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평전 -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
허경진 지음 / 돌베개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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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 6

 

본 작품을 읽고 내가 당초에 작품으로부터 얻으려고 의도했던 결론내지는 의미에 접근

하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많이 남아 결말 부분만 세 번 다시 완독했다.

나도 허균 선생이 역적이 아니고 시대의 희생양(?)이자 당파 싸움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작품을 뒤적여 보았지만 솔직히 뭐라 딱히 역적이다,

아니다라고 선뜻 말하기가 뭐해서 추후 시간을 갖고 더 공부를 해 볼까하는 생각을

굳히는 선에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게 되었다.

 

작품은 허균 선생의 작품과 또 그분의 행적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품을 전개

하고 있는데, 인간 허균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 증거보다는 저자의 주관점 관점이 강하

게 전개 내가 느끼기기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정확한 사실

만을 알고자 했던 나의 기대를 살짝 벗어난 느낌이 든 작품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허균 선생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분과 관련된 작품 내지는 그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이 함께 폐기된 관계로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일부 작품과 다른 역사

기록물에 언급된 내용을 근거로 작가의 창의적인 전개가 일반작품보다는 상당히 많은

분량 과거에 읽었던 작품 황진이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 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를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허균 선생은 홍길동전을 통해 잘못된 사회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기우렸다는

것을 강조하는 부분과 허균 선생의 스승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분이 저술했다는 호민론

(豪民論)‘, ’유재론(遺才論)‘ 등을 거명하며 서얼 차별철폐를 주장하고 민중봉기를 경고

했다고 하는데 나의 상식으로는 그런 행동이나 글을 함부로 세상을 향해 함부로 밝혔을

경우 당시 사회 구조상 큰 파급력을 줄 수 있어 자칫 극형에 가까운 형벌을 받을 것이

확실함에도 저자의 주장은 소설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작품만 놓고 보았을 때 그분은 자유주의자였고 민초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꿔온 이상주의자였다는 저자의 주장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참고로 허균 선생이 그렇게 타파하고 싶어했던 서얼제도는 태종 때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라는 인물이 서자에게는 벼슬길을 막자고 아뢰어 서얼금고(庶孽禁錮)

제도화된 뒤부터 서얼의 벼슬이 제한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허균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유교 사회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자신만

독특한 행동으로 자주 벼슬에서 쫒겨났으나 그때마다 이조판서까지 지낸 큰형(허성)

뒷배경과 아버지 초당과 허균 삼형제의 능력을 인정한 선조를 비롯한 어린시절부터

돈독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의 도움으로 벼슬자리를 쉽게 되찾았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 직후에 허균은 암행어사 장계에 의해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고 천추사로

임명되었다가 사퇴 후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고, 과거 시험의 채점관이 되었다가 시험부정 채점의 책임을 지고 귀향가기도 했으며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큰형

허성이 세상을 떠나고 임금도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그는 정권의

핵심에 의도적으로 접근, 명분이 약했던 대북파 정권에서 자기 같은 문장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빨리 간파하고 당시 정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이이첨에게 접근한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되고, 부원군 김제남이 처형당하자 광해군과

이이첨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는데,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법적인 어머니였으므로 를 가장 큰 덕목으로 내세우던

당시 상황에서 임금이 앞장서 조선 근간의 윤리원칙에 반하는 여론을 이끌 수 없었기에

이이첨이 후원하는 유생들이 동원하여 집단적으로 폐비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도록

조장하나 광해군은 외견상으로는 그들을 무마하는 척한다.

이를 무리없이 진척시키기 위해 설득력 있는 폐비 상소문이 필요했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허균이 선조와 이이첨에게는 필요했지만 끝내는 이이첨의 모략과 선조의

신임이 끝나면서 역모로 몰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역모로 인한 죽음의 과정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이이첨은 권모술수에 능해 대북파 정권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손녀딸이

세자빈이 되어 광해군 이후까지도 정권이 보장되는 실권자이기는 했지만 사림의 존경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인목대비곁에 있는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 온갖

계책으로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획책할 무렵, 허균에 대한 상소가 기준격에 의해 제기

되자 폐비를 주창하던 허균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동안 준비해 왔던 폐비론까지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한 선조는 허균을 치죄하기를 주저하게 되는데,

한 때 같은 배를 탓던 이이첨은 허균의 역적 행실이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해 또

허균의 딸이 자신의 손녀가 동궁빈임에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이 간택되어 세자의 후궁으로 간택되자 성균관의 후배이자 정치적 동맹인 허균의 위상이 높아짐에 위협을 느껴 허균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심복들을 움직이지만 뚜렷한 계기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허균의 측근 박응서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이첨이 주도해

허균가담한 역모로 판을 키우려 하나 제대로 허균을 엮지는 못한다.(계축옥사)

다급함을 느낀 허균이 기획하고 의식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실행에 옮긴 별도의 모사사건(경운궁 투서사건, 남대문 벽서사건)의 심복 허인준이 잡혀 들어가 취조를 당하며

허균이 연루된 사건임이 밝혀지게 된다.

