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문을 읽으면 조선이 보인다
구자청 지음 / 역사공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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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9

 

작품에 언급된 상소문의 내용을 찬찬히 읽고, 분석해 보면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로 요즘 세상

에서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소통]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며 이를 주제어로 선택해 엮어진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소문'은 작성되는 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배경에 대한 상세한 고찰없이 작품에

게재된 내용 자체로만 당시의 정치, 사회상의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로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소문은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간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자칫 글을 올리는 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건전하지 못하게 사용할 가능성도 있음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소문이라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과학적이고도 체계적인 조사 및 측정 기법이 있어서

이를 유효 적절히 평가해 최적의 안을 도출, 절대권자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올렸을 수도 있겠으나 모르긴 몰라도 작성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저자거리의 풍문

내지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마치 대다수의 의견인양 포장하여 제출될 경우 이를 해결해 줄 절대권자나 최고의 책임자는 바른 판단이라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확한 예로 보기는 어려우나 작품에 실린 '유자광'의 상소는 바로 이런 점을 잘 증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왕에게 그의 '머리를 잘라 받치겠다'고 상소를 올리고 있다.

상소문을 올릴 당시 그의 마음 자세는 순수한 마음에 의해 그런 상소문을 작성하였을 수도

있으나 결국 그런 상소문이 결국에는 자신이 권력층에 다가서려는 하나의 수단 중에 하나였음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결국 그는 순수하지 못한 그런 사고의 결과로 '남이 장군'을 제거하였고, 연산군 시절에는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숙청

시키는데 그방법으로 상소문을 활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유자광은 세조에게 발탁된 이후 다섯 명의 왕을 모시면서 풍운의 삶을 살았지만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간신'이라는 불명예를 안는다.

 

또 하나 상소문을 읽으며 느꼈던 사항으로 가장 크게 다가 왔던 것은 우리의 조선 왕들은 정말로 피곤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의 제목이나 한 구절만

읽어 보아도 전체 내용을 감지할 수 있는 몇 대목만 추려 보면 임금이 얼마나 피곤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 왕권을 위협하는 외척(처남들)을 처단하십시오.(태종)

- 형 양녕대군의 죄를 다스리십시오(세종)

-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십시오(중종)

 

(명종 시절 '조식의 상소' 주요 내용)

- 대비는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해야 합니다.

-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아 지극한 이치를 세우도록 하소서.

- 전하께서는 뭇 신하들에 대해 깊이 신임하시는 것이 부족합니다(선조)

- 근본은 세워 기강을 바로 잡으소서(효종, 송시열)

 

위의 대목은 단순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어 보면 절대자에게

끊임없이 마음과 정신 자세를 가다듬을 것을 줄기차게 촉구하는 내용으로 절대자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이런 글을 올린 사람들 대개가 임금보다 연령이나 인생 경험이 앞서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왕은 비록 자신이 왕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함부로 뭐라 이야기할 수 없어 정말 피곤

했을 것이며, 기득권층을 뒤에 업고 덤비기라도 하면 체면이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에게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 달라고 아우성 치는 인간도 있었으니 참으로 임금은

피곤하고도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식민사관적 관점이 역사학계에 널리 퍼져 있어 후세들 대부분이 마치 조선이 문제있는 왕조로 평가를 받아서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의 상소문을 통해 그런

모든 시각들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것은 명종 시대에 충신 '조 식'이 올린 상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식은 왕인 명종의 거듭된 벼슬 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번번이 사양하고 오히려 조정의

무능함을 질타하면서 명종과 모후인 문정왕후를 비난하면서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는 파격적인 글을 올려 왕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사건인데,

이 상소문을 접한 명종은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염집의 일개

과부로 표현한 글은 자신이 왕이기 이전에 한 어머니의 아들로서 분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런 글을 올렸다고 글 올린 자에 대한 벌을 내리거나 글의 내용을 갖고 치도곤내지는 문제를

삼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조선 왕조는 식민사관이 보는 '당쟁과

파당'싸움으로 날이 저문 그런 나라가 아닌 [소통]이 살아 있었던 그런 국가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상소문에 언급된 내용을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해 보면 대체적으로 왕에게 6가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1. 왕으로서의 처신을 잘해 달라

  2. 공인으로서의 자세가 부족한 인간들이 많다

  3. 왕의 학습이 부족한 것 같으니 더욱 학습에 매진하라

  4. 현명한 인재의 등용이 아쉽다

  5. 노력하는 공인이 별로 없다

  6. 사회 기본 질서가 타락해져 있으니 이를 바로 세워 달라

내가 내린 결론은 조선의 상소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직, 탄핵, 정치논쟁,

민폐 시정 요구 등으로 훌륭한 상소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 들이는 위정자들의 소명 의식이

없다면 한낮 휴지 조작에 불과했을 것이다.

 

정말로 우리의 산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작품이었다.

 

    책으로부터 얻은 상식들

 

- 종지(宗支)란 종은 적장자를, 지는 적장자를 제외한 아들을 이르는 말

 

- 기상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이 신하들에게 국가 경영에 대한 지혜를 묻는 '구언(求言)’이라는

  관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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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재발견 -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500년 고려 역사를 만나다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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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작품을 읽은 후 3주가 지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마주한 고려사 일부 내용이 내가 학창시절 배운 내용과 일부 달랐기에

또 그동안 우리 민족이 외세에 대항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알고 있었던 일부 내용이

자랑이 아닌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일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나는 쉽게 독후감

작성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최근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역사 과목 국정화문제가 내가 작품으로부터 알게 된 일부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나를

더욱 독후감 작성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그런 논쟁을 갖고 국정화가 좋다, 아니다하고 다툼을 일삼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어느

신문의 논설위원이 이야기하였듯이 망가진 배를 앞에 두고 자기가 운항을 책임지면

잘 할 수 있다고 떠드는 모습처럼 내게 비춰져 씁쓸함만 더해졌기에 이 역시 나를 쉽게

독후감 작성에 돌입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작품을 통해 내가 실망한 부분은 일전에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언급했었던 '대몽 항쟁'

시기에 나라의 지도자들었던 무신들이 보여준 치졸한 처사에 대한 사항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솔선수범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도 같은 행동을 왜 보여주지 못하였느냐 것이다.

