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6
노먼 요피 외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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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는 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군사적 보호의 핵심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원이 있는 곳이었다. 국가는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 체계였고,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의례, 행사, 물질문화가 도시의 진화와 함께 만들어졌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도시, 통치자, 노예, 불평등은 당연하며 영원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25


 케임브리지 세계사 6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II>는 세계 여러 곳에서 생겨난 도시라는 공간에 표현된 권력(power)과 권력 집중화의 정점 제국(帝國 Empire)을 다룬다. '도시'라는 특정되고 한정된 공간에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한정된 공간적, 물질조건으로 인해 이들은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연결되었다. 고대의 도시는 이렇게 태어났다.


 그렇지만, 이들 도시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는 왕의 세력이 강했던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보다 하부의 엘리트 층의 권한이 더 강했다. 어느 도시는 보다 더 크게 더 오래 번성했지만, 다른 도시는 얼마 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소멸되어갔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고대의 도시들 2>에서는 일차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결정하는 요소로 '자연(nature)'과 자연이 만들어낸 기후를 말한다. 농경 중심의 도시국가에서 자연조건은 결정적이었으며, 여기에 따라 권력 관계가 설정되었고, 권력관계는 도시의 형태를 규정했다. 


 지도자, 권력,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은 우루크의 아이콘이나 텍스트에서 상당히 두드러진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인더스 지역에서는 그런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p52)... 아마도 이들 지역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겠지만, 인더스 지역의 다양한 공동체에서 엘리트 계층의 권력 및 권위가 훨씬 폭넓게 분배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같은) 단일한 "왕권" 중심의 행정 체계가 인더스 지역에서는 끝내 형성되지 않았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53 


 인더스와 갠지스의 물리적 및 문화적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하나는 인더스 지역에서 넓게 펼쳐진 시공 경관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갠지스-야무나 평원의 도시가 밀집된 경관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소수의 몇몇 도시와 훨씬 더 많은 수의 소규모 정착지로 구성된 인더스의 시대는 700년에 불과했고,  그 뒤 인더스 전통은 쇠락하여 사라져버렸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66


 자연환경은 도시의 입지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도시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할 때에는 '전통'과 '건축'이 새로운 요소로 등장한다. 도시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라고 하는 이들 요소들은 의례(儀禮)를 만들어 내고, 의례는 정기적으로, 비정기적으로 공간속에서 재현되며 세대 내에서는 집단의 기억을 유지강화시키고 세대 간에는 전승되며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도시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카호키아의 몰락은 아마도 상당 부분 기억 작용(memory work)의 물질성(matceriality)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 작용의 물질성이란 물리적으로 표현된 문화의 근간을 말한다. 즉 모든 인류 문화는 (정치 제도, 정체성, 도시 구조 등등)는 기억 작용(사회적 기억을 드러내기 위한 물건의 생산, 공연, 의례, 혹은 기억의 제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뿌리를 기억 작용의 물질성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질성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혹은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256 


 공간의 목적은 도시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것은 도시 공간과 기념비적 건축물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분명 도시 공간의 감각적 차원도 존재했다. 도시의 물건, 도시의 물질적 특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험은 사람들마다 달랐다. 그들이 누구인지, 도시에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이해와 경험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도시 공간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도시에 알맞게 훈련되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세속적 감각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기념비적 기억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도시는 수많은 지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도시에서 익숙하게 길들여진 육체는 그것을 제2의 본성으로 받아들였다. 체화된 관념과 통치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정치적 권위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267


 도시가 내부적으로, 시간적으로 이같이 발달되었다면, 외부적으로 공간적으로의 확장은 제국(帝國)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만, 도시국가에서 도시가 왕국의 중심이었다면, 제국의 중심으로의 도약은 또다른 문제였다. 새로 병합된 지역의 중심으로도 자리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로서 아슈르, 니네베, 로마 등 제국의 수도는 새로운 신전(神殿) 건설로 끊임없이 건축되어야 했다.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공간적 확장을, 제국의 이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재건설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은 제국의 수도들은 끊임없이 바뀌었음을 <고대의 도시들 2>는 보여준다.


 도시국가(아슈르 Assur)에서 아시리아(Assyria)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주민의 생활에는 뚜렷한 변화가 생겨났고, 도시에는 왕국의 수도라는 성격이 부가되었다. 예전의 전통적인 수도 아슈르는 더 이상 왕국의 정부 소재지가 아니게 되었고, 몇몇 왕들이 아시리아 핵심 지대에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인구 압력이 높아졌고, 경제가 성장했으며, 안전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적 수요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못지않은 아시리아 왕들의 욕망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라이벌이었던 바빌론(BAbylon) 왕국을 규모나 화려함, 그리고 종교적 명성에서 능가하고자 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318


 제국의 도시들은 거대한 도시 계획으로 다른 도시들과 달리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광장, 시장, 도로, 정원, 놀이 공원, 성문, 아치 등은 기능적 역할뿐만 아니라 상징과 홍보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거대 규모의 인원이 종교 및 정치 행사에서, 상거래에서, 축제 혹은 여흥을 즐기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설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상업과 사회적 교류도 수도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활동을 위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도시의 우수성은 이미 기념비적 건축물과 세련된 예술 작품으로 충분히 과시되고 있었지만, 여기에 덧붙여 굉장히 넓고 인상적이며 잘 정비된 대중적 공간을 통해 도시의 위용은 더욱 빛났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잘 정돈된 도시 구획을 나누는 도로는 여느 도시보다 더 넓고 튼튼하게 건설되었다. 도로들은 궁전, 사원, 피라미드, 성문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대규모 행진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01


