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6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확대되자, 청과 일본 양국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간주하면서 내정에 직접 개입하려고 했다. 때마침 초토사 홍계훈 휘하의 장위영 병정들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6월 3일 밤 조선 정부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민영준의 주도 아래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을 둘러싸고 청과 군사적 충돌의 위기를 겪었지만, 양국은 톈진조약을 맺고 청과 외교적으로 타협했다. 청이 원병을 파견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은 ‘동학란’ 속에서 자국 거류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제물포조약과 톈진조약을 파병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두 조약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호 통지한다는 절차상 규정에 불과했을 뿐,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 시민의 한국사2 P53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케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26~27



교과서에서 청일전쟁을 다루거나 한국 근대사에서 청일전쟁을 다룰 때 서술 시각은 대체로 위와 같다. 동학농민전쟁을 필두로 전으로는 배경을, 후로는 전개 과정부터 결과까지 일사천리로 훓치듯 지나간다. 그나마 <시민의 한국사2>에서는 풍도 해전, 평양 전투, 황해 해전 등 주요 전투가 포함된 지도와 간단한 전개를 언급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알기는 어렵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피해가 컸다’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선 출병을 결정했는지 배경은 짐작할 수 있지만 누가 결정했고 어떤 과정에 의해서 결정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당시 천황가와 일본 내각 다수는 조선 출병이 시기상조라 보았다. 그러나 1894년 6월 2일 참모본부 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가 외무대신 무쓰의 관저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하야시, 무쓰, 가와카미 세 사람이 출병에 동의했고 다음 날 내각회의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장에 허락을 받아 출병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일본은 왕궁을 점령하고 일본의 뜻을 따르도록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이틀 후에는 인천 근처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과 교전에 들어간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개전의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부 내부에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주도한 것은 외무장관 무쯔 무네미쯔였다. 

무쓰 무네미쯔는 능력을 평가받아 외무성에는 지금도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청일전쟁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진 중국 뤼슌의 기념관에는 초상이 악인으로 묘사돼 있다. -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P49


무쓰는 7월 19일 외부 내각 의견에 따라 오토리 공사에게 조선 왕궁과 서울 포위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나 오토리는 군부의 의견에 동조하여 결행을 감행했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을 읽으며 놀란 부분은 일본이 청일 전쟁을 위한 결정적인 명분을 찾고 있었을 뿐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성 내외 수색과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도 차단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1893년 조선에 입국해 신분을 숨긴 채 비밀리에 조선과 청국을 정탐하며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만나기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청일전쟁에서 조선지도를 만들어 배포한다. 6월 5일 천황 직속의 통수기관인 전시 대본영을 설치된 것은 경복궁 점령 전 이미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청은 직예제독 예지차오,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기명제독 장치캉, 유격 판진산을 리더로 하여 부대를 구성했다. 추가로 웨이루쿠이, 마위쿤, 쭤바오구이 등이 인솔하는 군사를 평양에 파견하여 아산과 평양 일대에 약 14,000여 명의 청군이 주둔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의 전황을 풍도해전->평양 함락->황해 해전->뤼순다롄 전투->웨이하이 전투->시모노세키조약의 6단계로 보고 있다. 

출동 초기 청군은 동학농민군 토벌보다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데 치중했다. 게다가 청국군은 전쟁 초반 승기를 잡아야 했음에도 안일하게 대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예지차오는 리훙장에게 패주 과정에서 청주, 충주, 금화를 경유해서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싸워 승리했다고 보고했으나 날조였고 실제로 전투를 하지도 않은채 평양으로 도망쳤다. 성환과 아산 전투의 패배에도 전면전이 아닌 완만한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리훙장은 전략적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는 판단 미스였고 반면 일본군은 조선에 계속 증파되면서 평양 전투를 제대로 준비했다. 


