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 전략형 인재를 위한 역사 다시 읽기
최중경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1월
평점 :
추천 권유도 : 8
(정치관심자 9, 비관심자 7)
작품은 이미 흘러간 역사를 오늘의 잣대로 역사를 재단해 보았을 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또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자는 의미로 저술된 것으로 나는 이해하며 읽었다.
본 작품을 지난 2021년 처음 접했는데 당시 여러모로 지금처럼 국회가 시끄러울 때 강성의 이미지로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던 인물 중 한 사람이 ‘저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작품을 처음 접하고는 내가 알고 있는 역사지식 수준으로 본 작품 내용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저자의 강성 이미지로 인해 독후감 정리를 주저하며 당시의 소회를 별도 보관하고 있다가 최근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몇 수준 낮은 ‘상임위원장’이라는 작자들의 개그콘서트를 방불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장관
청문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랄과 발광에 가까운 인간들의 작태를 보면서 과거 큰 임팩트로 다가왔던 작품 내용과 비슷한 면이 떠올라 본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되었는데,
어떤 내용에서는 절로 감탄하게 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어떤 주장에서는 너무도 저자의 개인적 소견이 강하거나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어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수위 조절 차원에서 또 역사에 대한 일천한 지식으로 저자의 주장에 논박할 능력이 부족해 정리에서 일단 제외하였다.
작품도 지적하고 있지만 우리의 정치와 리더들의 소명 의식 부족의 큰 원인은
‘현대판 음서제도’와 ‘노블리스 오블리주 미흡‘이라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었는데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며 특히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어떤 변곡점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위 두 가지 문제점은 아주 고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해당 문제는 최근 이루어진 ‘장관 청문회’와 ‘국정감사’에서 또 형태를 달리해 나타났다고 판단하는데,
‘음서제도는 아빠 찬스’라는 형태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미흡’문제는 ‘공기업 수장 임명 부실 검증’과 현 집권 정부가 과거 야당시절 전 정부에 대해 독설에 가깝게 퍼부어 대던 과도한 물쓰기와 골프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치졸한 행동을 보여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만 그 점에 대해 이상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 생각하며 저자도 수년전 이미 이런 정치판에 ‘딱 맞는’ 현상을 아래 문장으로 예견하고 있었는데 저자의 주장을 보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지배층은 국가를 경영하는 인재집단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기득권을 맹목적으로 수호하려는 패거리집단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리는 한심한 집단으로 전락했다.“ (P 99)
라는 문구로 ‘임진왜란’ 자리에 작금 우리 정치 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을 적용해 보면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는 즉, 오늘의 이런 개판인 현상을 정확히 예측한 문구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것은 리더를 향한 ‘용비어천가’를 외치며 너도나도 충직한 측근임을 나타내고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와 함께 수준 낮은 비난과 지적질로 협치를 통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고 성장시켜야 할 상대를 싸잡아 비난으로 일관하며 리더의 눈에 들려고 난리치는 저열한 인간들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면서
‘인조가 병자호란 때 그 수모를 당한 이유가 바로 음서제도로 등극시킨 측근들 때문이었다‘
라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며, 해당 작품 저자 주장을 내세워 우리 역사의 잘잘못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 내가 이야기해도 들어줄 대중도 없겠지만 -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관점의 변화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이지 어느 수준 낮은 인간처럼 역사에 대해 편협된 시각을 질타하는 대중에게 몰상식하게 ‘후지다’라고 표현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작품을 통해 느낀 점은 우리의 리더를 과거 정치 권력의 실세였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던 강력한 카리스마의 ‘현대판 숙종‘으로 만들지, 아님 모친에게 급소를 붙잡혀 후세도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한 ’현대판 경종‘으로 만들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그렇게 정권욕에만 눈이 어두웠던 ’현대판 세조‘로 만들지는 리더를 보좌하고 있는 측근들의 자세에 달렸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제1장 우리 역사의 두 가지 가정
(전략적 사고가 필요했던 순간)
- 중대한 역사적 기로에서 지도층이 어떤 의사결정을 내리는지는 역사의 진로는 물론
국가와 민족의 운명까지도 결정한다. 만약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의
지도층이 실제 역사와 다른 의사결정을 내렸다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지도층의 책임을 이해
하게 되고 지도층의 자격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지도층은 국민 위에 군림하고 특권을 누리는 위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고뇌하고 노력
해야 하는 고달픈 자리로 국민 대다수가 지도자 자리의 무게를 인식할 때 전략적 사고
능력을 갖춘 진정한 지도자가 양성될 것이고 국민들도 진정한 지도자를 알아볼
것이다.
