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근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기진맥진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팀장이 나간 뒤로 팀에 큰 공백이 생겼다. 이 때문에 결정을 내가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그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전하는 말이 오해가 되지 않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어려움을 갖게 한다.

몇 번이나 그만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할 정도로 최근에는 어려움이 컸다.

최근 들어 두통이 잦았고 도무지 안 되겠어서 오늘 휴가를 내고 쉬고 있다.

하루 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밀린 리뷰도 쓰고 가벼운 책을 읽고 그랬다. 참! 달리기도 했다.


걷기와 달리기는 차원이 다른 운동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1분 뛰는 것과 1분 30초를 뛰는 것이 왜 이리 간격이 큰 것인지... 이제 4번째 진행했는데 하다가 막판에 좌절할 뻔했다. 내 체력이 얼마나 저질인지 새삼 느꼈다. 

어쨌든 체력이 되어야 머리도 굴리고 책도 읽고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어제 북플에 접속했다가 친구분들의 '인생네권'을 확인하고 나도 부랴부랴 했다.

좀 고민하기는 했지만 더 고민한다고 크게 달라질 목록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곧장 생각나는 책으로 꼽았다. 



<하워드 진, 역사의 힘>은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머리 두들겨 맞은 듯 강한 인상을 받았던 책이다. 아무래도 내 성정과 잘 맞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후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실제로 만나지 못했음이 그리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나는 언젠가 그 분의 강연을 꼭 한 번 경험하고 싶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책은 그래도 남아 있으니 계속 읽어봐야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은 한국 전쟁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그의 저작 이전과 이후가 나뉘어진다고 할 정도로 국내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내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특히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사실 박명림 선생님의 책이나 정병준 선생님 등의 책도 인상 깊게 읽었지만 이 책의 비중을 더 높게 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방 일기> 시리즈는 김기협 선생님의 저작을 본격적으로 파게 된 계기였다. 민족주의적 시각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균형 잡힌 역사 서술과 좌우파를 넘어선 시각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재밌고 흡입력이 좋다. 1권을 읽다 보면 2권을 읽고, 이후 10권까지 쭉 달리게 된다. 또 이 책 덕분에 내가 해방 후 3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에 인생책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어른이 아이에게 이야기 식으로 한국사를 재밌게 들려주는 방식이라 잘 읽히고 친근하다. 이 책을 꼽은 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존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 시기 앞선 세대와는 달리 주류적 시각이 아니라 역사에서 숨은 민중의 목소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셨고 그랬기 때문인지 민중사가 강세를 이룬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다변화되었지만. 그 중 18권을 고른 것은 그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철쭉이 피고 알록달록해진 세상을 보는 것이 그나마 즐거운 요즘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쟝쟝 2024-04-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역덕력 인정합니다!
팀장님의 공백에 찾아오는 두통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 회사야, 그 팀장 다시 잡아와라!!!
달릴 때는 바닥을 조심조심! 파인곳이나 느닷없이 등장하는 계단을 특히 조심하시구요 🏃🏽‍♀️🏃🏽‍♀️🏃🏽‍♀️달리세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2   좋아요 1 | URL
팀장 빨리 뽑아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새로 뽑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ㅠㅠ
안 그래도 달릴 때 계단 있는 곳은 피하고 트랙 있는 운동장이나 평평한 산책로에서 하고 있어요. 원래 발목이 안 좋았어서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달립니다. 쟝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4-04-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은 역사!
역시 역사!!
네권선택을 고민하는 시간도 재미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5 06:23   좋아요 1 | URL
ㅋㅋ 네. 역시 어쩔 수 없는 역사 덕후인가봅니다^^; 저도 선택을 고민할 때만큼 설레고 즐거울 때가 없었어요. 알라딘 덕분에 다양한 분들의 선택지를 볼 수 있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잠자냥 2024-04-2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면서 꽃 사진 찍은 거면 인정!! ㅋㅋㅋㅋ (뭘?! ㅋㅋㅋㅋ)
아 진짜 역적 아니고 역덕!!

거리의화가 2024-04-25 06: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체력이 늘어 달리면서 꽃 사진을 찍을 정도가 되면 좋겠네요. 역적 아니고 역덕이라서 다행입니다!ㅎㅎ

다락방 2024-04-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거리의화가 님 진짜 넘나 멋집니다!! 특히 역사책이 인생 네권 이라니! 😍
달리기 시작하셨다니 정말 좋고요 우리 함께 열심히 달려봅시다. 저는 오늘 열한번째 달리기 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4-04-25 06:27   좋아요 0 | URL
선택할 때 다른 분야의 책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났어요. 떠오른 책을 바로 고른지라!ㅋㅋ 늘 마음 속에 자리한 책을 고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다락방 님 11번까지 어떻게 가셨나요ㅠㅠ 저 4번인데 이미 힘듭니다!ㅋㅋ 언어도, 달리기도 화이팅이에요!