청일전쟁에서 조선인들의 등장은 일반인들보다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민병들의 기술에 주로 치우쳐져 있었다고 본다. 이는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비중을 상대적으로 높이 가져가는 영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하여 국내에서는 이이화 선생님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많은 대중서가 나와 있기도 하여 그 전개 과정과 영향,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그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관군은 일본군 사이사이에서 총을 쏘아 댔다. 농민군은 끝내 우금재 너머 언덕으로 물러나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를 피했다. 이때 관군 수십 명이 산을 내려가 작은 언덕배기를 장애물로 삼고 총을 쏘았다. 패색이 짙어진 농민군은 보루를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과 경리청군 50여 명은 달아나는 농민군을 남쪽으로 십여 리를 추격했다. 이 우금재의 싸움에서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히 메웠다"고 할 만큼 농민군은 크게 패배했다. 11일, 능치를 지키던 관군은 빼앗은 농민군의 옷과 수건을 착용해 농민군 모습으로 위장했다. 관군은 산을 기어올라 농민군에 근접했다. 농민군은 위장한 관군을 동료로 오인하였는데 위장 관군이 근접해서 불의에 총을 쏘아 댔다. 기습을 받은 농민군은 놀라 흩어졌다. 관군은 대포를 노획했고 많은 연환을 빼앗았다. 이 능치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은 12일부터 점차 흩어져 갔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276~277


"대국이 왜눔한테 항복을 했이니, 그게 망조라 말이다. 왜눔들이 개미떼맨쿠로 기어올 긴데, 벌써 항구에는 왜놈들 장사치들이 설친다 카는데, 허수애비 같은 임금 있으나 마나, 총포 든 놈이 제일 아니가." - 토지 1권 P123


또한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일본인 선부의 고용, 파견 기준과 조건, 서약서 제출 등에 관한 기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 기준과 조건은 예비,후비의 적에 있는 자 혹은 징병 당첨자, 신체 강건한 자, 연령은 21세 이상 45세까지, 주벽이 없는 자, 절도 혹은 도박범의 실결을 받지 않은 자, 폭행사건으로 형을 받지 않은 자로 한정했다. 공무상 다치거나 유행병에 걸린 자는 급료를 감하고(?), 스스로 건강에 주의하지 않아 걸리는 질환 또는 술에 취해 광기를 부리거나 싸움으로 얻은 외상은 휴업 중 일급 2분의 1 이내로 급료를 감할 것이라는 사항도 있다. 공무상 다치는데 급료를 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선발 기준도 꽤나 엄격한 듯 싶다. 이들은 서약서도 제출해야 했는데 한마디로 ‘규칙에 절대 복종하며 (왠만하면) 불만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군량과 말먹이 등 대부분이 현지에서 징발 형태로 조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군 뿐 아니라 청군도 마찬가지다(청은 재조지은을 이름 삼아 조정에 요구받으면서도 백성들을 못살게 군 것이 더 괘씸하기도 하다).  

평양에 주둔한 청군은 약탈 수준으로 징발을 자행했다. 베이징 정부는 행군 중 불법을 자행한 병사에게 군법을 따르게 하고 법률과 기강을 엄히 할 것을 지시했고 소란한 민심을 안정시켜 후환을 막게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잘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전쟁의 승리를 미화하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언론도 큰 몫을 담당했다. 당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 등 일본에 순회 전시되었고 이 중 일부는 물품이 현재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아니 근데 부녀자의 의복은 왜?). 


청일전쟁과 관련한 현재의 일본 사회과 교과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전쟁의 원인을 동학농민전쟁에서 구하는 데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동학난이라 불리는 농민폭동”이라며 단순한 반란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 청일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선이 중국에 출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중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농민군의 활동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은 부각시키지만 청일 간섭군에 농민들이 저항했으며 일본군이 이들을 철저히 진압했다는 사실은 생략되어 있다. 또 일본이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전쟁을 정당화했던 과거의 논리에 대해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셋째, 청일전쟁의 결과에 대해 고대부터 지속되었던 동아시아 중화질서는 이로부터 붕괴되었고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조선을 피동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근대 시기 일본 지식인 대다수는 청일전쟁을 ‘문명전쟁’, 러일전쟁을 ‘인종전쟁’으로 인식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러한 인식은 공유되고 있다. - P340~341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지신보>에 <뤼순의 학살은 터무니없는 떠도는 소문이다>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인했다.


