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읽는 역사
한순구 지음 / 삼성글로벌리서치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3



감히 나와 같은 독자에게 이 작품을 읽고 누군가가 작품 어때요?’라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고 평하려 한다.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분석해 저자의 전공 분야 관점으로 이를 해석해 그 역사적 

순간에 저자의 방법론을 적용해 보았다면 어땠을까를 유추하는 작품으로

저자가 사례를 들기 위해 선정한 역사적 사건과 해당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 및 그에 

대한 해법 등 모든 것이 각양 각층의 독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저자께서 노력하고는 있었다고는 느끼고 있으나 저자의 분야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무지에 가까운 독자들이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해석이 부분적으로 보였고, 그 접근

방법도 평이했다는 생각이다특히 나와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그러했다는 말이다.


크게 아쉬웠던 점은 저자의 약력을 통해 본 이력 중 일본에서 연구 활동 기간이 포함

되어 있어 그런지는 몰라도 구성된 총13개 장 중에서 4개의 장(33%)이 

일본 역사에서 사례를 뽑아내고 있는데일반인들이 쉽게 알고 있는 대중적인 

-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 역사적 사건이 아닌 특정 국가의 특정 사건을 예로 들면서 분석하고 있는데, 일본 전문가 혹은 일본에 지대한 관심이 없는 독자들이 해당 역사에

대한 깊이가 없는 상태에서 저자의 분석에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점은 아쉬움이라면 큰 아쉬움이라 할 것이다.


각 장별 아쉽거나 나름 이해가 어려웠던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2장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로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만 있는 상태라면 쉽게 이해되었고 저자의 주장에 일견 동의를 하지만

3장은 저자가 어떤 점을 강조하려는지(코어와 새플리 밸류) 또 저자께서 강조하시는 

학문에 관한 이론적 배경에 관한 기초 지식이 없으면 저자의 상세한 설명이 지금보다 더 세심하게 배려되지 않는한 이해가 쉽게 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고 판단되었지만 

한편으론 해당 장에서는 그동안 여러 역사적 작품을 통해 빈약하게 알고 있어 약간 

답답한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한 부분은 칭찬할만한 내용이었다고 판단한다.

4장에서 주장하신 이론(‘홀드 업 문제는 중소기업이 인질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인질로 잡힐까 두려워 대기업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이론)에 대한 사항은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몇 차례 읽었지만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으며


5(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저자께서 주장하는 이론(팀에서의 도덕적 해이)과 묘사 내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6 ~ 9장까지는 내가 위에서 거북하게 느꼈다는 혼란한 일본국 시대의 이야기를 배경을 예로 들고 있는데,

6장의 레퓨테이션 게임7장의 담함과 배신의 게임이론 그리고 8장의 밴드왜건 

효과’, 9장의 오사카성 전투내용은 일본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을 경우 저자의 

일방적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다소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10(컨티전시), 11(대리인 문제와 도덕적 해이), 12(데드라인 문제) 및 

13(또라이 전략)에서 예화로 든 역사적 사실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내용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분석하고 이론적인 내용으로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도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운 아쉬운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257쪽에서 저자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경제학의 가장 큰 화두는 구성원들에게 주인의식을 불어넣는 일이다.”

라는 내용은 경제학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이 사회, 우리나라 경제 활동을 비롯한 

전 분야에 걸쳐 가장 시급한 문제임에도 이를 경제학에만 국한시킨 강조는 큰 아쉬움

으로 남는다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방법을 제시한 작품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역사적 순간에 잘못된 순간 및 판단을 저자의 전공이론으로 이를 해석해 새로운 시각으로 참신하게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 의도했다면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이나 완성 후, 관련되는 여러 사람 특히 역사학자나 해당 역사적 사건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관련자들과 한 번쯤 토의나 토론을 통해 무지한 독자의 눈높이 까지 헤아렸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 작품이었다는 게 무식한 나의 

판단이다.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구 중 그나마 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마을이나 국가 

  그리고 친족 심지어는 가족마저 자기 자신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P 27)

- 홈그라운드를 완벽히 장악하지 전에 외부 정복에 나서는 것은 게임이론의 견지에서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다.(P 31)

-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은혜를 베풀면 안 된다.(P 33)

- 천하를 얻는 순간까지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썼지만 일단 천하를 얻어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니 능력보다는 충성심 강한 사람이 중요해 진다.(P 47)

-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개인보다 조직에 더 긴요하다.(P 60)

- 게임이론은 현재 상황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것이 유리한지 아니면 세컨드 무버가

  되는 것이 유리한지를 반드시 따져보고 결정하라(P233)

- 강하지만 상대를 맞힐 수 없는 오른손보다는 약하지만 상대를 맞힐 가능성이 높은 

  왼손을 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오른손잡이 권투 선수들은 왼손을 자주 뻗는다.

                                                                                                (P249)

- 최고 책임자는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미리 

  생각해 봐야 한다.(P252)

- 경제학의 가장 큰 화두는 구성원들에게 주인의식을 불어넣는 일이다.(P257)

- 대리인 문제의 해법은 의견교환과 믿음의 형성이다.(P269)

- 미래에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소수의 인간이 인공지능 기계를 이용하여 생산 작업을

  하고 전투에 임하는 시스템을 더 빨리 받아들이는 국가가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P273)

-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기만의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목표가 보통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과 존경을 받는다.(P277)

- 협상에서 시간제한, 즉 데드라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고

  실은 우리 머릿속만 있는 주관적인 것이다. 결국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P297)

 

 

작품에서 얻은 상식

- 로마인들은 카르타고 사람들을 포에니쿠스(Poenicus)라 불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 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드 룰렛 - 중국공산당의 부, 권력, 부패, 보복에 관한 내부자의 생생한 증언
데즈먼드 슘 지음, 홍석윤 옮김 / 알파미디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8


중국은 금세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외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상대로 펼치는 

국가 전반의 행태에 대해 게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갈 것으로 생각한다.