당시 권력을 잡았던 무신들이라고는 하지만 배운 집안의 후손들이었을 것이고, 문신

수준은 아니더라도 관료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사서삼경도 읽고, 충효를 논했을

것이고, 공자왈 맹자왈을 떠들며 갖은 허세, 없는 허세를 다 부려가며 백성 위에 군림

하면서 난리를 쳤을 터인데 어째서 나라가 어렵고, 백성이 힘들어 할 때 그들은 자신들

의 안위 그리고 영달만을 추구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왔다

- 있는 동네에 임대주택이 못 들어오게 하고, 임대주택 아이들이 자신의 아파트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장애인 시설이 자신의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의석수만을 늘리려는 우리의 선량들의 모습은 무신들이 행했던

그런 치졸한 모습과 무엇이 다른지 반문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

고려는 잘 아는 바와같이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918)되어 33대 공양왕(1392)

이르기까지 47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였으며, 1170년에서 1272년까지

무신에 의해 통치되던 국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칭키스칸의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국가였다는 것을 작품과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런 유구한 역사 속에 감춰진 우리 고려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역사

과목의 국정화 추진은 문제가 있는 주장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아직 완성도 되지 않는 분야를 무조건 자율이라는 이름하에 민중사학자들이 주체가

되어 외치고 있는 주장에 근거해 교육을 시켜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남한의 민족주의사학과 북한 역사학이 접목돼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일종인 민중사학, 그 이념을 추종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건국

부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해 학생들에게 획일화된 이념을

강요할 수 있다는 우려에 버금가는 민중사학적 관점에서 그 어떤 역사가 또다시 변질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나는 반대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개인적인 생각은 십 수 년이 흐른 어느날 우리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덤벼든 무지랭이 민초가 우연히 알게 된 우리의 숨겨진 역사를 보면서 오늘 나와 같은

혼란을 겪게될 경우 우리의 찬란한 역사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을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만큼만은 네 편, 우리 편으로 갈라서지 말고 역사와 후손

앞에 당당할 수 있게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거기서 나온 중론을 모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학자적 양식이 있는 분들을 엄선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측면에서

다루어진 내용으로 교과서가 집필되어 후세 교육에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자께서 나름의 연구 끝에 반드시 짚어 봐야할 역사의 주요 변곡점이라 여겨지는

29꼭지에 대해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시다고 생각되었는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경우는 비록 주마간산식 고려사에 대한 탐구였지만 작품을 통해 또 새롭게 알게

사실은 광종(4)’대에서부터 현종(8)’에 걸쳐 이루어진 개방정책으로 귀화인이

급증하면서 단일민족으로 부르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많은 외부인들이 고려로 귀화해

국력이 전성기였다는 사실은 로마가 주변국을 속국으로 삼으며 능력 있는 속국인들을

로마에 중용해 강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에 비견될 수 있다는 사항은 외국인 노동자 100만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새겨 볼 만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국(거란 및 송나라)과 벌였던 여러 외교전략과 협상술은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는 우리의 외교관들이 배워야 하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던 작품이다.

아무튼 본 작품을 통해 고려 관련 작품이 나오면 주제별로 찬찬히 정리해 볼 필요성을

크게 느낀 그런 시간이었으며 작품 말미에 언급되고 있는 기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개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기에 이 작품에서는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김윤회, 역사의 아침)라는

작품을 통해 그녀의 삶과 사랑 그리고 행동을 연구해 여기에 정리할 예정이다.

 

작품으로부터 얻은 지식

 

- 고려의 국호는 고려(901), 마진(904), 태봉(911)으로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려 했던 궁예의 뜻으로 지어졌으며,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으로 마하크다’, ‘진단동방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마진(摩震)’대동방국을 의미하는 뜻이며,

   태봉(泰封)()’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

   한다는 뜻이고, ‘()’은 봉토 즉, 영토를 의미한다.

   따라서 태봉(泰封)’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 왕건은 후백제의 근거지인 나주전투에서 승리해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일약

   2인자로 올라서게 되는데,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 물류의

   거점이자,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나주전투의 승리는 궁예가

   견휜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게 된다.

   이의 뒷배경에는 왕건의 제1비인 신혜왕후와 제2비인 장화왕후의 집안이 당시

   유력한 해상세력이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927년 왕건의 팔공산 전투는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지만

   오히려 최후의 승자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전투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자신의 심복 신숭겸김락은 물론 5천여 명의 군사를 잃지만

   견휜이 왕건과 연대하려는 경주를 침공해 신라 국왕을 살해하는 등 정통 왕조 신라에

   잔악한 행동을 하자 군소 실세들이 견휜에게 등을 돌리고 존왕주의를 내세워

   끝까지 신라를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내게 되는 계기된다.

 

- 왕건은 개태사(충남 연산)를 지어 견휜을 최후까지 영웅으로 배려했다.

