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본색 - 1인자의 본심을 읽어야 국가의 운명이 보인다
김덕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7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 지도자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혹은 지도자라면

태생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시대와 환경이 요구하는 지도자로 육성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 상을 그려보기 위해 

해당 작품을선정해 읽어 보았는데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작품은 우리 모두가 평소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다 알고 있는 고대 로마시대 

대표적 위정자의 통치 등극과정 그리고 그들이 행했던 통치 내역과 업적 분석을 통해 

지도자라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또 위기의 순간에 어떤 혜안을 갖고 난국을 헤쳐 나갔는지를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우리의 여의도와 용산을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당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과 비슷한 사람을 찾지가 쉽지 않았다.

어찌되었던 간에 작품을 통해 지도자 상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얻어보고자 덤벼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지도자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언젠가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이야기하고, 강조한 사실이

있지만 지도자는 스스로 타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여러 작품을 통해 얻은 결론은

첫째, 지도자를 키우는 확실한 조력자(부모, 친구 등)가 있어야 하고

둘째, 지도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하며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도자는 태생적으로 그런 인격을 갖고 태어나야 하며

넷째, 다른 여러 조건보다 우선적으로 어떤 경우라도 상대를 포용하려는 강력한 

      자세가 있어야 하고

다섯째, 지도자로 성장하기 위한 각고의 개인적인 노력과 더불어 지도자를 지지해

         줄 강력한 동참세력이 있어야 한다

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금의 우리 주변을 보면 어떤가?

기가 차고, 한심스런 작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으며 모두가 난리를 치며 당신은 틀렸다고

외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은 억울하며 아니라면서 모함이라고 울부짖으며

난리를 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최근에 방송된 모 프로에 나온 어느 유명 여자 탈렌트가 어느 영화 촬영 당시 아무리 노력

해도 시나리오에서 요구하는 표정 연기가 안 되어 속상해 하며 돌아서서 눈물지을 때 그

영화감독이 문자 한통을 보내 왔다고 한다.

모두가 환호할 때 인정하십시오

라는 문자였다고 한다.

자꾸 아니라고 하지 말고 모두가 의심할 때 인정하고 자중 모드로 들어가는 그런 지도자가

보고 싶다. 진짜로 .......

 

[선견지명의 함정] ---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가이우스)

- 기원전 2세기 중엽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해 서부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편입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각종 전리품과 전쟁 포로의 유입으로 경제적 활기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동방의 선진문물이 급속 유입

전쟁의 장기화, 대농장의 등장으로 중소 자영농이 급속 붕괴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사회 혼란 가중의 폐해 발생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즉,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

-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는 한니발을 물리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인 코르넬리

  아와 결혼하면서 권력을 독차지하나 12명의 자녀만 남기고 죽는다.

자녀 중 그라쿠스 형제와 셈프로니아()만 남고 모두 죽는다.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재혼도 거부한 채 자녀 교육에 몰두, 그라쿠스 형제를 로마의

   위대한 개혁가로 성장시킨다.

딸은 그라쿠스 가문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스키피오가문과 혼인하나 개혁 운동에

   앞장선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개혁에 중도적, 부정적 견해를 보인 스키피오파 가문과

   반목하게 된다.

- 그라쿠스의 형인 티베리우스가 제안한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자 원로원중심의 기득권

  과 평민중심의 민회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한 끝에 기득권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티베리우스의 비타협적이고 강력한 개혁 추진과 비록 가짜 뉴스로 인한 오해로부터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원로원이 주축이 된 폭력 행사가 사회 위기를 증폭해 불신과

   증오의 불씨를 심는 결과를 초래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도 형처럼 평민을 위한 개혁 운동에 참여하나 죽임을

   당하고, 그의 동생들인 그라쿠스 형제 역시 호민관에 등극하여 평민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다 형은 1년 만에, 동생은 2년 만에 정치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공화정 초기의 타협과 소통의 정신은 사라지고 극단적인 대치와 폭력만 난무하며 사회

   갈등이 심화돼 결국 로마는 길고 긴 내전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혼란의 시기가 지나가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평화시대를 연 이후 그라쿠스 형제

   가 제시한 개혁정책들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반대하는 자들을 일소하는 대신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따라서 나만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개혁은 명분을 잃은 채 이권

  다툼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의 실수였다.

