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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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아니 평범하다기보다는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주부다.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모범적 남편, 세 딸아이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많은 이들과의 관계를 멋지게 꾸려가는 사교성까지 갖춘 여성이다. 그런 그녀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된다.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한 남편의 편지 한 통 때문. 오래전에 남편이 써 놓은 편지에는 “반드시 내가 죽은 뒤에 열어볼 것”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그러니, 더욱 그 안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이 당연지사 아닐까? 과연 세실리아는 이 편지를 열어보게 될까?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남편의 비밀은 무엇일까?

 

리안 모리아티의 소설 『허즈번드 시크릿』은 세 명의 여인들이 각각의 화자가 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세실리아 외에도 딸을 오래전 살인사건으로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노부인 레이첼. 평범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중 쌍둥이처럼 지내던 사촌과 남편의 사랑 고백이란 청천벽력으로 인해 삶이 무너져 내린 테스가 그들이다. 이들 세 여인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서로 얽히며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과연 편지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는 걸까? 과연 사랑의 상처를 입은 테스의 사랑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노부인 레이첼의 노년의 삶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흥미를 돋운다.

 

세실리아는 우연히 발견한 남편의 편지를 끝내 열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끔찍한 남편의 본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언제나 극히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던 남편이 사실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하지만, 이 사실을 세실리아는 밝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 자신의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 걸까? 과연 자신의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진실을 묻어두는 것이 옳은 걸까?

 

이처럼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묻는다. 과연 무엇이 옳은 걸까? 이 선택 역시 독자의 몫일 것이다. 인생은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나눌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이다. 편지를 열어 보게 된 세실리아는 이제 그 비밀을 알게 됨으로 인해 비밀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한다.

 

아울러 비록 엄청난 죄악을 범한 자라 할지라도 그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생을 규정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을 작가는 우리에게 던진다. 세실리아의 남편 존 폴은 극히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모든 이들이 인정하며 닮고 싶어 하는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다. 게다가 지역사회에서 수많은 봉사활동을 행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가 행한 어린 시절의 끔찍한 범행 때문이다. 존 폴은 세상이 밝혀내지 못한 그 범행을 자백할 용기는 없다. 하지만, 그 범죄로부터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자신 나름대로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굉장히 즐거운 일, 전적으로 자신만을 즐겁게 하는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 인생을 단 한 번의 실수(?)로 악인이라 낙인찍어야 옳은가?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평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속죄하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를 용서해야 하는 걸까? 자신만의 방법으로 속죄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그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아울러, 그가 감춰버린 진실로 인해 피해자인 레이첼은 애매한 사람을 평생 의심하고,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누구 책임일까?

 

결코 쉽지 않은 내용들이며, 선명하게 답을 밝힐 수 없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하나의 결과를 제시한다. 결국엔 존 폴의 감춰진 진실로 인해, 그것은 또 하나의 흉기가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함으로, 물론 그것이 정당한 결말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결국 죄에 대한 결과는 자신들에게로 돌아오게 됨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러한 죄와 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에는 세 여인의 결말들은 모두 가족이 지켜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일지 모르겠다. 아울러 죄와 벌을 넘어, 화해와 용서의 손짓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결국 우리가 꿈꿔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세 여인의 삶에 나름의 형식으로 결말이 주어진다. 하지만, 완전히 닫힌 결말은 아니다. 여전히 느슨하게 열려져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인생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열어보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엔 독자의 몫임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닐까? 닫힌 듯싶으면서도 열린 결말. 어쩌면 우리 인생이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인생이 비록 확고한 신념 위에서 굴러가는 듯 여겨질지라도, 그 신념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평소에는 짜임새 있게 맞물려 굴러가는 듯 보일지라도 순식간에 이가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정부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내가 열어가는 판도라의 상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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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적선 개도적선 2015-07-1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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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조선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8
김소연 지음 / 비룡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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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으로 날 바라볼 때, 때로는 그 시선이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는 것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외국인의 시선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 청소년역사소설인 『굿바이 조선』은 이처럼 외국인의 시선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본 장편소설이다.