, 아무리 주변국에서 중국에 대해 비난을 퍼부어도 작게는 주변국으로부터, 넓게는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의 질타와 비난을 받는다 해도 빛바랜 그들의 정책인 도광양회

(韜光養晦: 실력을 감추고 절대 드러내지 말라) 정신을 이유로 절대 자신의 노선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자신의 행동이 표준이고 정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사상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낭비이다 -


본 작품을 읽는 본인이 내린 결론은 중국에 진출하는 기업 및 개인들은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여러 사건사고 내용을 반면교사로 삼아 중국내에서의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중국에서 펼치려는 사업 활동에 있어 활동의 지침(‘이카루스의 날개로 나는

명명하고 싶다)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 내가 모 대학 중국인 여 교수가 미래에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인구가 많은 

시장이 있는 중국을 바라보라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나는 시장도 시장 나름이고 시장에 있는 소비자들의 수준도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단연코 그녀의 주장에 대해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작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들은 나는 작품의 주인공처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둥, ‘내 친구 중국인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는 등의 근자감을 갖고 주장하면서 섣불리 중국 사업에 

뛰어 들 수 있다고 보는데,

그건 개인의 자유이나 나도 중국 쪽에서 일해 본 경험과 작품에 나타난 여러 증상을 

갖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비상식이 판치는 중국 사업은 쉽게 도전해서도, 쉽게 봐서도

안 되니 다시 한 번 신중히 접근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며 혹자는 나의 이런 글을

읽고 - 동의하지도 않겠지만 - 중국과의 거래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분명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중국인으로서중국인 경제

학자로 중국의 장밋빛 미래를 예측하는 중국 나팔수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 - 나도 구매해 읽었지만 -라는 작품이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와 있는 몇몇 사례를 통해 누구나 다 중국에 

가면 성공할 듯이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해당 작품을 읽으며 중국 현지에서 맨발로 뛴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야릇한 미소만 지을 뿐 소설 속 내용이 맞다, 틀리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왜 오늘날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앞서 그들은 뭐라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그런 민족이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대표적으로 내가 겪은 중국, 중국인 그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저개발국가와 후발 국가를 대상으로 일대일로를 행하며 돈을 무상으로 빌려주고 있는 것을 내가 주장하는 내용의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짜가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돈을 빌려 주고 대여금을 갚지 못하는 해당 국가에 

대해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 유럽에서 고리대금업자로 이름을 날린 유태인들 

뺨친다 할 것이다 -

위에서 언급한 배려라는 단어를 놓고 이야기를 해 보면,

 

한국인도, 독일인도, 일본인도 그렇고 중국인도 좋은 사람이 있고, 질이 원천적으로 

나쁜 사람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곳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혼재되어 

있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나 중국은 좀 특이하다 못해 이상한 민족들이 모여서 만든

국가같다.

공자를 비롯한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여러 불세출의 인물들을 탄생시킨 그런 국가 중국이 왜 오늘날 요즘말로 이야기하면 동네 양아치들도 하지 않는 그런 작태를 

세계를 대상으로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한국인들도 오늘날 중국  못지 않은 성향의 국가요 국민

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육에 힘입어 현재는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져 사회 곳곳이 선진화되어 가고 있지만 중국의 경우는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격하게 변한 중국인들

심성과 품성이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이상하게 변질된 채 잘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다.

 

대표적인 저들의 심성을 알 수 있는 단어가 배려’(配慮,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에는 해당 단어가 없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유사한 단어는 있는데 정확한 의미 전달 수준에서의 해당 단어는 없다고 

보면 정확하다.

배려가 없는 사회이고 국가이다 보니 모든 게 자기 중심적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 후기에도 중국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을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데

당은 위기가 왔을 때만 장악력을 느슨하게 해 사람들과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허용

 하는 척한다당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다가 항상 제자리로 돌아온다. (중략) 중국의 

 경제가 성장 가도에 접어들면서 당은 다시 지배력을 강화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문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작품을 읽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거래를 위해 다른 사례는 필요없다. 구구한 개인적 억측과 편견이라 이야기

하기 쉽지만 최근 발표된 중국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어떠한 부패가 이루어졌는가를 

보면 알 것이다.

그래도 중국 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해당 작품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중국인들의 

특성을 공부하라고 강하게 권하고 싶다.

 

하지만 남만 탓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여의도에도 중국인들 못지 않게 행동하는 배려 부족한 족속들이 부지기수로 

활동하고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 자기네 편 말만 옳다고 외치는 인간들이 득실대니 중국을 탓하기 이전에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인간들만 별도로 모아 놓고 룰렛 게임을 진행하고 싶은 심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레니엄맨 칭기스칸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7


해당 작품을 지난 2005년 처음 접하고 당시 내 이메일 아이디(nomad)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작품으로 당시 내가 만든 아이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할 수 없이 아이디 뒤에 'e'를 붙이며 아이디를 변경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당시 나는 작품을 읽고 앞으로의 시대는 유목민의 시대가 올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만들었음에도 아이디가 주는 의미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들볶는 주변인들 때문에 바꾼 것이 지금도 맘에 걸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당시의 분위기를 상기하며 작품을 읽은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유목민 시대는 앞으로 대세 - 지금도 약간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미풍 수준으로 조만간 태풍 

수준으로 우리 사회에 밀려 들 것으로 나는 예측하고 있다 - 가 될 것이고 그 내용과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며 작금 우리 사회 및 국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폐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를 들어 ‘MZ세대의 현상도 다 유목민 시대의 연장선상이라 여겨지며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떤 방면에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지는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연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 분명한 것은 나는 대책이 있고 앞으로 찬찬히 주변에 적용해 나갈 것이다 -

 

한 가지 퀴즈!

대세 연예인 유 모씨, 대중들에게 바보 이미지가 강한 김 모씨, 계그계의 대부이자 버럭 대마왕 

이 모 개그맨과 팔짱과 레이저 눈빛으로 한 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변호사 우 모씨, 엄마 찬스의 주역임에도 아니라고 우기시는 소년원생들의 대모를 자청하셨던 추 모님, 단군 이래 최대의 업적을 남기셨다고 지금도 틈만 나면 주장하시는데 가끔 주변인들을 모른다고 외치시는 이 모 정치인님들 각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나폴레옹(115), 히틀러(219), 알렉산더(515)보다 더 넓은 영토(777)를 정복했던 인물이며 새 천 년을 여는 시점에 워싱턴 포스트가 뽑은 1001년에서 2천 년까지의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정된 칭기스칸에 관한 이야기다.

(중반 이후는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서와 비슷해 정리에서 제외)

유목민, 그러면 몽골의 칭기스칸 시대의 유목민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당시의 그들이 그렇게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핵심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요인은 아마도 그들이 주고받았던 한 문장

소닝 새항 요 밴?(무슨 새로운 소식 없냐?)'

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유추가 가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해당 문장에는 도전정신’, ‘탐구정신그리고 개척정신등 현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 기업 및 기업인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반드시 갖추어야 할 그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몽골족의 첫 모습은 8세기 중엽 흑룡강의 중상류인 에르군네강유역이라 하며 9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면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토번제국과 중원의 당 제국역시 쇠퇴의 조짐을 보이며 그동안 눌려 지내던 군소 세력이 발흥하면서 나타났다.

