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섹남을 위한 퍼즐게임북
가레스 무어 지음, 엄성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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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창시절 문제집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던 스도쿠와 네모네모로직이 시작이었다. 스도쿠는 금세 질렸지만, 네모네모로직은 아예 단행본을 사서 본격적으로 빠졌었다. 졸업 후에도 가끔 퍼즐이 풀고 싶을 때면 퍼즐잡지를 사곤 했는데, 취향이 아닌 낱말퍼즐 등은 뛰어넘고 가장 좋아하는 지그재그 숫자퍼즐을 몇번이고 풀었다. 한 퍼즐잡지당 지그재그 숫자퍼즐은 5~6개 밖에 들어있지 않아서 여러 종류의 잡지를 한꺼번에 샀다.
우연히 발견한 <뇌색남을 위한 퍼즐게임북>은 내 취향의 퍼즐이 잔뜩 들어있는 보물같은 책이었다. 가장 좋아한 건 지그재그 숫자퍼즐과 동일한 퍼즐인 ‘슬리더링크‘와 약간 변형된 형태인 ‘양과 늑대‘, 그 외에도 ‘4차선 다리‘, ‘네 갈래 바람‘이다. 식욕상실과 더불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에 빠져 있던 입덧 기간을 이 책 덕분에 잘 버텨냈기에, 정말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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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이는 우리 사이에 우연과 낭만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는 일이에요. 전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어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커포티는『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육 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철저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338쪽(크레마전자책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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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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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선명한 화질을 자랑하고 자유로운 확대/축소가 가능한 디지털 사진들은 우연찮게 스캔들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필름사진에도 필름카메라와 그 인화 과정 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비밀이 있다. 그런 비밀들을 간직한 채 다정하게 미소 짓는 곳, 니시우라 사진관이다.

 

아주 작은 섬에 위치한 아주 오래된 사진관을 중심으로, 사진관을 오갔던 몇 사람과 얽힌 이야기들을 잘 직조했다. 구성과 분량면에서 가볍게 읽기에는 최적이다. 내용은 지나치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적당한 긴장감(추리소설과 유사한)과 정서적 위안(성장소설과 유사한)을 준다. 필름카메라와 오래된 사진들은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낡은 목조건물의 삐걱거림과 나무냄새가 느껴지는 듯하다. 초현실적인 상상을 하게 만드는 다소 오싹한 설정도 제법 괜찮다.

 

장소는 에노시마, 어린애 걸음으로도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섬이다. 주인공 가쓰라기 마유는 외할머니인 니시우라 후지코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후지코가 운영하던 에노시마의 니시우라 사진관으로 향한다.

에노시마에서 발견되는 미스테리의 중심은 마도리 아키타카라는 젊은 남자의 가족에 얽힌 이야기이고, 마유와 아키타카가 가까워지면서 밝혀지는 마유의 과거는 나가노 루이라는 인물과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얽매여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면서 과거를 극복해낸다. 부수적인 사건으로 에노시마에 거주하는 다치카와 겐지와 할머니 후지코 사이에 있었던 일도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단순한 구성이고,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헷갈릴 염려도 없다. 짧고 간결하다. 여행지에 들고 가 읽고 오기 좋은 책.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쪽이 더 평이 좋은 것 같던데,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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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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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잘 쓴 오락소설. ‘살아남기‘와 ‘그럼에도 인간성을 지켜내기‘라는 주제는 전통 있는 주제다. 고전문학에서는 그 배경이 전쟁이었다면 최근에는 가상의 무대인 경우가 많을 뿐... 설정은 <배틀로얄>과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메이즈러너>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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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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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을 읽은 건 오랜만이다. 일본어를 번역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을 썩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하루키와 에쿠니 가오리가 별로라는 이유로... 뭐 이런저런 이유로 굳이 일본소설을 찾아 읽지 않게 됐다.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와 아사다 지로는 좋아했었다. DJDJ가 하도 하루키를 칭찬하니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 책도 빨간책방에서 소개하지 않았다면 읽게 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은행에서 1억 엔을 횡령하고 해외로 도주한 리카,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 유코, 전 남자친구 가즈키, 전업주부 시절에 사귄 친구 아키. 이 네 명의 시점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리카의 횡령 사건의 전모이고, 리카의 지인들은 리카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횡령 사건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주인공은 리카가 아니다. '종이달'이 상징하는 바이기도 한 '돈'이다. 사진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 사진관에서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 사진을 찍곤 했다고 하니, '종이달'이란 가짜로 만들어 낸 행복을 의미하기도 하고, 실재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되는 종이돈(화폐)을 의미하기도 한다. 리카의 횡령도 대부분 돈 자체보다는 돈을 예금하였다는 증서를 위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돈이 돈으로 느껴지지 않고 어떤 허상, 허상이므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 마르지 않는 샘처럼 느끼게 되는 리카의 비현실적 감각은 그나마 현금으로 이루어지던 소비가 신용카드 결제 방식으로 바뀌면서 더욱 강화된다. 리카의 무모한 사치는 가속화된다. 이 부분에서 리카의 행위는 단지 개인의 부정을 넘어서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비극으로 확대된다.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萬能感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는 죄책감도 불안감도 전혀 느끼지 않고, 인적 없는 플랫폼에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만능감의 쾌락에 잠겼다.  -181쪽
"불꽃 너머에 달이 있어요." 고타가 불쑥 말했다. 정말로 깎은 손톱처럼 가는 달이 걸려 있었다. 불꽃이 떠오르면 그것은 사라지고, 불꽃의 빛이 빨려들 듯이 사라지면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 350쪽

칼로 살짝 도려낸 듯한 가느다란 달이 걸려 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달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391쪽

 

 실상 이 소설에서 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돈의 힘, 돈의 맛이다.