 

- '고려판 왕자의 난

  태조 왕건 제1비인 신혜왕후에게 후사 없자, 2비인 오씨로부터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하나 다른 호족에 비해 세력이 약해 이를 주저하게 되어 박술희, 왕규 등과

  같은 후견인을 내세워 후사(혜종)를 잇게 하는데 이로 인해 태조의 바람과는 다르게

  호족 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며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혜종 등극 3년 만에 병석에 눕자 차남 (3,정종)’와 삼남 (4,광종)’는 왕위를

  노리고 거사를 준비한다. 왕규는 배다른 형제 요와 소에게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를

  혜종에게 알지만 혜종이 이를 무시하자 오히려 왕규는 태조의 16번째 광주원군

  내세워 왕위에 앉히려 하다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정종을 등극시키게 되고 만다

 

- 광종은 중국계 귀화인 중 능력 있는 인물을 받아 들여 사회 각 방면에 활용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과거제도를 도입한 쌍기이며 고려사에 기록된 귀화인 중 두드러진

  인물만 40명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고려는 관료 엘리트뿐 아니라 외국인 기술자도 정책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10명 중 한 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활용해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한다.

  11세기 중엽 문종(1046~1083)은 송나라 진사 출신인 장정이라는 인물이 귀화하자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타산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등용해 고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다.

 

- 고려 현종 때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했을 경우 약 8.5%의 인구가 이민족으로 구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우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로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고 있는

  단일민족론을 재검토 해 할 근거가 되고 있다.

 

- 본관과 성이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이다.

  , 고려 초기 지배 계층은 왕조 건국에 협조한 대가로 중앙정부로부터 성씨와 본관을

  받은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성씨와 본관의 소유는 곧 중앙과 지방에서 지배 계층임을

  과시하는 증표이기도 했으며 이후 점차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며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갖게 되었다

 

1) 안동 권()씨의 유래

  권씨는 김행(金幸)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김씨는 신라의 대성(大姓)이었다. 김행이

  복주(안동)를 지키고 있던 중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이르니, 김행은 천명이

  그에게 있음을 알고 고을을 바치고 항복하자 태조가 기뻐하며 씨 성을 내렸다.

 

2) 이천 서()씨의 유래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경기 이천 부근 남한강에 이르렀을 때 이곳 출신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 강을 건너는데 도움을 주었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군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서()씨 또한 여기서 유래한것

 

3) 경주(慶州)의 유래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수도 계림경사스런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 토성분정 정책(본관제)은 단순히 지방세력에게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제도를 뛰어

  넘는 정책으로 초기에 토성을 부여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층이라 했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란 뜻으로 958(광종 9) 과거제는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1055(문종 9)에는 씨족록에 올라 있지 않은 본관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 고려 500년간 왕실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원인을 근친혼에서 찾고 있는데

  근친혼은 당시 왕실 및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고려 왕실이 택한 불가피한 조치

  였는데, 4대 광종은 근친혼을 한 첫 국왕이며 8대 현종에 이르러서야 왕실 외부

  가문으로부터 이성(異姓) 후비가 들어오지만 왕권과 왕실이 점차 안정화되어 가자

  유력 가문의 딸을 맞아들여 외척 가문을 왕실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 태조 왕건이 직접 작성한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 존속 기간 내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는데,

  8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역적 문제점(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산과 땅)

  다룬 이야기는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 홍성

  지역의 인물들을 등용할 때 금지할 것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지 이를 현대에까지

  적용하여 지역적 차별을 유도하는 것은 문제 있는 행동이다.

 

-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로

  태조 왕건이 불교와 음양 사상을 강조한 것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 주려는 것일

  뿐 이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행사가 팔관회로 이는 불교행사인 연등회와는 달리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로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민심과 사회를 결집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 기능을 수행한 축제행사였다.

 

-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자국과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것이 거란의 침입 목적

  임을 알아차린 서희는 두 나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돌려 줄 것을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 고려 문종은 영토를 잠식하려는 거란의 위협을 제어하고 송나라의 책봉을 받아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여 문벌귀족을 억누르려 했다. 송나라 또한 고려와 연합해

  당면한 거란의 영토 침해 행위를 견제하여 했다.

  일제 식민학자들을 비롯한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사대주의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던

  이들 국가와의 책봉 -조공 관계는 실상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는 자국의 안전과 실리를 추구하는 냉엄한 국제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때 형제맹약은 실리외교의 또 다른 모습이다.

 

- 예종은 부왕인 숙종을 기리기 위해 천수사의 건립을 산하들이 반대하지만 윤관을

  앞세워 이를 관철시키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지만 윤관의 죽음으로 사면초가에

  빠진다.

  예종은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인천) 이씨인 이자겸의 딸을 비로 맞아들여 이들과

  손을 잡고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

  따라서 이자겸을 외척으로 삼아 왕권은 보장 받지만 왕실과 왕권 강화를 괴한 부왕

  숙종의 부국강병은 포기해야 했다. 이에 따라 숙종 정책에 반대한 문벌 귀족 세력이

  득세하고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터주는 모양세가 된다.

  이자겸은 예종 사후에 아들이자 외손주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출가시키며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이자겸의 부상에 부담을 느낀 인종은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동원해 이자겸을 제거하지만 이후 나타난 외척의 발호와 개경 중심 문벌

  귀족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묘청의 난으로 연결된다.

- 1142(인종20) 김부식은 현직에서 사퇴 후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

  1145년에 완성하며 1170(의종 24) 일어난 무신정변(경계의 난)은 의종 주위의

  권력 집단인 내시, 환관과 술사, 친위 군사 간의 내부 세력 다툼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 고려 500년 동안 과거 합격자는 약 6,735명인데 그 가운데 무신정권 100년간 합격자

  는 전체의 33%2,229명으로 고려 전 기간을 감안하면 약 20%가 적정선임에도

  불구하고 합격자가 과다하다. 이는 과거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어 정권에 대한 불평

  불만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를 통한 등용보다는 천거제를 두어

  실력보다는 무신 정권에 충성하려는 자를 더욱 중용하였다.

