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고백,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군주 평전 시리즈 4
송재혁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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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세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여러 업적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여기에 세세히 열거해 나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본 작품을 집필한 저자의 의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인 것 같아 그 부분은 생략하고 작품에서 확인한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거나 - 나의 시각과 관점에서 - 잊고 있었던 내용에 방점을 두어 편안한 마음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작품을 읽으며 든 생각은 우리의 역사 교육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교육이 단답식 암기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일방적으로 선생님들이 떠 먹여주는 주입식 교육 과정의 폐해로 일어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크게 든 시간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세종대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 외에 세세하게 아는 것이 전무하다는 것이 그 단적이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분의 본명이 이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있을까? 또 그분의 재위 기간 중 발명한 

여러 과학기구가 나온 배경이 통치 기간 내내 가뭄과 흉년의 연속이었기에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왜 그분의 통치기간 중 의예(儀禮)’를 중시하는 많은 책자가 발간되었는가?를 비롯해 노비의 애환을 보살피는 여러 

제도를 개정한 것과 본 작품에서는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작품을 통해 확인한 내용 중 결혼과 관련된 풍습을 우리 현실에 맞게 변경시키기 위해 솔선해 자신의 

딸부터 적용해 보았다는 내용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손이 모자를 정도의 개혁을 추진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교육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작품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세종께서 이룬 

업적이 많음에도 후세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불확실한 내용이 많아 개탄스런 마음이 앞서서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그분의 업적 중 일반적인 사항 말고 기타 사항으로 들 수 있는 

몇 가지 업적을 드려다 보면서 그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점은

첫째, 중국에 맞서려는 의식이 강했던 인물이었으며

둘째, 부국강병에 대한 열의가 그 어느 왕보다 높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셋째, 조선의 어느 왕보다 공론정치를 개척한 인물이었고

넷째, 애민 사상이 그 어느 왕보다 높았던 국왕이었으며

다섯, 효와 형제애가 무척 깊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 선왕 태종이 당초 후계자로 생각지 않았던 관계로 1418(태종 18)당초 세자로 

  책봉이 예상되었던 장남 이제를 내치기 전까지 이도(세종)에게는 차원이 다른 

  교육을 시켰다.

  단적인 예로 세종에게는 후계자 교육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술과 관련된 교육에 집중

  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교육은 세종 말년에 정치사적 외에 그가 이룬 업적의 

  큰 밑바탕을 이루는데 자산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이다.

 

- 맏아들 이제를 내치기 전 태종은 수많은 고민을 했는데, 자신이 권력정치를 통해 

  구축한 비정상의 정치를 학문과 이념의 정치로 정상화할 수 있는 후계자를 원하면서

  무엇보다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훌륭한 국왕의 조건들 중 우선적인 것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정치의 핵심을 알고 있으며, 관계 지향적인 인간형이며 앞으로 

  후계자가가 될 수 있는 즉 적장자(두 아들)가 있는 아버지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꼽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이도에게 권력을 이양하려는 표면상의 이유는 당초 거듭된 자연재해와 

  자신의 지병이었다. 또 태종 자신은 정통성이 떨어지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

  했지만 세종에게는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조선의 정식 궁전(법궁)

  인 경복궁에서 즉위할 것을 지시하는데 이는 그동안의 정치를 정상화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즉위한 세종은 두 가지 교서를 내리는데 하나는 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유학 이념을 구현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 ‘세종실록을 보면 유독 의례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이도의 시대에 이르러 국가 

  의례가 상당수 정비되었다는 뜻으로 그의 시대는 건국과 정변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권위로 바꿔가던 시대로 한마디로 후대 국왕들의 표준을 확립한 국왕이었다.

  왕이 된 세종은 첫 번째 경영 교재로 대학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중국 남송

  시대의 대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책으로 유학의 기본교재인 대학의 이론적 바탕위에

  역사 사례들을 결합한 제왕학의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 이도는 경연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인 집현전설치를 지시하는데, 집현전은

  고려의 한림원을 계승한 것으로 이것은 당나라 현종 때에 왕립 학술기관으로

  ‘한림원이 설치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태종은 태조의 아들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력도 있었던 관계로 학자로서 자신의 

  학술적 지식에 의존해 별도의 자문기구를 두지 않았던 반면, 이도는 재위 초기에 

  학술 자문기구인 집현전을 설치했다.


- 권좌에 오른 세종이지만 지속되는 자연재해(9년의 홍수와 7년의 가뭄)가 치세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는데 이를 개선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32년의 재위 기간 중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은 해가 불과 6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420(세종 2) 하늘을 살피는 관측, 즉 천문과 관련된 정책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측과 대비를 통해 재해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 이도는 4명의 황제를 섬겼는데, 1424년 몽골 원정 중에 영락제가 사망하였고

  이후 3명의 황제가 뒤를 이었다. 이도는 지성사대를 통해 생존과 안정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는 명 황제들에게 신뢰를 쌓아 갔고, 재위 후반기에는 그것을 북방 영토 개척에 

  활용한다. 특히 태조와 태종을 계승한 이도는 명나라와의 공존을 시도하는데

  선왕들이 힘들게 얻은 평화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사대에 지극정성을 다하게 된다.