12세기 초인 1206년 칭기스칸은 예케 몽골 울루스를 건설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일부 발췌 정리해 보면

 

- 몽골 유목민들은 1203년을 대단히 중요하고 뜻 깊은 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1) 씨족제를 해체하고 천호제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을 구축해 사회적 대개혁을 감행했고

  2) 1204년 몽골제국 출범의 기반을 닦았으며

  3) 1206푸른 군대의 정비와 함께 칭키스칸이라는 칭호를 얻기 때문이다


- 몽고군은 포로를 잡아 보유하고 있는 기술재주를 통해 기술자 집단을 원했다.

  과거제도를 통해 세워진 중원의 유교 문명은 몽골군에게 냉혹히 거부되었다. 암기 능력만을

  테스트하는 중원의 과거제도는 몽골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 효용의 가치가 적어진 중원의 지식인들은 야한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데

          ‘금병배라는 소설도 당시에 나온 것이다.

 

- 1115년 건국된 금나라는 몽골고원에 대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 왔다.

  그 결과 금나라의 무차별적 도륙 정책은 몽골고원의 비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특히 금나라의 세종(1161~1189)이 펼친 감정(減丁)정책’ ‘몽골고원의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없앤다는 정책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도 같은 정책이었다. 칭기스칸은 1162년에 태어났다.

   ---> 1211년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대한 보복을 결의한다.


- 1218년 대규모 통상 사절단을 콰레즘(페르시아 길목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오코나를 통해 

  술탄 무하마드에게 보내지만 그의 친척인 이날치크 카이르칸이 사절단을 처치하자 

   ‘코릴타를 개최하고 콰레즘을 멸살시킬 것을 결의

   ---> 11만의 콰레즘 군이 주둔하는 사마르칸트 요새는 누구도 1년 내에 함락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몽골군은 3일 만에 함락하고 기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도륙

 

- 술탄 무하마드가 제거된 것을 확인하고 기독교 문명이 쉼쉬는 키에푸 루시(러시아)’로 방향을

  돌린 몽골군을 1223킵차크족키예프와 연합해 몽고군을 공격하지만 전멸 당하는데 그

  전투는 이후 유럽의 기독교 문명에 몰아닥친 파란의 전주곡이 된다.

 

- 몽골군(푸른 군대)은 금나라를 꾀뚫어보고 있었지만 금나라는 푸른 군대의 존재 유무를 몰랐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금나라 군대는 푸른 군대가 침범했을 때만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반면 

  푸른 군대는 자신이 싸우고 싶을 때 싸웠다.

  푸른 군대는 인간이 갈 수 있는 대지 전체를 무대로 삼은 반면 금나라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한

  곳에서 눈에 보이는 작은 영역만을 무대로 했다. 푸른 군대는 전력을 아껴가며 싸운 반면 

  금나라 군대는 선택 당한 부문만으로 총력을 다해 맞서야 했다.


- 자신의 실수를 상사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병사가 있을 정도로 군율이 강했으며

  그들은 무기가 있으면 절대로 도망가지 않았고, 전쟁을 할 때도 지휘관이 신호를 내릴 때까지

  후퇴하지 않았다이런 여러 요소가 겹치면서 킵차크 칸국몽골인이 4만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럽인 25백 만 명을 통제할 수 있었다.

 

- 농경 정착 사회는 수직 마인드 사회로 그런 사회에 사는 정착민들의 삶을 가장 확실하게 지켜

  주고 막아 주는 것은 바로 자리. 안정된 자리만 확보할 수 있으면 삶은 끝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창의력이 필요 없고 기억력이 중요시되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사는 사회였다.

  반면에 유목민들의 수평 이동 마인드는 농경 정착 세계를 넘나들며 사는 사회로 위가 아니라

  옆을 봐야 하는 수평 마인드의 사회로 살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회로 다른 사람이

  소중해 진다.

  또 수직 마인드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자리는 착취와 군림의 수단이 아닌 역할과 기능을 발휘

  하는 곳이 되며 이동효율정보의 개념 속에서 시스템이 태어나게 된다.


- 몽골군이 강했던 이유는 전리품의 공평한 배분, 부하들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특히 노예나 

  포로에게도 무한한 가능성과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고, 전투 자원(편제, 무기, 말 등)의 효율적인

  호완성과 군수 보급과 병참 시스템이 뛰어났고 평소에 대규모 사냥을 통해 연습하면서 숙달된

  군사들의 기동성이 가미되면서 그 효과는 배가 되었다.

  참고로 칭기스칸 군대가 콰레즘을 공격할 때 주로 부유한 성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함락 후 그 성에서 식량을 보급 받으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 12세기 후발 신흥국이었던 몽골 제국이 선진 정착 문명국가를 격파한 근간은 바로 군사 기술

  , 전쟁 기술이었는데, 칭기스칸은 신기술의 수입과 발전을 위해 기술자 집단을 극도로 

  우대했다.

  기술 패권주의의 정수는 금나라 투항 시 그들로부터 압수한 세계최초로 개발된 원시적 다연장

  로켓포인 비화조회회포(回回包)’는 몽골군의 큰 전력으로 자리 매김한다.

  또한 대상들을 활용한 정보전 및 심리전도 몽골군의 가장 큰 무기로 활약하게 된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정보 인프라 군사 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역참제의 개발도 몽골군이

  강해지게 한 큰 요인으로 이는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몽골을 지탱하는 데 큰 역할은 한 사준마(四駿馬)의형제인 보오르초, 잘 라이즈족의 모칼리,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칠라운, 주르킨 출신의 보로콜이었으며

  사맹견(四猛犬)제베, 코빌라이, 젤메, 수베에테이였다.

 

- 몽골의 징병과 징세는 그 지역 사정에 밝은 인물들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납세를 거절

  하면 각지의 전략 지점에 배치된 몽골군이 처리했다.

 

- 칭기스칸은 몽골고원 통일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기여한 너커르집단을 새 시대의 주도 

  세력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너커르란 동무, 친구, 동지라는 뜻으로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집단을 의미하며 너커르는 칭기스칸 권력의 핵심이자 신질서의 상징

  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천호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군사 조직의 개편을 넘어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군사, 사회의 종합 통치시스템이자 총력 동원 체제의 등장을 의미했다.

 

- 유목 방식은 2가지가 있는데

  1) 쿠리엔식 : 부족 전체가 집단적으로 이동항는 형태의 유목 방식

  2) 아일식 우목 : 두세 가구가 한 무리를 이루어 광활한 초지를 소유하며 유목하는 방식

 

- 칭기스칸의 말을 한데 모아 놓은 대자사크격언 빌리크는 칭기스칸이 단행한 여러 개혁 

  조치와 개혁방향, 구상, 원리들이 들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칭기스칸의 정복 전쟁은 자연 재해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만든 것은

  중국이었지만 지폐의 대량 발행을 통해 본격적인 화폐경제를 이룬 것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때 일이었다.