1.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 만주족 편에 섰더라면?
-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해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 홍타이지는 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의 후방
지원자인 조선을 평정할 필요를 느낌.
당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친명정책으로 청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냄
-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의 반정 명분 중 아버지의 나라인 명을 배신했다는 논리로 인해
인조는 친명정책을 공고히 하나 후금은 이를 문제 삼아 1627년 조선을 침략
--->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됨.
- 명과의 연합 작전을 하던 중 후금을 공격한 일과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에서의 결례로
인해 청나라의 조선 침략 명분을 주게 됨.(병자호란)
- 청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할 것을 제안하는 등 우호적이었다. 여진족은
말갈족의 후예이고 말갈족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해 세운 나라가 발해였기 때문이다. 여진과 조선은 실제로 함경도 지역에서는
서로 통혼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 누르하치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경주 김씨의 후손이라는 해석이 있다고 한다. 청나라와 손을 잡고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면 어떠했을까?
[한족에게 나라의 운명을 의탁한 이유?]
1) 예의와 명분을 집착하다 정신적인 종속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2) 여진족을 오랑캐라 하여 멸시하며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는 데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3) 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적 학문을 숭상해 대외 정보 수집과 분석에 소홀했다.
4) 중국 왕조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저자는 후기 글에 이렇게 쓰고 있는데
2. 14세기 원명 교체기에 고려가 요동을 차지했더라면?
- 14세기 중엽 홍건적 일파의 두목인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군사적 입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중원을 차지했다고는 하나 만주와 조선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 당시 역사적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한족이 요동을 실효적으로 직접 지배한 시기는
고구려 멸망 직후이기 때문에 한족이 직접 통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 이성계의 조선은 알아서 굽히고 들어가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맺었고 공민왕 이후
중단되었던 공녀까지 바치는 제후국 신세가 되었고 그 결과 몽고군에 항복한 원나라
부마국이 되었던 고려시대보다 훨씬 낮은 대우를 받는다.
- 위화도 회근으로 한민족이 자력으로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를 회복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를 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신채호 선생은 고려시대 묘청의 난을 고구려
고토 회복을 추구하던 세력이 몰락함으로서 대륙 진출의 끔에서 멀어진 중대사건
으로 인식했다. 위화도 회군이야말로 민족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 중 하나이다.
- 만약 당시 요동정벌이 이루어졌다면 요동의 인적 자원을 장악한 고려는 만주로
세력을 넓혀서 군사력 측면에서 명나라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제2장 성장판이 닫혀 있던 조선
1. 잘못 설정된 조선의 건국이념
- 조선은 한 수 아래였던 일본에 식민지가 되는데, 조선 조정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일본의 호전성을 이야기하며 일본을 비난하기 전에 조선을 먼저 돌아보고 조선의
오류를 찾아내야 한다. 조선의 오류를 찾아내 그 오류가 발생한 원인을 찾아내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조선의 오류를 찾아내지 않고 일본 탓만 하면 또다시 유사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 건국이념에 대한 저자의 주장
건국이념은 시대가 바뀌면서 국가의 장기적인 성장을 막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
* 총 7개의 분야에 걸쳐 오그라진 조선의 성장판이 닫힌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 아래 제목은 내가 작품을 읽고 더 근접한 내용으로 만든 것임.
사대주의와 중농주의가 초래한 자충수
미약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해금정책(海禁政策)’과 ‘폐광정책(廢鑛政策)’
국민총화를 힘들게 했다. (논공행상/양반들/사제관계 등)
기술 선진국이던 조선, 산업혁명의 흐름을 놓치다.
정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
조선의 불찰로 탄생한 텐진조약.
