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 1
조지 오웰 지음, 이수정 옮김, 박경서 해설 / 코너스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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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대략 20여 년만인 것 같다. 당시에는 형의 방 책꽂이에 꽂혀있던 『1984』와 함께 한 권으로 출간된 책을 읽었던 기억인데, 금번 코너스톤 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새롭게 시작되는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장원농장’의 동물들은 모두 한 곳으로 모여든다. 이곳에서 다른 동물들에게 존경받던 늙은 돼지 메이저 영감은 자신들의 삶이 이대로 괜찮은지 질문을 던진다. 생산하지는 않으면서 소비만 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들에게 언제까지나 착취당하기만 해야 하는 지. 그러한 인간들을 향해 반기를 들 것을 선동한다. 이렇게 동물들을 선동하고 죽은 메이저 영감의 영향으로 이제 동물들은 자각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한 목소리가 되어야 함을 알고, 한 목소리를 내게 되고, 결국 ‘장원농장’을 동물들의 세상으로 만들게 된다. 이제 이름도 ‘동물농장’으로 바뀌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뒤집어진 세상, ‘동물농장’은 게속하여 안녕할 수 있을까?

 

정치적 풍자가 가득한 『동물농장』을 통해, 작가 조지 오웰은 먼저, 사회주의 혁명이 요구될 수밖에 없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네 삶은 비참하고 고달프고 짧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목숨을 겨우 유지할 만큼의 먹이만 받아먹고, 일을 할 수 있는 동물은 마지막 순간까지 혹사당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바로 끔찍하고 잔인하게 도살을 당하지요. 영국에서 태어난 그 어떤 동물도 나이 한 살을 먹고 나면 행복이나 여가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오. 어느 동물도 영국에서는 자유가 없는 게지요. 비참한 노예의 삶, 이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잖소.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란 말이오.(13쪽)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로 인해 동물들(인민들)은 봉기한다. 그리고 세상은 바뀐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모든 인간들이 자신이 누릴 마땅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비록 쉽지 않은 이상향에 불과하다 할 수 있겠지만,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우린 지향해야 한다.

 

하지만, 소설이 진짜로 보여주고자 하는 풍자는 그 혁명의 정신이 얼마나 쉽게 변질되고, 그 이상향이 쉽게 깨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혁명에 성공을 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였다고 하는데, 실제 동물들의 삶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점점 더 힘겨워질 뿐이다. 동물들을 이끌어가는 자들이 혁명의 참 이상을 버리고, 그저 자신들의 탐욕만을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클로버가 생각한 미래의 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나고 모든 동물이 평등하며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예컨대 메이지 영감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자신이 앞다리로 새끼 오리들을 보호해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콜로버가 바라던 미래 대신 찾아온 것은 누구도 자기의 생각을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농장 여기저기를 휩쓸고 돌아다니고, 동무들이 충격적인 죄를 자백한 다음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은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그러한 사회였다.(97-8쪽)

 

혁명은 변질되었다. 혁명의 성공은 또 다른 탐욕스러운 돼지들의 잔치를 양산했을 뿐이다. 그 전에 동물들을 착취했던 인간의 자리에 돼지들이 앉았을 뿐이다.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했다. 밖에서 지켜보던 동물들은 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서 인간으로 번갈아 고개를 돌리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이미 구별할 수 없었다.(151쪽)

 

『동물농장』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제도나 사상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제도나 사상을 운용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 시스템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떤 인격, 어떤 마음,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아무리 좋은 사상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할 수 있으며, 아무리 좋은 제도 역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이 시대의 안녕은 사람에 달려 있다. 『동물농장』은 결국 탐욕 앞에 무릎 꿇고 변질하는 혁명, 실패한 혁명을 보여줌으로 아무리 좋은 이상향이라 할지라도 그 안의 ‘사람’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오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참 ‘안녕’을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일 수 있길 소망해본다.

 

우리 모두의 ‘안녕’은 좋은 제도와 좋은 여건들의 마련도 필요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야 하니 말이다.

 

역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두고두고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언제나 저렴한 가격으로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선사하는 코너스톤의 『동물농장』으로 고전의 가치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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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 픽션
배상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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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민 작가의 장편소설 『페이크 픽션』을 읽고 느낀 건, 첫째, 재미있다는 점이다.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오가며 전개되는 소설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떼기 쉽지 않을 만큼 흡입력이 강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나게 전개되는 소설의 내용은 무겁다.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이 다루는 주된 메시지는 용산재개발 지역의 참사를 다루고 있다. 그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이 아닌, 그 참사 안에 희생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즉, 작가는 ‘사람’에 관심을 기울인다. 삼류 영화감독인 황감독의 시선을 통해서. 황감독의 시선 변화처럼, 독자인 우리들의 시선 역시 변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황감독은 삼류 감독이다. 아니, 아직 제대로 입봉도 하지 못한 그는 지금은 그저 동거녀(동거녀 역시 삼류 여배우다)와 함께 만화카페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가게를 비워져야 할 위기에 처한. 그런 그들의 만화카페 입간판 뒤에 어느 날 포스트잇 한 장이 붙게 된다.

