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밤이나 낮이나 가족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암시 속에서, 그들의 희망과 원망 사이에서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듣거나 하는 공유물이 되어 있었다_말테의 수기 283, 민음사, 문현미 옮김.

 

공유물되기를 거부하는 이 집 장손은 제사만은 무시하지 못한다. 엄마 할매 누나가 두부를 만들고 전을 부치는 등 제사 지낼 중노동을 마쳤을 때에야 나타난다. 버선발로 마중 나온 할매에게 큼직한 로코코풍 분홍 플라스틱 마이크를 선물한다(경성은 할매의 욕망을 허하라).

 

집안의 위계질서는 장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있어도 무시한다. 그런 그를 제외하면 자아실현을 추구하면서 사는 구성원은 없다. 부양의 짐, 과한 노동, 원망, 폭언, 주정, 희생, 강요, 억압, 병간호, 암담한 현재, 그것에 이어질 당연한 미래, 서로를 굴레에 가두거나 갇혀 산다.

 

가족은 미친 짓이다를 시연하는 것이다. 얼매나 인정시럽고 잔정 많고 희생적인가, 그러면서도 시니컬하거나 퉁명스런 말투 때문에 마음속 깊은 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곡해되고야 마는 사람들, 말투와 내지르는 문장에서 상냥함과 자상함이 결여된 사람들, 아아, 과거를 묻지 마세요. 저 안에 있네요.

 

그럼에도, 모오든 고향들의 말이여, 오오 성이여 계절이여, 상처 없는 억양이 어디 있으랴, 모오두 근사하게 들려뿌래라를 염원하는 랭보 같은 입장으로서 보아하니 대구식한국어로만 나온다. 사투리, 듣기도 읽기도 싫어하는 사람들. 혐오를 없애려면 많이 봐서 익숙해지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달려라 억양들아!

 

할배는 재산을 미리 물려주는 바람에 리어왕인 듯 아들에게 무시당한다. 할매는 괄약근 조절이 안 되고 노망까지 난 할배를 두고 갑자기 죽는다. 가족들의 반목이 시작된다. 큰 딸이 달마다 백만 원씩 맡긴 돈과 동네 곗돈은 할매가 죽음으로써 미궁에 빠진다. 증발 한 듯한 그 돈은 할배가 택시 타고 떠나는 장손에게 비밀리에 쥐여 준다.

 

장손 이름으로 예금된 달성군 농협 통장. 장손에게만 몰아준 뭉칫돈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받는다. 할배는 눈을 맞으며 산 쪽으로 하염없이 걸어간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할배는 산에 누워 죽어간다. 상마이, 우리 할마이는 어디가고 자네가 날 데리러 왔는가. 튀김, 두부, 제사, 거대한 나무, 절은 중국에도 있지. 자네 밭 콩 값을 후려쳐서 미안했네. 보랏빛 콩 꽃이 피는 자네 밭, 푸른 들녘은 우리의 것이지.


다 떠나거나 개발되거나 푸른 들녘이 사라졌어. 이젠 어쩔 수없이 수입으로 만드네, 우리 할마이는 상마이 자네 마누라 곗돈을 꿀꺽했어, 어쩌겠나,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게. 우리 장손은 결국 돌아올게야. 두부 공장이 더 번성하고 들녘은 다시 푸르러 질거야. 나는 믿어. 장손이 가업을 이으리라는 것, 나와는 달리 농부들에게 정직하리라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자가 저공비행으로 나는 것을 보러 갔다. 밑에서 쳐다보고 있자니 회오리 바람이 쌩쌩 분다. 그때였다. 예기치 않게 무언가 내 발 아래 툭 떨어졌다. 프로펠러가 일으킨 바람에 날아온 단어 하나, 그것을 들고 왔다. 주운 거지 훔친 게 아니다. 끝없이 회피하고 입에 담을 수 없던 단어, 정.신.요.양.원. 회피는 결국 해피다. 잘 대면하면...


쇼츠의 시대에 저 딱붙은 줄을 보라. 같은 줄 또 읽을까 눈에 힘을 주고 읽어 본다.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 산책

                 (지은이, 로자...의 저공비행에서 퍼온 시)