 

[피를 부른 지도자의 근시안]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와 죽음 이후 로마는 민회와 원로원, 평민파와 귀족파로 분열

  되고, 마리우스(평민파)와 술라(종신 독재관)의 등장

- ‘술라는 몰락한 귀족 집안이었는데 여인(부유한 연상녀와 계모)를 만나 재산과 명예를

  물려받으며 정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 당시 실권자인 집권자 마리우스밑에서 재무관을 지낸 술라는 킴브리아 전쟁과 동맹국

  누미디아가 일으킨 유구르타 전쟁등을 거치며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집정관에 당선

  되는데, 이때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을 도입 징집제도를 개혁하지만 추후 징병제도의 

  개혁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개혁이 되는데,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며 평민파의 지도자로

  성장할 때 부관이 바로 술라였다.

- 50대의 마리우스와 30대의 술라....술라가 마리우스의 종려 집정관의 부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둘 사이는 분열하게 된다. 법무관에 오른 술라는 동맹국 전쟁으로 입지가 부각

  이때 흑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무리들과의 전쟁인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누가 할 것인가를 놓고 평민파의 대표자 마리우스와 귀족파의

  술라가 갈등하게 되는데 귀족파의 지지를 받은 술라가 총사령관이 된다

   ---> 로마 역사상 최초의 내전발발(마리우스파와 술라파)

- 마리우스는 술라에 의해 아프리카로 도망갔다.

  ‘킨나의 도움으로 국내로 복귀한 그는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하지만 

  이내 술라의 복귀로 다시 정권을 빼앗긴다.

  이 과정에서 술라가 저지른 적폐 청산은 마리우스파의 절멸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이후 밀어붙인 개혁은 반동적 성격이 강해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면 당장의 효과는 있어서 내 뜻을 실현하고 사회 안정을 이룰 

  것처럼 보이지만, 그 힘 자체가 영원할 수 없다. 내가 힘을 잃는 순간 상대가 발톱을

  드러낼 것이고, 평화는 깨진다. 그런즉 복수의 연쇄를 끊는 지도자, 자신을 핍박한

  상대를 용서하는 지도자는 위대하다.

* ‘술라의 정권 등극 후 보인 행태와 이전 정부 시절 보인 행태가 거의 유사하다.

술라가 유사시 원로원이 특정인에게 비상 대권을 주는 패착으로 인해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듯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어느 단체장의 어설픈 시민단체에게 각종 이권을 줘서

그럴듯한 통치 모습을 보였지만 종국에는 그들로 인해 스스로 먹칠한 행동가가 되었듯

술라의 묘비명은

친구에게 선행을 베푸는 데 그를 따를 친구가 없었고, 적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데 그를

따를 적이 없었노라는 문구는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 또는 핑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카이사르는 고모부인 평민파의 수장 마리우스가 죽자 그의 오른팔 킨나와 협의, 그를

  유피테르 신전의 제관으로 임명하고 킨나의 딸과 혼인하지만 술라가 카이사르에게 

  사면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촌과의 결혼을 요구하며 회유

- 카이사르는 우여곡절 끝에 속주의 참모로 공적을 세우며 은신하고 있던 중 절대 권력자

  술라가 죽자 집정관귀족파간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는데 또 다른 집정관이자

  실력자인 레피두스가 카이사르와 함께 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법정의 변호인 혹은 고소인으로 활동하는 요즘말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입지를 다진다.

-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귀족파의 실력자 돌라벨라히브리다를 고소하면서 그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 졌으며 동시에 수사학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키케로가 글과 말로써 국가에 봉사했다면 카이사르는 정치와 군대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와중에 15명으로 구성된 신관단의 한 명인 코타가 죽가 카이사르가

  신관으로 선임되는데 이는 정무관으로서 첫 번째 경력이 된다.

- 카이사르가 살았던 공화정 시대의 로마는 어떤 관직이라도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한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에 인민의 지지 없이는 합법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었는데 지도자

  는 인민의 지지 위에서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카이사르는 여러 속주의 참모(재무관 등)로 일하면서 역량과 능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술라의 손녀(폼페이아)와 재혼하면서 또 평민파의 대부인 마리우스의 정신을 계승하면

  서 정체성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평민들의 지지를 쉽게 얻는다.