 

“왜 가만히 있지요? 벌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세상은 변한 게 없어요.”(164쪽)

 

이 글씨는 황감독에는 눈에 익은 글씨체, 바로 그토록 찾던 삼룡의 글씨체였던 것. 삼룡은 바로 황감독의 데뷔작이 될 뻔 했던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이 소설은 바로 황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황감독은 동거하던 여배우 성숙이 2천만 원을 사채업자로부터 빌리는 바람에 이 돈을 갚지 못하면 사채업자들로부터 콩팥을 떼어내야만 할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사채업자는 황당한 제의를 한다. 2천 4백만 원으로 자신의 무용담을 근거로 한 액션영화를 만들라는 것. 그나마 2천 4백만 원은 황감독이 빌린 돈과 이자였다. 그러니, 황감독은 돈 한 푼 없이 액션영화를 만들지 못하면, 콩팥을 떼이고 버려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 황감독은 돈을 들이지 않고 영화를 찍을 방법을 찾아낸다. 최신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엄청난 무술 실력을 가진 주연 배우를 캐스팅하여 실제 싸움판에 투입하여 그 장면을 찍겠다는 것. 문제는 이런 실제 싸움판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사할 엄청난 무공을 가진 주인공을 캐스팅하는 것. 우여곡절 끝에 황감독은 냉면집 배달원 삼룡이 엄청난 무공을 가진 것을 알게 되고, 순박한 청년 삼룡을 영화배우로 캐스팅하여 실제 싸움판에 투입한다. 이에 삼룡은 영화를 실전처럼 찍는다는 말에 속아 건달들 간의 이권 싸움판에 투입되고, 철거촌 현장에 투입되어 철거용역으로 철거민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된다.

 

이런 가운데, 삼룡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않음을 알고 갈등하게 되고, 결국 철거민들 편에 서게 되는데. 과연 삼룡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황 감독은 콩팥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

 

앞에서도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소설, 『페이크 픽션』은 재미나다. 하지만, 단지 재미만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그 안에 철거민들을 향한 안타까움, 정의를 향한 꿈틀거림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편한 소설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우린 마땅히 감수해야 할뿐더러, 불편함 이면에 있는 불의를 향해 외면치 말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재난, 어쩌면 자연이 가져다 준 것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재난이 더 위험한 지도 모르죠. 자연이 준 재난은 인간을 뭉치게 하지만 인간이 준 재난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으니까요.(360쪽)

 

소설 속에서 철거민들 편에서 투쟁하던 여인 재인이 황감독에게 하던 말이다.

 

세상은 참 변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나,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뭐가 그리 다를까. 그리고 5년 전 그 날. 철거를 앞둔 5층 건물이 불타오를 때 나와 함께 있었던 그들도... 법은 언제나 내쫓으려는 자들의 편에 서 있었다.

 

이는 만화카페 가게를 비워줘야 할 위기에 처한 황감독의 독백이다. 그렇다. 세상의 법은 언제나 내쫓으려는 자들의 편에 서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을 위해 작가는 존재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재미난 소설을 읽으며,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얻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 내쫓으려는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내쫓기는 약한 이들의 편에 법이 서게 될 날을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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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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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용이 있다』, 책 제목이 참 독특하다. 과연 이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제목의 문구는 고대 지도에 적혀 있던 문구라고 한다. 항해하기에 위험한 지역 등에는 ‘여기 용이 있다’는 은유적 표현을 적음으로 그곳에 가까이 가기를 금한 표현이란다. 마치 우리의 “개조심!”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문구, ‘여기 용이 있다’란 문구는 위대한 정신의 탐험가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곳만을 찾아다니며 탐험을 즐긴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책 역시 이런 의미가 있겠다. 이 책 안에는 위험한 사상이나 생각, 이야기들이 가득할 수 있으니 펼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진짜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니 어서 책을 펼치고 그 안에 담긴 신비한 세계를 탐험하고 즐기라고.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열매들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 이 책 안에는 어떤 위험한 이야기들이 있을까? 저자는 도합 113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책 안에 113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짧은 이야기일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픽션이다. 그러니 작가가 지어낸 짧은 이야기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짧은 이야기들 가운데는 물론, 어떤 주제에 대한 작가의 단상을 적어 놓은 에세이 형식의 글들도 있다. 또한 어떤 글들은 작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글들에는 풍자, 해학, 위트 등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풍자나 해학, 유머는 많은 경우 냉소적 표현이나 희화적 표현으로 전달되기도 하며, 많은 글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세상을 향한 풍자의 글들을 읽으며, 때론 비웃음을 유발하는 부분도 있고, 때론 분노를, 때론 슬픔과 아픔을 느끼게도 된다.