발저의 도시는 따로 없겠지
발저는 산책가였으니
파리의 산책가 보들레르를 뺨칠
아니 따귀를 후려칠
산책가였으니
발저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산책에 나섰던 거지
눈이 내리는 성탄절 아침에도
발저는 눈길을 꾹꾹 밟으며
걸음을 옮기는 일을
마치 성탄의식처럼
행했던 거지
눈덮인 산언덕에 이르러
마지막 열두 걸음을 옮기고
발저는 이제
생에서 손을 놓았지
지상에 남겨둔 두 켤레 같은
마지막 두 걸음 더
그러고는 누웠네
다 이룬 것처럼 누웠네
대자로 누웠네
그 바람에 모자가 날려
발저의 영혼길을 안내했다네
하늘에는 발저의 자리가 있을까
분명 정신요양원은 없을 테지
그래도 필시
발저는 산책을 멈출 수 없을 거야
경력 단절은 없을 거야
산책길 대화도 이어지겠지
연필로 쓴 작은 글씨도
다시 이어졌으면
그게 발저니까
로베르트 발저
눈길에 꾹꾹 새겨진
이름 로베르트
발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상록수 : 심훈 장편소설 한국문학을 권하다 5
심훈 지음, 이경자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록수>를 완독한 날은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다. 초등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둔 날이었다. 선생님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사람은 쪼가리에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다. 하필 그날 갱하이하고 나이가 뭐가 쪼매 안 좋았는지 분위기가 쌔한게 서로에게 도장 찍는 일을 미루는 거다. 어디에 있는지 잘 아니까 내가 그냥 꾹 찍어버리면 될 걸, 통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머리는 안 돌아가고, 그저 마루에서 어제 읽다 남겨둔 상록수를 읽었다.

 

그런데 아뿔싸, 저자님아! 주인공을 죽이면 어예노, 내가 너무 슬프잖나. 채영신이 세상을 떠나서, 박동혁이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어서 나는 심리적 타격을 받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어쩜 그렇게 끝없이 눈물이 나는지 그칠 수가 없었다. 갱하이는 내가 도장 때문에 우는지 알고 나이한테 지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는 훼손된 두꺼운 녹색 표지에 투명 테이프를 붙여 이사 다닐 때마다 근 40년을 함께 했다가 인연을 정리했는데 이번에 다시 샀다.

 

신간은 읽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서 옛날 작품 위주로 사게 된다. 그래서인지 무언가 감이 떨어지고 이게 늙는 건가 싶기도 하다. 물론 집에는 우리 아-가 사들인 신간이 넘치지마는 안 읽는다. 출판사는 무섭다. 띠지에 적힌 말을 믿고 집어 들고 왔다가는 속기 십상이다. 양귀자 작품은 보류해뒀는데,  덜덜 떨면서 손을 못 대는 것이다. 마지막 실망을 할 순 없기에... 그간 얼마나 속았으면...

 

심훈에게 내가 이런 토로를 하면 그는 나를 이상에게 데려간다. 병문안을 가면 이상과 심훈은 이런다.

아니, 작년에 죽은 사람이 어째 왔소? 임자 병문안 왔지. 성실하게 안 살고 이게 무슨 꼴이오. 지금 조선 시골에는 임자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콧구녕에 바람이 들어서 돌아 댕기고 있는 거냔 말이오. 곧 죽을 사람 앞에서 위로는커녕, 나무라시기요? 속상해서 그러지. 난들 이러고 싶겠나.

 

, 뒷전에 앉은 저 이는 뉘요. , 알겠군. 고찌 이랏샤이, 이이상상, 내 두 배군. 나는 이상이오, 이제 반상이군. 고정관념에 묶이기 싫은 이상이고 반상이지. 좀 있다 내 숨이 넘어가면 멜론을 들고 가오. 사러 보냈으니 곧 올 거요. 대접할 건 그 뿐이니 아쉽군. 나는 못 먹소. 향기라도 맡으며 죽으면 족하지. 아니, 이 사람아, 조선 사람이 숭늉을 먹고 호박 잎 쌈을 먹어야지, 코오피를 먹고 이제는 멜론 타령인가? 양담배에 위스키 고량주 와인이 일상인 지금 조선은 말이 아닐세.

 

나는 이상의 호흡이 안정되도록 심훈을 말린다. 심훈이 옳고 심훈 말이 맞다. 그러나 이상은 멋지다. 곧 죽을 사람이 따박따박 대거리하는 폼이며 남긴 작품이며. 겨우 스물일곱임에도 성숙한 이상이 우러러 보이는 것이다. 심훈은 존경스럽고, 이상은 가깝게 느껴 진다. 나의 이십 대에 만났으면, 음악으로도 대화했으면, 더 좋았지 않을까 하면서 옛 시절을 돌아보는 것이다. 오오,서양 팝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도 한 번 못 보고 죽은 이상...

 

갱하이하고 나이가 어렵게 보내주는 넉넉한 돈으로, 친구와 팝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러 까페에 가서 파르페를 시킨다, 음악에 취하면 세상 걱정이 없다. 맑은 날에는 장미 다발을 사서 안고, 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으면 멈춰 서서 듣는다, 친구가, 니 저 테이프 살라꼬 물으면, 당연하다 하면서 산다. 비 오는 날에는 파르페에 꽂힌 우산을 빼서 쓰고, 메리 포핀스가 되어 집까지 날아간다.

