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목수의 기술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법률 조항을정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선거 시스템을 민주주의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21)

 

그리고근원적이라는 말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존재는 원래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다. 우리 시대를 논할 때 민주주의의 급진성은 언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좌파이다.

이 말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바 또한 명쾌하다. ‘좌파는 일종의 정치적 은유로서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민중의 대표자들이 앉은 자리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좌파라는 말은 바로 민중의 편이라는 의미이다. 어떻게 민주주의자가 민중의 편이 아닌 다른 편에 설 수 있겠는가?(각:그러나 왼쪽에 앉아 있는 자만이 민주주의자라는 것이 항상 옳은 말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종류의 중앙권력, 즉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관료, 계급, 기업, 정당, 조합, 기술 지배의 권력을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개념 정의상 당연히 이러한 모든 권력을 반대한다.

질서, 효율성, 투쟁의 필요성같이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급진 민주주의의 비판을 막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어떤 구실을 붙이더라도비민주적인 권력은 결국 비민주적일 뿐이라는 것이다.(69~70)

 

(424)

그녀는 스쳐 가는 사람들과 끝없이 악수를 나누는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거기 서 있었다. ...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행사가 엉터리라고 느낀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 사람들은 군주정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낸 이 행사가 민주주의 제도라고 생각했다. - 헨리 애덤스 Henry Adams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어느 모로 보나 평등해야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425)

단 한 번도 미국인들은 어떤 장소에서건, 어떤 엄숙한 회의에서도 엄선된 대리인을 통해서건, 미국이 민주적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적이 없다. 미국 헌법에는 민주주의나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말이 없고 서문에 우리 인민은이라는 표현만 있다. ... 미국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에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 중 민주주의자를 자처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 메리 리터 비어드 Mary Ritter Beard


 독재정권이 냉소를 없앨 수 없듯 민주주의는 위선을 막을 수 없다. - 조르주 베르나노스 George Bernanos

 

완벽한 민주주의란 이 세계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이다. -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민주주의는 [개에게] 던질 돌을 찾을 때까지 착하지, 강아지야라고 말하는 기술이다. - 윈 카틀린 Wynn Catlin

 

만약 민중이 지배자가 된다면 누가 지배를 당해야 하는가? - 존 코튼 John Cotton

 

(427)

보통 현명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보호 장치 하나가 있는데, 모두에게 이롭고 안전하면서 전제군주에 맞서는 민주주의 체제로 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불신이다. -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

 

다른 공공복지는 아테네인들 사이에 실현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평등이 민중들 사이에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이런 통치 형태는 그리스어로 민주주의(Democratia), 라틴어로 민중 권력(Popularis potentia), 영어로 평민에 의한 지배라 불렸다. - 토머스 엘리엇 경 Sir Thomas Elyot

 

(428)

... 민주주의를 위해 두 번의 축배를. 한 번은 민주주의가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고, 또 한 번은 민주주의가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두 번의 축배로 충분하다. 세 번을 외칠 이유는 없다. - 포스터 E. M. Foster

 

민주주의는 여기서 사랑과 같다. 민주주의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살릴 수 없다. - 시드니 후크 Sidney Hook

 

(430)

형제애를 가졌고 오백 년 동안 민주주의와 평화가 자리 잡았던 스위스에서 그들은 무엇을 생산했는가? 뻐꾸기 시계! - 해리 라임 Harry Lime(소설 <3의 사나이> )

 

나는 노예도 주인도 되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내 생각입니다. 이 생각과 다르다면 그 차이만큼 민주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민주주의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언제나 다수가 혁명적인 소수를 억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 - 월터 리프먼 Walter Lippmann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억압자가 될 권리를 부여한다. - 제임스 러셀 로웰 James Russell Lowell

 

(431)

가서 당신 집안의 민주주의부터 확립하시라. - 리쿠르고스 Lycurgus

 

나는 오래 전부터 순수하게 민주주의적인 제도가 조만간 자유나 문명을 파괴할 거라, 또는 둘 다를 파괴하고야 말 거라 확신했다. - 토머스 매콜리 Thomas Macaulay

 

(432)

민주주의는 인류(the species)의 헌법이다. -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민주주의자를 위한 유일한 치료법은 군대이다. - 빌헬름 폰 메르헬 Wihelm von Merchel

 

(434)

모든 마을에서 악당들이 봉기해서 스스로를 민중이라 부르며 가장 잔인한 전제정치를 확립할 것이다. - 로버트 필 경 Sir Robert Peel

 

민주주의는 민중이 비난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이다. - 로렌스 피터 Laurence J. Peter

 

민중이 통치하지 않는 나라에 와 있는 것은 즐거운 기분 전환이다. - (파라과이를 방문한) 필립 왕자 Prince Philip

 

(436~437)

민주주의는 강력한 위계질서를 토대로 한다. 엄청난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의 과두정치는 지도자들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자신들의 활동에서 물질적인 이익을 거의 얻지 못하는 열성적인 부하들을 가져야만 한다.

