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 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말이나 감회가 없었다기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_ 박경리, <토지 16> , p26/592


 토지문화 독서챌린지 31주차.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있다. 김두수의 협박담긴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홍이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행동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한다. 분열되는 자아. 그것이 홍이의 지금 모습이 아닐까. 홍이는 자신의 영원한 어머니 월선 앞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음을 말할 수 밖에 없는 홍이. 홍이는 소외되고 외로웠다. 하지만, 소외된 홍이의 침묵은 무(無)가 아닌 새로운 가능태(可能態)임을 우리는 읽을 수 있고 소망하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_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p17


 요컨대 우리는 발화되기 이전의 파롤과, 그것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있는 침묵의 배경을 고찰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이 없으면 파롤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파롤과 뒤얽혀 있는 침묵의 끈들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p51)... 표현하는 예술이 지니는 새로움은, 침묵하는 문화를 죽음과도 같은 순환에서 빠져 나오게 한다. 예술가는 숭배나 반항에 의해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재개하려고 한다. _ 메를리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p139/262


 침묵과 침묵의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말해질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발화행위 자체보다 행위가 속해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월선의 무덤가에서 말이 없는 홍이. 홍이의 모습은 단순한 감회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나온 또다른 발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는 홍이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처한 공통된 상황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_ 박경리, <토지 16> , p48/592


 조선인들은 모두 순간순간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과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果)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 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準軍服)인 카키 빛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하에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농민, 고기잡는 사람, 하급관리, 월급쟁이들 할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_ 박경리, <토지 16> , p184/496


 1930년대 후반, 태평양 전쟁 직전의 상황에 더할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던 시기에 모든 이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침묵의 세계는 결코 순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변혁이며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소외된 의식이 느끼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은 이제 새로운 도약의 동력이 된다. 이것이 <토지>에서 길상의 관음탱화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침묵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산산조각이 난 한 세계의 잔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잔해는 그것이 잔해인 까닭에 사람들을 무섭게 만든다. 때로 어떤 도시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거리의 소음 한 가운데에서 쓰러져 죽는다. 그럴 때는 마치 가로수 꼭대기에 아직 여기저기 앉아 있는 침묵의 조각들이 갑자기 죽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것 같다. 그 침묵의 잔해들이 죽은 자의 침묵에게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 같다. 한순간 그 도시는 정지하게 된다. 침묵의 잔해들은 이제 그 죽은 사람의 곁에 있으며 죽음의 틈을 통해서 그와 함께 죽음 속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죽은 자가 침묵의 마지막 잔해들을 동반한다. _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p212


 길상이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사실 서희의 경우는 외관상 분리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간도에서 돌아온 후 이십여 년 동안, 김환과 길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활동과 투쟁을 교묘히 엄폐해가면서 꾸준히 최씨 일문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앞뒤가 다른 가면을 쓰고서도 늘 앞면만 보여왔다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친일적 경향을 띠면서 회유의 손길을 뻗쳐놓을 필요가 있었고 요소요소, 상당히 광범위하게 호의(好意)의 통로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6> , p478/494


 개인 스스로가 끝내 도달하는 보편적인 모습이 '죽음'이라는 순수한 존재(das reine Sein, der Tod)이다. 이는 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자연의 결과로서, 의식의 행위는 아니다... 인간이 공동의 세계에서 누리는 죽음의 안식은 참다운 의미에서 자연에 속하는 것은 아니므로 자연이 죽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듯이 내세우는 교만함을 불식하고 죽음의 진실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 죽음을 당한 가족이 치러야 할 의식(儀式)의 참뜻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8


 길상도 홍이처럼 소외된 세계 속의 인물이다. 자신의 내면은 독립을 외치고 있지만, 감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부인 서희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의 주변은 친일(親日)의 세계다. 그 역시 내면의 목소리를 감추고 분열되고 소외된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다시 근원의 모습으로 돌아가 관음탱화(觀音幀畵)에 매진하는 것은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자아의 침묵이라는 언어행위는 아닐런지... 이번 독서챌린지에서는 전쟁에 끌려가는 민족의 불행이라는 보편적 상황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개별자들의 소외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승화로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글 속에서는 의미 작용이 조각상 속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집결되며, 어떤 것도 그 파롤의 유연성에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는 말하는 것이고, 회화의 목소리는 침묵의 목소리인 것이다. _ 메를리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p144/262


  정신의 첫번째 현실성은 종교의 개념, 다시 말하면 직접적이고 따라서 자연적인 종교이다. 여기서는 정신이 자기를 자연 그대로의 직접적인 형태를 띤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두번째 현실성은 자연적인 요소를 탈피한 자기의 형태 속에서 자기를 인지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곧 예술종교이다. 형태가 자기의 모습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의식이 대상을 창출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되었을 때 의식은 대상 속에서 자신의 행위와 자기를 직관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 현실성은 앞의 두 경우에 안겨져 있던 일면성을 제거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자기가 하나의 직접적 존재인 것 못지않게 직접성이 그대로 자기가 되어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47


 절대예술의 단계에 오면 정신은 예술을 넘어선 곳에서 더욱 고차적인 표현을 이루어내게 된다. 즉 자기로부터 태어난 인륜의 실체가 표현될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이 자기가 표현의 대상이 되고, 개념으로부터 자기를 낳을 뿐만 아니라 개념 그 자체를 형상화하여 개념과 제작된 예술작품이 서로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륜적 실체가 단지 현존하는 세계를 이루는 데 그치지 않고 순수한 자기의식 속으로 되돌려지게 될 때 이 자기의식은 개념을 등에 업고 활동하는 주체가 되며 여기에 힘입어서 대상으로서의 정신이 산출되기에 이른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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