1) 사대주의 및 중농주의가 초래한 자충수
- 명나라에 종속된 사대주의는 17세기 만주족 굴기에 따른 중원 세력의 판도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명분론에 매몰되어 붕괴되는 명나라에 집착하는 결과
초래 또 ‘여진족 = 오랑캐’라는 선입견으로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될 청나라를
지나치게 자극
- 조선 지배층의 ‘집단인지장애 증상’은 조선 사대부가 숭상한 ‘성리학’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는 하나, 이는 성리학의 문제라기보다 성리학의 오용, 남용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결국 명분과 예절을 중시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전이 없는 정체된
폐쇄사회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인 통치 철학일 수 있으나 외부로부터
도전이 끊이지 않는 역동적인 개방사회에 맞지 않는다.
---> 체제 유지 또는 기득권 유지를 위한 안전판으로 유교사상이 이용됨.
- 중화사상에 매몰된 사대주의 외교가 평화공존을 위한 실리 추구를 벗어나 맹목적인
복종으로 변질, 중국 이외의 국가들 특히 서양 국가들과 관계를 설정하거나 국제
정세를 파악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버렸다.
---> 임란 당시 의병장 및 관군 장수들의 공적은 깍아내리면서 명나라 이여송이 이끈
명나라 원군을 높이 평가한 점, 임오군란 당시 국가의 위기가 아닌데 부패한
지배층이 청나라에 원군을 청한 점 등은 중화사대주의를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실리외교가 아닌 지배층 기득권 유지를 위한 안전판으로 사용되었다.
- 중농주의에 입각한 경제체제는 공업에 종사하는 장인과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낮춰
근대국가 발전의 핵심요소라 할 수 있는 기술개발과 상용화를 가로막는 부작용 초래.
- 조선의 왕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구조로 사대부와 왕만 놓고 보면 입헌
군주제 비슷한 국가 지배구조로 중국에서도 조선을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조선의 신권정치는 실수를 줄이는 효과는 있을 수 있겠으나 탁월한 군주가
속도감 있게 의사결정을 통해 국가 역량을 집중하기 어려웠으며 우매한 군주 등극 시
부패가 가중되거나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 매관매직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며 동학혁명으로 이어져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2) 미약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 양반은 사실상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 없이 특권만 누리는 계급이었다.
한마디로 국가 위급 시 양반 즉 지배층 자제들이 앞장서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했고
심지어 돈이 있거나 빽이 있으면 ‘방군수포제’, ‘대립제’ 등을 통해 군대를 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호적상 양반 숫자의 급증은 군역 인구의 감소와 국방력 감소와
연결되었다. 특히, 납세 인구의 감소는 국가재정의 취약성으로 나타나 국방력 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폐해 사례는
1866년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에서 총 595명의 장졸이 참전했는데, 그중 67%인
367명이 민간인 포수였다고 한다.
---> 조선이 518년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제후국 지위를 청하여 중국에
종속되어 중국의 공동운명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1911년) 직전 대한제국이 무너진(1910년)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3) ‘해금정책(海禁政策)’과 ‘폐광정책(廢鑛政策)’
- 삼면이 바다인 조선은 농지가 부족한 반도국가로 해금정책으로 무역을 통한 번영의
의지를 스스로 꺽어버리고 가난과 기아에 허덕였으며 풍부한 지하자원을 사장.
위 두 정책은 이웃인 일본에게 번영의 기회를 양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해금정책은 중국의 주원장이 중국내 권력투쟁에서 반대세력이 해상 세력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내린 정책이었는데, 조선은 특별한 고찰 없이 이를 따라했으며
조선이 막을 내릴 때까지 이 정책을 고수한다.
여기에 더해 섬에서 거주하는 ‘공도정책’까지 추진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반사이익으로 ‘후추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 조선은 개인이 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쓰다가 병자호란(1637년)이후
청나라와의 무역을 위한 은의 수요가 늘자 1651년부터 개인 광산 개발 허용한다.
연산군 시절(1506년) 세계 최고의 제련기술인 ‘연은분리법’을 우리 손으로 개발
하였지만 중종에 의해 사치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폐기(1544년)되었고,
이 기술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막대한 양의 은을 생산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일본은
세계 최대의 은 생산국이 되었고 은을 매개로 한 국제 무역에 참여해 국부 축적했다.
---> 중종이 은 제련기술을 폐기한 이유는 ‘사치풍조’와 관련되었으나 실상은
은 생산량 증가에 따른 신흥세력의 등장을 경계한 것일 수도 있다.