아랫사람들이 보여 주는 이런 종류의 싸구려 거룩한 감정을 자극하여 흥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방법은 우정의 징표를 아낌없이 베풀고 이상주의적인 말을 계속 걸어 명예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국가의 영광, 자연에 대한 과학의 지배, 계몽을 향한 인류의 행군, 이런 것들은 민주주의 연설가들의 연설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 조르쥬 소렐 Geoges Sorel


만약 [19세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민주주의가 여전히 환영받지 못하고 당파적인 용어라면, 민주주의를 믿거나 지지하는 일은 때때로 더 쉬웠을 것이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Raymond Williams

 

세계는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해져야만 한다. - 우드로우 윌슨 Woodrow Wilson

 

 

 

왕이 왕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민중이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 한해서일 뿐이다. 백성의 굴종(좀 더 멋지게 표현하면 ‘충성‘)은 지배자의 권력이다.(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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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31번지 용인천주교공원묘지(묘지번호; NF 54)


신분당선 강남역에서 - 1151번을 타고 오산리, 천주교묘지입구 정거장에서 하차 - 도보 2킬로미터(30분 정도 대형 트럭이 오가는 위험한 찻길을, 대형중형소형미세초미세초초미세 다 쓸수는 없소, 무한대 먼지를 마시며 걸어가면) - 천주교용인공원묘지가 나타남 - 관리사무소에 들어갔다 나온다고 생각하고, 사무소와 가장 가깝게 붙은 오른쪽을 보면 올라가는 길이 보임 - 이제부터는 길을 올라가면서 갈라지는 길이 세 번 나오게 되는데 오가는 차를 조심하며 올라간다. 갈라지는 길을 세며 올라가면, 그 세 번째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산만댕이를 향해 오르면 목표지점이 있다.


-  일단 첫 번째 양 갈래길을 만나면 맘속으로 1번이라고 번호를 매긴다. - 그렇게 조금 걸어가면 두 번째 양 갈래길이 나오는데, 2번이라고 번호를 매기고 세 번째 갈래가 나올 때까지 걸어올라간다. - 조금 가다보면 양 갈래 갈라지는 세 번째 골짜기 길이 또 나오는데 첨탑도 보인다. 에펠탑이거니 생각하고 오른쪽 언덕배기를 택해서 걸어 올라간다. 오르는 길은 가파른데, 가파르고 가팔라서 참으로 가파르다.


 - 조심조심 헥헥대며 올라가면, 무조건 올라가며 전헤린 한글 비석을 찾으면 드디어 보인다. 실패하면 내려가서 다시 사무소에서 우측으로 난 길로 올라오기 시작해서 2회 정도 실패하고 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갈래길에서 올라가며 밑에서 부터 9번째 단으로 들어가면 된다. 먼 거리는 아니다. 삼각형 묘역이라고 하는데... 나무를 보며 숲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을 것임을 기록해 두고 싶다. 저것이 삼각형인가 나는 사각으로 보이는데 이러는 사람 반드시 있을 것이다.  꽤 쉽지만 모를 땐 어려운 길, 이렇게라도 적어서 누군가에게 길라잡이가 되려는 이유.


1. 비석에 한글로 혜가 아닌 헤, 전헤린이라 적혀 있다.

2. 반드시 용인천주교공원묘지로 가야 한다(김수환 추기경 큰!! 묘가 있고, 일용엄니 김수미 묘소도 있다. 전헤린 묘소 바로 위쪽에는 박완서 작가 묘소도 있다). 용인에는 용인공원묘지도 있으니 그곳과  헷갈리면 안 됨.


3. 용인천주교공원묘지 입구에 '라라' 라는 까페가 있다. 이 곳을 발견하고 들어가기 전에 빌자.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진 하늘의 지바고여 영원한 안식을...

4. 자그마한 전헤린 묘 앞에, 선명하고 에쁜 보라색 쑥부쟁이 몇 포기가 있다. 갖고 간 물로 비석을 씻어내고 꽃에 물을 주니 부족해서 다음엔 2통을 들고 와야겠다 싶다. 무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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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12-1 시안 공원묘지(비석번호6917) 


서울에서 가려면 - 


1.  사당역 3번 출구 나가서  -  좌석버스 1500-2 를 타고  -  오포 장례식장, 주성엔지니어링 정거장에서 하차  -   하차 후 맞은편으로 건너 가서 -  오포장례식장 간판을 끼고 우회전하면 언덕으로 좌측에 화장실이 있다   


- 화장실 옆 공사 중인 큰 흙바닥 주차장 시멘트 길 정면에서 보면 현수막이 있다(96년 이전 사용하신 매장묘는 개장절차를 안내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현수막을 사이에 두고 좁다란 왼편 길과 오른편 길이 있는데, 현수막 왼편 길(시멘트길)로 주욱 올라간다 


 -  길이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겨우 차 돌릴 수 있을 만한 세모꼴 시멘트). 여기에서 오른편(주의: 왼쪽 아닌 오른쪽)으로 난 길을 선택해서 계속 올라가면  -  시멘트가 끊어지고 흙길이 시작되는 곳, 계단이 있다. 그 왼편에 큰 소나무가 한그루 있다. -  바로 그 위쪽 평지에 있음.