   ---> 몽골인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을 단일 화폐 경제권으로 통합했다. 그 덕택에 동양과 

        유럽 간에 대규모 무역이 가능해졌다. 곳곳에 무역항이 발달하고 외국인이 모여들었다.

 

- 무굴제국이라 할 때 무굴이란 힌두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 몽골의 언어는 소리는 있지만 글자는 없다. 대부분 소리만을 빌려 번역하고 통역한다

  이것을 통사(通事)라고 한다.

 

[작품에 나타나는 몽골어]

- 바아토르 : 용사 

일종의 국회’ : 코릴타(상원격), 케식텐(하원격)

- 사원 : 부하라 

고탈 : 군화

- 너커르 : 친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군주 평전 시리즈 4
송재혁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7


이도(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여러 업적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여기에 세세히 열거해 나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본 작품을 집필한 저자의 의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인 것 같아 그 부분은 생략하고 작품에서 확인한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거나 - 나의 시각과 관점에서 - 잊고 있었던 내용에 방점을 두어 편안한 마음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작품을 읽으며 든 생각은 우리의 역사 교육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교육이 단답식 암기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일방적으로 선생님들이 떠 먹여주는 주입식 교육 과정의 폐해로 일어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크게 든 시간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세종대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 외에 세세하게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이 그 단적이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분의 본명이 이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있을까? 또 그분의 재위 기간 중 발명한 

여러 과학기구가 나온 배경이 통치 기간 내내 가뭄과 흉년의 연속이었기에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왜 그분의 통치기간 중 의예(儀禮)’를 중시하는 많은 책자가 발간되었는가?를 비롯해 노비의 애환을 보살피는 여러 

제도를 개정한 것과 본 작품에서는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작품을 통해 확인한 내용 중 결혼과 관련된 풍습을 우리 현실에 맞게 변경시키기 위해 솔선해 자신의 

딸부터 적용해 보았다는 내용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손이 모자를 정도의 개혁을 추진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교육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세종께서 이룬 

업적이 많음에도 후세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불확실한 내용이 많아 개탄스런 마음이 앞서서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그분의 업적 중 일반적인 사항 말고 기타 사항으로 들 수 있는 

몇 가지 업적을 드려다 보면서 그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점은

첫째, 중국에 맞서려는 의식이 강했던 인물이었으며

둘째, 부국강병에 대한 열의가 그 어느 왕보다 높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셋째, 조선의 어느 왕보다 공론정치를 개척한 인물이었고

넷째, 애민 사상이 그 어느 왕보다 높았던 국왕이었으며

다섯, 효와 형제애가 무척 깊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 선왕 태종이 당초 후계자로 생각지 않았던 관계로 1418(태종 18)당초 세자로 

  책봉이 예상되었던 장남 이제를 내치기 전까지 이도(세종)에게는 차원이 다른 

  교육을 시켰다.

  단적인 예로 세종에게는 후계자 교육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술과 관련된 교육에 집중

  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교육은 세종 말년에 정치사적 외에 그가 이룬 업적의 

  큰 밑바탕을 이루는데 자산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이다.

 

- 맏아들 이제를 내치기 전 태종은 수많은 고민을 했는데, 자신이 권력정치를 통해 

  구축한 비정상의 정치를 학문과 이념의 정치로 정상화할 수 있는 후계자를 원하면서

  무엇보다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훌륭한 국왕의 조건들 중 우선적인 것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정치의 핵심을 알고 있으며, 관계 지향적인 인간형이며 앞으로 

  후계자가가 될 수 있는 즉 적장자(두 아들)가 있는 아버지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꼽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이도에게 권력을 이양하려는 표면상의 이유는 당초 거듭된 자연재해와 

  자신의 지병이었다. 또 태종 자신은 정통성이 떨어지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

  했지만 세종에게는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조선의 정식 궁전(법궁)

  인 경복궁에서 즉위할 것을 지시하는데 이는 그동안의 정치를 정상화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즉위한 세종은 두 가지 교서를 내리는데 하나는 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유학 이념을 구현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 ‘세종실록을 보면 유독 의례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이도의 시대에 이르러 국가 

  의례가 상당수 정비되었다는 뜻으로 그의 시대는 건국과 정변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권위로 바꿔가던 시대로 한마디로 후대 국왕들의 표준을 확립한 국왕이었다.

  왕이 된 세종은 첫 번째 경영 교재로 대학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중국 남송

  시대의 대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책으로 유학의 기본교재인 대학의 이론적 바탕위에

  역사 사례들을 결합한 제왕학의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 이도는 경연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인 집현전설치를 지시하는데, 집현전은

  고려의 한림원을 계승한 것으로 이것은 당나라 현종 때에 왕립 학술기관으로

  ‘한림원이 설치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태종은 태조의 아들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력도 있었던 관계로 학자로서 자신의 

  학술적 지식에 의존해 별도의 자문기구를 두지 않았던 반면, 이도는 재위 초기에 

  학술 자문기구인 집현전을 설치했다.


- 권좌에 오른 세종이지만 지속되는 자연재해(9년의 홍수와 7년의 가뭄)가 치세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는데 이를 개선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32년의 재위 기간 중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은 해가 불과 6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420(세종 2) 하늘을 살피는 관측, 즉 천문과 관련된 정책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측과 대비를 통해 재해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 이도는 4명의 황제를 섬겼는데, 1424년 몽골 원정 중에 영락제가 사망하였고

  이후 3명의 황제가 뒤를 이었다. 이도는 지성사대를 통해 생존과 안정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는 명 황제들에게 신뢰를 쌓아 갔고, 재위 후반기에는 그것을 북방 영토 개척에 

  활용한다. 특히 태조와 태종을 계승한 이도는 명나라와의 공존을 시도하는데

  선왕들이 힘들게 얻은 평화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사대에 지극정성을 다하게 된다.

  이도의 행장을 보면 정성을 가지고 사대하였고, 신의를 가지고 교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도가 재위 시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를 알 것이다.

  반면에 왜에 대해서는 통신사라는 이름의 사절을 1428년에 처음 보내는데 왜에 대한

  교린정책은 양면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우선 중앙의 막부와는 우호 유지, 지방의 여러

  왜인들에 대해서는 기미정책을 시행하였다. , 조공을 잘하고 통제를 따를 경우만

  조선과 통상을 허락하였으며 창구는 대마도로 일원화했다.