 

추국청에서는 주변인들의 진술만 갖고 대질 심문 없이 허균을 처리하자고 하나 광해

군은 역적의 괴수인 허균은 심문하지도 않고 서둘러 죽이려는 이이첨 일당에 대해 불신을 하게 되고 역적 모의 관련자까지 캐보고 싶었으나 이이첨은 허균이 혹시라도 자기를 끌고 들어갈까봐 그런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한편, 감옥에 있던 허균을 찾아가 허균의 입을 막기 위해 조금만 참으면 풀려날 것이다라고 허균을 달래는 등 이중 플레이를 한다.

 

이이첨의 간계로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의 역모와 관련된 이의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처형이 집행된다.

처형된 후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역적이 일어나면 엄히 국문하여 모든 것을 바로 캐어묻고, 하나도 숨김이 없는 뒤에

결안을 작성하여 형을 집행하는 것이 국가 고금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해서 몇몇 적들의 입에서 역모의 자백이 나오긴 했지만 허균 본인에겐

한마디도 묻지 않았으며 매 한 대도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남은 무리에게서라도 제대로 역모의 진상을 파악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고 있다.

 

허균의 동지들은 짧은 기간동안 여러 사람들이 잡혀들어가 심문을 받아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한 자도 있으나 대다수는 끝내 자백하지 않고 매 맞고 죽은 자도 많았다고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모두 누명을 벗었지만 허균에게는 당시

주어졌던 역적이라는 이름이 늘 붙어다니고 있다.

여하튼 허균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를 새로운 이념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했었던 인물로 지배층에게는 허균이 경박한 패륜아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민중들에게는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지도자로 보았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계시다. - 나보다 아는 지식이 더 많은 분이 그렇게 외치니 일단은 수긍할 수 밖에 없다

 

[허균의 시대적 환경]

- 성종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을 등용하려던 시기이며

  또한 여러 사화가 난무하던 시기로 각각의 사화 원인은 달랐지만 비판적인 사람진출

  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들의 반발이 있었다.

  , 사림의 관점에서 보면 사화는 부패한 특권 보수층에 대한 진보 세력의 끝없는

  도전이자 실패였고 수난의 시대였다.

 

[허균의 성장환경]

- 156911월에 초당 허엽의 막내로 출생, 아버지 초당은 첫 번째 아내와는 아들 하나

  (허성)와 딸 둘을 두었고, 두 번째 아내에게 아들 둘(, )과 딸 하나(난설헌)를 얻음

- 12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린 시절은 형들로부터 교육을 받던 중 천재 시인으로 이름난

  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스승을 만난다. 그는 기생의 서얼로 태어난 신분이었지만

  허씨 집안에서 그를 스승으로 받아주었는데 서자도 아닌 그가 홍길동전을 짓게

  된 것은 스승인 이달이 개인적으로 평생 느꼈던 한을 사회 문제화한 것으로 보인다.

- 허균은 어린 나이에 엄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형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관계로

  버릇이 없었지만 김씨를 아내로 맞으면서부터 마음에 안정을 얻고 글공부에 전념하나

  그 아내를 임진난 통에 잃는다.

-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길에 천주교의 교리와 서적을 들여왔고 성리학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 상황에서 불교를 믿었는데 당시의 기득권들은 그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가는 조선 사회의 근간인 성리학 사상이 무너질 것을 심히 우려했다고 한다.

- 특이한 점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을 했는데 기생들과

  대놓고 놀러 다닌다거나 상중에 음주 가무를 하는 등 당시 통념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자주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고 한다

 

[허 성, 허 봉 형들과 누이 난설헌]

- 형들의 공통점은 국제정세에 밝았던 인물들로 특히, 허 성은 동인이었지만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파견되어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해 선조

  에게 보고하는 등 심지가 굳었던 인물이라고 하며,

  작은형 허 봉은 중국통으로 그가 기록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행(燕行)일기이며, 선조가 자신의 친할머니(명종 후궁 안빈)의 사당을 대궐에 봉안

  하려 하자 첩의 사당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고, 그가 경기도 순무어사로 재직

  당시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보고는 관련 부사의 파면과 함께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할 것을 상소하는 등 충직한 인물이었지만 이이를 절대 신임하고 있던 선조의

  미움을 받아 관련자들과 유배되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추후 복권은 되지만 선조의 미움으로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 한 채 죽음을 맞는다.

  허균 본인 역시 중국통으로 중국에 다녀올 적마다 중국으로부터 여러 문물을 들여와  

  국내에서 사익을 노렸던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선진 서적과 신문물을 들여오는 등

  선진학문 전파와 국민 편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 그의 누이 난설헌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버림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으며 정을 붙이고 살던 아이들과 뱃속의 아이마저 잃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살다 죽는다.

 

[임진왜란 당시 권력 지도부의 상황]

- 왜란을 피해 북으로 피신한 선조는 아들 임해군순화군을 함경도 쪽으로 파견

  하나 성질이 사나웠고 그의 하인들 역시 성질이 사나워 전쟁 중임에도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고을 수령들에게 금품을 강요하는 등의 패악질이 심하여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이 두 왕자와 여러 원로대신 그리고 고을의 부사와 그의 가속들까지

  묶어서 적에게 넘겼음은 물론이고 왜적이 임명하는 벼슬을 받고 적을 위해 성을 지켜

  주는 반역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 허균이 외친 호민론(豪民論)]

-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자는 오직 백성 뿐이다. 평소에 위에서 시티는 대로 따르는

  항민(恒民), 불만을 느끼기는 하지만 힘이 없어서 원망이나 하는 원민(怨民), 다른

  마음을 품고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때를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풀어보려는

  호민(豪民)이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호민이다 

- 임금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사명을 잊게 되면 나라가 망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경고하였고. 