우리 뤼순의 대승에 대해 외국인 중에는 그 살육이 많다는 것을 듣고 왕왕 말을 만드는 자가 있다. 승리를 틈타 중국인들을 도륙한다는 한 가지 일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면할 수 없다. 이 참혹한 최후의 거동은 모두 전승의 명예를 말살하기에 족하다는 논평으로 한탄스럽다. … 뤼순 시가의 죽은 자 중에는 무고한 인민이 다수 있다는 것은 모두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인민을 살육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은 그 터무니없음을 경계함과 동시에 금후에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고려 없이 살육을 행해 조금도 차이 없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 P580~581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런 정서를 공유했을 것이다. 


청일 전쟁은 한반도를 넘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조선의 인부가 일본인 인부와 함께 압록강을 넘어 동원되었다고 한다. “후방에서 양곡을 취하여 전방인 청국 안둥현으로 전송했다. … 대체로 황군의 운이 우세하니 한인 인부의 위풍도 한결같다. …” 한 육군 포병 소좌의 기록을 통해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이런 식으로 끌려갔을지 상상하게 된다. 황군의 운이 좋으면 한인 인부의 위풍이 그에 따르는 것이라니 이 인식도 문제가 심각함을 느끼게 한다. 


양국 해군은 1894년 9월 17일 황해 해전을 벌인다. 이 때 기함 사령관이 상관인 제독 정여창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청의 해군이 피그덕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포격으로 함교가 무너져 정여창과 영국인 고문이 부상을 당하면서 청의 지휘 라인에 공백이 생겼다. 이에 청군은 웨이하이로 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황해 해전은 청의 뼈아픈 손실이 되었을 것이다. 


웨이하이웨이로 불리던 19세기, 이곳에는 청왕조의 북동부 바다를 지키는 북양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포대가 설치되고, 류꿍따오에 제독의 청사가 세워졌다. 1880년대 무렵까지는 동양의 제1의 함대라고 불렸지만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일본군이 이 바다를 습격하자 북양함대는 투항했다.  -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P54


첫째, 이 전쟁은 민족주의를 통해 정부와 국민이 하나의 목표로 굳게 단결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던 나라와 정부와 백성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따로 놀았던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나선 일본은 거국적인 역량을 총동원한 반면 청의 일반 백성들은 전쟁과는 거의 동떨어져 있었으며 조정은 거의 전적으로 북양 함대와 이홍장의 회군에게만 의지했다. 둘째, 청은 명확한 지휘 체계가 서 있지 않아서 명령이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거국적인 동원도 없었다. 총리아문, 지방 당국, 무책임한 청류파 관료들의 상충된 건의들은 청조의 우유부단함만 초래했을 뿐이다. 조선의 외교와 군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이홍장은 정책 결정권이 없었으며 자기 관할 밖에 있는 전함과 군대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다. 셋째, 조정과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는 처음부터 청의 노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태후가 여름 별궁인 이화원 건축을위해 해군 기금에서 수백만 냥을 전용한 것, 그녀의 환관 총애, 사회전반의 도덕성 타락도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이홍장이 정직성보다는 개인적 충성심과 복종심에 따라 인선한 북양 함대의 사령부에서 특히부패가 만연했다. 많은 군관들이 태감 이연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으며 공금을 빼돌려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는 이들의 불법 행위를 비호해주었다.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북양 함대는 사실상 약체였다. 이홍장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먼저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홍장의 외교는 국제 정치에 대한 이해 결여, 개인의 협상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구태의연한 이이제이 정책에의 의존 등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의 중재가무산되자 이홍장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구했으나 양쪽 다 일본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었다. - <캠브리리 중국사> P188~189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양국 간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은 상당 부분 한반도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의 물자와 인부들, 병사들, 무고한 백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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