---> 1812년 발발한 ‘홍경래의 난’도 홍경래가 광산을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모아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4) 국민총화를 힘들게 했다. (논공행상/양반들/사제관계)
-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최일선에서 싸운 의병장들을 배제하고
역으로 누명을 씌운 과 이순신 장군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을 보면서 또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며 임금의 피난길을 동행한 사람들 중심으로 공적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병자호란과 구한말 외침에 항거해 일어나는 의병의 숫자를 격감시키는 결과 초래.
--->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국민이 일치단결해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응집력을 상실한 나라 즉, 국민총화가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 또한 돈만 있으면 양반 신분도 얻을 수 있어서 조선 개국 때 10% 미만이었던 양반이
조선 말기에는 최고 70%까지 이르러 세수의 부족과 군력의 부족 등으로 또 세금
포탈을 위해 호적을 허위로 기재하는 것이 허용된 사회 전체에 영이 설 수 없는
구조였다.
특히 ‘음서제도’로 인해 조선 지배층이 대대손손 벼슬길에 나가면서 고관대작을
독차지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할 유인도 없어졌진 것도 조선의 대외감각을 무디게 한
중요 원인이었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17세기 초부터 난가쿠(蘭學)라 해서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 정도였고, 페리제독을 통해 일본이 개항됨과
동시에 미국의 산업기술 능력이 도입되면서 일본은 일취월장하게 된다.
- ‘군사부일체’는 성리학의 주요 축으로 스승이라 할지라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록 스승의 틀린 주장이라 할지라도 제자 입장에서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국가의 중요 의사결정이 왜곡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의 큰 문제였다
또 ‘방납 폐해’를 비판하면서 대동법을 제안한 송시열이 스승인 김집이 대동법을
반대하자, 송시열도 입장을 바꾸며 대동법을 외면한다.
5) 기술 선진국이던 조선, 산업혁명의 흐름을 놓치다.
- 최석정의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수학책
- 세계 최초의 산탄대포(조란탄) / 세계 최초의 작열탄인 ‘비격진천뢰’라는 지연탄 및
로켓탄인 ‘신기전’
- 기관총의 원형이라 불릴 수 있는 변이중의 ‘승자총통’
- 권총으로도 전환이 가능했던 세종 때 만들어진 ‘세총통’
- 획기적인 은 분리법인 ‘연은분리법’
- 괴테가 극찬했던 복식 부기인 고려시대 때에 창안된 ‘송도사개치부법’
위의 모든 결과물은 과학적이지 못한 건국이념으로 인해 기술자와 상인을 천하게 여기게 되었고 형이상학적인 방법론 때문에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답보 및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P 67)
6) 정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
: 저자의 주장이 일견 맞는 이야기일수 있으나 정밀하고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 없이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두 사건(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예로 들면서 ‘조선이 정보에 무관심해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일방적인
저자의 주장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패망의 여러 조건 중 특정 분야만 부각시키고 있는
저자의 주장은 평소 나의 관점과 다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존중하나
정리에서 제외하였음.
-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열두 차례 방문했지만 일본의
물질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이 일취월장한 것은 보지 않고 윤리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의 차이만 보았다. (P 79)
---> 결국, 일본발 위기요인이 축적되는 것을 방치하다 한일강제 합병을 초래한다.
7) 조선의 불찰로 탄생한 텐진조약
- 조선 붕괴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텐진조약’이다.
텐진조약의 출발점은 ‘임오군란’이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자, 일본도 제물포 조약을 통해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켰고,
갑신정변 과정에서 양국의 군대가 충돌하는 물의가 빚어져 텐진조약 체결.
- 주요 연관 사건을 연결해 보면,
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거문도 사건(1885)의 여파가 축적되고 조선 나름대로
생존해 보겠다고 별기군을 창설(1881)하지만 관리 부실로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연이어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1884)의 여파로 러, 일간 벌어진 전쟁의 배상
과정에서 ‘텐진조약(1885)’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 텐진조약을 근거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청군은 조정의 요청
대로 ‘아산’으로,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했는데, 청군의 목표는 조선의 요구대로
농민군 진압이 목적이었으나 일본군의 목표는 조선을 장악하는 데 있었다.