- 임금이 백성을 기르지 않고 위에 앉아서 자기 욕심이나 채운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

  하며 견휜이나 궁예가 신라를 무너뜨린 호민이었던 것처럼, 조선왕조를 무너뜨릴

  호민으로 홍길동을 내세운 것이다.

  

작품에서 얻은 지식


- 내자시란 : 궁중에서 쓰는 쌀, 국수, , 간장, 기름, , 채소, 과일 등을 맡아보는 곳

- 예문관 : 임금의 칙령이나 교명을 기록하는 곳

- 중시(重試)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계속 격려하는 뜻에서 특별히 실시하는 시험

- 사예 : 간추려내는 것을 산(, 깍을 산)이라 한다.

- 문장에서 잘못된 글자나 쓸데없는 글자를 깍아내리는 것, 또는 많은 작품 가운데 잘

  된 것만 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 칠비)는 작품의 마감이나 배경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은 어느 한 구절의 미감을 논하는 것이다.

- 시참(詩讖)이란 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는 일

- 광해군의 처남인 문창대감 유희분은 평판이 아주 안좋았다.

- 승무원 : 외교 문서 담당 

- 중국 최초의 세계 지도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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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들의 책사 - 조선시대 편
신연우.신영란 지음 / 생각하는백성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3

작품은 13분의 왕과 함께 국사를 논했던(?) 충신 혹은 악인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태조 : 정도전과 정몽주], [태종 : 하륜과 이숙번], [세종 : 황희와 맹사성], [세조 : 한명회

와 신숙주], [성종 : 김종직], [중종 : 조광조], [명종 : 문정왕후와 정난정], [선조 : 이이],

[인조 : 최명길과 소현세자], [영조 : 박문수], [정조 : 홍국영과 채제공], [순조 : 정순왕후]

[고종 :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작품에서 언급된 개개인에 대한 업적 및 일부 이상한 인간들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하게 되면 아마도 개인당 하루 정도의 시간을 주어도 다 정리가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중 세 분과 관련된 잘 몰랐던 사실과 이면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고자 한다.

 

   1. 두문불출(杜門不出)과 황희정승(黃喜政丞)

 

고려가 무너지고 이씨조선이 건국되는데 고려의 많은 유생들은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가 임금을 치다)'에 분개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길수는

없다)’정절을 내세우며 고향을 등진다.

이들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에 모여서 일체 외부로 나오지 않고

살았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성계는 인재를 널리 모집하지만 인재다운 인재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그 연유를 확인해 본 결과, 인재라고 여겨지는 인물들 대개가 전부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대신

들를 보냈으나 끝내 그들이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자 태조는 산에 불을 지르고 두문동을 불태워 버린다고 겁박하지만 그들은 내려오길 거부하고 불에 타 숨지고 만다.

그 때 숨진 유생들이 72명이라 하여 "두문동 72"이란 말이 생겨난다.

당시 많은 선비들은 두문동의 인재들처럼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이름은

은거의 상징이 되었고 두문동이라 칭하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생겨났으며 이후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성계는 모든 정성을 다해 회유하고 설득하였으나 끝까지 두문불출한 개성 유생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향후 100년간 개성

유생은 과거를 못보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개성 유생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훗날 그 유명한 "개성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황희(黃喜)라는 유생도 고려가 멸망하자 처음에는 두문동에 은둔하며 지냈는데

자신들의 이런 행동을 누군가 살아남아서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내부 논의 끝에 두문동

동료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문동에서 나왔으며 야인생활을 하던 황희는 동료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태종때부터 세종, 문종까지

3대에 걸쳐 왕들을 보좌하는 명재상이 된다.

그는 좌천 2, 파직 3, 귀양살이 4년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질시 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펼치기 시작 했고 그 후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경세육전>,<국조오례>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수 있게 하였다.

세종 31(1449) 87세에 60여 년간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3년 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종대왕이 문병왔는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세 노인이 초가

삼칸집 멍석자리 위에 누워있어 이를 본 세종대왕이 깜짝 놀라 이럴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늙은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정도에게 들려줄 이야기이지만 오늘을 사는 소위 말하는 리더들은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2. 맹사성(孟思誠)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후세인들은 맹고불이라 하면 검은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노인을 연상할

정도로 친근한 존재였다.

성격이 소탈했던 그는 외출할 때면 소 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

집에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다. 실록에서는 그를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조정의 큰일이나 관직에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황희는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이 전해지지만 맹사성은 상대적으로 그 업적이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서의 소박한 삶과 진솔한 인품만이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음률에 대한 지식과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강호사시가통한 문학적 재능은 성군 세종이 그를 왜 중용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공민왕 9맹희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렸을 정도의 효자라고 한다.

그는 정몽주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사수하려던 최영의 사돈이었던 그의 집안에 모진 풍파가 몰려왔고 할아버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은거하다 불타 죽었고, 함께 두문동에 머물던 아버지(맹희도)는 충청도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아산에 있는 최영의 집에 금곡서원을 세워

유학전파에 몰두하는 한편 아들 맹사성에게 출사를 종용한다.              