 

때는 1905년, 열강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 러시아의 귀족 장교인 알렉세이는 조선탐사단의 일원으로 조선을 찾아온다. 물론, 이들이 조선을 탐사하는 목적은 조선을 삼키기 위한 기반 마련을 위한 것. 이 탐사단의 분대장 가운데 하나인 알렉세이는 자신의 분대원인 비빅, 니콜라이와 함께 조선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비빅은 다소 다혈질의 거구 퇴역 군인이며, 통역관인 니콜라이는 조선인으로서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은 탐사여행에 필요한 말을 구하던 중 근석이란 소년과 함께 여정을 떠나게 된다. 과연 이들의 탐사를 통해 발견되어지는 조선은 어떤 모습일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던 조선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당히 무능하며, 본질을 상실한 정부의 모습이다. 조선에 대해 탐문하던 알렉세이에게 한 러시아 상인은 조선인들은 마치 백조와 같다고 말한다. 백조가 사냥꾼에게 사냥을 당하듯이 러시아 수비대에 의해 조선인들이 사냥당하고 있다는 것. 이에 조선의 정부는 왜 가만히 있느냐는 알렉세이의 질문에 러시아 상인은 이렇게 말한다.

 

작금의 코레야라는 국가가 그렇습니다. 사살 사건이 지방 정부에 보고된다 한들 그에 대한 항의나 재발 방지 요구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까요. 단적으로 말해 코레야 정부는 자국민을 지킬 힘도 의지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30쪽)

 

자국민을 지킬 힘도 없을뿐더러 의지도 없다는 평가가 우릴 부끄럽게 한다. 더 서글픈 것은 이런 모습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 아닐까?

 

뿐만 아니라 동학군을 외세의 힘을 빌려 척결하려는 조선의 모습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역시 우릴 부끄럽게 한다.

 

알렉세이 두 눈이 커졌다.

“동학군은 코레야 사람 아닙니까?”

“조선 사람 맞지요.”

“그런데 지금 외국 군대에게 자국의 백성을 학살해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왕조에 반역하고 사민평등을 내세우며 극악한 도적질을 일삼는 동학당 따위는 조선 백성이 아니오. 도적 떼일 뿐이오. 반상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양반을 능멸하는 저런 무리는 하루 속히 이 땅에서 쓸어 버려야 하오.”(109-110쪽)

 

반상의 질서가 더 중요하고, 민중은 함께 가야할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양반의 사고구조에 화나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럽기만 하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이처럼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순하디 순한 백조가 되어 수많은 외세의 폭력에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러한 양반과 정부의 왜곡된 시선, 본질을 상실한 모습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백조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고고한 척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불쌍한 동물이 조선의 현실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조선에 직접 들어와 탐사하는 가운데 점차 변하게 된다. 힘없던 백조에서 절개를 잃지 않고 용감하게 역사에 맞서는 백두산 호랑이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선이 변하는 이유는 조선 안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꿈틀대며 깨어나고 있는 민중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부정부패의 온상지인 탐관오리들의 창고를 터는 동학군의 모습이며, 외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의병대의 모습 등이다. 아울러 이런 모습들을 통해, 새롭게 깨어나는 근석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저 시골마을의 소년에 불과했던 근석은 알렉세이 일행과 함께 하는 가운데, 깨어나게 된다. 근석의 고백을 보자.

 

나는 지금껏 조선이 임금님 한 분의 나라인 줄만 알고 살았어요. 그래서 한 번도 산과 들이 내가 지켜야 할 내 것이라고 여겨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대장님과 여행을 하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조선은 임금 한 사람만의 나라가 아닌 이 땅에 사는 모든 조선인의 나라라는 걸 말이에요. 조선이 백성의 나라가 아니라면 왜 의병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적군과 싸우고 동학당들이 탐관오리의 사창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겠어요?(250쪽)

 