----> 일본군은 조선에 주둔한 청군을 공격한 다음 청나라에 선전포고 후 청일전쟁을
일으킴.
- 텐진조약은 조선과 종주국 청나라가 범한 과오와 실책의 결과물로,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청일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패가 되었다. (P 87)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
- 조선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로 산업 기반을 형성하기 어려웠고 대외무역 금지로
물질적으로 빈곤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시한부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지배층은 국가를 경영하는 인재집단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기득권을 맹목적으로 호하려는 패거리집단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리는
한심한 집단으로 전락했다. (P 99)
- 조선이 잘못된 건국이념과 재조지은이라는 왜곡된 중화사대주의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로 인해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고 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고 식민지 근대론의 궤변성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P100)
---> 식민지 근대화론은 요시다 쇼인이 주창한 ‘정한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3장 전략적 사고를 위한 역사 다시 읽기
(논쟁이 필요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질문)
- 중대한 역사적 고비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자긍심이 아니라 어두운 역사로부터
냉철한 교훈에 입각해서 추출한 전략적 사고능력이다.
1. 고구려는 왜 백제의 위기를 외면했을까?
- 백제가 고구려의 숙적인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면 고구려 남쪽이 당나라 군대에
노출될 뿐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원활한 교역으로 당나라의 군대가 강력해지는
반면, 고구려 안위가 염려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백제를 돕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당나라의 양동 작전에 말렸을 가능성
둘째, 고구려 조정이 백제의 상황을 늦게 파악했다
셋째, 백제의 구원요청을 안일하게 대응했다
넷째, 이른 붕괴로 고구려가 손 쓸 틈이 없었다.
2. ‘신립’은 왜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로 갔을까?
- 주력이 기병으로 구성된 신립의 군대는 문경새재에서 싸우자는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병력을 충주 ‘탄금대’로 옮겨 배수의 진을 치고 달천령 평야에서
싸웠다.
---> 신립 부대의 구성을 보면 주력이 ‘궁기병’으로 새재와 같은 산악지형에서는
쓸모가 적었고 갑자기 투입되다 보니 보급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새재보다
평야를 택한 것으로 판단.
하지만 평야에서의 싸움에서 완패를 하는데 이유는 논밭으로 이루어진 땅 바닥이
질척거리고 지반이 약해 기병이 속도를 내기 어려웠고 조총의 위력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3. 명이 조선을 구했는가. 조선이 명을 구했는가?
-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낸 것은 조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일본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사전 예방 조치적 성격이 강하다.
---> 명군이 주도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사실이
없다. 오히려 명 조정은 협상에 의한 해결을 추구하기 시작. (P131)
- 일본과 강화 협상을 하던 명군 장수 심유경은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명나라 군대에게 피하라고 통보한다. 결국 고립된 조선군과 조선 백성이
몰살될 때 명나라 군대는 방관했다.
또한 울산성에 웅거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공격할 때 조선군이 선봉에 섰으나
통합 사령관격인 명군 지휘관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현장을 떠났다.
- 임진왜란 기간 중 총 100 여회가 넘는 전투 중 명군이 참여한 전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또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군에 의한 폐해가 심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간단한
사실만 갖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를 평가해 본다면 결국 조선은 명나라에 의해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도와 준 것이고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P134)
4. 병자호란 때 조선군의 작전이 엉망이었던 이유?
-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다 예견된 청나라의 침공을 받는데 이에
대항하여 할 도원수 김자점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거의 수수방관한다.
그 결과, 도원수 김자점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지만 다시 부활해 영의정까지
오른다. 그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문과 출신의 병조 하급관리였으나 인조반정에
참여, 반정공신이 된다.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하는 역할과 임진강 수비사령관을 담당한 것이
군 경력의 전부다. 그는 효종시절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북벌계획을 청나라 조정에
밀고하는 배신 행위를 서슴없이 행했던 기회주의자였다.
-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극심한 불안감에 병권을 함부로 내 편이 아닌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반정공신이자 병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김자점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인조는 왕자와 중전, 후궁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면서 강화도 수비사령관으로 문관이고 전투 경험도 전무한 ‘김경징’을
임명하는데 그 역식 반정공신이었는데, 현직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었는데
그 역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자로 능력이 의심되는 자였다.