 

그는 원칙주의자인 허조와 일벌레 황희사이에서 원만하게 사안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수많은 인재들이 등장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과학입국의 미래를 다져

나가던 그 시기에 신료들의 개성과 자율 속에서 드러내기 쉬운 아집과 독선을 조율해주는 따뜻한 존재였다.

세종은 즉위 이후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황희와 맹사성, 윤회 등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다. 성격이 분명하고 강직한 황희에게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부드럽고 섬세한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사교성이 뛰어난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다.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시켰다.

맹사성은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에 종사했고 평생 임금의 뜻에 따라 조용히 소임을 다했지만 마냥 예스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이 말년에 소헌왕후와 영응대군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려 하자 조선이 유교 국가임을 내세우며 신료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세종이

권도를 내세우며 완강하게 내불당 건립을 밀어붙이자 임금의 친위세력이던 집현전

학사들까지 끌어들여 맞섰던 인물이다.

 

세종은 우의정 맹사성에게 예악의 정비를 총괄하게 하여 세종 12년에는 제사 아악보와

조회 아악보를 완성하는 등 각종 악보를 만듦으로써 조선의 공식의례음악을 완성시켰다. 또한 세종은 아악의 정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정확하게 연주할 우리의 악기 제작을 독려한 결과 1423(세종 5) 정양과 남급의 노력에 힘입어 금, , 대쟁, , 봉소 등의 악기가 만들어졌다.

이듬해에는 화, , 피리, , 지 아쟁,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도 완성되었다.

세종대에 여진족으로 인해 국경이 혼란스럽자 맹사성으로 하여금 정벌 작전을 주도적

으로 기획하도록 했다.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을 완수한다.

맹사성은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는데 일찍이 김종서의 자질을 알아본 그는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따져 묻고,

방종을 경계함으로써 북방의 사자로 조련시켰으며 이후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해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정승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향리 온양에서 노후를 보냈다. 청백리답게

말년은 소박했다. 바깥 출입은 언제나처럼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고, 식량은 조정에서

지급하는 녹미(祿米)로 만족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람 정승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3. 최명길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병조좌랑으로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 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며 그후 이조

참판,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국력의 나약함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후금과의 강화를

역설하여 화의를 성립시키나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는다.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

신주를 한 사당에 모셔 놓고 한 곳에서 제사지냄)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할 즈음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지만 조선에서는 절화(絶和: 화의를 단절함)가 높아지는데 그는 당장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면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니 원망을

불러 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한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고 강화론을 계속 펼친다.

이 해 겨울 이조판서가 되어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지만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한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 할 정도로 사리명분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청군이 물러간 뒤,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기우리며 한편 청나라에 사신으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지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곤욕을 치르는 등 책임을 스스로 다하다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 혼자서 은밀히 공부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 지천집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내가 후손들이 오늘도 우러러보는 여러 분의 책사들을 작품이 소개했음에도 굳이 세 분만 여기에

옮겼는지 우리의 위정자들께서는 깊이 숙고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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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너머의 역사담론 8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 8.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추국(推鞫)의 실행 주체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한 작품으

당심(黨心)에 기초한 당쟁론을 통하여 해당 사건을 볼 것인지,

아니면 반역으로 촉발된 왕조 시대의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

기축옥사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따라서 송강 위관 때 15905월설 = 선조 23년설 = 경인년설

          서애 위관 때 15915월설 = 선조 24년설 = 신묘년설

                                                                이 점에 대한 논쟁을 다룬 작품이다.

 

송강 정철을 독철(毒澈)’이니 간철(奸澈)’로 불리게 한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인

기축옥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면

  

[1589년 동인 권력을 송두리째 흔든 정여립 모반 사건동인이 물러나고 서인

 권력 중심부인 조정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해당 사건을 서인인 정철

 책임자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동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치적

 사건이다.

 사건의 핵심인 정철은 1589년 과거 급제 후, 노수신의 추천으로 활동하는데 김효원

 (동인)과 심의겸(서인) 사이에 인사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동인(김효원)의 편을 들었던

 일로 동인으로 분류된다.

 정여립은 동인에 들어가 자신의 스승격인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을 헐뜯는데 이로

 인해 선조 임금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 오래 있지는 못한다. 또한 정여립은 서인 측에서

 그를 비난하자 낙향하여 별장에 은둔하여 학문을 강론한다는 미명하에 사람을 모은 후

 당시 변승복 · 박연령 등과 같은 정치 불만 세력을 포섭한다.

 얼마 뒤에 그는 당대에 떠돌던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는 정감록

 나오는 참언을 옥판에 새겨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산의 석굴 속에 감추게 하고 

 자신이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미고 의연에게 각 지방을 다니면서 왕의 기운은

 전라도에 있고, 전주의 남문 밖에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거기는 바로 정여립이

 출생지.

 마침내 정여립은 반란을 결심하고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모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서울로 진격하지만 사전에 승려 의암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인 조구의 자백으로

 역모는 사전에 발각되자 정여립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함으로서 사건은 종식된다.

 선조는 사건의 진상조사를 정철에게 맡겨 조사 과정에서 동인 사람들이 다수 제거

 되었는데 3년여 동안 1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기축옥사라고 한다.]

   

상기 사항은 네이버에 나와 있는 사항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정철이 선조의 명을 받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동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작품은 정말 정철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느냐에 대한 의심에서

두 역사학자의 논쟁(저자 : 1590년 선조 23, 상대 1591년 선조 24)을 다루고 있다.