은하수 2024-04-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역덕으로 인정합니다.
하워드 진 저도 꼭 만나고 싶은 분이었는데.. 나중에 천국에서라도요~~^^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라니 멋집니다. 두통이 날아갔을 듯 해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9   좋아요 1 | URL
하워드 진 강연을 실제로 듣고 얼굴을 본 독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운일까 생각 많이 했었어요. 천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뵐 수 있다면 좋겠죠!ㅎㅎ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 정말 할 만합니다. 달릴 때는 숨차서 고통이지만ㅋㅋ 그래도 달리는 순간은 잡 생각 달아나서 좋더라구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4-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기도 하시다니, 가끔 달리기도 해야 한다지만 저는 늘 걷기만 할까 합니다 빨리 걸으면 되죠 잘 쉬셨네요 하루라 할지라도 그런 날 있으면 좀 더 낫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25 06:30   좋아요 0 | URL
저도 늘 걷기만 하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달리면서 생각이 그 순간은 달아나서 좋더군요.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맛이 꽤나 좋습니다. 하루 쉬니 좀 낫네요. 오늘은 어떤 일이 기다릴지^^; 희선님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자목련 2024-04-2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사서는 화가 님으로 통한다!
그나저나 업무로 힘드셔서 걱정이네요.
달리기, 산책, 그리고 책과 꽃들이 화가 님께 평안을 찾아주기를 바라요.
꽃 사진과 하늘 넘 예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8 18:22   좋아요 0 | URL
요 근래 들어서는 일요일 오전만 되면 이미 한숨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시간이 약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날이 포근해져서 철쭉이 절정을 지난 것 같더군요. 오늘은 덥기는 했는데 미세먼지도 없고 날 좋아서 걷기 참 좋았습니다. 자목련님 남은 4월 행복하게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4-2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쪽 두권은 저도 읽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인생책 4권에 포함시키는 화가님 포스는 못따라가겠네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4-04-28 18:23   좋아요 1 | URL
역시 그레이스님 2권 읽으셨군요. 멋지십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독서력이 짧아서일 것 같아요. 편중된 독서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894년 6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확대되자, 청과 일본 양국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간주하면서 내정에 직접 개입하려고 했다. 때마침 초토사 홍계훈 휘하의 장위영 병정들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6월 3일 밤 조선 정부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민영준의 주도 아래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을 둘러싸고 청과 군사적 충돌의 위기를 겪었지만, 양국은 톈진조약을 맺고 청과 외교적으로 타협했다. 청이 원병을 파견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은 ‘동학란’ 속에서 자국 거류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제물포조약과 톈진조약을 파병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두 조약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호 통지한다는 절차상 규정에 불과했을 뿐,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 시민의 한국사2 P53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케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26~27



교과서에서 청일전쟁을 다루거나 한국 근대사에서 청일전쟁을 다룰 때 서술 시각은 대체로 위와 같다. 동학농민전쟁을 필두로 전으로는 배경을, 후로는 전개 과정부터 결과까지 일사천리로 훓치듯 지나간다. 그나마 <시민의 한국사2>에서는 풍도 해전, 평양 전투, 황해 해전 등 주요 전투가 포함된 지도와 간단한 전개를 언급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알기는 어렵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피해가 컸다’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선 출병을 결정했는지 배경은 짐작할 수 있지만 누가 결정했고 어떤 과정에 의해서 결정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당시 천황가와 일본 내각 다수는 조선 출병이 시기상조라 보았다. 그러나 1894년 6월 2일 참모본부 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가 외무대신 무쓰의 관저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하야시, 무쓰, 가와카미 세 사람이 출병에 동의했고 다음 날 내각회의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장에 허락을 받아 출병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일본은 왕궁을 점령하고 일본의 뜻을 따르도록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이틀 후에는 인천 근처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과 교전에 들어간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개전의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부 내부에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주도한 것은 외무장관 무쯔 무네미쯔였다. 

