했던 신카이 감독이었다. 기대감에 차서 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작품을 3시간여 동안 감상했다. 불과 46분에 불과한 러닝타임이지만 처음 보고 자막이 올라갈 때 울컥했다. 아름다운 영상뿐만 아니라 화면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디테일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였다고 생각됐기 때문. 그리고는 계속 봤다.

 

줄거리는 그저 그런 통속적인 내용이었다. 남고생과 여선생의 사랑이야기.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만엽집>의 가키노모토노 히로마로의 시구 두 편을 통해 격조 높은 사랑의 시가로 승화시켰다. 이 작품의 타이틀인 <언어의 정원>은 정원 속에서 두 주인공이 이 시가로 연을 맺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나는 이 작품을 연속으로 3번 보았고, 최고의 연출력이 발휘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무려 10번도 넘게 돌려 보았다. 사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같은 부분을 10번 이상 반복해서 본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무척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부분에 꽂히곤 하는데, 기억나는 작품으로는 대작 <베르세르크>가 있다. 이 tv시리즈 작품에서 가츠가 불사의 조드와 목숨을 건 칼싸움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감독이 정말 연출을 끝내주게 했다고 생각해서 수십 번을 반복해서 보곤 했다.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한다. 정말 질리지 않는다.

 

그 다음 비슷하게 반복해서 본 작품이 24부작 <페이트 스테이트 나이트> 엔딩 부분이다. 여주와 남주가 헤어지는 장면인데, 무척이나 상실감이 컸다. 그래서 이 부분도 십수 번 반복해서 보았다. 이별하면서 흐르는 엔딩곡이 정말 압권이었다.

 

<언어의 정원>에서는 엔딩 바로 전 장면이 나로 하여금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게 했다. 아키즈키(남주)가 사랑 고백 후 유키노(여주)의 방을 나오고, 유키노는 혼자 흐느껴 운다. 그러다가 시(만엽집에 나오는 시가)를 생각하고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키즈키를 따라가 아키즈키와 마주한다. 그녀에게 대고 무자비하게 사랑의 불만을 쏟아놓는 아키즈키에게 유키노가 달려드는 상황이다.

 

특히 아키즈키가 그녀에 대해서 심하게 몰아세울 때 유키노의 표정변화와 마지막 아키즈키에게 달려들기 직전 한 줄기 햇빛이 유키노의 얼굴에 비춰지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내가 왜 이 장면에서 그렇게 뻑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테리다) 이후 그를 안고 통곡하면서 그녀가 하는 말은 이 작품의 방점을 찍는 클라이막스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사진 직전이 클라이 막스. 여기서부터 엔딩곡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작품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 갑자기 내가 알라딘에서 구입한 두 권 중 한 권이 <만엽집>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1994년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인데, 저자인 이영희님이 <만엽집>을 통해 한일 언어문화를 연구한 필생의 역작이다. (2009년에 2권으로 재간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서(이영희 씨는 신문사 기자 출신) 매우 저평가 된 저작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영희 테제’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책의 결론은 <만엽집>에 쓰여진 언어가 신라의 이두였고,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현재 일본어의 뿌리가 된다는 것.

 

시구 하나하나에 놀라운 상징과 그 시대의 상황이 압축적으로 녹아 있어 해석이 매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이 <만엽집>이다. 에로틱한 시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시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두로 읽어야 할 곳이 산재해 있다고. 이 시가들을 연구하는 것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 언어를 이해하는 귀중한 뿌리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언어의 정원>을 보게 된 것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했던 이유다.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로 다루어지고 있는 시 두 편은 <만엽집> 제 11권에 실려있다. (참고로 아래 시가의 번역도 이두를 알아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시대의 표기는 현재의 일본어식 표현과 전혀 다른 이두를 일본어에 맞게 사용했기에 그렇다고.)

 

 

[원문과 번역된 시가]

雷神 小動 刺雲 雨零耶 君將留

천둥소리 울리고 하늘 흐려 비가 온다면 그대 여기 머무르게 하련만

 

雷神 不動 雖不零 吾將留 妹留者

천둥소리 울리고 비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작품에서 번역된 자막]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린다면 돌아가려는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만엽집>은 사랑의 시가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시기(약 8세기) 사랑의 표현은 '孤悲'였다. (이 단어는 포스터에서도 쓰여져 있다) 새기자면 '외로움을 느끼는 비애'정도 될 듯하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만엽집> 시대의 사랑을 메타포로 가져온 게 분명하다.

 

하지만 꽤 단호히 주장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8세기에 그려진 사랑의 의미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메타포는 깔 돼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얹어 아주 멋지게 해석해 내었다. 나는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남주 설정에서 감독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일본 아스카 시대 시가의 명인으로 칭송받는 가키노모토노 히로마노의 시 두 편은 2013년 도쿄의 정원 안에서 주인공들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비가 오는 정원의 한 정자(휴게터)에서 유키노는 아키즈키를 처음 만난다. 간단한 인사 후에 헤어지는 찰나, 천둥이 치면서 비가 오는 배경으로 유키노가 아키즈키에게 읊어 주는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린다면 돌아가려는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천둥소리 울리고 하늘 흐려 비가 온다면 그대 여기 머무르게 하련만)”이라는 시구는 8세기 때 이미 사어(死語)가 된 고전 언어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2개월 후에 유키노의 시에 답하는 아키즈키의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천둥소리 울리고 비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역시 더 이상 고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의 사랑의 언어다.