- 카이사르는 평민을 위한 혁신적인 조치들을 단행함과 동시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정권을 공동관리하나 크라수스의 패전으로 정권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자 세력이 더

  강했던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에 선임하면서

  내부 암투가 시작된다

- 카이사르는 평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여러 개혁조치를 취하면서 폼페이우스와 파르살루

   스 평원에서 대접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하는데 아프리카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는 당시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근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삼두정치를 종식된다

- 카이사르가 험한 시기를 보낸 이후 보여준 것은 복수가 아닌 관용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였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적극 대항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같은 편으로 간주하였으며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누구든 한 사람은 살려주어도 된다고 했다. 심지어 정적들

  이 관직에 나가는 것조차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 지도자는 국가 운영의 중심, 즉 법과 제도가 인민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카이사르는 사리사욕과 기득권 유지에 집착한 원로원을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 그는 많은 정치적 개혁과 민생 복지를 위한 노력을 많이 했으나 갈리아전쟁에서 승리

  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끈테 권력의 최고 자리를 탐한 결과 왕을  두지 않는다는 

  공화정 초기 정신이 크게 훼손되면서 원로원의 미움을 사 죽게 된다.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울 때 로마에는 왕을 두지 않는다는 선언에 따라 누구든지

  왕이 되고자하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더라도 죽어야 했다.

- 지도자는 시대를 정확히 읽고, 인민의 지지를 얻으며,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것을 겸비한 인물이었지만 정적인 공화파의 반격의

  빌미를 준 권력욕, 명예욕 그들을 과소평가한 안이함이 그의 치명적 실수였다.

-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늘 경계해야 한다. 인권변호사 카이사르와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므로.

 

[처음에 이기고 마지막에 패배하는 지도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카이사르 사후 타협 및 고도의 정치 행위로 로마의 위기를 극복한 지도자, 또는 외세와

  손잡고 로마를 배신한 매국노, 안토니우스를 향한 극단적 평가가 있다.

  특히 부정적 인상을 각인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키케로로 그는 카이사르

  암살 당시 안토니우스를 함께 죽이지 못한 것을 최대의 실수라 했다.

  키케로는 추후 안토니우스의 계부가 카탈리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되자 이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키케로에게 복수하며 둘 간의 악연은 막을 내린다.

-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을 비롯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악티움 해전 및 알레산드리아

  전투에서 연이어 패한 전력과 각종 영웅전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등으로 역사적으로

  안토니우스에 대한 부정적인 경향이 높은 게 사실이다.

- 안토니우스의 조상은 보수적인 성향의 귀족파였지만 할아버지가 술라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마리우스에게 처형당한다. 모계의 집안도 카이사르의 친척이었으나 마리우스와

  킨나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전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 안토니우스의 친구 클로디우스를 카탈리나의 모반연루자로 키케로가 지목, 둘 사이는

  급속히 악화되는 데 평민파 운동에 가담하면서 클라디우스가 키케로를 추방하는 데

  성공하지만 훗날 이 일로 귀족파에게 살해 당한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로 넘어가 수사학을 배워 카이사르파의 일원이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 안토니우스는 수많은 전쟁에서 많은 공적을 세우는 등 군대에서 역량을 뽐내기 시작.

  특히 이집트 내전에 관여한 것을 기회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 로마는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를 주축으로 하는 귀족파, 카이사르를 주축으로 하는

  평민파와 갈라져 있었는데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목된 옥타비아누스는 초기 안토니우스와 반목하는 듯하다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의 동생들을 권력의 주변에 배치하며 권력을 확장해 나간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관대히 처리한 결과 카이사르

  의 병사들에게 반감을 샀음을 잘 알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들기 시작

- 공화정의 재건을 꿈꾸던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카이사르의 후광과

  병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공화정의 원로들을 제거하고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카이사르파의 재건을 도모한다

- 카이사르 제거에 앞장섰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니아누스와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후,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돕고 공화파를 지원했는지를 묻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로마의 지원이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이집트의 지원이 절실했다.

-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과의 악티움 해전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패한 안토니우스는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인(에로스      에게 지시하지만 막상 그 순간에 하인이 이를 결행치 못하고 스스로 자결하다 미수에 

  그친 상태에서 자신을 찾으러 온 클레오파트라의 하인 디오메데스에 의해 발견되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인도되어 그녀의 품안에서 죽는다.

- 안토니우슨은 전시의 군사적 재능은 출중했지만 평시의 통치 능력은 부족했던 것이

  카이사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의 최대 실책은 정치권력의 근거지를 로마가 아닌 이집트로 잡았다는 것이다

- 지도자로서 안토니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 분열을 극복한다는 대의가 아니었다.

  카이르 암살 뒤 혼란을 수습할 때나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유자할 때나 모두 자신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부터 고민했다. 그래서 그의 대통합은 힘이 없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야합이었다. 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모든 것이 자기 계산대로

  되고 있다는 안일함 속에서 안토니우스는 자멸하고 말았다.