무쓰 무네미쯔는 능력을 평가받아 외무성에는 지금도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청일전쟁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진 중국 뤼슌의 기념관에는 초상이 악인으로 묘사돼 있다. -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P49


무쓰는 7월 19일 외부 내각 의견에 따라 오토리 공사에게 조선 왕궁과 서울 포위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나 오토리는 군부의 의견에 동조하여 결행을 감행했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을 읽으며 놀란 부분은 일본이 청일 전쟁을 위한 결정적인 명분을 찾고 있었을 뿐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성 내외 수색과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도 차단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1893년 조선에 입국해 신분을 숨긴 채 비밀리에 조선과 청국을 정탐하며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만나기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청일전쟁에서 조선지도를 만들어 배포한다. 6월 5일 천황 직속의 통수기관인 전시 대본영을 설치된 것은 경복궁 점령 전 이미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청은 직예제독 예지차오,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기명제독 장치캉, 유격 판진산을 리더로 하여 부대를 구성했다. 추가로 웨이루쿠이, 마위쿤, 쭤바오구이 등이 인솔하는 군사를 평양에 파견하여 아산과 평양 일대에 약 14,000여 명의 청군이 주둔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의 전황을 풍도해전->평양 함락->황해 해전->뤼순다롄 전투->웨이하이 전투->시모노세키조약의 6단계로 보고 있다. 

출동 초기 청군은 동학농민군 토벌보다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데 치중했다. 게다가 청국군은 전쟁 초반 승기를 잡아야 했음에도 안일하게 대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예지차오는 리훙장에게 패주 과정에서 청주, 충주, 금화를 경유해서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싸워 승리했다고 보고했으나 날조였고 실제로 전투를 하지도 않은채 평양으로 도망쳤다. 성환과 아산 전투의 패배에도 전면전이 아닌 완만한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리훙장은 전략적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는 판단 미스였고 반면 일본군은 조선에 계속 증파되면서 평양 전투를 제대로 준비했다. 


청일전쟁에서 조선인들의 등장은 일반인들보다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민병들의 기술에 주로 치우쳐져 있었다고 본다. 이는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비중을 상대적으로 높이 가져가는 영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하여 국내에서는 이이화 선생님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많은 대중서가 나와 있기도 하여 그 전개 과정과 영향,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그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관군은 일본군 사이사이에서 총을 쏘아 댔다. 농민군은 끝내 우금재 너머 언덕으로 물러나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를 피했다. 이때 관군 수십 명이 산을 내려가 작은 언덕배기를 장애물로 삼고 총을 쏘았다. 패색이 짙어진 농민군은 보루를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과 경리청군 50여 명은 달아나는 농민군을 남쪽으로 십여 리를 추격했다. 이 우금재의 싸움에서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히 메웠다"고 할 만큼 농민군은 크게 패배했다. 11일, 능치를 지키던 관군은 빼앗은 농민군의 옷과 수건을 착용해 농민군 모습으로 위장했다. 관군은 산을 기어올라 농민군에 근접했다. 농민군은 위장한 관군을 동료로 오인하였는데 위장 관군이 근접해서 불의에 총을 쏘아 댔다. 기습을 받은 농민군은 놀라 흩어졌다. 관군은 대포를 노획했고 많은 연환을 빼앗았다. 이 능치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은 12일부터 점차 흩어져 갔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276~277


"대국이 왜눔한테 항복을 했이니, 그게 망조라 말이다. 왜눔들이 개미떼맨쿠로 기어올 긴데, 벌써 항구에는 왜놈들 장사치들이 설친다 카는데, 허수애비 같은 임금 있으나 마나, 총포 든 놈이 제일 아니가." - 토지 1권 P123


또한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일본인 선부의 고용, 파견 기준과 조건, 서약서 제출 등에 관한 기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 기준과 조건은 예비,후비의 적에 있는 자 혹은 징병 당첨자, 신체 강건한 자, 연령은 21세 이상 45세까지, 주벽이 없는 자, 절도 혹은 도박범의 실결을 받지 않은 자, 폭행사건으로 형을 받지 않은 자로 한정했다. 공무상 다치거나 유행병에 걸린 자는 급료를 감하고(?), 스스로 건강에 주의하지 않아 걸리는 질환 또는 술에 취해 광기를 부리거나 싸움으로 얻은 외상은 휴업 중 일급 2분의 1 이내로 급료를 감할 것이라는 사항도 있다. 공무상 다치는데 급료를 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선발 기준도 꽤나 엄격한 듯 싶다. 이들은 서약서도 제출해야 했는데 한마디로 ‘규칙에 절대 복종하며 (왠만하면) 불만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군량과 말먹이 등 대부분이 현지에서 징발 형태로 조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군 뿐 아니라 청군도 마찬가지다(청은 재조지은을 이름 삼아 조정에 요구받으면서도 백성들을 못살게 군 것이 더 괘씸하기도 하다).  