 

- 몽고(원나라)는 총 7차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특히 1254(고종 41) 몽골과의 30

  전쟁에서 최대의 피해를 보았다. 이때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이 207천 명

  으로 당시 고려 인구를 500만으로 보았을 때 전 인구의 약 10%가 포로로 끌려갔다.

  1270(원종 11) 고려 정부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들이 삼별초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반기를 든다.

 

- 삼별초 항쟁의 초기 모습은 몽골에 대한 저항을 명분으로 민심을 결집하고, 몽골과

  결탁해 삼별초군을 해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국왕과 지배층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이었다.

  삼별초 항쟁은 몽골의 압력이 점차 강화되고 무신들의 권력 기반이 크게 약화되자

  그에 대응하여 일어난 반 왕조적 정치운동이었다. 대표적인 증거가 진도를 근거지로

  궁궐과 성을 수축하고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여 독자적인 진도 정부를 세운 것이

  구체적인 증거이다.

 

- 원의 간섭기 동안 두드러진 활동을 한 인물로 55(평민15, 천민10, 상인2, 승려3,

  외국인7)을 들고 있다. , 억압과 규제만 받아온 민초들에게 원의 간섭은 기회와

  희망의 시기였던 것이다. 민초들의 신분 상승을 주도한 계층은 부곡인(部曲人)’으로

  이들은 향, 부곡, , , 처라는 특수행정구역에 거주하는 하층 주민들이었다.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공물을 수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층민이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들이 부곡인들이었으며

  대표적 사건이 망이, 망소의 난이다.

  고려 후기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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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9

 

금번 작품을 읽으면 벌써 김종서 장군에 관한 작품만 세 번째 읽는 것이라  그래서 그랬는

지는 몰라도 김 종서 장군과 관련된 작품을 읽다 보면 읽을수록 울화통이 터지고 답답한

마음을 이루 헤아릴 길 없음을 이 지면에 대고 외치고 또 외쳐 본다.

김종서를 비롯한 당시 이름도 빛도 없이 정당한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다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인물들은 수 백 년이 흐른 지금도 후세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지만, 당시 현실적인 암투에서 승리해 정권을 장악했던 한명회, 권람 등을 기리는 곳이

조선 천지의 그 많은 서원 중에 단 한군데고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이, 역사가들이 그들을 무어라 평가해 본들 꺽여져 버린 북진의 꿈과 정통 왕권의

계승은 이미 엎어진 물이 되어 버렸으니 말 그대로 '오호 통재라' 아니 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 언젠가 북진 땅을 휘달리며 김 종서 장군을 비롯한 고토의 회복을 염원했던 수많은

영혼들의 한 맺힌 억울함을 달랠 수 있을런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오늘도 대권을

향해 울부짖는 저 위정자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메세지나 절규가 없음에 한 없이 눈물

짓는다.

작품의 내용을 이전의 독후감 정리 방식이 아닌 팩트별로 요약해 보았다.

절재(節齋) 김종서(1383 1453) 장군은 문신이면서 무신의 역할까지도 완벽 수행한

인물로 세종, 문종, 단종을 거치며 임금의 명을 받아 북방 영토를 확장, 정비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종 1(1453), 계유정난의 시발점에서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된 김종서는 무려 293

후인 영조 22(1746)에 공식적으로 신원된다. 뿐만 아니라 임금을 잘 보좌했다는 뜻의

'충익공'이란 시호도 함께 내려졌다.

[정권과 시대적 환경]

국내적으로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된 모든

세력들 특히 세종의 장인과 처남까지 정리하는 데, 세종은 그런 정치적 기반 위에서 안정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가뭄으로 인해 서민들의 고통도 상당히 뒤따랐던 시기였다.

국외적으로는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상당히 곤경을 치루기도 했다고 하는데,

특히 조선 출신이면서 명나라에 환관으로 바쳐진 '윤 봉'이라는 인물은 명 황실을 등에

업고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힌 인물로 그는 조선에 있는 자신의 여러 형제들에게 벼슬을

달라고 위세를 부린 인물이다.

[세종과 김종서]

사리 분별 정확하고, 매사에 꼼꼼한 김종서를 무한 신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일 계속되는 자연 재해 피해를 김종서를 통해 조사해 보고케 하는 등 다른

관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조사 내용으로 세종의 신뢰가 상당했었다고 하나, 황흥 정승같은

이는 그의 대쪽같은 성격을 고치기 위해 상당한 질책을 가하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김종서가 북방을 지키는 도중에 모친이 돌아가 돌아가셨음에도 세종의 성화에 못 이겨 3

상을 마치지 못한 채 '기복출사'를 명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의 문제점]

현명한 군주였던 세종도 역시 피부치에 대해서는 과단성이 상당히 결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연일 문제를 일으켜 대소 신료 특히

김종서까지 나서서 이를 질책하기를 건의하나 세종은 자신의 형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등의 허점을 노출하는데, 이 과정에서 김종서와 양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기득권층의 문제점]

세종의 명을 받아 어렵게 북방 영토를 김종서 장군이 개척하였지만 척박한 북방 지역으로

이주할 이주민들이 없었다. 특히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벼슬아치들 조차 북방은

커녕 서울 근교의 지방으로도 가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고 한다.

이런 작태에 심기가 불편해 진 세종은

'사람들이 모두 경직(중앙 벼슬)을 하려고 늙은 병든 어버이를 핑계를 대고 외관에 나가지

않으려 하니 아주 옳지 못한 일이다. 또 어버이가 있는 가까운 곳을 제수해도 사양하는

것은 무슨 뜻이며, 경상도나 전라도에 있는 어버이를 위하여 경직을 사양하고 가는 자가

없는 것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라고 탄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국경의 말썽꾼, 여진족]

김종서가 함길도로 떠날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안팎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 당나라 시대엔 '말갈족'이라고 불렸는데, 발해 때만 해도 여진족은 발해의 한 부분으로

이루는 주요한 요소였으나 고려가 만주 쪽에서 통제권을 상실하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가 한 때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었던 적도 있는데 우리의

유학자들이 중국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면서 여진족을 오랑캐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한족의 시각으로 여진족을 바라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가장 우려한 것은 여진족의 통합이었다. 따라서 여진족을 여럿으로 나누어

관리했는데 이를 '기미정책'이라고 하는데 기미란 '고삐'라는 의미한다.