  또한 조선은 독자적인 국가로서 국가이익을 위해 전쟁이란 수단을 활용하기 시작

  하는데 그 출발은 1419년 태종이 약 17천명으로 단행한 대마도 정벌이며 이를 

  이어받은 이도는 야인 정벌과 북방 영토 개척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 태종의 상제가 끝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상복을 벗자 이도가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을 상왕을 따라다니며 매년 해 왔던 사냥을 겸비해 훈련하는 강무였다.

  이도는 매년 봄, 가을 강무를 시행했는데, 군사적인 의미 외에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

  으로 활용하였으며 무의 정치를 내세우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재위 15년째인 

  1433년의 야인 정벌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야인 정벌의 본질은 명나라의 현상유지 

  정책과 이도의 공세적인 북방정책 사이의 마찰이었다.


- 당대의 대학자 변계량이 지은 화산별곡은 이도가 직위 직후부터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정치를 펼쳤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가 실패한 정책은 전폐 정책

  , ‘동전의 보급이었다.

 

- 이도의 시대에 들어 그동안 태종의 권력정치에 가려 있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

  했는데, 대표적 사건이 바로 벼슬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관행이었는데

  이도는 뇌물사건을 국가 흥망이 걸린 중대 사안으로 간주하며 이를 철저하게 관리

  하며 문제화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국가 흥망의 문제를 넘어선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이도는 부패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처벌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해 극히 자제된

  처벌을 하게 되는데 이도는 부패가 한 인물을 처단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진정한 해결은 인정교화의 정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도권을 장악한 이도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학문적 성취로 잡으려 한다. 신유학의

  서적을 읽으며 신유학의 정치론을 체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다

  이도는 자신이 솔선수범해야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도는 재위 초반부터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어떠한 신하들보다 깊은 학문적 성취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학문적 성취야말로 유교국가 조선에서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

 

- 이도는 재위 기간에 총 1,898회의 경연을 개최하는데, 이도 경연의 특징은 실용적

  이라는 것이 특징으로 학습 성과는 재위 후반기 각종 개혁의 모태가 되었다.


- 즉위 10년차(1428) 즈음 사회적 범죄(문제)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나타나면서

  이도는 통치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고민하게 되는데 관료들의 부패(1426)

  백성들의 풍속 , 민풍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며 사회질서 안정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공자는 백성을 먼저 부유하게 하고, 다음에는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맹자 역시

         먼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후 교육해야 함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왕도정치이다.

         ,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왕도정치의 시작이고, 교육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왕도 정치의 완성임을 깨닫는다.

   ---> 백성들이 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 과학기술 분야의 수많은 업적도 결국은 농업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농사직설과도 같은 증산법을 만들어도 백성이 글을 몰라 농사 권면이 

          지지부진 

   --->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작업의 연장으로

          교민은 훈민으로 연결되었다.


- 잦은 개혁으로 인한 관료들과 백성들의 원성을 줄이고 개혁에 동참시키기 위해 또 

  법 자체가 지닌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여론 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 1436년 이도는 의정부 서사제로 통치제도를 전환했다. 서사(署事)란 일을 처리한다는

  말로,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제도인 반면, 서사제도는

  의정부의 대신들이 주요 안건들을 미리 검토, 의논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통치제도

  이다.

  즉, 6조는 안건을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의논해 아뢴 뒤에 

  임금의 분부를 받아서 도로 6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는 제도이다.

  주된 이유는 정치적 책임의 분산으로 이도는 독단적으로 강행한 정책의 실패를

  체감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정치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의 정치적 수혜자는 황희였는데 그는 헌장(憲章)’에 밝았기 때문인데 헌장이란 

  선왕인 태조와 태종이 이룩한 정치적 유산을 의미한다

 

- 1438년 신개는 무인정변을 조선의 건국을 이어 다시 왕업을 안정시킨 행위로 평가

  하면서 기존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데 무인정변이란 정안군 이방원이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법 그리고 태조를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의 

  신하를 제거한 쿠테타를 말하는데 이 작업은 1447년 정인지와 권제,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편찬으로까지 연결되며 신개의 이런 주장은 추후 태조실록에도 

  반영된다.

   ---> ‘무인정변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귀향가 있던 이숙번을 초치하여 

          과거사에 대해 재조사를 추진하게 한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국사 교과서를 다시 읽는다 셈치고 이런 책은 한 권씩 사거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크게 생각한 시간이긴 했지만 나의 이런 요약도 만족스럽지 못 해 한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도자 본색 - 1인자의 본심을 읽어야 국가의 운명이 보인다
김덕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7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 지도자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혹은 지도자라면

태생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시대와 환경이 요구하는 지도자로 육성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 상을 그려보기 위해 

해당 작품을선정해 읽어 보았는데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작품은 우리 모두가 평소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다 알고 있는 고대 로마시대 

대표적 위정자의 통치 등극과정 그리고 그들이 행했던 통치 내역과 업적 분석을 통해 

지도자라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또 위기의 순간에 어떤 혜안을 갖고 난국을 헤쳐 나갔는지를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우리의 여의도와 용산을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당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과 비슷한 사람을 찾지가 쉽지 않았다.

어찌되었던 간에 작품을 통해 지도자 상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얻어보고자 덤벼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지도자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언젠가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이야기하고, 강조한 사실이

있지만 지도자는 스스로 타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여러 작품을 통해 얻은 결론은

첫째, 지도자를 키우는 확실한 조력자(부모, 친구 등)가 있어야 하고

둘째, 지도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하며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도자는 태생적으로 그런 인격을 갖고 태어나야 하며

넷째, 다른 여러 조건보다 우선적으로 어떤 경우라도 상대를 포용하려는 강력한 

      자세가 있어야 하고

다섯째, 지도자로 성장하기 위한 각고의 개인적인 노력과 더불어 지도자를 지지해

         줄 강력한 동참세력이 있어야 한다

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금의 우리 주변을 보면 어떤가?

기가 차고, 한심스런 작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으며 모두가 난리를 치며 당신은 틀렸다고

외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은 억울하며 아니라면서 모함이라고 울부짖으며

난리를 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최근에 방송된 모 프로에 나온 어느 유명 여자 탈렌트가 어느 영화 촬영 당시 아무리 노력

해도 시나리오에서 요구하는 표정 연기가 안 되어 속상해 하며 돌아서서 눈물지을 때 그

영화감독이 문자 한통을 보내 왔다고 한다.

모두가 환호할 때 인정하십시오

라는 문자였다고 한다.

자꾸 아니라고 하지 말고 모두가 의심할 때 인정하고 자중 모드로 들어가는 그런 지도자가

보고 싶다. 진짜로 .......

