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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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막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생의 비루함과 무력함을 통감했다. 낮의 회색 페이지와 밤의 검은 페이지가 한장 한장 넘어가는 동안 나는 변한게 없는데, 나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반추했다. 


그리고 이를 생생히 구현해 낸 부차티에게 경의를 표했다. 인생의 거대한 요새 앞에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이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드로고는 아마도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부차티가 작품 속 드로고에게 해 주는 말은 결국 내게 하는 말이었으며, 드로고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대체해도 여전히  유효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드로고는 또 한번 요새의 골짜기를 오른다. 그는 에누리 없이 십오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크게 변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시간은 정신이 나이들기도 전에 너무나 빨리 흘러버렸다.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어렴풋한 불안감은 날마다 더 커져간다. 드로고는 삶의 중요한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환상을 놓지 않는다. 그는 결코 오지 않은 자기의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 다가올 시간이 무한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낭비해도 되는 무궁무진한 부유함처럼 여겨졌던 옛 시절이 더는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p240-241)



시간의 장이 넘어가고, 여러 달과 여러 해가 지난다. 진력이 나도록 일해온 드로고의 학창 시절 친구들은 네모꼴로 정돈된 회색 수염을 기르고서 점잖게 도시를 거닐며 정중하게 인사를 받는다. 그들의 자녀들은 다 자란 성인이고, 어떤 친구는 벌써 할아버지다. 드로고의 옛 친구들은 이제 직접 지은 집의 문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인생의 강물을 바라보듯 각자 밟아온 길에 만족하며 지난 삶을 살피길 즐긴다. 그들은 군중의 소용돌이에서 자기 자식들을 발견해내며 기뻐한다. 자식들에게 어서 서두르라고, 다른 이들을 앞질러 먼저 도착하라고 부추긴다. 반면에 조반니 드로고는 매 순간마다 약해져가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p252)



작품을 두어 번 더 읽고 난 후, "문득 마음의 무거운 짐이 눈물로 부서지려하고 있었고", 바로 그 순간 내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건 죽음이 아닌 그 무언가 였다. 죽음과 희망 사이의 그 무엇. 찌질함과 용기 사이의 그 간극.


이 소설은 내게 '실존적 아픔'이란게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해 준 명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덧]

1.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도 멋진 문장들이 산재해 있어, 마치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는 것처럼 문장에 줄을 수도 없이 쳤다.

2.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다시 들을 수밖에 없었다.

3. 번역이 너무도 잘 돼 있어 한국 소설 읽듯이 읽어내려갔다. 번역자 한리나 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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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0-22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고독합니다 ㅋ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저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ㅎㅎ 저도 명작이라 생각합니다~!!

yamoo 2022-10-24 14:39   좋아요 2 | URL
아주 고독하고 실존적 아픔이 무엇인지 너무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서, 비슷한 정서를 느끼믄 독자에게 정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듯합니다. 부차티란 작가를 처음 알았는데, 정말 다음 작품을 찾게 만드는 작가인거 같아요. 이 작품 별 5개도 모자라요!!

scott 2022-10-22 1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그림 세계에 타타르인 사막의 고독이 반영 될것 같습니다 🤗

yamoo 2022-10-24 14:40   좋아요 2 | URL
흠....타타르인의 사막을 시간과 고독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습니다. 컨셉을 어케 잡아야할지 고민에 고민을 더할 거 같습니다. 이 작품 정말 강력합니다! ㅎㅎ

stella.K 2022-10-23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정말요...?
신해철의 노래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니.
게다가 번역꺼정! 이거 읽어보긴 해야겠네요.
리뷰 잘 안 쓰시기로 유명한 야무님에서 리뷰를 이리 쓰실 정도라면
정말 안 읽을 수가 없겠는데요?
근데 좀 읽다가 우울에 빠질까 봐 겁나는데요? 흐흐

yamoo 2022-10-24 14:43   좋아요 2 | URL
네, 읽은 후에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들으면 신해철의 작사 능력이 넘사벽이라는 걸 느낌니다. 이 작품과 궁합이 정말 좋아요.

이 작품은 지금껏 읽었던 세계문학 작품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작 중 명작이에요!

우울한 거 보다는 약간 황량하다는 느낌이 강하고, 우울 이후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적절할 듯한데...이건 읽어봐야해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의 느낌이 모든 걸 말해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