조선 개국 당시 여진족과 조선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고 여진족이 일정 부분 활약

하지 않았다면 이성계의 조선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

조선과 명은 사대와 조공의 관계였지만 만주를 두고는 끊임없이 갈등을 하는 관계였다.

명나라는 이름만 있는 허울 좋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은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북진 정책]

- 세종 때 북방 정책은 문신 김종서, 무인 최윤덕과 이징옥에 의해 주도 되었다.

- 세종은 고려시대의 '윤관'이 설치한 '길주'라는 지명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명 태조가 만주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국경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파악하고

   세종 21(1439) 공조참판 최치운을 북경에 보내 두만강 북쪽 700지점에 있는

   공험진 이남의 땅이 조선의 땅이라고 통보를 한다.

 

조선 중, 후기 '한백겸''동국지리지'에서 공험진이 함경도 남쪽에 위치한다고 주장한

    것이 시초인데, 한백겸의 주장에서 유력한 증거로 윤관이 세운 비석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비석은 함경도 이원의 마운령에 있는 '석추구기'라는데, 이는 윤관이 세운

    '선춘령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이 세운 마운령 순수비로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국토 확장 사상이 오그라든 계기가 되었다.

- 김종서의 북진 정책에는 이징옥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징옥은 영토를 확장할 때

   반드시 이주할 백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국경방어의 역할을

   맡기는 것을 건의할 정도였데 그의 도움으로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다. 

[문종의 급서와 어의의 특진]

- 문종의 수명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역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문종 재위 2(1452) 5월초 허리 위의 종기와 이를 담당한

  어의 '전순의'에 의해 운명이 갈린다.

  전순의는 문종의 종기에 상극일 수밖에 없는 음식인 꿩이나 오리, 닭 등을 상식하도록

  처방하였는데 한의학에서는 종기 환자에게 이러한 처방을 하는 것을 독살의 증거로 삼을

  정도로 상극인 음식이라고 한다.

  더 한심한 것은 모든 의료에 관한 사항은 도승지 강맹경이 수양과 양녕에게 상의한 후

  처리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왕이 급서한 다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곧 바로 어의였던 전순의를 복귀 시키고 좌익 원종공신 1등급을 부여 했다는

  사실이다.

[단종의 어려움]

12살의 나이에 등극한 단종은 수렴청정 해 줄 대비가 없었다는 게 큰 어려움 이자 난관이었

다고 보면 된다. 그의 모친 권씨는 어린 시절 죽었으며, 할머니 소헌왕후 역시 태종에 의해

쑥대밭이 된 친정집의 한을 품고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등극]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거의 2천번 이상 이름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종 즉위년 7월인데,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는 '음서 제도' 덕택에 관리로 나서는 데 제일 처음 받은 보직이 '경덕궁 궁지기'였다.

그는 친구이며 과거에 장원 급제한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 줄을 대고, 수양대군의

모사꾼이 된 한명회는 불평불만 세력을 결집해 수양대군을 부추긴다.

[문종과 문종빈 권씨의 무덤과 풍수지리]

세종의 세자빈 권씨의 장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목효지'라는 인물이 장지 선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 권씨의 장지로 선택된 곳은 '장자, 장손이 일찍 죽는 악지'라는

것이다. 풍수가들은 문종의 능자리를 찾으면서 백악산의 뒤에 궁을 짓자는 주장을 한다.

이는 문종 빈 권씨의 장지 선택 시에도 나왔던 주장으로 만약에 궁을 짓게 되면 '자손이

성한다'는 설로, 그렇게 되면 자신의 거사가 좌절 될 것을 우려한 수양대군이 이를 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세종 이후 후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 수양대군은 방룡으로서 왕은 되었지만 그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일찍 사망하고,

둘째 '예종'이 뒤를 잇고, 그 후사는 의경 세자의 둘째인 '성종'이이었으며, 성종의 맏아들

인 정룡 '연산군'은 쫒겨나고, 성종의 차남 '중종'이 뒤를 잇는 등 방룡이 성했다.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은 즉위 1년이 못 되어 사망하고 둘째 아들 '명종'이 뒤를 이었으니

그 옛날 풍수가들이 한 예언이 어느 정도는 맞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계유정난]

- 정난(靖難)은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으로 어차피 이긴 자들이 붙이는

   이름이다.

- 수양은 훗날의 거사에 대한 명분을 쌓고 명나라의 우군화를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그는 명나라 육부상서에 들어갈 때 한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으며, 다시 황제

   앞으로 나가서는 다섯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북경에 간 이유는

   자신은 중국을 극진히 섬기는 사대주의자임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훗날 일으킬 정변을

   추인받고자 한 것이다.

- 수양은 자신의 야욕을 감추기 위해 단종의 국혼을 강력히 권유한다.

   이는 철저한 이중 플레이였다. 세조 실록에는 자신이 거사를 일으킨 이유로 양평대군의 

   모반을 미리 없애기 위해서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권력에 야욕이 없던 양평대군을

   음해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 단종 11010일 한명회, 권람, 홍달손, 양정, 유수, 유하 등이 수양의 집에서 거사를

   결정하고 시행에 옮긴다. 거사의 첫 번째 목표로 김종서와 양녕대군을 처치를 내세운다.