결국 작가는 『굿바이 조선』이란 소설을 통해, 우리의 민중이 이처럼 깨어나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 우리 조선(대한민국)이 여전히 오늘날 이 땅의 열강들에게 백조에 불과한 모습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이제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열강의 눈에 비춰지길 소망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의미는 이처럼 백조에 불과했던 조선이 호랑이의 모습으로 열강의 눈에 비춰질뿐더러, 열강의 시선이 우리 조선의 시선과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세이가 그렇다. 사실 알렉세이가 조선 탐사단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자신의 민중을 보호하기보다는 민중을 학살하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회의였다. 이제 알렉세이는 시골 아이 근석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뜨는 모습을 통해, 이젠 도망치지 않고, 근석처럼 자신의 고국을 위해 뭔가 해야 할 바를 찾아 떠나게 된다. 이런 모습 역시 타자의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봄일 것이다. 외국인의 눈으로 조선을 바라보는 것에서 이 소설은 그치지 않고, 조선을 통해, 다시 자신들을 바라보게 됨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선의 확장은 오늘 우리 독자들에게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소설을 통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근석과 알렉세이, 아울러 니콜라이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나아가는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조국의 멋진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물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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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 초롱 - 강소천 동요시집 아동문학 보석바구니 7
강소천 지음, 김영덕 그림 / 재미마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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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재미마주에서 출간되고 있는 <보석바구니> 시리즈 7번째 책으로 강소천 선생님의 동요시집인 『호박꽃초롱』이 출간되었네요. 아마도 강소천 선생님의 전집이 모두 <보석바구니> 시리즈 안에서 출간되나 봅니다. 그 첫 번째 책인 『호박꽃초롱』은 강소천 선생님의 동요시집으로, 33편의 동요들과 2편의 단편동화가 실려 있네요.

 

이번에 다시 나오게 된 이 책에서 몇 가지 의미를 찾아봅니다.

 

첫째, 올해(2015)가 강소천 선생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네요. 그러니, 강소천 탄생 100주년 사업의 일환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네요.

 

둘째, 이 시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때가 1941년이라고 하네요. 이때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짓을 서슴지 않던 때죠. 이러한 때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동요시집을 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겠네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말은 안녕한가요? 온갖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고, 우리말보다는 외국어가 더욱 대접받는 시대 아닌지요. 외국어를 사용해야 지적 수준이 높게 인식되는 오늘날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말이 말살되는 때가 아닐까 여겨지네요. 또한 젊은 세대들을 위주로 만연한 언어파괴 역시 우리말 말살과 다름없지 않을까요? 물론, 언어란 것은 시대에 맞게 변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급속도로 파괴되어지는 우리말을 볼 때, 씁쓸한 것은 사실이지요.

 

이러한 때이기에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 앞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시어들을 가지고 발간되었던 이 책이 여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여겨지네요.

 

셋째, 처음 간행되었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있음도 좋네요. 물론, 예전의 세로표기를 가로표기로 바꾸고, 책 크기에도 변화를 주고, 맞춤법 등을 교정하였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표지 그림은 처음 간행될 당시의 그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이 표지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레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답니다. 커다란 호박꽃 안에서 노니는 두 아이들의 모습은 왠지 어린 시절 호박꽃을 따며 놀던 때를 떠올려보게 되죠. 이러한 연상 작용을 통해, 동심 가득하던 그 시절,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답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는 요즘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동요를 통한 과거로의 여행, 동심을 끌어올리는 그림이 아닐까 여겨지네요.

 

물론, 그 안에 담겨진 33편의 동시들이야말로 알맹이겠죠. 참 예쁘답니다. 동시의 교과서를 접하는 느낌이랄까요? 좋은 동시를 쓰기 위해선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고 말하죠. 바로 그런 관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동시가 바로 이 책에 실려 있네요.

 

물 / 한 모금 / 입에 물고 //

하늘 / 한 번 / 쳐다보고 //

또 / 한 모금 / 입에 물고 //

구름 / 한 번 / 쳐다보고

< 닭 > 전문

 

그 유명한 동시가 강소천 선생님의 것이었네요. 또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참새 때를 보며 노래한 시도 참 예쁘고 인상 깊게 다가오네요.

 

버드나무 무슨 열매 / 달리련마는 //

아침 해가 동산 위에 / 떠오를 때와 //

저녁 해가 서산 속에 / 사라질 때면 //

참새 열매 조롱조롱 / 달린답니다. //

< 버드나무 열매 > 일부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니,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도 열매가 되네요. 그 외에도 동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동시들, 참 고맙네요. 더 나이 들어 늙더라도 동심을 잃지 않는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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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네버랜드 클래식 48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허버트 포즈 그림, 김주경 옮김 / 시공주니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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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말하길, “고전은 누구나 읽어야 할 권위를 지닌 책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란다. 뿐 아니라, 읽어도, ‘지금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한단다. 그 유명한 고전을 ‘아직’ 읽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의 교양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언제나, ‘다시’ 읽는다고 슬쩍 말해버리는 책이 고전이란다.