평양에 주둔한 청군은 약탈 수준으로 징발을 자행했다. 베이징 정부는 행군 중 불법을 자행한 병사에게 군법을 따르게 하고 법률과 기강을 엄히 할 것을 지시했고 소란한 민심을 안정시켜 후환을 막게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잘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전쟁의 승리를 미화하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언론도 큰 몫을 담당했다. 당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 등 일본에 순회 전시되었고 이 중 일부는 물품이 현재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아니 근데 부녀자의 의복은 왜?). 


청일전쟁과 관련한 현재의 일본 사회과 교과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전쟁의 원인을 동학농민전쟁에서 구하는 데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동학난이라 불리는 농민폭동”이라며 단순한 반란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 청일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선이 중국에 출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중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농민군의 활동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은 부각시키지만 청일 간섭군에 농민들이 저항했으며 일본군이 이들을 철저히 진압했다는 사실은 생략되어 있다. 또 일본이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전쟁을 정당화했던 과거의 논리에 대해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셋째, 청일전쟁의 결과에 대해 고대부터 지속되었던 동아시아 중화질서는 이로부터 붕괴되었고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조선을 피동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근대 시기 일본 지식인 대다수는 청일전쟁을 ‘문명전쟁’, 러일전쟁을 ‘인종전쟁’으로 인식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러한 인식은 공유되고 있다. - P340~341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지신보>에 <뤼순의 학살은 터무니없는 떠도는 소문이다>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인했다.


우리 뤼순의 대승에 대해 외국인 중에는 그 살육이 많다는 것을 듣고 왕왕 말을 만드는 자가 있다. 승리를 틈타 중국인들을 도륙한다는 한 가지 일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면할 수 없다. 이 참혹한 최후의 거동은 모두 전승의 명예를 말살하기에 족하다는 논평으로 한탄스럽다. … 뤼순 시가의 죽은 자 중에는 무고한 인민이 다수 있다는 것은 모두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인민을 살육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은 그 터무니없음을 경계함과 동시에 금후에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고려 없이 살육을 행해 조금도 차이 없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 P580~581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런 정서를 공유했을 것이다. 


청일 전쟁은 한반도를 넘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조선의 인부가 일본인 인부와 함께 압록강을 넘어 동원되었다고 한다. “후방에서 양곡을 취하여 전방인 청국 안둥현으로 전송했다. … 대체로 황군의 운이 우세하니 한인 인부의 위풍도 한결같다. …” 한 육군 포병 소좌의 기록을 통해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이런 식으로 끌려갔을지 상상하게 된다. 황군의 운이 좋으면 한인 인부의 위풍이 그에 따르는 것이라니 이 인식도 문제가 심각함을 느끼게 한다. 


양국 해군은 1894년 9월 17일 황해 해전을 벌인다. 이 때 기함 사령관이 상관인 제독 정여창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청의 해군이 피그덕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포격으로 함교가 무너져 정여창과 영국인 고문이 부상을 당하면서 청의 지휘 라인에 공백이 생겼다. 이에 청군은 웨이하이로 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황해 해전은 청의 뼈아픈 손실이 되었을 것이다. 


웨이하이웨이로 불리던 19세기, 이곳에는 청왕조의 북동부 바다를 지키는 북양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포대가 설치되고, 류꿍따오에 제독의 청사가 세워졌다. 1880년대 무렵까지는 동양의 제1의 함대라고 불렸지만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일본군이 이 바다를 습격하자 북양함대는 투항했다.  -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P54