 

[굴욕을 대하는 태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 졸지에 로마의 일인자가 되어 버린 옥타비아누스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권력을 내려

  놓고 즉, 대권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반납하고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한 그는 인간 이상의

  ‘존엄한 자라는 뜻인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기틀 마련

- 옥타비아누스(이우스투스)에 대한 평가

  1) 권력욕에 취해 적과 손잡고 친구도 배신하는 불신의 아이콘

  2) 남의 아내를 빼앗은 부정한 자

  3) 권력 세습을 위해 외동딸을 세 번이나 정략결혼의 희생물로 삼은 잔인한 아버지

  4) 어떠한 굴욕에도 포기하지 않은 야심가

  5) 국가를 혼란과 무질서에서 구한 구구의 영웅

- 옥타비아누스의 집안은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덕분에 아버지가 카이사르의

  둘째 누나(율리아)의 딸인 아티아와 결혼하는데 그가 태어날 즈음 카이사르는 평민파의

  우두머리로 서서히 떠오르는 별이었다.

- 카이사르의 죽음을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친구와 동행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이때 하층민 출신이자 친구이자 충성스런 이인자인 이그리파가 있었다.

  로마에 입성한 옥타비우스, 안토니우스는 둘 다 카이사르파였지만 안토니우스 온갖

  방해와 비협조로 유언장에 언급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의 세력 확장에 우려하던 공화파가 옥타비우스에게 손을 내민다.

- 원로원의 배신으로 옥타비우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간 안토니우스의

  방해로 미뤄오던 양자 입양 절차를 마무리하고 옥타비아누스라는 새 이음을 얻고 명실

  상부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우뚝 선다.

- 내분을 극복한 카이사르는 본격적으로 공화파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당한 이는 안토니우스를 가장 비판하고 옥타비아누스를 배신한 키케로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력 집권에 도움을 준 삼두정치의 동료(섹스투스, 레피두스)를 

  하나씩 제거하는데 33세에 로마의 일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 그가 내전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아그리파라는 친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 후계를 이으려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그의 절친이자 사위인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권력 세습의 불안을 느끼자 구원투수로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스우스 네로

  였다.

- 아우구스투스는 권려과 권위를 자신에게 집중하고 세습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지중해 세계 전체에 로마의 평화를 확장해 이후 서구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반대급부로 공화정이 보장하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행사된 로마 인민의 자유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 야심을 품지 않는 지도자는 없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힘을 갈망한다. 꿈이 큰 만큼은

  고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포기할 상황에서도 지도자는 가능성을

  찾는다. 그리고 집요하게, 성실하게, 정확하게 목표를 좇는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지도자의 그릇을 판가름 할 기준이다.

 

[완벽한 통치의 비밀] 트라야누스

- 국가의 정의로운 시스템 덕에 황제에 오른 속주 출신의 인물이 황제 트라야누스로 그는

  제12대 황제 네르바의 양자로 지명된 끝에 다음 황제로 즉위했고, 제국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기를 대표하는 황제가 되었다.

- 황제 네르바 시절에 각종 복지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전까지 로마의 복지는 지배층이

  마련한 기금이나 황제의 사재로 이루어졌는데 처음으로 국가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이 긴축되면서 근위대가 들고일어나는데 이를 완벽하게 방어한 인물이

  트라야누스 즉, ‘게르마니쿠스였던 것이다.

- 로마 전통의 상징인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사소한 절차와 의례도 성실히 따랐지만 원로원에 끌려다니지 않았고 황제로서

  권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평소 긍정적인 이미지와 합쳐져 경건하고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

  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뛰어난 자들을 대거 선발해 원로원 의원으로 삼았다.

- 황제 네르바가 도입한 각종 복지 정책을 알리멘티라 불렀는데,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고

  인구 감소로 이어지자 로마군은 제국을 방어할 뿐 아니라 속주들을 로마화해 제국의

  통일성을 선도하는 주요 자원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알리멘트라는 복지정책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

- 트라야누스는 공공 건축에서도 로마의 위상을 높인 위대한 건설자였는데 복잡하고 

  얽히고 설킨 복지 문제, 인구 문제, 경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 지도자로 그가 눈앞의

  인기를 얻는 것보다 국가의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임을 잘 이해한

  지도자였다.