 

이런 고전 가운데 한 권이 여기 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가 그것이다. 시인의 표현대로 참 교양 없게도, 본인은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이 아니라, ‘처음’ 읽었다. 더 ‘교양 없는’ 비밀 하나 말한다면, 『파랑새』의 원전이 희곡이었음도 금번에 알게 되었다. 그러니 참 ‘교양 없는’ 사람 중에 괴수인 게다.

 

그러니 『파랑새』를 읽으며 가장 행복한 것이 무엇일지 짐작이 되지 않나? 그렇다. 그 ‘교양 없음’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 수 있었노라는 안도감이야말로 고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의미 아닐까 싶다.

 

각설하고, 오늘 우리에게 ‘파랑새’는 『파랑새』를 읽었건 읽지 않았건 ‘행복’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만큼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한 작품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이러한 고전을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닐까 싶다.

 

 

가난한 가정의 남매인 틸틸과 미틸은 어느 밤 자신들을 찾아온 요술쟁이 할머니 베릴륀느에게서 파랑새를 찾아오란 부탁을 받게 된다. 요술쟁이 할머니의 아픈 딸이 파랑새를 갖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파랑새는 행복이다. 파랑새를 찾는 이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요술쟁이 할머니는 마법의 다이아몬드가 달린 모자를 남매에게 준다. 그리고 이 마법의 다이아몬드를 돌리면 모든 것들의 본연의 모습을 보게 된다.

 

틸틸과 미틸 남매는 이 모자의 힘을 빌려, 그리고 수많은 요정들의 도움(?)과 함께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숲속, 무덤, 행복의 정원, 하늘궁전, 미래의 나라 등 많은 곳들을 1년이란 시간 동안 찾아다니다 결국 집에 돌아오게 되는데, 과연 남매는 파랑새를 찾아올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 메시지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 가까운 곳에 있음일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행복은 바로 매일매일 반복되어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행복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134쪽)

 

“참 딱하기도 하지! 틸틸! 너희 집은 문이랑 창문이 터질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우리는 늘 웃고 노래하지. 우리가 샘솟듯이 만들어 내는 즐거움 때문에 벽까지 춤추고 지붕까지 들썩거릴 정도라니까! 단지 네가 그걸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거지.”(137쪽)

 

‘행복의 정원’에서 만난 ‘행복’의 말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의 삶 곳곳에 행복은 터질듯이 가득 차 있음에도 우리의 눈이 감겨져 있어 보지 못하고, 우리의 귀가 닫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 우리 삶에서도 마법의 다이아몬드를 돌림으로 외형 안에 갇힌 참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자칫 힘겨운 삶의 껍데기로 인해 그 안에 가득 담겨진 행복을 걷어차지 않도록.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죽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추억의 나라’에서 남매가 만나는 장면이다. ‘추억의 나라’로 떠나는 남매에게 요술쟁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은 너희 추억 속에 살아 있으니 돌아가셨다고 할 수는 없지. 인간들은 이 비밀을 몰라. 뭐, 원래 인간은 아는 게 별로 없긴 하지만. 너희는 다이아몬드 덕분에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죽은 사람들도 우리가 추억하는 동안은 세상에 있을 때처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말이다.”(48-50쪽)

 

그리고 실제 이곳 ‘추억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떠올리는 순간 죽은 자들은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추억’과 ‘기억’이 중요한 이유다. 기억이 죽은 자를 살려낸다.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렇기에 더욱 잊지 않아야 한다. 그들과 함께 했던 ‘세월’을.