첫째, 이 전쟁은 민족주의를 통해 정부와 국민이 하나의 목표로 굳게 단결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던 나라와 정부와 백성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따로 놀았던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나선 일본은 거국적인 역량을 총동원한 반면 청의 일반 백성들은 전쟁과는 거의 동떨어져 있었으며 조정은 거의 전적으로 북양 함대와 이홍장의 회군에게만 의지했다. 둘째, 청은 명확한 지휘 체계가 서 있지 않아서 명령이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거국적인 동원도 없었다. 총리아문, 지방 당국, 무책임한 청류파 관료들의 상충된 건의들은 청조의 우유부단함만 초래했을 뿐이다. 조선의 외교와 군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이홍장은 정책 결정권이 없었으며 자기 관할 밖에 있는 전함과 군대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다. 셋째, 조정과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는 처음부터 청의 노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태후가 여름 별궁인 이화원 건축을위해 해군 기금에서 수백만 냥을 전용한 것, 그녀의 환관 총애, 사회전반의 도덕성 타락도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이홍장이 정직성보다는 개인적 충성심과 복종심에 따라 인선한 북양 함대의 사령부에서 특히부패가 만연했다. 많은 군관들이 태감 이연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으며 공금을 빼돌려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는 이들의 불법 행위를 비호해주었다.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북양 함대는 사실상 약체였다. 이홍장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먼저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홍장의 외교는 국제 정치에 대한 이해 결여, 개인의 협상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구태의연한 이이제이 정책에의 의존 등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의 중재가무산되자 이홍장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구했으나 양쪽 다 일본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었다. - <캠브리리 중국사> P188~189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양국 간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은 상당 부분 한반도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의 물자와 인부들, 병사들, 무고한 백성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원들은 세월호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라고 불렀다. 청해진 해운은 일본에서 18년 이상 운항한 나미노우에호를 구입해 불법으로 증개축했다. 증개축이 반복되면서 '승인이 나지 않은 도면'으로 증개축이 이어졌다. 증개축으로 배의 무게가 239t 늘었고, 배가 기울었을 때 평형상태로 되돌아오려는 복원력은 낮아졌다. 한국선급이 승인한 최대 화물 적재량은 1077t인데, 그날 배에는 화물 2214t이 실려 있었다(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이윤을 위한 과적은 상습적이었다. 부실하게 고박한 화물이 쏠리면서 복원성이 상실되었다. 배 한 구역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구역은 침수되지 않도록 수밀문, 맨홀을 닫고 운행했어야 하는데 세월호 지하층의 수밀문, 맨홀은 모두 열려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이를 방치한 채 배를 떠났다. 시뮬레이션 결과, 닫혀 있었더라면 배는 더 오래 떠 있었을 것으로 나타났다. 해경 지휘부는 현장 출동 책임자에게 사진, 영상 송출을 계속 요구했다. 생사의 순간이 허비되었다. 수많은 부주의와 방관이 쌓였고, 배가 침몰했다. 304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아픈 기억이다. - P3


세월호 참사는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침에 출근했던 가족이 무사히 퇴근하는 것, 여행을 갔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어요. (...) - P15




꼭 10년이 흘렀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이 슬픔을 견뎠을까. 나는 지금도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하면 무너지곤 하는데 말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지난 10년 간의 기록을 담은 책을 읽었다.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참사의 역사를 복기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사 초기 정부의 기능이 불능인 상황에서 자진해서 내려간 민간 잠수사들, 유가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봉사하러 간 택시 기사님들을 비롯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굴러갔을지 지금은 그저 그나마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초기 정부의 막장 대응, 불통과 관련한 가족들의 인터뷰를 듣자니 그 때가 떠올라 분노가 일었다.  


2017년 4월 18일 세월호 선체의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세월호 선내 4층에서 단원고 조은화 학생이, 18일에는 허다윤 학생이, 22일에는 이영숙 씨가 수습되었다. (그전인 5월 5일에는 세월호 침몰 해역 수중 수색에서 고창석 단원고 교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8년 5월 10일 세월호가 바로 세워졌다. - P69

 

실종자 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3년 간을 기다렸다. 3년이라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간이다. 


그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아이를 찾기 전과 찾고 나서의 표정을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완전히 달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요. 얼굴이 새카맣다가 하얘져요, 진짜로. 마치 살아 있는 애를 찾은 것 같은 얼굴이에요. 처음에는 진짜 이해하지 못했어. 완전히 얼굴이 피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얼굴이 빠짝 마르고 시커메지고 표정도 하나도 없던 사람이, 뼛조각이라도 아이를 찾는 순간 살아 있는 자식을 만난 것 같은 얼굴이 돼요. 그러다가 갑자기 슬픈 얼굴이 돼요. 자기 곁에 아직도 못 찾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기쁜데 미안한 거죠. (이승용) 