 

참 다양한 글들이 각기 짧은 분량으로 실려 있는데, 어떤 글들은 이런 내용을 확장하여 소설을 써가도 좋겠다 싶은 글들도 보인다. 또 어떤 글은 완전히 똑같은 글이 두 번 실려 있기도 하다. 처음엔 왜 두 번 실렸을까? 편집의 실수일까 싶었는데, 글의 내용을 보니, 일부러 두 번 실었음을 알게 된다. 같은 글이지만, “흐른 시간과 바뀐 공간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찾고 다른 해석을 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이렇게 두 번 실었다(그런데, 이 글의 제목은 「경고」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런 내용으로 맺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지 않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끔찍한 불행이 쏟아질 거라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44, 91쪽)

 

그러니, 두 번 읽으라는 것?(그래서 두 번 읽었다^^ 처음엔 어, 똑같은 글이 또 있네 하고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읽었다).

 

또한 같은 제목, 같은 시작, 다른 결말을 보이는 글들도 있다. 그러니, 이 책안에 실린 113편은 모두 별개의 내용이면서도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퍼즐처럼 서로 연결되고 맞춰질 수 있는 그런 내용이기도 하다.

 

또 어떤 글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이기도 하다. 그 글의 제목은 「어느 기억상실증 환자의 기억」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적을 수 없을밖에.^^

 

아무튼 참 독특한 소설집을 읽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두 가지만 남겨본다.

 

하나는 「두 개의 심장」이란 이야기다. 심장을 두 개씩 가진 어느 가족이 있었다. 하나는 사랑을 위한 심장, 또 하나는 미움을 위한 심장을 가졌다. 그래서 이들은 아침에는 자녀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주면서도, 저녁이 되면 전쟁터에서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다. 물론, 이야기는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이 부분이 마음에 남는다. 이들은 심장이 둘이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마음을 아주 쉽게 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또 하나는 「폭발장치」라는 글인데, 이 글 안에서는 폭발사고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런 폭발사고가 뉴스에 나온다. 글은 이렇게 끝맺는다.

 

“그 뉴스를 본 사람들은 평소처럼 책을 읽다가 가족과 저녁을 먹고 개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163쪽)

 

어쩌면, 이처럼 어떤 끔찍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그 일에 꿈쩍도 하지 않고 여전히 평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자세, 그 삶의 공간이야말로 결코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위험한 용이 있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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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 소녀
박정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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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목공 소녀』라는 작품집을 통해. 이 소설집은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소녀’이면서도 통상적인 ‘소녀’란 이미지를 탈피한 소녀들이다. 이들을 통해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사실, 대단히 어둡고, 때론 섬뜩하며, 기괴하기도 하다. 솔직히 이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들은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어두운 이유는 이야기들 밑바탕에 죽음, 피, 성폭력, 부모로부터의 버림받음 등과 같은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면면도 어둡다. 초등학교 동창에게 약물을 파는 소녀. 수년 동안 16살에 머물며 학생의 자리에 돌아가길 원하지만 16세 때의 상처를 결국 치유하지 못하는 소녀. 죽음과 무덤에 묻힘을 놀이로 하는 소녀. 사기와 불륜으로 감옥에 간 엄마에게 죽어버리라 저주한 소녀. 등이 붙은 상태로 엄마의 자궁 안에 있다가 태어나며 분리되어 태어났지만, 서로의 등이 맞닿을 때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소녀. 복수를 꿈꾸는 소녀 등. 모두 한 결 같이 평범함을 거부하는 소녀들이다.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목공 소녀」의 주인공 진이 자신을 16세 학생 아닌 학생으로 영원히 머물게 한 장본인 상어 같은 외삼촌을 향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부분을 보면,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소녀들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기 쉬울게다.

 

진이 년 어디 있어? 상어의 발자국 소리가 안방으로 다가왔다. 쿵쿵쿵. 상어가 나선형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삐걱거렸고 거칠게 내뱉는 상어의 숨소리가 들렸다. 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끝과 발끝이 뻣뻣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전기톱의 스위치를 켰다. 덜덜 떨리는 톱이 이불자락을 잘라냈다. 튀어나온 목화솜이 흩날렸다.(114쪽)

 