   그렇지 않고 거사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의 계획이 맞아 들어가자

   바로 궁중으로 들어가 단종을 위협해 김종서와 양평대군 등을 역모로 모는 교서를

   작성하게 한다.

- 수양은 자신의 거사에 반대를 했거나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친자이면서

   16세 이상인 자는 '교형'에 처하고, 그 이하의 친자는 양육한 뒤 거제, 제주, 남해, 진도

   의 관노로 편입시켰으며, 자신의 거사에 동참하였던 자에게는 귀천 여부를 따지지 않고

   종이나 시녀들에게 까지도 죽은 대신들의 저택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고 한다.

[계유정난 이후 처리 과정]

- 갑작스런 거사에 성공한 수양은 김종서와 쌍두마차를 이루며 북방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이징옥을 불러 들여 처치하려 하는 데, 한때 김종서와 원수지간이었던 '박호문'이라는

   자를 이용하려 하지만 갑작스런 지휘권 이양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징옥이 박호문을

   통해 거사가 일어났음을 알고 반발하며 대항하려 하지만 이징옥을 따라다니던 종성 판관

   '정종''이행검'에게 오히려 살해 당하고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이징옥의 거사는 오히려 수양대군에게 군사권마저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 세조(수양)는 왕위 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 2,300여명에게 정치적 특권을 주었는데

   어떠한 죄를 지어도 처벌하지 않는 불처벌 특권이었다.

   이는 추후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 일부 특혜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 세조 3(1457) 1021일 단종은 결국 천명을 보존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나이 열 일곱, 재위 기간 32개월이었다. 선조 때 씌여진 '대동운옥'에서 '수상 정인지

   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단종)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이덕형이 '죽창한화'에서는 단종의 죽음에 대해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 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

[정말 특이한 인물 열전]

- '정인지'는 병든 아내를 두고 북방에 나가 있는 김종서대신 그의 아내를 돌볼 것을 세종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정인지에게 명을 내리나 그는 세종의 명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계유정난 직후에는 수양의 편에 선 관계로 공신으로 추대받는 그런 인물이다.

   그가 만들었다고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실제로는 김종서가

   편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진실은 '고려사' 전문이 아니라 같은 날

   '문종실록'을 보면 좀 더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니....'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 박호문이라는 작자는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회령절제사'로 부임하였는데, 부임하자마자

   국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고, 백성들의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새 청사 짓는 것을 반대한

   김종서와 척을 지게 되면서 무고한 내용의 죄를 김종서에게 씌우려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다.

- 명나라 환관 '윤 봉'은 명나라 요구에 따라 조선에서 바쳐진 명 황실에 헌납되어 고위

   환관이 된 인물인데, 명 황실을 등에 업고 조선에 있는 자신의 여러 형제들에게 벼슬을

   달라고 위세를 부린 인물이다.

 

   작품으로 얻는 지식들

 - 전남 해남군에 있는 '방춘서원'은 숙종 때 창건되었는데 김종서, 황보인, 정문 등

   계유정난 당시 희생된 세 정승을 모시는 사당으로 '삼상사'라 불리웠는데,

   1919방춘서원으로 개칭되었다.

  

-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내용이 어떠할지라도 죄를 주지 않았다.

   만약 죄를 줄 경우 숨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식읍'이란 그 고을의 민호나 조세를 받아 쓰게 하던 것이고,

   '석실봉'이란 해당 민호와 조세와 부역 전부를 주는 것을 말한다.

- 보통 기제사(忌際祀)4년까지만 봉사하고 5대부터는 신주를 무덤에 묻는다.

   그러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인 경우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계속 모시는 데 이를

   '불천위'라고 한다.

- 단종의 시신은 영월부 호장 '엄홍도'라는 인물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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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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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 제목의 [여울]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이라는 풀이로 기술되어 있다

내가 왜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작품을 읽고 느끼시길 권유해 본다.


작품은 문학 작품이 아니다.

본 작품은 우리 근대사를 관통하는 민초들의 역사 증언서이다.

, 우리들이 알고 있으면서 잊고 살아가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씨줄''날줄'로 

엮어서 전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맺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과 임오군란(1882) 또 하나는 동학농민혁명(1894)축으로 하고 있고,


또 하나는 사랑을 찾아 나선 애잔한 어느 촌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나는 이런 구도를 접하며 문학계에 널리 통용되는 단어 중에 황 작가님을 지칭하는 단어로

'황구라'라는 단어가 왜 붙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석제님은 이야기꾼???)

수 년 전 우연히 접하게 된 이 분의 장편 '장길산'을 읽으며 어느 정도 황구라님 특유의 이야기 

재능(?)을 느끼긴 하였지만 본 작품의 전개 및 소재를 마주하며 그러한 별칭이 굉장히 합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 확실한 작품이었다.

아무튼 작품 속에는 광대패, 과거 부정 시험장면, 농민 봉기, 구식 군대의 봉기 등과 당시의 사회 

관습에 대한 이야기를 얼기설기 그물 코를 엮어 놓은 구도가 정말 잘도 엮어 놓았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다.