그마저도 세월호 선체 수색으로 9명의 실종자 중 4명은 돌아왔지만 5명은 영영 찾지 못했다. 뼛조각이라도 찾겠다는 가족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가 뭍으로 나오고 세워지던 날이 기억난다. 흉물 같던 배는 마치 너덜너덜해진 피부 같아 보였다. 세월의 흔적만큼 배도 그렇게 변해버렸구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이를 잃고 황망해진 부모와 형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진상 규명을 위해 일어섰고 오래도록 지난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 힘은 분명 아이를 잃은 슬픔과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역량의 강화, 투쟁에 대한 승리의 경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부모들의 나이는 평균 사오십 대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시대를 살아왔으며 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다. 정치 활동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일지라도, 감금이나 고문 같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던 시대의 공포에 시달렸던 세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보통신기술과 네트워크 매체의 발달 역시 이들의 각성과 실천을 자극했다. 가족대책위라는 공동체로 모여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공유했으며 수많은 시민과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새로운 특징을 지닌 유가족의 출현을 촉진했다. 한계 지어진 틀 안의 존재를 넘어 사유하고 증언하며 주장하고 실천하는 주체의 등장이었다. - P238~239


난관 끝에 탄생한 세월호 특조위는 여당과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종료됐다. 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허망하게 갔는지 그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는지… 

’세월호특조위에 여당과 야당이 위원을 추천하는데 여당인 새누리당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사람을 추천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게 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새누리당에 김재원 의원이 ’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여론이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상상이상이었어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위원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짜 하나하나 다 방해했어요. 공무원 파견을 안 하거나, 아예 뽑지를 않거나 예산을 덜 주거나 제때 안 주고, 자료도 부실하게 주고. 무엇 하나 특조위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박주민) - P150


세월호참사와 관련되어 법적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공직자는 123정 김경일 정장 단 한 명뿐이었다. 경찰, 국정원, 검찰의 적폐청산 기구들은 ‘세월호 참사는 사참위에서 다룰 사안’이라며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특조위와 마찬가지로 사참위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지 못했다. 세월호 5주기인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역시나 사참위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 P167


세월호 선체 수색 종료 이후에도 참사와 관련하여 소식들이 이어졌지만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안산에 합동분향소가 철거되었지만 대신 가족협의회와 안산 시민들이 연대하여 4.16생명안전공원을 통해 기억과 추모의 공간을 추진 중이다. 2021년 2월 마침내 4.16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가 시작되었는데 착공 예정 공사비가 500억 원을 넘으면서 사업 적정성 검토를 추가 진행하며 현재 착공 일정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상태다. 끝까지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진도의 팽목항에 있던 임시 시설물들도 철거될 뻔 했으나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이 가족대기실과 희생자 분향소로 쓰이던 낡은 컨테이너에 ‘팽목기억관’을 만들었다.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을 운영하고 합창, 공방, 연극, 목공, 꽃누르미 공예, 봉사 등을 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그들은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실 이 분들도 살아나가야 하는데 계속 피해자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우습지 않나. 웃으면 웃어서 뭐라고 하고 울면 운다고 뭐라고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그래도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힘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영애 씨는 자신에게 전사(戰士)의 얼굴을 새로 주었다. 슬픔을 지우고 강함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순응을 요구한 사회에 맞서는 길이라 여겼다. 피해자다움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족쇄였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그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 P388


의혹으로 둘러싸인 사건에 대해 명쾌하고 간결한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현주소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은 때로 울퉁불퉁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모양을 갖는다. 왜 세월호가 그렇게 빨리 침몰했는지, 왜 세월호에 갇힌 이들을 국가는 구하려 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의 얼굴은 아직 장막에 가려진 채 남아 있다. 한편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사법적 정의 외에도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회복적 정의의 실현도 함께 가야 한다. - P173


의혹이 아니라 진실이 알고 싶다. 대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면 여전히 분노하는 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못한다 해도 이 사회적 재난의 대가는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사랑의 단상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짧은 봄이 지나가고 있다.

낮에는 이제 제법 초여름 느낌이 날 때가 있어서 이제 곧 여름으로 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요즘 회사에서는 일이 계속 터져서 도무지 짬이 나지 않는다.

주말에 그나마 책을 읽거나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할 뿐.



개나리와 벚꽃이 이제 거의 다 졌지만 그동안 찍어둔 사진들을 조금 풀어본다. 

개나리는 너무 빨리 폈다가 져 버려서 만개한 것을 포착을 제대로 못했고 벚꽃은 만개한 날마다 날이 우중충해서 별로 예쁘게 보이지가 않는다ㅠㅠ 


아무튼 올해 봄 꽃은 철쭉, 그리고 장미가 남았으려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목련 2024-04-12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 개나리, 정말 예쁘네요!
어렸을 때는 예쁜 줄 몰랐던 꽃이 개나리였는데. ㅎㅎ

거리의화가 2024-04-15 07:54   좋아요 0 | URL
저는 연두색 다음으로 노란색을 좋아해요^^ 그래서인지 개나리와 해바라기가 최애 꽃이네요.
올해 개나리는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제대로 포착을 못해 아쉽습니다. 자목련님 남은 봄 행복하게 보내시길!

