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찾기 Recherche'에서 본질적인 것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鋪石) 안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 '찾기'는 단순히 추억해 내고자 하는 노력, 기억에 대한 탐색이 아니다. '찾기'는 '진리 verite 찾기'라는 표현에서처럼 그 말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한편 잃어버린 시간 le temps perdu은 단지 지나간 시간 le temps passe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낭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억이 찾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p2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내용을 '진리 찾기'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진리는 결코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기호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기호의 폭력이 난무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이것만큼 프루스트가 강조한 테마는 거의 없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外現的)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 sens 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마주침의 [속성인] 우연과 강요의 [속성인] 압력을 프루스트의 두 가지 근본적인 테마이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p4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리를 찾는 이는 누구인가? 들뢰즈는 사랑에 빠졌지만, 애인(알베르틴)의 거짓말로 고통받는 이가 진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교장, 공연장 등에서 수많은 기호들의 압력을 받으며 진리 찾기를 강요받는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았고, 나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그녀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날 떠난다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中 


 <누가> 진실을 찾는가?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가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가는 어던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친화성 affinite이나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선(善) 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게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들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p4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p238)...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p31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리 찾기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메제글리즈와 관념적인 게르망트. 이들은 배움의 두 측면이며, 주인공(혹은 화자)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배움을 펼친다는 것이 들뢰즈의 해석이다. 그리고, 진리 찾기의 방향은 미래로 향한다.


 이 책은 어떤 배움 apprentissage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다. 메제글리즈 Meseglise 쪽과 게르망트 Guermantes 쪽은 추억의 원천들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線)들이다. 그것은 수련 formation의 두 측면이다.(p22)... 이 배움은 배움의 목적들과 원리들을 통해서 [수단인] 기억을 넘어선다. '찾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放出 emettre)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p23)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p3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또한, 들뢰즈는 기호들의 세계에서 궁극적인 기호인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를 지망하는 주인공에게는 문학이 궁극적인 기호로 작용하며, 예술을 통해서만 진리는 비로소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깨달은] 그때부터,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먼저 거쳐 온]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감각적 기호들에 대해서 그렇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들은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한다.(p3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기호와 의미의 진정한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기호가 자신을 방출하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기호를 구성한다. 또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에게로 의미가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의미를 구성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최종적 결론 혹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시가 바로 본질이다.... 오로지 예술의 층위에서만 본질은 드러난다.(p68)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p15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그렇다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은 시간안에서 우리에게 인식되기에,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의 네 가지 시간 구조는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는 헛되이 보내버린 시간의 의미를 찾는 것. 예술을 통한 절대적인 시간의 획득. 이것을 들뢰즈는 배움의 성과로 해석한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섞여 버린다. 바로 이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구별은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구별이다. 되찾은 시간의 진실 못지 않게 잃어버린 시간의 진실도 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는 각기 저마다의 고유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 시간의 네 구조를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다.(p42)...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p4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뿐 아니라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고계의 기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함축한다. 또 사랑의 기호는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감싸고 있다. 감각적 기호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되찾게 해주며, 그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마지막으로 에술의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 이 되찾은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다.(p5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시간이란 이미 펼쳐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시간이 그에 맞추어 전개될 서로 구별되는 차원들은 아직 없으며 또 시간이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리듬들에 맞추어 분포될 서로 분리된 계열들조차 아직은 없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은 영원과 동일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p79)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p19)...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확실성이라는 착한 천사가 내 주위 모든 것을 고정해 나를 내 방 이불 아래 갖다 눕혔고, 어둠 속에서 내 옷장, 책상, 벽난로, 길가 쪽 창문, 두 문을 대충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p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들뢰즈의 주장을 요약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찾는 배움의 과정으로, 주인공이 맞게 되는 수많은 기호 중 예술이라는 궁극의 기호를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들뢰즈에게 (절대적) 시간은 진실이 표현되는 다른 차원이며, 진실 찾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추론은, 단지 '되찾은 시간'을 비의지적인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의 경험과 혼동하는 해석,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비의지적인 기억의 단편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에는 결여되어 있는 풍성함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 부여하는 기나긴 각성의 체득을 무시하는 해석들을 무너트릴 뿐이다... 예술 작품의 초시간적 extra-temporel인 차원을 발견하는 것은 기호의 체득에 비해 아주 독특한 경험이 된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비의지적인 기억이나 기호의 체득과 동일시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층위의 경험과 화자가 거의 삼천 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의 끝에서야 뒤늦게 베일을 벗기는 전대미문의 경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바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 말할 수 있게 된다.(p273) <시간과 이야기2> 中