나는 작품에서 전개되는 특정한 사건을 갖고 아니면 작품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특정 사건만을 

갖고 작품 전체의 주제인 양 작품의 평을 한다는 것은 아주 저급한 작품 평이요 작가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기 보다 작품 전반에 걸쳐 쉼 없이 잔잔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는 여울물 같은 우리 

민초들의 깨알 같은 삶에 영향을 준 시대적 상황과 환경 또한 팍팍 할 수 밖에 없었던 사건, 사고

내용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참 의미를 깨닫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문학 작품을 읽으며 쌩뚱맞게 이렇게 느낀 이유는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박연옥'이도

'이신()'이라는 사람도 정말로 그 시대에 살아 있었을 수도 있고, '초라니 광대 박씨'

'장돌뱅이 안 서방', 대원군의 심복인 허민이도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우리 나라 어느 

곳에선가 분명히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인 '이신()'이가 왜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피붙이를 두고 먼 지방으로 내 돌아야 했는가

그는 자신의 본명이 있었음에도 왜 '이신통'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가, 허민이라는 대원군의 

심복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작품을 통해 알 수도 있겠으나, 작품 저변에 흐르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작품 속의 등장 인물이나 그들이 보여 주고 있는 삶의 

내용 그리고 그들이 던져 주고자 한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민초들의 여러 모습은 시대적 변화에 항거하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쓰러져 간 바로 우리 민초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작품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근대사를 다시 

한 번 재 조명한 '역사물'의 또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학창시절 우리는 본 작품의 기본적 소재가 되고 있는 '강화도 조약'이니 '임오군란이니 

'동학혁명'이니 하는 사건을 연대 순으로 혹은 원인과 결론에 대해 사지선다형 답을 맞추기 위해 

외우고 또 외웠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 교문을 나선지 오래된 사람들은 당시의 사건을 하나의 

우리의 근대사 혹은 치욕의 역사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 더 이상도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 이런 시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소재가 되고 있는 시대적 사건의 배경을 확인하면서 작품 

내용을 반추해 봤으면 한다. 이런 작품이 하루 아침에 쓰여지지 않기에 또 작가님은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작품 활동 보다는 모 후보의 열성 지지 당원으로 우리 나라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니셨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훨씬 전부터 자료 준비를 해 놓으시지 않으셨다면 집필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셨을텐데 이런 작품이 나왔다면, 우리 아픔의 역사를 소재로 왜 이 시기에 출판하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재음미하고 생각해 본다면 작품이 갖는 의미성이 더 가슴에

와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모티브를 던져주고 있는 역사적 우리의 주요 사건에 대한 내용을 축약해 보면


1. 강화도 조약(1876)

- 강화도조약은 1876(고종 13)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일본과 체결된 조약으로 한일 관계

  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는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의 침탈 의도를 본격적으로 나타냄.


- 조약은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지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고 일본의 전략은 맞아

  떨어진다.


- 강화도 조약에 따라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며 수신사는 일본과의 조약 성공을 관철

  시키기 위한 친일파를 양성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2. 임오군란(1882)

-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옛 훈련도감 소속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 , 후임 임 선혜청 책임자인 민겸호 및 그의 하인들의 착복 및 축재 사실이 단초가 되어 일어난

  난을 조정이 관리들을 옹호하며 병사들 감정이 격화되어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 교관을 포함 

  13명을 살해하고 종결되나 민씨 척족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조선에 군사가 들어오는 단초를 제공.


- 임오군란으로 대외적으로는 청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 문제로,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게 된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일본과는 임오

  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게 며 자주권 상실이 

  가속화


3. 제물포 조약(1882)

- 제물포 조약은 임오군란 사후 처리를 위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에 책임을 묻는 형식으

  로 김홍집이 주도해 체결, 조약의 내용은 50만 원 배상, 일본 공사관 경비병 주둔,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를 위한 수신사 파견, 임오군란 주모자 처벌, 일본인 피해 유가족에게 위로금 지불 등

  이 그 핵심


- 제물포 조약의 규정에 따라 박영효, 김만식, 홍영식, 김옥균, 민영익 등이 수신사로 일본에 간다

  그들은 국빈 대우를 받으며 당대의 철학자 후쿠자와 유키치와 접촉하면서 선진 일본에 매료

  되는 친일파가 되는 계기가 됨.


- 제물포 조약에 의해 조선 정부가 배상토록 한 배상금의 완화는 물론 기간의 연장 등 일본의 

  계략에 빠져 친일 성향을 갖게 되고 이들이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4. 동학 농민 운동(1893~95)

-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동학은 서학에 맞선 우리 민족 전통의 종교로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운동이라 보면 된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비행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 동학농민전쟁은 실패하였으나 이 실패를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 주게 된다.


- 갑오농민봉기 이후 조선의 양반 및 부호층들이 전쟁에 패한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처럼 행동하며 일본군과의 연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전략으로 채택

  되면서 민족분열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작품 전반에 걸쳐 이런 전후 사정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작가께서 작품을 통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지 쉽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이런 점을 갖고 내가 

느낀 것은 한 겨울에도 쉼 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는 우리 산천의 '여울물'들은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상징적 이름이었다는 게 작품을 읽은 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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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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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는 동안 과거 휴가차 아내와 '홍도'로 여행을 갔을 당시의 서해 먼 바다에 외로이

떠 있던 '홍도'의 모습이 눈에 떠올랐으며, 내가 그 섬을 여행할 당시 느꼈던 추억과 느낌이

작품 속 주인공 처지와 어딘지 모르게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작품에 대한 느낌이 더욱

다가왔지만 한 편으로는 작품을 통해 받았던 답답함에 근거한 무기력감으로 인해 주인공이

겪었을 한 많은 세상에 대한 원망도 해 보았고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희망도 찾지 못한 채

끝없는 미로를 헤매었을 주인공의 참담한 마음도 함께 헤아려 보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은 말 그대로 내게 큰 흑산(黑山)으로 내게 다가왔다.