이처럼 아홉 소녀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들은 암울하고, 섬뜩하며, 어두운 결말들로 이어지곤 한다. 작가는 이런 암울한 이야기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한 쪽에서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행복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외침이 공허한 울림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 여전히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제로인 이들이 다른 한 쪽에는 존재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꿈 많은 ‘소녀’여야 할 그 단어, 상큼하고 싱그러운 단어인 ‘소녀’. 하지만, 그런 소녀들이 꿈, 희망, 행복, 사랑 등 긍정적 단어로부터 괴리된 채 더욱더 어둡고 암울한 세상으로 내몰리며 살아가야만 하는 ‘소녀’ 아닌 ‘소녀’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는 수없이 존재함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을 소녀의 자리에서 내모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 부모의 도의를 행하지 못하는 자들. 자녀를 지켜주지 못한 자들. 시기심에 의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내는 자들. 도움을 외면하는 자들. 어쩌면, 이들은 그리 괴기스럽지 않은 자들이다. 아니, 어쩌면 내 곁에 있는 자들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내가 그 자리에 설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작가는 이것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이 아닐까? 당신이 소녀들을 소녀의 자리에서 내모는 자일 수 있다고.

 

아무튼 모를 일이다. 괴기스럽고, 섬뜩하며, 암울하고, 어두운 소설들이다. 하지만, 그저 어둡다고 치부하기엔 뭔가 그 안에 묵직한 속삭거림이 느껴지는 소설들이다. 다시 한 번 소설을 찬찬히 곱씹으며 읽어볼 필요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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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면
티에리 코엔 지음, 임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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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코엔의 소설, 『만일 당신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면』은 한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암은 피곤해 하는 엄마를 졸라 공원에 가 그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다 그만 자신을 뒤따르던 엄마가 차에 치어 숨지게 된다. 이 사건은 노암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꼬마가 떼를 써요. 공원에 가서 그네를 타자고 계속해서 졸라요. 엄마가 ‘다음에 하자’라며 꼬마를 달래요. 엄마는 꼬마를 ‘몽꾀르(내 심장)’라고 불러요.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 사실 누군가를 ‘심장’이라고 부르는 건 말도 안 돼요. ... 왜냐면 심장은 무언가를 살게 해주는 거잖아요.”(10쪽)

 

심리상담을 하며 어린 노암이 던진 말이다. 결국 엄마를 살게 해주는 존재가 아닌, 죽인 자신이 어찌 엄마의 ‘심장’이 될 수 있겠느냐는 이 말 안에 노암의 죄책감과 노암이 평생 짊어져야 할 아픔의 무게가 느껴진다.

 

노암은 오랜 시절 심리상담을 받게 되고, 결국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모습일 뿐. 노암은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의식 가운데 품고 살아간다. 그런 노암은 어느 날 사랑하는 어린 조카(3살) 안나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넌 다섯 사람과 함께 같은 날 심장으로 죽을 것이다.”

 

누군가 조카의 입술을 빌어 말하는 것 같은 이 말로 인해, 노암의 가장 큰 두려움, 죽음은 노암을 힘겹게 하고, 노암의 공항장애가 시작된다. 그러던 차, 이 음성이야말로 ‘순수한 이들의 예언’임을 알게 되고, 어린 시절 자신의 상담자였던 로랑스 박사를 통해, 신비주의 심리상담을 하는 리네트를 소개받게 되고, 리네트는 노암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예언하는 아이를 찾게 한다.

 

과연, 노암 앞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안나의 예언의 의미는 무엇일까?

 

처음 접한 작가인 키에리 코엔, 그의 소설을 읽어가는 가운데 금세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스토리 자체가 흥미진진할뿐더러, 신비한 영역, 우리가 알지 못할 또 다른 차원의 어떤 힘을 느끼게 하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접근도 흥미롭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해체된 가정과 엉망이 된 삶이 이제 소설 말미에서는 안정을 찾아 가게 되는데, 그 동인은 무엇일까? 영원한 사랑과의 만남. 사라의 예언을 추적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의 울림. 그리고 또 다른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고백과 용서를 통해 얻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과연 그것뿐일까 암시한다.

 

우린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두려움에 종교가 가장 큰 힘을 실어주고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울러, 우리가 죽음에 얽매이기보다는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에서 작가가 던져주는 질문이 이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겠다.

 

나는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살아왔는가?

나의 가치들을 포기해 오지 않았는가?

나는 정말로 내 가족의 행복에 관심을 가졌던가?

이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투쟁에 얼마만큼이나 참여했던가?(209쪽)

 

내 죽음의 때가 언제일지에 매달리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런 질문과 함께 살아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역시 도서출판 밝은세상의 소설들은 한 결 같이 재미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평소 도서출판 밝은세상의 책답지 않게 책 안에 오타가 많다는 점이었다. 10여 곳이 넘는 오타들(조사들을 잘못 번역 내지 적은 경우가 많았고, 단순한 오타들도 많았다)이 좋은 작품을 방해하는 요소로 남는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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