 

[선견지명의 함정] ---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가이우스)

- 기원전 2세기 중엽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해 서부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편입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각종 전리품과 전쟁 포로의 유입으로 경제적 활기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동방의 선진문물이 급속 유입

전쟁의 장기화, 대농장의 등장으로 중소 자영농이 급속 붕괴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사회 혼란 가중의 폐해 발생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즉,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

-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는 한니발을 물리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인 코르넬리

  아와 결혼하면서 권력을 독차지하나 12명의 자녀만 남기고 죽는다.

자녀 중 그라쿠스 형제와 셈프로니아()만 남고 모두 죽는다.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재혼도 거부한 채 자녀 교육에 몰두, 그라쿠스 형제를 로마의

   위대한 개혁가로 성장시킨다.

딸은 그라쿠스 가문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스키피오가문과 혼인하나 개혁 운동에

   앞장선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개혁에 중도적, 부정적 견해를 보인 스키피오파 가문과

   반목하게 된다.

- 그라쿠스의 형인 티베리우스가 제안한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자 원로원중심의 기득권

  과 평민중심의 민회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한 끝에 기득권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티베리우스의 비타협적이고 강력한 개혁 추진과 비록 가짜 뉴스로 인한 오해로부터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원로원이 주축이 된 폭력 행사가 사회 위기를 증폭해 불신과

   증오의 불씨를 심는 결과를 초래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도 형처럼 평민을 위한 개혁 운동에 참여하나 죽임을

   당하고, 그의 동생들인 그라쿠스 형제 역시 호민관에 등극하여 평민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다 형은 1년 만에, 동생은 2년 만에 정치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공화정 초기의 타협과 소통의 정신은 사라지고 극단적인 대치와 폭력만 난무하며 사회

   갈등이 심화돼 결국 로마는 길고 긴 내전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혼란의 시기가 지나가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평화시대를 연 이후 그라쿠스 형제

   가 제시한 개혁정책들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반대하는 자들을 일소하는 대신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따라서 나만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개혁은 명분을 잃은 채 이권

  다툼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의 실수였다.

 

[피를 부른 지도자의 근시안]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와 죽음 이후 로마는 민회와 원로원, 평민파와 귀족파로 분열

  되고, 마리우스(평민파)와 술라(종신 독재관)의 등장

- ‘술라는 몰락한 귀족 집안이었는데 여인(부유한 연상녀와 계모)를 만나 재산과 명예를

  물려받으며 정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 당시 실권자인 집권자 마리우스밑에서 재무관을 지낸 술라는 킴브리아 전쟁과 동맹국

  누미디아가 일으킨 유구르타 전쟁등을 거치며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집정관에 당선

  되는데, 이때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을 도입 징집제도를 개혁하지만 추후 징병제도의 

  개혁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개혁이 되는데,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며 평민파의 지도자로

  성장할 때 부관이 바로 술라였다.

- 50대의 마리우스와 30대의 술라....술라가 마리우스의 종려 집정관의 부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둘 사이는 분열하게 된다. 법무관에 오른 술라는 동맹국 전쟁으로 입지가 부각

  이때 흑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무리들과의 전쟁인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누가 할 것인가를 놓고 평민파의 대표자 마리우스와 귀족파의

  술라가 갈등하게 되는데 귀족파의 지지를 받은 술라가 총사령관이 된다

   ---> 로마 역사상 최초의 내전발발(마리우스파와 술라파)

- 마리우스는 술라에 의해 아프리카로 도망갔다.

  ‘킨나의 도움으로 국내로 복귀한 그는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하지만 

  이내 술라의 복귀로 다시 정권을 빼앗긴다.

  이 과정에서 술라가 저지른 적폐 청산은 마리우스파의 절멸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이후 밀어붙인 개혁은 반동적 성격이 강해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면 당장의 효과는 있어서 내 뜻을 실현하고 사회 안정을 이룰 

  것처럼 보이지만, 그 힘 자체가 영원할 수 없다. 내가 힘을 잃는 순간 상대가 발톱을

  드러낼 것이고, 평화는 깨진다. 그런즉 복수의 연쇄를 끊는 지도자, 자신을 핍박한

  상대를 용서하는 지도자는 위대하다.

* ‘술라의 정권 등극 후 보인 행태와 이전 정부 시절 보인 행태가 거의 유사하다.

술라가 유사시 원로원이 특정인에게 비상 대권을 주는 패착으로 인해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듯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어느 단체장의 어설픈 시민단체에게 각종 이권을 줘서

그럴듯한 통치 모습을 보였지만 종국에는 그들로 인해 스스로 먹칠한 행동가가 되었듯

술라의 묘비명은

친구에게 선행을 베푸는 데 그를 따를 친구가 없었고, 적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데 그를

따를 적이 없었노라는 문구는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 또는 핑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카이사르는 고모부인 평민파의 수장 마리우스가 죽자 그의 오른팔 킨나와 협의, 그를

  유피테르 신전의 제관으로 임명하고 킨나의 딸과 혼인하지만 술라가 카이사르에게 

  사면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촌과의 결혼을 요구하며 회유

- 카이사르는 우여곡절 끝에 속주의 참모로 공적을 세우며 은신하고 있던 중 절대 권력자

  술라가 죽자 집정관귀족파간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는데 또 다른 집정관이자

  실력자인 레피두스가 카이사르와 함께 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법정의 변호인 혹은 고소인으로 활동하는 요즘말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입지를 다진다.

-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귀족파의 실력자 돌라벨라히브리다를 고소하면서 그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 졌으며 동시에 수사학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키케로가 글과 말로써 국가에 봉사했다면 카이사르는 정치와 군대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와중에 15명으로 구성된 신관단의 한 명인 코타가 죽가 카이사르가

  신관으로 선임되는데 이는 정무관으로서 첫 번째 경력이 된다.

- 카이사르가 살았던 공화정 시대의 로마는 어떤 관직이라도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한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에 인민의 지지 없이는 합법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었는데 지도자

  는 인민의 지지 위에서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카이사르는 여러 속주의 참모(재무관 등)로 일하면서 역량과 능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술라의 손녀(폼페이아)와 재혼하면서 또 평민파의 대부인 마리우스의 정신을 계승하면

  서 정체성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평민들의 지지를 쉽게 얻는다.