 

정철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상대자(이덕일 선생)의 주장은

정철이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수사 책임자)을 맡아 수많은 동인들을 죽였다

유성룡이 위관을 맡아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김장생의 기록은 날조다

등으로 확정적으로 정철의 소행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저자는

선조 244~5월 경 추국의 위관은 유성룡이었고, 5월 어느 무렵에 위관이 다시

이양원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철은 이 해 윤3월에 이미 파직을 당한 상태였는데, 선조가

근교가 아닌 강계로 유배갔으니 정철이 추관을 맡을 수가 없었다

또한 김장생이 쓴 송강행록을 보더라도

정철이 유성룡에게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공은 어찌죽였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점을 들어서 정철이 아닌 유성룡의 행위로 보았지만 김장생의 송강행록을 조작이라고

하여 해당 자료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본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에 대한 이야기는 본 작품의

내용과 연관성이 적어 여기서는 제외하겠다.

 

왜 이런 논란이 아직도 있는가는 바로 기축옥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인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임진년 이전의 사초가 춘추관승정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사건과 관련된 심문, 판결 등이 적힌 자료가 전란 중에 당시의 사관들이 도망가면서

모두 없애 버려기 때문이라고 하며 후일 기자헌, 이이첨 등이 대신하여 자료를

만들었으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중 대표적인 사례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

왜곡이 가장 심하다고 하며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

인데 북인 몇몇을 빼곤 모두 평가절하되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이이첨본(선조실록)과 이식본(선조수정실록)을 비교해 보면 이식본에서 보완된 주제

하나가 바로 기축옥사관련 기록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양원이 위관일 때라고, 광해군

일기 (증초본)에 실린 사관의 말에 따르면 서애가 위관일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단 정철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을 읽은 나는 누구의 주장이 맞다고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입장으로(내가 손을

들어 준들 누가 인정을 하겠는가?) 그냥 학자들의 신념에 찬 각각의 주장을 받아들여 혼자 느끼고 혼자 생각하며 추후 발굴될 사료가 있다면 그것을 기초로 나의 생각을

고쳐가면 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일단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송강 정철

선생이 약간은 억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후일 역사적 자료가 더 많이 나와 오늘의 이 분란을 잠재우기만을 바랄 뿐이다.

작품에서 얻은 지식들

 

- 노론-소론이라는 용어는 1682년 숙종 8년 무렵 송시열과 윤증의 인간관이 갈라지며

  처음 등장한 용어라고 한다.

 

- 임진년 당시 몽진하던 선조에게 백사 이항복은 의주로 나아가 있다가 머물러 있다가

  팔도가 모두 함락되면 곧바로 중국 조정으로 가서 호소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유성룡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대가가 만약 우리 동방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기만

  한다면 조선 땅은 우리의 차지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라고 반대하고 있다.(P 123~124)

  ---> 선조에게 이 땅을 떠나라고 건의한 백사의 후손 중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정치인이 있다. 누구일까요? 

- 조선에서는 징역형이 없었고 이라는 것은 형을 받을 혐의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오늘날로 치면 구치소와 같은 개념이다.

  장기간 옥에 갇히는 경우는 조사 과정이 길어지면서 가둬지게 되는 것으로 징역형이

  아닌 심문대기 상태이다.

 

- 조선시대에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 추워지는 겨울에는 옥에 갇힌 사람들을 조사하여

  풀어주었는데, 이를 소결(疏決)이라고 했다.  

 

- 피의자가 자백을 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되는데 이를 물고(物故)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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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 실제로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7

  

작품은 역사를 사랑하는 한국인이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40분의 인물들이 신하(참모)

로서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 언급되신 몇 분은 내가 들어도 생소한 존함들이라 그분들에 대한 허투른 언급은 자칫 그분들의 업적에 누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세세한 언급하지 않겠지만 후일 시간을 갖고 좀 더 상세히 알아볼까 생각한다.

 

작품을 접한 나의 결론은 쌩뚱맞게도 과연 멋진 참모‘, ’훌륭한 참모는 어떻게 탄생할까?

라는 점에 모아졌다.

언젠가 글을 쓰면서 리더는 성품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지 누가 가르친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주장을 거듭해 왔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훌륭한 참모역시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닌 천성적으로 타고나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작품을 읽고 진정한 참모의 구비 조건과 관련된 나만이 느끼고 생각해 온 참모와 관련된 몇가지

강조 사항이 머리에 떠올라 이렇게 글을 작성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외국인 혹은 외국

출신의 참모(임원)를 선정할 때의 주의점에 대한 Tip을 제공하기 위해 여기에 글을 남긴다.

 

내가 직장인으로서의 햇병아리 시절을 갓 지나던 무렵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동료 직원이 자조섞인 이야기가 조직 생활을 현재도 하고 있는 나의 평생 슬로건 아닌 슬로건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사람은 유한할지라도 조직은 영원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조직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리더도 중요하지만 그를 뒷받침해 줄 참모의 역할도 리더 못지않게 중요하기에 여기에 몇 자 적어보는 것인데 나의 경험이 타인에게 전파되어 그 타인이 자신의

것으로 변형해 적용한다면 그 또한 글을 쓴 나의 보람이고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조직을 살리자는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니 말이다. 책을 읽고 진정한 참모를 어찌 발굴하고 그들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내가 경험한 조직 속에서 만난 여러 참모 유형들과 견주어 보면서 글을 전개했다.