 고타는 자신이 먼저 뭘 사달라거나 해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자신은 돈 때문에 리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타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리카에게 돈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얼마를 쓰든 돈은 무한히 나온다고 여긴다. 쥐뿔도 없는 백수 신세인 고타가 호텔 스위트룸을 자연스럽게 즐기고 또래의 식당 종업원에게 파라솔 위치를 바꿔달라고 지시하며(의자를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도) 무의식 중에 우월감을 표시하는 장면은 씁쓸하다. 고타는 돈의 힘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갇혀 있다. 결국에는 그곳에서 나가는 길을 택한다.

 유코는 어떤가? 유코는 과도하게 돈을 아낌으로써 오히려 돈에 속박당한다. 근검절약으로 의기투합했던 남편마저 지치게 할 만큼. 그리고 유코의 딸은 친구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갖고 싶은 나머지 도둑질을 저지르게 된다.

 아키는 반대로 쇼핑으로 과소비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인물이다. 사치로 인해 이혼을 당했으나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 이혼 후 전 남편과 살고 있는 딸에게 비싼 물건을 선물해준 대가로 딸로부터 애정이 아닌 지갑 취급을 받게 된다.

 가즈키의 아내인 마키코는 매우 부유했으나 가세가 기운 집안 출신으로, 결혼 후 한동안은 소박한 생활에 만족했지만 아이들이 커 나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유코와 아키, 마키코는 모두 리카의 또다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카도 얼마든지 저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고, 저들도 얼마든지 리카처럼 될 수 있었다.

 어쨌든 모든 인물의 공통점은 돈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349쪽

 일정 선을 넘어서면 돈이 덩어리로 느껴진다는 리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한마디로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억 단위의 돈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 그건 채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선을 넘어서면 지극히 뻔뻔해지는 채무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책을 보는 내내 가장 싫었던 인물은 리카의 남편이다. 언뜻 보면 열심히 일하고 아내가 집안일을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불평하지 않는 온화한 남편 같지만, 실은 아내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쫌생이에,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친밀함이 전혀 없는 목석이다. 엄청나게 가부장적이다. 아이를 갖자고 해놓고 배란일이라며 다가오는 리카를 무안주기나 하고.. 아니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러니 아무리 불륜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하여도 리카의 이 독백을 보며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카는 인정했다. 그렇다, 줄곧 기다렸다. 줄곧 이렇게 애무받고 싶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아름다운 것을 어루만지듯이 이렇게 만져주길 바랐다. 줄곧 기다렸다. 줄곧.  -179쪽

 

 리카는 해외로 도망쳐 이대로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고, 평생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과 만능감을 느끼지만, 곧 다시 절망에 빠진다. 여전히 자신은 스스로 친 덫에 걸려 있다.

리카는 여권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매달리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예전에 사랑한 남자가 했던 것과 같은 말을.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406쪽

 

 리카가 아닌 아키의 이야기로 소설이 끝맺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건 어쩌면 희망의 제시가 아닐까. 리카는 화려하게 죄를 짓고 도피한 끝에야 자신이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임을,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지만, 아키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봄으로써 죄를 짓기 전에 사치라는 덫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낸다. 아키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돈에 휘둘리기 전, 한때는 순수했던 과거의 자신일까?

 

집을 나설 때는 완벽한 화장에 완벽한 코디네이트를 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 유리창 속에서 몹시 초라해 보였다. 엄마도 아내도 되지 못하고,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한심한 여자로 보였다. 아키는 은행 돈을 착복한 리카를 생각했다. 사건을 알고 난 뒤, 마치 그녀가 내 속에 살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키는 리카를 자주 떠올렸다. 리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리카도 역시 이런 식으로 무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돌아가자, 돌아가자, 생각하는 사이 눈물까지 났다. 어째서 눈물이, 생각하면서 아키는 뺨을 타고 턱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고 되뇌면서 필사적으로 걸었다.  -414쪽

 

리카는 겨우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학이며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몇 시 전철을 탔는지, 그런 세세한 사건 하나하나까지가 자신을 만들어온 거란 걸 이해했다. 나는 내 속의 일부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믿을 수 없는 부정을 태연히 되풀이할 때까지, 선도 악도 모순도 부조리도 모두 포함하여 나라는 전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모두 내팽개치고 도망친 지금 역시 더 멀리로 도망치려 하는, 도망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나도 역시 나 자신이라고.
가자, 이다음으로.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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