미미 2024-04-12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벚꽃 덕분에 나날이 화사하더군요. 화가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4-04-15 07:55   좋아요 1 | URL
미미님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이제 벚꽃은 다 떨어지고 나무들이 어느새 연둣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맘때의 나뭇잎의 색깔이 참 싱그럽고 좋아요. 감사합니다^^

은오 2024-04-13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꽃이 폈구나... 하면서 지나가는 저한테는 앞으로 남은 꽃들까지 꿰고 계신 화가님이 신기하고 멋집니다. ㅋㅋㅋㅋ
마지막 깨알 화가님 발!! >.<

거리의화가 2024-04-15 07:5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은오님. 그래도 지나치며 나무며 꽃은 보셨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발 사진 캐치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날씨가 봄이 아닌 듯하지만 남은 봄 건강하게 보내시길요!
 


[CH32]

루페의 아빠는 멕시코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국경에 나갔다. 헌데 그가 돌아오지 않자 루페는 싸한 기분을 느꼈고 악몽은 현실이 됐다. 아빠는 이민청에 붙잡혀 현재는 샌디에이고 감옥에 가 있다. 루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어깨를 연신 계속 들썩였다. 미아도 이는 불공평하다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루페는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자 위험하다며 미아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They could throw us out anytime they want." 보다 못한 행크는 루페가 딸이라고 하겠다고, 그럼 안전할 거라고 말했다. 미아는 루페를 꼭 안아주었다.루페와 행크는 그렇게 출발했다. 


[CH33]

밤 10시쯤 행크와 루페가 돌아왔다. 행크는 루페의 아빠에게 그들이 강요하는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말고 희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고 했다. 먼저 그는 내일 이민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행크는 루페가 아주 의연했다며 칭찬했다. 미아의 부모님도 용감하다며 추켜세웠다. 오늘 밤은 함께 지내자며 엄마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우리가 뭐든 할 것이라고 루페를 안심시켰다. 미아는 루페와 잠을 자기 위해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루페는 아빠와 포옹하고 싶었지만 직접 대면은 불가능했으며 유리문 바깥에서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용기를 갖고 싶은데 자꾸만 무섭다는 루페에게 미아는 루페가 예전에 자기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했다. “We’re going to get through this. Together.”


[CH34]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지역 전체에 있는 변호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기는 작업을 했다. 미아와 루페는 등교했고, 미아는 제이슨에게 신문에서 오려 놓은 요리 기사를 건넸다. 그런데 제이슨은 요리 교실에 가고 싶은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며 주저했다. 아빠 사업도 그닥 좋지 않은데 너무 비싸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요리 수업은 여자들이나 듣는 것이라는 아빠의 반응이다. 미아는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괴상한 것이라며 말도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미아는 계속해서 제이슨을 설득해볼 생각이다. 

Mrs. Welch는 미아를 따로 불러 최근에 쓴 작문에 대해 칭찬했다. 문제는 칭찬 실컷 해 놓고 점수는 C. 대체 왜? 선생님은 자신이 모든 학생에게 캔디를 나눠주는 달콤한 사람이 아니라 말했다. 


[CH35]

루페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던 미아는 드디어 Delaney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행크와 루페, 미아는 LA로 부푼 마음에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그는 사정은 자세히 묻지도 않고 변호사 비용은 1시간에 3백 달러이며, 부가비는 별도라고 이야기했다. 행크는 화장실에 손 닦으러 갈 때 휴지에도 값을 매기냐며 따졌다. 하지만 그는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사람을 돕는 것보다는 수임료가 더 중요하다는 뼈있는 말을 덧붙여 던지고 그들은 밖을 빠져나왔다. 김앤장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흠...


[CH36]

쿠퍼씨가 토요일에 전화해서 모텔 경영이 잘 되어가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의 지분을 돌려달라고 했다. 루페는 변호사비 비용 때문에 모텔 지분을 팔아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미아는 절대 안 된다고 루페의 가족이 모텔에 기여햔 바가 큰데 그럴 수는 없다 잘라 말했다. 루페는 전화가 올 지 모르니 집에 가겠다고 했지만 미아의 엄마는 그녀를 혼자 보낼 수 없다 이야기했다. 