 제국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구성원을 함께 묶어내는 일이 아마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정복 당시에는 강제와 위협이 결정적 수단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그 무, 즉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성과 없이 오래 살아남을 제국은 없었다. 권력 중심부에서는 제국의 모든 구성원에게 신앙을 합법화 및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07


 <고대의 도시들 2>에서는 이처럼 도시의 탄생과 지속 유지, 발전과 쇠퇴에는 자연과 인간문화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합이 적절한 시대의 변화에 맞았을 때 도시는 번성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쇠퇴하고 사라졌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1975)는 '도전과 응전 challenge and response'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지만, 응답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기 다른 환경에 적절한 대응이 문명의 존망을 결정한 역사 속에서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

이 <국가 Politeia>에서 제기한 '최선의 정체(政體)'에 관한 논의를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상적인 정체가 있을까. 그런 이데아(Idea)가 아닌 오직 민의(民意)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이와 함께 우리가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중앙집권화'가 과연 정체의 발전형태인지에 대한 물음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정치요소들이 당시에는 일시적인 약속 또는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권(自然權, natural rights)으로 인정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한 답은 이후 역사를 통해 보다 상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기존 고고학에서 말하는 도시의 기준은(그리스 도시들만 예외로 하고) 다음과 같았다. (1) 화려한 궁전에 거주하고 제한된 세습 엘리트에 속한 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2) 중앙 통치 기구 혹은 강력한 종교 기관(국가 종교)이 존재해야 한다. (3) 엄격한 위계질서에 입각한 행정 체제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 고대 문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선입관이 형성된 첫 번째 이유는, 동양은 전제 군주의 횡포 아래 놓여 있었다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오랜 유산 때문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동양(East)은 강력하고 폭압적인 전제 군주나 성직자에 의해 통치된 "타자(other)"였던 것이다(p144)...  두 번째 이유는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투입된 고고학의 역사 때문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146

제니-제노에서는 국가와 유사한 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시가 형성되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명하복과 엘리트 주도의 정치 행위가 도시를 지배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왕, 사원, 궁궐 등을 볼 수 없었으며, 엘리트 계층조차 분명히 확인되지 않았다. 니제르강 중류 지역에서 기원전 제1천년기 말엽 및 그 이후 시기 도시의 정치/경제 조직은 수평 연결(heterarchical) 구조였다. 즉 집단별 정체성은 구분되었지만, 때로 서로 중첩되기도 했지만, 권위의 영역은 전적으로 상호 작용의 과정에 놓여 있었고, 왕과 백성의 수직적 위계질서나 일방적 정보의 유통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 P123

권력의 중심이 동시에 다원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의 대규모 협력과 조정이 필요한 활동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더스 지역에서 도시를 형성한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거대한 공공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노동력을 조율해야 했다. 그래서 방대한 규모의 도량형 표준 제체를 발달시켰다. 이를 통해 인더스 지역의 정착지들 사이에 경제적 교류가 가능해졌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상품이 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도시 공간은 성공적이었고, 도시의 주민은 조직 구조와 화해 조정 시스템을 만들어서 수백 년 동안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의 성공과 회복력은 오히려 경직된 조직과 관계의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 P154

도시라면 어디서나 상상력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전설과 전통과 제도를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계획할지는 상상력에 달려 있다. 상상력은 유형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무형의 과정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능력 범위 내에서 계획을 세우고, 경험을 하고, 상상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명백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도시의 지속성은 도시 설계에 영향을 받는다. - P281

주기적으로 조공 물품이 수도로 흘러들고, 그에 따라 의례와 정치적 과정을 통해 소비가 되면서 메소아메리카 전체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조공품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테노치티틀란 반경 400킬로미터 이내에서 움직이며 멕시코 평원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 때문에 아스테카의 배후지는 주식 작물과 부가 고갈되어 자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조공 체계를 따라 물품이 흘러드는 반대편 끝에서는 엄청난 수량의 다양한 물건이 멕시코 평원의 인구를 풍요롭게 했다. 이데올로기적 의례 과정을 통해 잉여 물품이 흡수되었고, 특히 사치스러운 의례와 축제의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품이 소비되었다. - P340

초기 도시의 성장과 규모, 왕궁의 출현과 고도로 계층화된 작업 구역 및 묘지 구역, 거대 구역을 둘러싼 성벽 등을 근거로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왕과 (국가 수도로서의) 도시의 거대한 권력을 설명하게 된다. 그러한 설명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왕의 권력이 경쟁 상대 없이 절대적이었다거나 그 권력을 통해 정부와 도시가 안정화되었다고 곧장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게다가 수명이 길지 않았던 도시들, 그리고 상나라 말기의 왕들이 배후지를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에 나서야 했던 일을 고려할 때 기원전 제2천년기 중국 도시의 정치 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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