 

이상상이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앙상한 그의 손을 잡고 말한다. 걱정 마세이. 작품 마이 알려 주께요. 뭐하러. 다 태워버려. 안 돼요. 아깝잖니껴. 좋아하는 사람 많는데요. 어떤 건 여혐 끼가 보이는데 지금 죽을 판이니 거론하긴 좀 글코요. 내가 다른 오감도도 써 봄 시더. 재해석 해가 내 식으로 한번 써 보께요. 이이상상은 말라꼬 글 쓰노. 그래 말이래요. 뭐 굳이 이유가 있다면 몇 가지 있는데 한 가지 알레드리죠.

 

손에 꼽을 만큼 밖에 안 만난 서른 이후의 갱하이를 떠올리면 눈물이 나고, 마지막 만났을 때 자주 오라 했는데 안 갔거든요. 그래가 미안하게 돼가 내 마음이 일단 되는데 꺼지만 해가 시를 썼니더. 요새는 신문기사도 시도 소설도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이잖니껴. 시로 일단 갱하이가 사망이 됐는데, 이제 서른 후가 걱저이래요. 다시 살려내가, 더 직시하고 정직하게 제 날짜에 죽여야 되는데... 그래가 더 정리해 나가다보이 천사도 이런 천사가 없니더. 그걸 심훈은 너무나도 잘 알제요


자본주의에 휩쓸려 스러져간 농부, 평생 자전거만 탄 사람, 십 원 한 푼 안 받고 들길의 풀을 벤 사람, 도시로 떠나는 나를 보려고 버스 밖에서 두릿두릿 살폈으나 커튼을 쳐 못 본 사람, 도시 안 가고 흙을 지킨 사람, 농민신문을 읽던 사람... 간 지 딱 십 년 지났는데 생각이 나가 후회를 하니더. 내 보고 싶다고 그클 그랬는데 안 가고 제망아부지가를 여다가 쓰고... 이상상, 상록수 읽었니껴심훈 최고제요? 나는 인제 <상록수>가 농촌과 농민 이야기라 생각하니더. 영신도 아부지도 죽어서 슬픈 이야기지만요.

가을 학기가 되자 ㅇㅇ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를은 있었다

 

스무 살 때 팔공산 파계사 젊은 스께서 물었다

인생의 화두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믿던 친구와 나는 화두가 뭐예요 물어봤으되 스께서 침묵 하였도다

불교란 얼마나 최고의 종교이냐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아무 종교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 세상에서 부처가 가장 깨달은 자다

 

전쟁 중에는 포로제도가 가동되어야 하고 나무토막을 무기랍시고 가진 자는

산 채로 비밀포로가 되어야한다 다친 한 명을 상대한, 최첨단 기술이 뒷배경인

여러 명 총 든 청년들은 얼마 후 자신의 아이를 낳으면 사랑할 것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렴 어려운 이웃을 돌보렴

이웃을 죽이렴 완전소탕 하렴

 

담배를 물려주고 깨진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려다 안 될 것 같으면 자신의

라이터로 붙여주고 그의 머리와 몸에 쌓인 회색 폭격재가 담뱃불을 꺼트리면

또다시 붙여주고 담배를 다 피우면 오른팔에 붕대를 감고 들 것에 실어 나른 

후 상부에 보고했어야 한다 지휘관님 작전대로 초짜 군인들이 우연히 잡도록

잘 포장 되었습니다 국제사회는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너무 건조한 지역이라 침이 안 나와서일까 목이 아파서일까 그냥 비상용일까

한 알도 안 먹은 멘톨 민트와 릴케의 왜소한 붉은 장미가 여러 포기 그려진

best 담뱃갑과 초라한 몇 가지 전리품을 올려두고 사진을 찍어 배포하여

신만큼 잔인한 위세를 떨치자 우방도 박수를 치고 머리 뚫린 시체인질이 제때

치과치료를 못 받아 특징이 뚜렷하여 가엽기보다 협상카드로만 최고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깃


관계 없는 사람과

관계 있는 얘길 하다 알게 된다


나와 말하는 이 사람이

허깃꾼 사깃꾼 솔깃하게 꾀는 사람 선상에

나를 올려놓고 있거나


내가 한 방울의 연료만 더 보태어주면

폭발할 지경에 있다는 것을


옷깃을 여미고 사람의 영혼에 깃든 무언가를

찾으려 해도 꼬깃한 지폐벌이에 찌들어

두 번만 물어도 눈을 흘깃거리고


깃껏해야 동물과 놀아주느라 도깃자루 썩는 줄 모르거나

동물을 실컷 먹는 게 지향점인 우리들인데


쳇깃쳇깃 헤이헤이헤-이 노래하자고

깃발을 쳐들며는 무얼 부추깃니껴 어심을 하고

강풍에 펄깃대는 깃발만 신이 나니


참으로 신깃타 쫄깃한 쫄면도 질깃한 고깃국도 못 채울

허파에 공기가 드갔나봐 깃깃 웃는데 쓰다 깃침이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