결국 병자호란 때 인조가 갖은 수모를 당한 여러 이유 중 극명한 한 가지는 ‘음서출신'
측근들로 인해 벌어진 사태가 주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5. 후기 조선통신사는 왜 중단되었을까?
- 후기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의 요청으로 1607년 이후 200년간 모두
12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으나 1811년 이후 중단된다. 그이유를 추측해 보면
1) 1811년 조선의 큰 기근과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의 난 발생으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고
2) 19세기 들어서 조선은 여러 가지 제도적 모순, 매관매직으로 인한 부패, 민란과
도적떼의 잦은 출몰, 사농공상으로 인한 산업의 피폐화, 양반 급증에 따른 국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많은 예산이 드는 통신사 파견이 어려운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
일본의 경우는 서구 열강과 잦은 교류를 통해 일본의 문화수준이 높아져 조선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사라졌고, 자신의 문화 예술작품(그림, 도자기 등)이 유럽으로
넘어가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면서 어느 순간 조선 문인들과 더 이상 대화하기가
힘들어졌음을 자각했을 것이다.
3) 조선은 해금정책으로 대외교역이 금지되어 있어 산업혁명의 물결에서 벗어나 있었고
사농공상의 사회라 자체적으로 기술이 발전하기 어려운 구조로 인해 통신사 교류가
시작된 17세기나 200년이 지난 19세기나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 수준에 별 차이가
없었고 새로운 발명품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 문화에 대한 존경보다 일본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고양
- 신분이 고착되어 있고 개인의 노력에 따른 보상과 신분 상승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였던 조선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6. 세계 유일의 자생 기독교인 조선 천주교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 조선의 천주교는 중국에 들어온 유럽 천주교 신부들에게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서학’이라 불리는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종교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P153)
- 서학을 연구하던 조선 선비 이승훈이 1784년 조선사절단의 일원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승훈이 조선으로 돌아와 동료를 신부로 임명한 후 미사를 집전하고 포교를 시작한
것이 조선 천주교의 출발점이다.
- 조선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천국, 지옥, 연옥이 불교의 극락세계 또는
염라대왕이 지배하는 지옥과 유사해 낯설지 않았고, 천주교 사제가 불교 승려처럼
결혼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정진하는 모습도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영향력은 우리 민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이 설명의 열쇠이다.
- 조선의 강력한 통제사회에서 억눌려 잠자고 있던 한민족의 유연한 사고가 천주교에
의해 다시 일깨워졌다고 보면 조선의 백성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천주교에 심취하고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한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된다.
7. 동학혁명 때 청나라에 원병을 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데, 조선의 원병 요청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명줄을 끊은 결정타가 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동학혁명은 탐관오리의 처벌이었고 일제 침략을 막는 것이었지 임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다.
둘째, 어느 일방의 조선 출병은 또다른 일방의 조선 출병을 의미하는 텐진조약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침탈이 가속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이유?
첫째, 조선 조정이 텐진조약의 세부 내용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임오군란 때 청군 개입으로 일이 풀렸듯이 가볍게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생각하고 파병 요청
셋째, 친일 세력이 고종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는데 실제로 일본군이 청군을 제압후
일본정부의 입김 아래 친일파 내각이 등장해 갑오경장이 이루어진다.
넷째, 내정 간섭을 일삼던 원세개가 청군 파병을 강요했을 가능성이 크다.
- 조선의 고위관료들이 거세게 파병을 반대하면 파병 요청이 성사되기는 어려웠을
텐데, 분명히 조선 조정의 일부 세력이 맞장구를 쳤기 때문에 파병이 성사.
8. 고종은 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을까?
-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친일내각을 견제하고 조선의 주권을 방어할 방도의
일환으로 친러파 이범진과 이완용의 적극 건의에 따라 아라사(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러시아는 고종을 볼모로 조선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서
상당한 이권을 챙긴다.
-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굳혔고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자 조선을 일본 지배아래 두는 것이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만든 사건이다.
- 조선 조정, 특히 고종은 국제정치 감각이 무디고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아관파천으로 친러국가로 오해받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거문도 사건 때 영국과 직접 대화했다면 국제질서를 지도하는 국가가 영국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크게 아쉽다.
9. [조선책략]이 청나라의 발등을 찍었을까?