- 3세기 중반 이후 신임 황제가 즉위하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행복하고

  트라야누스보다 더 훌륭한 황제가 되시라라는 말로 축하를 전하는 게 전통이었는데

  이런 기대에 부응한 황제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 지도자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그래서 어떤 시스템으로 구체화하는지다. 트라야누스가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 개인이 정의로워서이기도 하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정의로운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아집의 차이] --- 하드리아누스

-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양자로 로마의 제14대 황제로 그는 21의 재위 기간 중

  13년을 순행하는 데 받친 발로 뛰는 황제였던 반면,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던 그를

  트라야누스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순행 중에 만난 안티노우스라는 청년과

  동성애에 빠지기도 한다.

- 파르티아 원정을 나갔던 황제 트라야누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나

  친위대장인 아티아누스와 황후인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황제로 등극.

- 전임 황제 트라야누스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에 따른 속주들의 반발에 따른 뒷수습은

  후임 황제인 하드리아누스 몫이었다.

- 지도자는 다양한 이유에서 정치적 결절을 내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수도 있고,

  자신의 당파를 위해서일수도 있다. 다만, 그 결정의 궁극적인 평가 기준은 공공의

  이익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다.

- 순행 중 속주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뜻을 관철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한다.

  즉, 유대인의 성지 예루살렘 근방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자신의 씨족명을 붙인

  식민시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로마 - 유대전쟁이 한창이던 70년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터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는 실수를 범한다.

  이에 반발한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 50만 명 이상이 죽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남은 유대인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했고, 정해진 날만 예루살렘 출입이

  허용되었다. 유대 지방은 시리아 팔레스티나 속주로 편입되어 철저히 관리되었다.

  유대인들은 제국 곳곳으로 흩어졌도 다시 나라를 세우기까지 1800여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유대인들의 비극,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하드리아누스는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 군단도 손 보았는데 이들의 임무는 변경 요새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 밖의 상황에 대비한 새로운 보조 군단인 누메리도 창설하였다.

  또한 팔랑크스라는 새로운 전술도 개발하였다.

-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법제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법률가들이 합의해 제출한

  보고서에 법적 권위를 부여해, 판사들이 유사한 사건을 심의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추후 로마대법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여러 차원에서 진행된 하드리아누스의 사법 개혁은 로마의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하드리아누스의 여러 업적 중 다른 황제들을 압도할 만큼 탁월한 것은 제국 전역에서

  추진된 공공 건축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 로마시의 판테온이며 아직 남아 있는

  또 다른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 대능원이 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즉위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을 뿐더러 로마 황제 중 그만큼 그리스

  문화에 빠진 사람은 없었고 그리스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다. 이런 모든 과오에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오현제에 드는 것은 순행으로 보여 준 지도력 덕분이다.

 

[함께 통치하는 지혜] --- 디오클레티아누스

- 235년부터 284년까지 무려 20여명의 황제가 등극하나 평균 3년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살해당하거나 쫓겨난다. 3새기의 로마는 안과 밖이 모두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제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개천출신으로 광대한 

  제국을 혼자 통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권력 투쟁만 불러일으킨다고 

  진단하며 권력을 나누기로 생각한다.

- 42대 황제 카루스의 근위기병대장이었던 디오클레스는 황제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를

  추종하던 추종세력에 의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다른 황제들에게

  없던 정치 감각이 있었고 원로원의 지지을 얻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로마시를 방문한다.

- 북방(게르만)과 동방(페르시아)의 끊임없는 외침에 고민하던 황제는 잉를 막아내기 위해

  서방을 맡아 다스릴 부황제(막시미아누스)를 임명하게 되는데 이 전략이 크게

  성공한다.

-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둘 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웠고,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으며 각자의 황국와 군대와 행정기관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제국이 둘로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명의 황제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8년만인

  292년 두 황제가 각각 부황제를 두어 총 네 명이 통치하는 ‘4제 통치를 도입한다.

- 공동체가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지도자는 놀라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권력을 나눠 다른 훌륭한 이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공동체가 겪는 문제는 대부분 너무나 복잡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결국 식물 지도자되기에 십상이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지도자에게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 민생을 위협하는 인플레이션이 심했고, 이를 잡기 위해 조세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그리스도교를 극심하게 탄압한 시대였다.

- 그는 생전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난 로마사 유일의 황제였는데 집권 과정에서 경쟁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제위를 차지했다. 그는 발칸반도를 근거지로 한 군인

  황제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군사적 재능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앞선 

  군인 황제들과는 다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치 감각과 능력을 발휘해 끝이 보이지 

  않던 혼란과 무질서를 끝냈다.

  그의 최대 공적은 50여 년간 계속된 군인 황제 시대를 마감하고 제국을 위기에서

  건져냈다는 데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