- 카이사르는 평민을 위한 혁신적인 조치들을 단행함과 동시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정권을 공동관리하나 크라수스의 패전으로 정권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자 세력이 더

  강했던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에 선임하면서

  내부 암투가 시작된다

- 카이사르는 평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여러 개혁조치를 취하면서 폼페이우스와 파르살루

   스 평원에서 대접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하는데 아프리카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는 당시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근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삼두정치를 종식된다

- 카이사르가 험한 시기를 보낸 이후 보여준 것은 복수가 아닌 관용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였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적극 대항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같은 편으로 간주하였으며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누구든 한 사람은 살려주어도 된다고 했다. 심지어 정적들

  이 관직에 나가는 것조차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 지도자는 국가 운영의 중심, 즉 법과 제도가 인민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카이사르는 사리사욕과 기득권 유지에 집착한 원로원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 그는 많은 정치적 개혁과 민생 복지를 위한 노력을 많이 했으나 갈리아전쟁에서 승리

  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끈테 권력의 최고 자리를 탐한 결과 왕을  두지 않는다는 

  공화정 초기 정신이 크게 훼손되면서 원로원의 미움을 사 죽게 된다.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울 때 로마에는 왕을 두지 않는다는 선언에 따라 누구든지

  왕이 되고자하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더라도 죽어야 했다.

- 지도자는 시대를 정확히 읽고, 인민의 지지를 얻으며,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것을 겸비한 인물이었지만 정적인 공화파의 반격의

  빌미를 준 권력욕, 명예욕 그들을 과소평가한 안이함이 그의 치명적 실수였다.

-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늘 경계해야 한다. 인권변호사 카이사르와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므로.

 

[처음에 이기고 마지막에 패배하는 지도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카이사르 사후 타협 및 고도의 정치 행위로 로마의 위기를 극복한 지도자, 또는 외세와

  손잡고 로마를 배신한 매국노, 안토니우스를 향한 극단적 평가가 있다.

  특히 부정적 인상을 각인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키케로로 그는 카이사르

  암살 당시 안토니우스를 함께 죽이지 못한 것을 최대의 실수라 했다.

  키케로는 추후 안토니우스의 계부가 카탈리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되자 이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키케로에게 복수하며 둘 간의 악연은 막을 내린다.

-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을 비롯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악티움 해전 및 알레산드리아

  전투에서 연이어 패한 전력과 각종 영웅전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등으로 역사적으로

  안토니우스에 대한 부정적인 경향이 높은 게 사실이다.

- 안토니우스의 조상은 보수적인 성향의 귀족파였지만 할아버지가 술라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마리우스에게 처형당한다. 모계의 집안도 카이사르의 친척이었으나 마리우스와

  킨나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전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 안토니우스의 친구 클로디우스를 카탈리나의 모반연루자로 키케로가 지목, 둘 사이는

  급속히 악화되는 데 평민파 운동에 가담하면서 클라디우스가 키케로를 추방하는 데

  성공하지만 훗날 이 일로 귀족파에게 살해 당한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로 넘어가 수사학을 배워 카이사르파의 일원이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 안토니우스는 수많은 전쟁에서 많은 공적을 세우는 등 군대에서 역량을 뽐내기 시작.

  특히 이집트 내전에 관여한 것을 기회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로마는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를 주축으로 하는 귀족파, 카이사르를 주축으로 하는

  평민파와 갈라져 있었는데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된 옥타비아누스는 초기 안토니우스와 반목하는 듯하다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의 동생들을 권력의 주변에 배치하며 권력을 확장해 나간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관대히 처리한 결과 카이사르

  의 병사들에게 반감을 샀음을 잘 알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들기 시작

- 공화정의 재건을 꿈꾸던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카이사르의 후광과

  병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공화정의 원로들을 제거하고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카이사르파의 재건을 도모한다

- 카이사르 제거에 앞장섰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니아누스와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후,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돕고 공화파를 지원했는지를 묻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로마의 지원이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이집트의 지원이 절실했다.

-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과의 악티움 해전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패한 안토니우스는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인(에로스      에게 지시하지만 막상 그 순간에 하인이 이를 결행치 못하고 스스로 자결하다 미수에 

  그친 상태에서 자신을 찾으러 온 클레오파트라의 하인 디오메데스에 의해 발견되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인도되어 그녀의 품안에서 죽는다.

- 안토니우슨은 전시의 군사적 재능은 출중했지만 평시의 통치 능력은 부족했던 것이

  카이사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의 최대 실책은 정치권력의 근거지를 로마가 아닌 이집트로 잡았다는 것이다

- 지도자로서 안토니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 분열을 극복한다는 대의가 아니었다.

  카이르 암살 뒤 혼란을 수습할 때나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유자할 때나 모두 자신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부터 고민했다. 그래서 그의 대통합은 힘이 없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야합이었다. 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모든 것이 자기 계산대로

  되고 있다는 안일함 속에서 안토니우스는 자멸하고 말았다.

 

[굴욕을 대하는 태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 졸지에 로마의 일인자가 되어 버린 옥타비아누스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권력을 내려

  놓고 즉, 대권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반납하고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한 그는 인간 이상의

  ‘존엄한 자라는 뜻인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기틀 마련

- 옥타비아누스(이우스투스)에 대한 평가

  1) 권력욕에 취해 적과 손잡고 친구도 배신하는 불신의 아이콘

  2) 남의 아내를 빼앗은 부정한 자

  3) 권력 세습을 위해 외동딸을 세 번이나 정략결혼의 희생물로 삼은 잔인한 아버지

  4) 어떠한 굴욕에도 포기하지 않은 야심가

  5) 국가를 혼란과 무질서에서 구한 구구의 영웅

- 옥타비아누스의 집안은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덕분에 아버지가 카이사르의

  둘째 누나(율리아)의 딸인 아티아와 결혼하는데 그가 태어날 즈음 카이사르는 평민파의

  우두머리로 서서히 떠오르는 별이었다.

- 카이사르의 죽음을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친구와 동행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이때 하층민 출신이자 친구이자 충성스런 이인자인 이그리파가 있었다.

  로마에 입성한 옥타비우스, 안토니우스는 둘 다 카이사르파였지만 안토니우스 온갖

  방해와 비협조로 유언장에 언급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의 세력 확장에 우려하던 공화파가 옥타비우스에게 손을 내민다.

- 원로원의 배신으로 옥타비우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간 안토니우스의

  방해로 미뤄오던 양자 입양 절차를 마무리하고 옥타비아누스라는 새 이음을 얻고 명실

  상부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우뚝 선다.

- 내분을 극복한 카이사르는 본격적으로 공화파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당한 이는 안토니우스를 가장 비판하고 옥타비아누스를 배신한 키케로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력 집권에 도움을 준 삼두정치의 동료(섹스투스, 레피두스)를 

  하나씩 제거하는데 33세에 로마의 일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 그가 내전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아그리파라는 친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 후계를 이으려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그의 절친이자 사위인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권력 세습의 불안을 느끼자 구원투수로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스우스 네로

  였다.