  이도의 행장을 보면 정성을 가지고 사대하였고, 신의를 가지고 교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도가 재위 시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를 알 것이다.

  반면에 왜에 대해서는 통신사라는 이름의 사절을 1428년에 처음 보내는데 왜에 대한

  교린정책은 양면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우선 중앙의 막부와는 우호 유지, 지방의 여러

  왜인들에 대해서는 기미정책을 시행하였다. , 조공을 잘하고 통제를 따를 경우만

  조선과 통상을 허락하였으며 창구는 대마도로 일원화했다.

  또한 조선은 독자적인 국가로서 국가이익을 위해 전쟁이란 수단을 활용하기 시작

  하는데 그 출발은 1419년 태종이 약 17천명으로 단행한 대마도 정벌이며 이를 

  이어받은 이도는 야인 정벌과 북방 영토 개척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 태종의 상제가 끝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상복을 벗자 이도가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을 상왕을 따라다니며 매년 해 왔던 사냥을 겸비해 훈련하는 강무였다.

  이도는 매년 봄, 가을 강무를 시행했는데, 군사적인 의미 외에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

  으로 활용하였으며 무의 정치를 내세우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재위 15년째인 

  1433년의 야인 정벌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야인 정벌의 본질은 명나라의 현상유지 

  정책과 이도의 공세적인 북방정책 사이의 마찰이었다.


- 당대의 대학자 변계량이 지은 화산별곡은 이도가 직위 직후부터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정치를 펼쳤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가 실패한 정책은 전폐 정책

  , ‘동전의 보급이었다.

 

- 이도의 시대에 들어 그동안 태종의 권력정치에 가려 있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

  했는데, 대표적 사건이 바로 벼슬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관행이었는데

  이도는 뇌물사건을 국가 흥망이 걸린 중대 사안으로 간주하며 이를 철저하게 관리

  하며 문제화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국가 흥망의 문제를 넘어선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이도는 부패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처벌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해 극히 자제된

  처벌을 하게 되는데 이도는 부패가 한 인물을 처단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진정한 해결은 인정교화의 정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도권을 장악한 이도는 왕으로서의 권위를 학문적 성취로 잡으려 한다. 신유학의

  서적을 읽으며 신유학의 정치론을 체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다

  이도는 자신이 솔선수범해야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도는 재위 초반부터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어떠한 신하들보다 깊은 학문적 성취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학문적 성취야말로 유교국가 조선에서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

 

- 이도는 재위 기간에 총 1,898회의 경연을 개최하는데, 이도 경연의 특징은 실용적

  이라는 것이 특징으로 학습 성과는 재위 후반기 각종 개혁의 모태가 되었다.


- 즉위 10년차(1428) 즈음 사회적 범죄(문제)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나타나면서

  이도는 통치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고민하게 되는데 관료들의 부패(1426)

  백성들의 풍속 , 민풍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며 사회질서 안정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공자는 백성을 먼저 부유하게 하고, 다음에는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맹자 역시

         먼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후 교육해야 함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왕도정치이다.

         ,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왕도정치의 시작이고, 교육을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왕도 정치의 완성임을 깨닫는다.

   ---> 백성들이 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 과학기술 분야의 수많은 업적도 결국은 농업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농사직설과도 같은 증산법을 만들어도 백성이 글을 몰라 농사 권면이 

          지지부진 

   --->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작업의 연장으로

          교민은 훈민으로 연결되었다.


- 잦은 개혁으로 인한 관료들과 백성들의 원성을 줄이고 개혁에 동참시키기 위해 또 

  법 자체가 지닌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여론 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 1436년 이도는 의정부 서사제로 통치제도를 전환했다. 서사(署事)란 일을 처리한다는

  말로,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제도인 반면, 서사제도는

  의정부의 대신들이 주요 안건들을 미리 검토, 의논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통치제도

  이다.

  즉, 6조는 안건을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의논해 아뢴 뒤에 

  임금의 분부를 받아서 도로 6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는 제도이다.

  주된 이유는 정치적 책임의 분산으로 이도는 독단적으로 강행한 정책의 실패를

  체감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정치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의 정치적 수혜자는 황희였는데 그는 헌장(憲章)’에 밝았기 때문인데 헌장이란 

  선왕인 태조와 태종이 이룩한 정치적 유산을 의미한다

 

- 1438년 신개는 무인정변을 조선의 건국을 이어 다시 왕업을 안정시킨 행위로 평가

  하면서 기존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데 무인정변이란 정안군 이방원이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법 그리고 태조를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의 

  신하를 제거한 쿠테타를 말하는데 이 작업은 1447년 정인지와 권제,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편찬으로까지 연결되며 신개의 이런 주장은 추후 태조실록에도 

  반영된다.

   ---> ‘무인정변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귀향가 있던 이숙번을 초치하여 

          과거사에 대해 재조사를 추진하게 한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국사 교과서를 다시 읽는다 셈치고 이런 책은 한 권씩 사거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크게 생각한 시간이긴 했지만 나의 이런 요약도 만족스럽지 못 해 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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