첨언하면 소나무 왼편으로(다음 칸) 위 쪽에  -  축대 밑에 6개 묘지가 나란히 있다  -  우2묘 좌3묘 사이에 비석번호 6917이 정규화 선생 묘소이다. 내려갈 때, 가파른 언덕 길이므로 운동화 필수(등산화 좋음). 


2.  서울역 버스환승센터(5번 승강장)에서 1150번을 타고 - 오포 장례식장, 주성엔지니어링 정거장에서 하차  -  올라가는 길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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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에서 - 지하철 타고 현충원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서 - 현충원 보훈모시미 정류장에서 - 30분 기다려서 셔틀버스(라 쓰고 봉고차라 읽는다)를 타고 - 독립 유공자 제7 묘역에 내려서 - 입구 쪽에 보면 쉽게 찾을 수(제270호) 있다.


참고사항 - 1. 현충원 내에 있는 매점에서 조화를 팔지만 나중에 쓰레기 처리가 힘드니 되도록 지양하고, 꼭 원한다면 생화 한 송이 정도만 포장없이 하는 게 좋을 듯.

 

2. 현충원 내에 1시 30분 까지 무료로 국수 제공 하는 데가 있어서 필요시 셔틀 기사님에게 위치를 물어보면 알려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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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미륵은 이의경의 아명이다. 현재로 치면 서울대 의대생이던 이의경은 1919년 8월 29일 만세 시위에서의 유인물을 직접 인쇄하여 나눠주다, 일제에 쫒기는 신세에 놓이게 된다.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피신하여 모친의 금전적 도움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서 활동하며 지내다가 여러나라를 거치는 배를 타고,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안봉근) 소개로 독일로 가게된다(그 때 가서 영영 못 오다가 이번에야 고국에 온 것이다. 한 줌 가루로).


최초의 뮌헨 한국인 유학생이 된 청년 이의경은 독일에서 2차대전, 나치시대를 겪었다. 아마 죽기 직전이라도 귀국을 할 수 있었다면, 3개월 후에는 육이오, 한국전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피압박민족회의'가 열린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 일제침략 고발을 위한 4명의 조선대표(이의경, 이극로, 황우일, 김법린)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네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 그 다음 비극이 또 있으리란 것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뮌헨대에서 동물학 박사가 되었으나 취업이 어려워, 이미록이란 이름으로 독일어로 쓴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하고 작가가 된다. 아직 모든 작품을 알지 못하기에, 일단은 위트있는 꽁트 <이상한 사투리>가 제일 맘에 든다.


위암으로 51세인 1950년 3월 20일, 독일친구들이 불러주는 애국가를 들으며('우리나라만세' 부분은 함께 부르고) 그렇게 죽었다. 바이에른 주 뮌헨 근교 그레펠핑의 묘지에서 드디어 고국에 돌아왔다. 독일 유학생이 된 지 104년 만이다. 


2024년 11월 16일 토요일 오후 1시,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 14번 게이트에서 <이의경 지사 유해 봉환식>이 열렸다. 그간 잊고 있었다가 다시 옛 기억을 떠올린 건 우연히 경향신문 곽희양 기자(2024. 11. 12일자)의 기사를 읽은 게 계기다.


전혜린이 번역한 <압록강은 흐른다> 정규화의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집을 뒤져 찾아냈다. 그리고나서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인터넷 사이트 내의 글을 3일간에 걸쳐 읽었다. 그런 다음, 표현이 어려운 어떤 심정으로 봉환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다음 날인 2024년 11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 유해 안장식 또한 참석하였다. 아리랑을 불러드리고 싶은 마음인지라, 제사상에 태극기와 아리랑 성냥을 얹고 절을 했다. 


정규화의 제자 박균 선생이 번역한 <압록강은 흐른다>를 사들고 가 사인을 받았다. 

유족대표 이영래 님이 정규화 선생의 <어느 이방인의 향기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과    정규화, 박균 공저 <이미륵 평전 Dr. MIROK LI>에 친필사인 해주었다.  


이의경 지사 안장식 후, 정규화 선생 묘소와 전혜린 선생 묘소에도 차례로 방문하여 참배하고, 사진 찍고, 묘지 정돈을 했다. 이 세 분은 하늘에서 다같이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부디 만났기를 바라본다.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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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1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1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