- 아우구스투스는 권려과 권위를 자신에게 집중하고 세습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지중해 세계 전체에 로마의 평화를 확장해 이후 서구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반대급부로 공화정이 보장하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행사된 로마 인민의 자유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 야심을 품지 않는 지도자는 없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힘을 갈망한다. 꿈이 큰 만큼은

  고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포기할 상황에서도 지도자는 가능성을

  찾는다. 그리고 집요하게, 성실하게, 정확하게 목표를 좇는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지도자의 그릇을 판가름 할 기준이다.

 

[완벽한 통치의 비밀] 트라야누스

- 국가의 정의로운 시스템 덕에 황제에 오른 속주 출신의 인물이 황제 트라야누스로 그는

  제12대 황제 네르바의 양자로 지명된 끝에 다음 황제로 즉위했고, 제국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기를 대표하는 황제가 되었다.

- 황제 네르바 시절에 각종 복지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전까지 로마의 복지는 지배층이

  마련한 기금이나 황제의 사재로 이루어졌는데 처음으로 국가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이 긴축되면서 근위대가 들고일어나는데 이를 완벽하게 방어한 인물이

  트라야누스 즉, ‘게르마니쿠스였던 것이다.

- 로마 전통의 상징인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사소한 절차와 의례도 성실히 따랐지만 원로원에 끌려다니지 않았고 황제로서

  권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평소 긍정적인 이미지와 합쳐져 경건하고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

  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뛰어난 자들을 대거 선발해 원로원 의원으로 삼았다.

- 황제 네르바가 도입한 각종 복지 정책을 알리멘티라 불렀는데,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고

  인구 감소로 이어지자 로마군은 제국을 방어할 뿐 아니라 속주들을 로마화해 제국의

  통일성을 선도하는 주요 자원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알리멘트라는 복지정책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

- 트라야누스는 공공 건축에서도 로마의 위상을 높인 위대한 건설자였는데 복잡하고 

  얽히고 설킨 복지 문제, 인구 문제, 경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 지도자로 그가 눈앞의

  인기를 얻는 것보다 국가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임을 잘 이해한

  지도자였다.

- 3세기 중반 이후 신임 황제가 즉위하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행복하고

  트라야누스보다 더 훌륭한 황제가 되시라라는 말로 축하를 전하는 게 전통이었는데

  이런 기대에 부응한 황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 지도자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그래서 어떤 시스템으로 구체화하는지다. 트라야누스가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 개인이 정의로워서이기도 하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정의로운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아집의 차이] --- 하드리아누스

-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양자로 로마의 제14대 황제로 그는 21의 재위 기간 중

  13년을 순행하는 데 받친 발로 뛰는 황제였던 반면,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던 그를

  트라야누스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순행 중에 만난 안티노우스라는 청년과

  동성애에 빠지기도 한다.

- 파르티아 원정을 나갔던 황제 트라야누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나

  친위대장인 아티아누스와 황후인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황제로 등극.

- 전임 황제 트라야누스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에 따른 속주들의 반발에 따른 뒷수습은

  후임 황제인 하드리아누스 몫이었다.

- 지도자는 다양한 이유에서 정치적 결절을 내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수도 있고,

  자신의 당파를 위해서일수도 있다. 다만, 그 결정의 궁극적인 평가 기준은 공공의

  이익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다.

- 순행 중 속주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뜻을 관철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한다.

  즉, 유대인의 성지 예루살렘 근방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자신의 씨족명을 붙인

  식민시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로마 - 유대전쟁이 한창이던 70년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터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는 실수를 범한다.

  이에 반발한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 50만 명 이상이 죽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남은 유대인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했고, 정해진 날만 예루살렘 출입이

  허용되었다. 유대 지방은 시리아 팔레스티나 속주로 편입되어 철저히 관리되었다.

  유대인들은 제국 곳곳으로 흩어졌도 다시 나라를 세우기까지 1800여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유대인들의 비극,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하드리아누스는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 군단도 손 보았는데 이들의 임무는 변경 요새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 밖의 상황에 대비한 새로운 보조 군단인 누메리도 창설하였다.

  또한 팔랑크스라는 새로운 전술도 개발하였다.

-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법제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법률가들이 합의해 제출한

  보고서에 법적 권위를 부여해, 판사들이 유사한 사건을 심의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추후 로마대법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여러 차원에서 진행된 하드리아누스의 사법 개혁은 로마의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하드리아누스의 여러 업적 중 다른 황제들을 압도할 만큼 탁월한 것은 제국 전역에서

  추진된 공공 건축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 로마시의 판테온이며 아직 남아 있는

  또 다른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 대능원이 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즉위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을 뿐더러 로마 황제 중 그만큼 그리스

  문화에 빠진 사람은 없었고 그리스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다. 이런 모든 과오에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오현제에 드는 것은 순행으로 보여 준 지도력 덕분이다.

 

[함께 통치하는 지혜] --- 디오클레티아누스

- 235년부터 284년까지 무려 20여명의 황제가 등극하나 평균 3년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살해당하거나 쫓겨난다. 3새기의 로마는 안과 밖이 모두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제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개천출신으로 광대한 

  제국을 혼자 통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권력 투쟁만 불러일으킨다고 

  진단하며 권력을 나누기로 생각한다.

- 42대 황제 카루스의 근위기병대장이었던 디오클레스는 황제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를

  추종하던 추종세력에 의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다른 황제들에게

  없던 정치 감각이 있었고 원로원의 지지을 얻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로마시를 방문한다.

- 북방(게르만)과 동방(페르시아)의 끊임없는 외침에 고민하던 황제는 잉를 막아내기 위해

  서방을 맡아 다스릴 부황제(막시미아누스)를 임명하게 되는데 이 전략이 크게

  성공한다.

-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둘 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웠고,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으며 각자의 황국와 군대와 행정기관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제국이 둘로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명의 황제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8년만인

  292년 두 황제가 각각 부황제를 두어 총 네 명이 통치하는 ‘4제 통치를 도입한다.

- 공동체가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지도자는 놀라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권력을 나눠 다른 훌륭한 이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공동체가 겪는 문제는 대부분 너무나 복잡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결국 식물 지도자되기에 십상이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지도자에게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 민생을 위협하는 인플레이션이 심했고, 이를 잡기 위해 조세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그리스도교를 극심하게 탄압한 시대였다.

- 그는 생전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난 로마사 유일의 황제였는데 집권 과정에서 경쟁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제위를 차지했다. 그는 발칸반도를 근거지로 한 군인

  황제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군사적 재능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앞선 

  군인 황제들과는 다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치 감각과 능력을 발휘해 끝이 보이지 

  않던 혼란과 무질서를 끝냈다.

  그의 최대 공적은 50여 년간 계속된 군인 황제 시대를 마감하고 제국을 위기에서

  건져냈다는 데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