 

아울러,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우리의 눈은 과연 떠 있는가? 우린 봐야 할 것을 과연 보고 있는가? 아울러 제대로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틸틸과 미틸 남매가 마법의 다이아몬드가 달린 모자를 통해 세상의 본질을 보게 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남매에게 모자를 전해주며 요술쟁이 할머니가 하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무엇이든 새로운 눈으로 본다는 게 중요해!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들이란다. 요술쟁이들이 죽은 뒤로 인간은 제대로 보질 못해. 게다가 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심조차 안 하지. 다행히 감긴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단다.”(26쪽)

 

오늘 우리의 감긴 눈을 뻔쩍 뜨이게 할 마법의 다이아몬드는 무엇일까? 그건 세상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 그리고 상상력이 아닐까?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지 않나 여겨진다. 바른 통찰력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읽어내야 하며,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삶, 바로 그곳으로 ‘파랑새’ 한 마리 잡으러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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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소 되다 한림아동문학선
핼리 혜성 지음, 사사메야 유키 그림 / 한림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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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아빠가 소가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일이 동화 속에서 실제 일어났답니다. 유이치네 아빠가 하루아침에 소가 되어버렸네요. 『아빠, 소 되다』는 바로 이런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이야기랍니다. 아빠가 실제 소가 되어버림으로 일어나는 좌충우돌 생활담이 담겨 있습니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식성,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먹는 만큼 엄청나게 배출하는 거시기(!). 특히, 이 거시기로 인해 온 가족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답니다. 매일 하루 일과는 아빠의 엄청난 거시기를 해결하는 거랍니다. 변기에 한 번에 버릴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을 처리하는 어려움. 게다가 온 집안에 배어드는 냄새는 정말 견디기 어렵죠. 뿐인가요? 이 일이 소문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들은 참 눈물겹답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마음이 상당히 무거운 이야기랍니다. 눈물 흘리게 하는 진한 감동도 있고요.

 

특별한 일탈적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유이치네 가정은 여전히 일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하기도 하죠.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아빠가 소가 됐는데, 나는 이렇게 평소처럼 학교에 가고 있다니. 하지만 초등학교 생활도 나름 바쁘다. 5학년 정도 되면 더 그렇다. 아빠가 소가 됐다고 해서 넋 놓고 쉴 수는 없는 것이다.”(25쪽)

 

특별하고 엄청난 사건, 그 일탈적 상황과 일상의 삶 간의 간극, 그 긴장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네요.

 

그렇다면 아빠가 소가 되어버린 이유가 뭘까요? 그건, 아빠의 소외감에 있답니다. 가족 모두 아빠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답니다. 아빠는 가족을 위해 ‘소처럼’ 일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전혀 존재감 없는 존재에 불과했죠. 하지만, 소가 되면서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게 되네요. 이런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혹, 우리네 가정에도 이처럼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이는 없는지 말이죠. 특히, 아빠라는 존재가 더욱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울러 소가 되어 버린 아빠의 모습은 아빠의 희망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복잡한 것 다 잊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삶 말입니다. 아무런 고민 없고, 먹고 자고 싸는 ‘소처럼’ 사는 삶을 아빠는 동경합니다. 물론, 이런 삶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빠의 아픔이 담겨 있네요. 고민 없는 소와 같은 삶은 수많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의 선택(?)이지 않았을까요?

 

책꽂이에 즐비한 책은, 우리한테 환영받지 못한 아빠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한 흔적처럼 보였다.(129쪽)

 

결국 이야기는 소가 된 아빠가 사람으로 돌아오는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답니다. 왜 그럴까요? 소가 된 아빠가 시골 할머니 댁으로 떠나는 장면에서는 이를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데, 왜 이왕이면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 안에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비록 소가 되어 버린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아빠라고 말이죠. 오늘날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아버지들. 그들 모두 열심히 살아감에도 어쩌면 가족 앞에 당당하지 못한 아버지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네들은 아버지라는 것을 작가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나요?

 

이야기 속의 유이치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말도 전혀 통하지 않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저 소를 과연 아빠라고 할 수 있을까? 소가 된 아빠를, 아빠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지 않을까.(97쪽)

 

이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더욱 아버지를 가장 가까운 가족이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거죠. 하지만, 여전히 소에 불과한 아빠이지만, 그 소를 온전히 아빠로 인정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히려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비정상이라고 말이죠.

 

기발한 상상력, 발상으로 풀어내고 있는 동화이지만, 그 안에 참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의미 있는 동화랍니다. 한림출판사에서 발간되고 있는 <한림 아동 문학선> 가운데 한 권인 본서는 출판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린이 스스로 골라 일을 만한, 재미와 감동, 울림이 있는 문학 작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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