미아는 모텔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2주 후 전화가 왔다. 모든 3학년 이야기 중에서 미아 이야기가 뽑혀서 경연에 미아 이야기가 나간다고 했다. 경연에 뽑히면 상금도 받을 수 있다고. 그러나 루페는 자신과 가족의 정보가 유출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미아는 루페와 자신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종이(서류) 하나의 차이였다.


every passing day, the worry hung lower and heavier on all of us, like a soaking wet towel.


[CH37]

미아는 학교에서 제이슨과 맞닥뜨리고 자신의 경험을 다시 이야기해준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자신은 자전거를 타고 있다면 다른 사람은 자동차에 있다고. 그렇지만 볼 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작가는 나의 꿈이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 미아는 이야기했다. Mrs. Welch는 작가로서 필요한 것은 절반은 감성이고 절반은 기술이라며 미아에게 감성은 있지만 기술이 부족하니 그 부분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감성이 부족하다고, 자신은 평범한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야기한다. 미아는 선생님께 모텔에 한 번 방문하라고 제안한다.


[CH38]

미아와 루페는 루페의 아빠를 만나러 교도소로 간다. 루페의 아빠는 며칠은 먹지 못한 것처럼 창백하고 볼은 푹 꺼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는 가죽만 남은 사람 같았다. 행크는 그에게 굴하지 말라고 변호사를 찾고 있으니 잘 해결될거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루페의 아빠는 변호사비가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루페는 아빠가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잃어버린 것 같아 슬프다. "Have faith. Just hang on a little longer."


[CH39]

미아는 루페가 아빠와의 만남을 지켜보고 모텔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과 진한 포옹을 나눈다. 미아의 엄마는 루페를 꼭 안아준다. 

Mrs. Welch가 모텔에 깜짝 방문했다. 이민자들을 상대로 한 수업에 참관하며 미아 뿐 아니라 부모님까지 놀란다. Mrs. Welch는 미아의 엄마에게 미아가 잠재력이 있다고 칭찬한다.


[CH40]

모텔에 와 보니 다섯 통의 변호사 관련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형 로펌에서 온 4건은 건너 뛰고 마지막의 로펌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름은 Prisha Patel이고 이민 전문 변호사라 했다. 컨설팅 비는 무료고 변호 비용은 맞춰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루페는 아빠의 구명을 위해 Kids for Kids의 아이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제이슨은 요리 학원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수업 때 187 법안 관련하여 있었던 LA시위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Mrs. Welch는 우리 중 참석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이 법안이 아주 중대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미아는 그녀가 변화하는 것 같아 기뻤다.

변호사 사무실은 초라했다. 대형 로펌이 아니라 그녀만이 있었다. 그는 인도 여성이었다. 미아는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현실에 대해 속상함을 표현했다. Patel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야기했다.


[CH41]

루페는 부모님이 불법적인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폭탄이나 마약처럼 불법자로 취급받는다고 너무 심하다 넋두리를 한다. 미아의 부모님과 미아는 그렇지 않다고 그녀를 추켜세웠다. 루페의 역할들이 다양하다며 기죽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저녁 식사 후 미아와 루페는 조용히 빠져 나와 마스터 키를 가지고 룸 하나에 들어가 노래를 신나게 불러제꼈다. 


[CH42]

미아는 Mrs. Welch에게 계속해서 작문 지도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마지막에 쓴 에세이의 이 표현(“My parents may be on side streets now, but one day, they’ll be on the main road.”)이 좋았다고 미아에게 말했다. C는 받겠구나 생각했던 미아는 A-라는 점수를 받았다. 깐깐한 선생님에게서 A-라니 다른 선생님으로 생각하면 A++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루페도 미아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모텔 접수대에 의회, 미국 상원, 시장 등에게 보낼 편지가 쌓였다. 행크의 건의에 따라 마지막에 개인이 보내는 편지가 아닌 “California Against Garcia Deportation”이라고 썼다. 행크는 루페의 디자인을 실은 티셔츠까지 주문했으니 대단했다. 모텔에 오는 손님들은 계속해서 서명을 해주었다. 

일요일에 현금 등록기가 또 다시 가득 찼다. 얼마 후 제이슨을 포함한 Kids for Kids 멤버들이 왔는데 루페가 제이슨을 보고는 미아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제이슨의 엄마가 Mr. Yao 집에서 청소하면서 겪었던 대우, 엄마와 잠시 팔씨름을 한 걸 가지고 Mrs. Yao가 해고한 일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