이야기에 앞서 참모학을 말하면 누구는 이런 사례를 누구는 저런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참다운 자기 나름의 참모학을 주장하는데, 나의 경우는 오나라 부차월나라 구천사이에 벌어져

역사적 사례를 들고 싶다.(자세한 것은 역사를 읽고 느끼시기 바랍니다)

, 그 이야기 속에 나오고 있는 오월동주토사구팽에 관한 사자성어에만 집착하지 말고

이야기 중심에 숨겨진 인물들인 범려와 문종‘, ’백비와의 관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직접 읽어보시라는 의미에서다.

 

이야기를 시작해 보면

 

첫째, 얼핏 들으면 쉬운 이야기같지만 그리 녹녹하지 않은 이야기로 조직이 필요로 하는 참모를

       선택할 때는 반드시 해당 인물(참모)의 과거 생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최소 3인 이상의

       주변인(친구 혹은 동창)들의 검증을 거치라고 권하고 싶다.

 

전통적인 우리의 인재 등용 방식은 주로 학문 위주(과거)나 집안의 내력을 보고(지금은 절대 통용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작금은 툭하면 이야기된느 무슨 조사 위원회를 구성할 때 보면 무슨

무슨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기준이 공공연히 나도는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물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그런 방식은 오늘날 기업에 있어서는 집안 출신 성분이 그리 큰

요소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만 빼놓고서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성적만으로 선발된 인물이 어떤 과정과 가정환경 혹은 어떤 스승 밑에서 뭘 보고

배웠는지에 대한 정보없이(위에서 언급한 조사 위원들은 무슨 출신인지만 알면 과거 그들이 뭘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성장 과정에서 어떤 가치관과 신념 등이 형성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없어 결국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상황에 이르러 조직이

망가지거나 조사 위원회가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한 채 존속 기간이 끝나버리거나 조사 결과에

신뢰를 얻지 못하는 악순환을 되풀이되고는 하였던 게 사실이다.

 

나는 이런 단편적인 평가 방식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검증절차에 어린 시절 (중급,

고급 간부 시절) 혹은 학창 시절 검증 방법직장은 최소 5년 전까지를 소급해 업무능력 및 관련 부서 평판도 조사 - 을 제안하는 바이다.

, 해당 인물의 업무 능력과 함께 주변인(관련부서)들을 통한 인물의 평판도를 보완하는 방법을 써 볼 것을 강력히 추천하자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방식의 중요성과 위력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아이돌 그룹 구성원의 학창시절 몰지각한 행동으로 인한 몰락과 일부 방송인의 학창시절의

일진설로 인한 중도하차를 보면서 과거 이력에 대한 조사가 왜 필요한지를 절감할 것이다.


두번째 참모로서 부적격한 인물 유형으로 개인적 성향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내가 조직에

          서 경험한 바로는 거의 100% 맞는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 독립적으로 객지

          생활을 해 온 인물은 가급적 활용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일견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독립심과 생존력 등이 우월할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참모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주안점을 두고 그들의 인적 자질을 판단해 보면 조직 생활에 그리 적합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 객지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존과 직결된 순간순간이 평범한 생활을 해 온 부류들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 마주한 그들 대개는 아마도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인력들보다 판단력과 순발력 그리고 생존력은 물론이고 친화력까지도 월등한 수준

이라고 판단되나,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성향을 지녀야 하고 리더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기 위한 정보 제공자로서의 참모 역할자로서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참모들 유전 인자 속에는 어려서부터 생존하기 위한 자기 자신만 존재하지 자신을  제외한 전체를 보는 눈이 아주 낮다. , 그들의 안중에는 집단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려서부터 객지 생활을 많이 해 온 분들을 많이 접해 보았지만 어느 인물도 조직을 조화롭게 융합시키고 합리적으로 이끄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고 심할 경우는

자신만 살겠다고 조직 구성원을 버리거나 자기 편의대로 몰아가는 모습을 무수히 목격했었다.

모르겠다.

그런 그들을 참모가 아닌 리더로 활동한다면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훌륭한 리더훌륭한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 할 때 주어지는 자리이지 어느날 갑자기

주어지는 자리는 아니라고 보았을 때 답은 나왔다고 본다.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분들의 삶은 편협된 경우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인데,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아집의 삶은 상대의 삶 자체를 부인하고, 신념의 삶은 상대를 수단으로 전락시키나, 사랑의

삶은 상대를 세워준다‘ 내가 왜 이 대목에서 이런 글귀가 생각났을까?

 

마지막으로 부적격한 참모들의 사례는 '일밖에 모르는 인력'들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가 필요 없는 부류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과 조직도 중요하지만 소소한 가족들의 기념일 조차도 챙기지 못하는 인간들은 참모로서

자질이 절대로 부족한 부류들이라고 생각한다.