- 『조선책략(朝鮮策略)』은 1880년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조선에 제시한 외교·
개화 전략서로 당시 러시아의 남하와 열강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이 어떤
외교 노선을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책으로 주요 내용은
① 친중국(親中國) :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 조선의 외교적·군사적 안전을
확보한다는 전략.
② 결일본(結日本) : 일본과 관계를 맺고 협력하여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응.
③ 연미국(聯美國) : 미국과 연대하고 수교하여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며 서양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넓히자는 주장입니다.
- 『조선책략』은 조선의 독립과 안전만을 위한 순수한 조언은 아니었으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일본 역시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따라서 이 책에는 조선의 개화와 외교적 대응을 촉진한 측면과 청·일의 이해
관계를 반영한 측면이 함께 존재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조선책략』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와 친교를 유지하고
일본과 관계를 맺으며 미국과 연대하자는 전략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수교와
근대화를 촉구한 책자다. (Chat GPT)
- 해당 작품은 청나라 이해관계에 입각해 저술되었고, 당시 세계의 중심 국가인 영국에
대한 언급이 소홀히 다루어진 작품으로 영국의 국제적 지위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고
조선에게 영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면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화파가 영국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을 수도 있다.
-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 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도록 주선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한반도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선책략은 조선이 청나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들려는 의도로
기획되었지만 청나라에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4장 전략형 인재를 위한 역사 다시 읽기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전략이 보인다)
1. 삼국의 몰락
2. 계백부대는 최후 결전을 벌인 결사대가 아니다
3. 위화도 회군 4불가론은 궤변
4. 파국의 씨앗이 된 임진왜란 논공행상
★ 5. 이겼다는 신미양요에 숨겨진 진실
- 미국 입장에서는 개항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조선 관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 조선 백성들의 곤궁한 모습,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드는 조선군의
감투정신에 놀라면서 조선 개항에 따른 무역에서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철수 결정
- 조선 입장에서는 이 전투를 승리로 둔갑시켜 버린다.
★ 6.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된 조선
- 1904년 2월 일본 해군이 여순과 인천에 있는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 즉, 러일전쟁은 한반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점임.
★ 7. 가쓰라 - 태프트밀약 전후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
-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 수상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맺은 대화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로 한 약속을 기록한 각서.
- 조선은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접견 요청을 하나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외교권이 없으니 더 이상 직접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
- 일본은 가쓰라 - 대프트 밀약 2주 후 1905년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맺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영국에서 인정받았다.
★ 8. 원세개의 9년 전횡
- 원세개는 임오군란 때 대원군을 텐진으로 전격 압송해 임오군란으로 인한 혼돈
상황을 일거에 정리하는 데 성공, 이에 고종은 갑신정변 때에도 원세개에게 다시
큰 신세를 졌다. 그러다 보니 청나라가 보낸 감시관에 불과하던 청년 그에게 코가
꿰어서 원세개가 사실상 조선의 총독 노릇을 하게 된다.
★ 9. 항일 무장투쟁의 전술적 승리와 전략적 한계
-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선열들은 물론 중국 대륙에서 중국공산당, 국민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선열들, 어려운 여건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직할부대에서 활약한
선열들과 그들을 지도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희생과 노고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분들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계승하는 데 있어 정신적 기반을
확실하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반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들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기획하고 조율하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위의 소제목 앞에 붙은 ★표는 진정으로 우리 역사 교육 시 반드시 포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소제목들인데 해당 내용에 대해 세세히 정리하지 않은 이유는
내용이 민감하고 아직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판단이 정확히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저자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제외한 것으로
추후 해당 분야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나온다면 그때 가서 개인적으로 정리를 해
볼까 생각하고 있다.
작품 오류 수정의견 제시
- P204쪽을 보면 ‘미국 해군육전대의 스프링필드 전장식 소총 유효사거리가
900m’라고 했는데, 이를 확인해 보니 아래와 같다.
· 스프링필드 모델 1855 : 유효사거리 약 365m (약 400야드)
· 스프링필드 모델 1861 : 유효사거리 180~365m (약 200~40야드)
탄환은 약 900m 이상에서도 치명적 위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는 통상적인 정확한
조준사격이 가능한 유효사거리와는 구분해야 한다. (Chat 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