 이에 반해,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 ~ 2005)는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e'cit>에서 들뢰즈와 의견을 달리한다. 배움의 끝에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들뢰즈의 의견과는 달리, 리쾨르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 주인공과 화자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되찾은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라는, 적어도 두 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세속적이고, 애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미적인 모험들을 그것이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 이야기한다. 여기서 언술 행위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결말을 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투사하는 "과거 속에서의 미래"라는 형태가 생겨났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화자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화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에 의해 이야기되는 경험에 되찾은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의미를 두게 한다는 것이다.(p279) <시간과 이야기2> 中


 초시간적 존재(l'etre extra-temporle)로 주인공을 내려다 보고 있는 화자,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 이들이 '되찾은 시간'에서 '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영원성이 시간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리쾨르는 해석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절대적 현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지게 되는 유년기의 추억은 바로 비몽사몽의 과거 속에 삽입되는 것이다. 그 추억들은 마들렌 과자의 경험이라는 독특한 삽화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삽화는 그 자체가 표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추억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p281)... 우리는 의지적인 기억의 취약함을 선언하고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을 우연에 맡기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 이 삽화의 표면에서 이면으로 옮겨가게 된다.(p282)... 화자가 유보시키고 있는 표지는 <되찾은 시간>에서 결말을 알고 다시 책을 읽을 때 그 의미와 효력을 갖게 된다.(p283) <시간과 이야기2> 中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9)...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무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에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되찾은 시간이라는 말은 때로는 초시간적인 것을, 때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로지 글을 쓰겠다는 결정만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가 갖는 이원성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p300)... 글을 쓰겠다는 결정은 이처럼 근원적 전망에서 비롯된 초시간적인 것을, 잃어버린 시간이 되살아나는 시간성으로 옮긴다는 효력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되찾은 시간이 갖는 한 가지 의미 작용에서 다른 의미 작용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p301) <시간과 이야기2> 中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므로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p84)... 영원히 죽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 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리쾨르의 주장을 요약하면, 화자와 주인공의 서로 다른 층위의 경험은 되찾은 시간 안에서 예술(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만나게 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처음부터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받게 된다. 초시간의 시간화. 결국,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실찾기'로 '근원적인 절대적 시간'을바라봤다면, 리쾨르는 '화자와 주인공의 시간속에서의 통합'으로 해석하며 '초월적 시간'의 '시간화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들뢰즈의 시간방향이 미래로 지향한다면, 리쾨르의 시간방향은 되찾은 시간의 이행을 의미하기에 과거로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진실찾기 끝에 도달한 결론인 반면, 리쾨르에게 (되찾은) 시간은 진실찾기의 출발점이 된다. 알파와 오메가. 
















이들의 해석은 이처럼 차이가 있음에도, 새로운 2020년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의 해석이 모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 삶을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의미 찾기 과정으로 본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고, 보내고 있으며, 맞이한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삶의 의미는 우리와 주변의 상황들에 의해 기호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각각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들뢰즈의 관점이라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며 삶을 재해석하는 것이 리쾨르의 방식이 아닐까.


 2019년과 그 이전의 시간들을 매 순간 정리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삶의 끝에서 바라본 모습과 의미는 또 다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9년을 보내면서 아쉬운 점이 많은 한 해로 기억하겠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에는 2019년이 내 인생의 분기점으로 기억될런지. 한 해를 보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관점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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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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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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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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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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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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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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