- 그런 인간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조직보다 상사와 관련된 기념일은 득달같이 챙기는 특징을

  갖고 있다 -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되나, 내 주변에 1365일 회사 출근만 하시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의 취미는 회사 업무였고, 운동은 회사 사무실 정리정돈이었다. 식구들이 특정 가족 기념일이라고 외치면 마지못해 가족들을 회사 앞으로 불러내 인근 중국집에서 자장면 정도시켜 먹는 게 그 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가족단위 외출이었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자연히 임원승진도 동기들보다 빨리 달았고 승승장구하였던 게 사실이지만 그분의 직장 생활의 결과는 어찌 되었겠는가?  결론적으로 그분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였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로서 또 리더를 보좌하는 참모로서의 역할은 젬뱅

이라고 회사가 판단하여 결국 용도 폐기되어 가정으로 돌아갔지만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는

가족이 없었다고 한다.

군인 장교들은 군복을 입으면 누구나 계급과 함께 보병이면 보병, 포병이면 포병 등과 같은 병과 마크를 달지만 장군으로 승진하면 병과마크를 붙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일반인들은 임원을 속칭 회사의 별이라고들 부른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이라면 외견상 뿐만아니라 A부터 Z까지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전천후 인간 즉, 회사 업무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사까지도 잘 챙겨보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진정한 별이 될 때 장군으로서, 참모로써 소임을 완벽히 수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이런 생각이 절대 아니라고, 편협된 자기만의 생각이라고 우기면 할 수 없다.

 

추가적으로 내가 조직 생활 속에서 체득한 외국인 참모 채용 방식에 관한 사항인데 이를 외국인을 구하려는 기업에서 적용해 보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간단한 Tip을 소개하니 참고

바랍니다.

 

외국 인력을 스카웃할 때는 대개 그 외국인(해외 시민권 소유 한국인 포함)의 학문적 성과내지는 실무적 성공 사례를 기초로 스카웃하는데 단순히 그것만 갖고 인력을 영입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쉬운 게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국내 인력은 입사 시험 시 개별면접‘, ’인적성 검사‘, ’토론 면접이다 등을 통과하면서 어쨌든

회사가 추구하는 인재들을 자연 추려내지만 외국에서 스카웃되는 인력은 회사마다 그 기준이

있기는 하겠지만 명확한 기준도, 절차도 짬짬이 방식으로 존재하여 오로지 그런 인력 채용을

지시한 TOP의 의지에 각색되고 평가되어 채용되는 게 일반적 외국 출신 임원 혹은 외국인 채용

방식일 것이다.

본인도 회사에 있으면서 어느날 갑자기 낙하산식으로 영입되는 임원들을 대하면 처음에는 뭔가 기대를 갖고 새로운 분야를 배울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지만 그런 기대는 짧은 시간안에 실망과 함께 당혹감으로 변하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에 여기서 체득한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개 외국에서 자라고, 공부하며 회사 생활을 하다 스카웃되는 인력들을 보면 우리와는 출발부터가 다른 인력들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다른 것을 둘째치고 대표적인 차이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라온 교육 환경 치열한

입시지옥 및 입시 학원 등 이고 또다른 점은 실패가 용인되고 학연, 지연이 무시되는 능력 위주의 회사 근무환경이라는 것이다.

국내의 거친 환경을 살아온 조직 구성원들에 대한 이해나 사려 깊은 배려가 없을 경우 외부

영입인력은 어느 순간이 되면 국내 인적 자원을 무슨 버러지 취급하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더라도 끝내는 물과 기름처럼 엇나가기 쉽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외부영입 인력들 대다수는 ! 이 산이 아닌가벼하고 어렵게어렵게 들어온 회사를 쉽게 빠져

나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만 프로야구 KBO에서 맹활약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몇몇 인간들이 현지에서 자신이 뛰었던 KBO환경을 욕하는 것만 봐도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외국에서 인재라고 불리는 인간들을 채용해야 회사 입장에서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고 그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첫째, 채용되는 인력에게 특정 주제를 부여하고 주제 연구발표를 시켜볼 것을 강력히 권하는데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연구했던 분야는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케팅 전공자에게 등산이나 낚시와 같이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 대해 발표

       시키라는 것이다.

둘째, 시간과 장소를 특정시키지 말고 예고없이 즉흥 ’5분 스피치를 시켜 보아라.

 

그러면 해당 인력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뭔 놈의 회사가 이런 걸 시키느냐고 말이다.

위의 사실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진행해 보라는 것이다.

- 그 방식은 회사 사정과 대상 인물의 성향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실력이나 성과는 이미 서류적인 심사에서 다 밝혀졌기 때문에 이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발표 시 그들이 사용하게 될 어휘 구사력표현력전개 방식 및

주제발표 시 발생할 수 있는 순간 질의응답 대응력에 대한 대처 자세를 통해서 국내 적응력

조직내 친화력내지는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할 조직원의 자질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하는 이유를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보면

외부에서 연구만 해 온 사람들은 단어 사용이나 표현력이 절대 다채롭지 못하고 고루해 뭐를

시켜도 자기 분야만 열심히 파 왔고 타인과의 교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인력들이 많아

자신의 전공 분야는 뛰어난 설득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혀 다른 분야에서는

타인을 설득하거나 설득하기 위한 표현력에 상당한 문제를 노출하기 때문이다.

국내 생활을 어느 정도하다 보면 우리의 현실에 차차 잘 적응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도 있지만 안 바뀌는 놈은 절대 안 바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자분야의 인력이 반드시 전자

업종과 관련된 사람과 국한되어 관련 정보나 연구과제를 논한다는 것은 과거의 방식이다.