 

이 모든 대화가 도쿄 한 복판의 정원에서(대개가 비 오는 상황) 오고 간다. 남녀 두 주인공이 6월에 처음 만나 9월에 헤어지기 까지, 유키노와 아키즈키는 비가 오는 날만 만나서 서로 위해주면서 가까워진다. 그 매개의 중요한 한 축이 바로 <만엽집>의 사랑의 시가다. (다른 하나는 ‘구두’)

 

그리고 아키즈키의 사랑 고백 후 혼자 울먹이며 앉아 있는 유키노에게 천둥소리 울리고 비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이라고 읊조리는 아키즈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유키노는 그를 잡으러 간다.

 

아키즈키를 안으며 통곡하면서 하는 유키노의 말, 즉 그녀가 낙심해서 살 기력을 잃었을 때 다시 발을딛고 살 수 있게 해 준 이가 바로 아키즈키였다는 말은 사랑이 언어를 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일종의 알랑비탈?)을 깨닫게 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망가진 삶'을 치유하고 계속 살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만엽집>의 시가를 하나의 축으로하고, 다른 하나는 ‘걷는다’라는 행위가 구두와 함께 등장하는 플롯 구조를 완성한 듯.

 

이는 아키즈키가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으로 설정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 구두였을까? 구두는 개인의 일상의 삶을 지탱해 주는 물리적 사물이자,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유키노는 일부 학생들의 그릇된 모함으로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학교에 출근하지 못한다. 그 대신 공원으로 향한다. 이 상황은 심리적으로 정상이 아님을 나타낸다. 아키즈키에게 구두 디자인 문제로 자신의 발을 맡길 때, 그녀가 '걸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만엽집>의 사랑(孤悲)을 감독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지 알려주고 있는 포인트이기에 그렇다.

 

결국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유키노가 통곡하면서 하는 대사는, 감독이 8세기 사랑의 시가를 어떻게 자기식으로 해석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명장면이지 않을까한다.

 

 

어쨌거나, 개인적으로 <별의 목소리>를 보고 난 후 계속 채워지지 않았던 2%를 충만히 채울 수 있어 뿌듯하다. <언어의 정원>이 아니라 '영상의 정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단한 비주얼을 보는 것은 더블 보너스~! 

 

덧.

마지막 엔딩 곡이 너무 좋다.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엔딩 곡 때문에 반복 횟수를 늘렸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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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놀랍고,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은 더 놀랍고,
yamoo 님의 해석마저 놀랍네요... 그저 감탄.. 감탄..

yamoo 2014-01-23 12:20   좋아요 0 | URL
영화는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오렌님께서 보시면 어떠실지...
<노래하는 역사>는 저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처음 건졌습니다. 94년도에 출간되고 01년에 재출간 되었는데도 전 모르고 있었습니다. 보니, 아주 좋은 책이더군요. 끝내주는 삽화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페크(pek0501) 2014-01-2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망가진 삶'을 치유하고 계속 살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 결국 사랑이란~
"사랑만이 굽은 것을 펴고, 회복하고, 조정하고,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진정한 창조력을 갖춘 사랑이야말로 완벽한 구원자다." - <초역 니체의 말 2>에서.
망가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창조력이죠.

작품 해석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문제가 될 순 없는 것이죠.
작품은 독자나 관객의 해석에 의해 완성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창작자의 의도도 소용 없는 것...

화답하는 시가 참 좋네요.
님 덕분에 좋은 감상했습니다. ^^

yamoo 2014-01-23 12:22   좋아요 0 | URL
사랑이란 뭐, 그런거겠지요^^ 연출력이 끝내 줬어요~

작품 해석은 개인에 따라 다르니 뭐, 그렇지요.

만엽집에 수록된 시가라고 하는데, 정말 좋더군요.
저는 이 영화를 페크님에게 추천드립니다~^^

gostraight 2014-03-0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메일을 확인하면서 언어의 정원 포스터그림이 있길래 뭐지? 하고 눌러보니


안에 있던 내용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라고 새롭게 다시 느끼고 갑니다. 감사해요^^

숲내 2014-03-0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배우니 감사합니다.
함 봐야 겠네요.^^

Forgettable. 2014-08-0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딩은 음악이며 영상이며 대사며 갑작스러운 마무리까지 뭐하나 부족할게 없었어요. 눈물이 울컥.. 시구도 무척 좋았구요. 몇번이고 다시 보게 되더군요. 비슷한 부분에서 비슷한 감상이라 다시 영화본 직후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 그런데 알라딘 검열 글 보고 들어왔는데 그 글도 사라졌네요.. 지우신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