지금은 전자업과 전혀 공통성이 없을 것 같은 분야인 의류는 물론이고 패션‘, ’선박‘, ’식음료

무수한 이종(異種)산업 종사자들과 교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의 이런 주장이 왜 나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휘 구사력표현력이 어눌하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에서 외톨이가 될 확률이 아주 높거나 자기가 소속된 동료들을 완전 무시하는 스타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위의 두 가지가 부족하거나 부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이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변 동료나 직원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항을 갖고 회사의

근무환경이 부적절하다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우를 과거 내가 몸을 담았던 조직에서 간간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질의 응답 순간대응력이 부족한 부류들은 과거 연구든 공부든 간에 혼자만 열심히 추진해 온 인물로 타인에 대한 배려나 협동심이 절대 부족한 인물로 봐도 틀리지 않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외국에서 영입되는 인물은 실패했을 경우 비용적으로나 사업 기회적으로 회사에 큰

손실을 줄 수 있는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상당히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항을 기본으로 몇가지 아이디어를 활용해 회사와 영입될 인력의 상황에

맞는 좀 쌩뚱맞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평가 방식을 개발해 활용해 보면 회사와 조직 등에 있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 자부하는 바이며 어줍잦은 절차와 방식으로 외부 인력을 영입해 같이

일을 해 보면 직원들 다수는 대개 이렇게 이야기한다.

 

축구선수를 영입하자 했는데 축구 해설가를 영입했어

 

라고 말이다. 나의 이런 주장은 그냥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해도 좋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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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치혀
홍경호 지음 / 흥부네박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 7

 

지난 2006년 어느날 본 작품을 읽은 뒤 나중에 찬찬히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내용을 음미해

보겠다는 족적을 남겼던 기억이 있다. 왜 그런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을까?

아마도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고전에 대한 공부가 미진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2006년 당시 나는 작품의 작가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세 치 크기의 혀이다. 혀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세 치 혀는 사람을 한없이 존귀한 존재로 올려놓기도 하고, 깊이

 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키기도 한다.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물론이고 백성 노릇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 많은 선한 사람들이 이 책에서 구하고 소원하는 바를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세치혀"에 대한 주의와 당부를 동시에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었다.

 

백가쟁명의 시대에 '세치혀'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였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섯 나라의 정승

자리를 차지했고 죽으면서도 산 자를 이용해 원수를 갚은 '소진', 제갈공명이 그렇게 본받고자

했던 '안영', 19년의 망명 끝에 왕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자까지 크게 끌어 안고 국운을

융성시킨 '진 문공' 등의 13편의 글 들이 실려 있다.

'천하를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세치혀에서

비롯된다'고 하며 '세치혀'와 관련된 이야기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의 흥미진진한 얘기와 함께 거기서 파생된 여러 고사성어에 얽힌 비화도 함께

있었으며, 삼국지에 버금가는 책략에 관한 얘기도 있었고, 제갈공명이 흠모했다는 안영의

'세치혀'에 관한 얘기도 있다.

만약 작품을 고른 독자들이 흥미 위주로 이 책을 선택한다면 만족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선전

대로 고대의 지혜와 책략을 통해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조금은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해당 분야의 내용이 그리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아서다.

 

열국지(烈國誌)와 삼국지(三國誌)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앞에 언급한 두 작품의

부록 정도로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만큼 두 작품과본 작품이 연관성 깊은 작품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인 소회이기는 하나 본 작품은 우리 역사는 아닐지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중국은 아리러니컬하게도 백가쟁명시기에 흥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하나는 '선악 구분의 모호함'이고, 또 하나는 '지역색의 비존재'였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중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만드는 나라라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었던 점이 오히려 백가쟁명이 난무하는 시기에 여러

사상을 발달시킬 수 있는 토양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진리''비진리'의 경계가 무엇인지 또

전제주의가 이러한 토양을 발달도 시키는 동시에 반대로 썩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하고 있다.

 

어느 책을 보니 "거대한 항공모함이라 할지라도 그 배의 크기에 비해 하잘 것 없는 '방향키'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 작품의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겠는

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특히,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이야기 중 오월동주토사구팽의 어원을 만들어낸 오나라

와 월나라 사이에 벌어진 참모들과 왕의 욕심과 진 문공의 절치부심 권력으로의 복귀 과정에

그를 따르는 참모들이 어떤 자세를 갖고 리더를 보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정답을 던져주는 느낌이다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여러 사례 중

1) 동호직필(董弧直筆)과 관련된 목숨을 걸고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는 참다운 사관의 정신

   자세에 대한 사례

2) 딸을 사랑한 어느 아버지의 결초보은과 관련된 이야기

3) 제갈공명이 그렇게도 배우기를 흠모했다던 남귤북지(南橘北枳)의 주인공 제나라 안영

4) 43세에 책나라로 망명하고 6세에 왕위에 오른 진()문공은 자신이 도피 생활 당시 곤경에

   빠트리고 죽이려고 했던 두수발제를 큰 원칙에서 포용하는 왕으로서의 큰 그릇 정신을

   보여주었다.

 

나는 위의 4가지 사항을 본 작품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하며 적폐청산불합리한

과거와의 결별을 주장하며 연일 여기저기를 흔들어대는 여러 위정자들을 보며 진 문공의 담대한

정신과 포용을 배우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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