 

작품을 통해 격랑의 역사 속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져 간 새로운 인물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그간 몰랐던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조각을 찾아냈다는 즐거움과 함께 한편으론

씁쓸함이 더 컸던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중심에 선 인물은 이름도 생소한 [황사영]이라는 분으로, 서학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해당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조건들, 예를 들자면 시대적 상황과

당시를 살던 민초들의 움직임 등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와 이해가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접하면 작가의 의도는 물론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주제성을 거의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알렉산데르이며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정약용의 형제들과 교류를 갖던 중 둘째인 정약종(丁若鍾)으로부터 사사

받았고, 정조 14(1790)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후, 정약종의 맏형

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

, 천주교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1801)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중국

에서 파견한 신부인 주문모(周文謨)를 만난 뒤 그의 측근 인물로 활동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 방안에 대해서 북경주교에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로 이를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 편에

보내려다 발각된다.

이 문제로 체포된 황사영은 서울로 압송 뒤 '대역 부도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고,

살아 남은 일가족은 모두 귀양 가면서 [황사영]과 관련된 모든 자취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작품은 혼란한 세상에 홀연히 들어오게 된 서양 종교의 유입 과정에 얽힌 우리 종교

선각자들과 이를 받아 들이는 민초들의 이야기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내용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사건의 줄거리 속에 간간이 끼워 놓은 우리 민초들의

참담한 이야기 소재는 작가가 마치 곁에서 본 사건인양 묘사하고 있는 점은 작가의 숨겨진

또 다른 내공을 보여 준 한 단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으며 왜 작가는 지금 '흑산'이라는 작품을 들고 나와 그분의 이전 작품

'칼의 노래', '남한산성' '현의 노래'로 연결 되는 연장선상에서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

를 던지려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작가는 '한 시대를 증거하는 표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늘 갖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 시대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갈구하는지에 대해 세치혀가 아닌

그들의 재주인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로 무장하고 시대의 아픔을, 민초들의 절박한

속내를 대변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바로 작품은 그런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금융 위기와 국가간의 경쟁적인 환율 장난으로 우리네의 살림살이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한 때는 공업화와

산업화의 역군이라는 평가를 받던 베이비부머세대는 이제 퇴물 아닌 퇴물로 전락해

버리면서 더 이상 그들은 시대의 중추가 아닌 걸림돌로 변해 버렸고, 그것도 모라자

작금에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떨어트리는 주범으로까지 폄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그들이 보유했던 특정 기술은 더 어리고 더 똑똑한 후배들에 의해 추월 당해 용도

폐기를 넘어 무용지물화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고, 그들이 자부하며 지녀 왔던 그들만의

노하우는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기기 앞에 밑천을 드러내 버리고 말아 그들이 지녔던

희소성에 대한 의미도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한 잠재적 역동성을 젊은 피를 소유한

세대를 역시 기성 세대와 같은 수준의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그런 평가에 좌절한 그들은

국가가 쳐 놓아주길 원하는 사회적 안전망에 기대려 하나, 이런 것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될 인간들은 남의 나라 주방용 고무 장갑 광고에 나올 정도로 주접만 떨고 나 몰라라

외면하고 그것보다는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에 몰두한 나머지 연일 색깔 논쟁으로 싸움만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답답함의 극치를 느끼면서 이런 시대적 상황이 빨리 종결되고

어서 빨리 새 날이 오기만을 꿈꾸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아마도 이런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참고로 북한의 '김 청년'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아마 작품 속 시대적 배경과 같은 고민

속에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핵 무기' 운운하시는 모양인데, 전쟁을 일으키면 어떤 무기를

쓰더라도 아래 이유로 절대 이 쪽을 이기지를 못 할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이 쪽의 혈기 방장하고 어디로 뛸지 모를 중학생들의 의식은 이쪽에 사는 기성인력들

         도 컨트롤이 안 되는 별종의 인간들이 무지하게 많고

 

둘째, 대학까지 나와 번듯한 직장을 잡지 못한 채 여기 저기에 이력서를 내밀고 있는 가슴

         에 남은 것은 열정이 아닌 좌절밖에 남지 않은 젊은이들이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군에 들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것이며

 

셋째, 더 중요한 것은 '핵이 있으면 이긴다'는 망상은 절대 허구라는 점을 시대적 상황,

         새 역사의 창조 이전에 감안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할 것임.

때문에 전쟁에 대한 미련은 버리는 게 좋을 듯하다고 생각하는 데 당신 생각은?

작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본인이 앞서 읽고 기록으로 남겼던 독후감에서도 이야기

했던 "조선의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백승종), 세상을 바꾼 여인들(옥당, 이덕일)"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국민 정서적으로 정신적

측면이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었던 것으로 관측 된다 할 것이다.

, 조선의 문화 부흥기를 이끈 영, 정조를 거치며 문화가 융성해 짐과 동시에 민초들의

사고의 폭도 넓어져 민초들에게 과거처럼 일방적인 복종만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조 시대를 거치며 외부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민초들과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는

집권층간의 노골적인 싸움은 서학 문물의 유입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출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 중에서 가장 시대적 상징성이 큰 작품의 소재된

'황사영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간간이 등장하고 있는 중인 및 하급 계층(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이야기가

비록 창작성을 띈 문학 작품일지라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기에 작품에 주요 사례로 등장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나의 눈길을 잡은 대목은 다른 게 아닌 바로 어느

민초의 기도문이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58)

 

라고 기도하는 '언문 기도문'에서 당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작품은 기득권과 새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조직적인 항거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작품을 읽으며 한가지 재미난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의 작품 전개 방식이 본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앞서 읽었던 황 작가님의 작품 역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그 사건의 밑에 침잠해 있던 민초들의 고충을 다루면서 작품의 주제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본 작품도 그런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너무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 김 작가께서 본 작품에 한 해 황 작가님을 COPYCAT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듯 하다고

  이야기하면 아마 발끈하실 수 있을 것 같지만 ㅋㅋㅋ

 

과거 황 작가님이 모 신문에 '장길산'이라는 작품을 연재할 때 작품이 펑크 나지 않도록

수발하러 다녔던 전담 마크 맨이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대 작가님이 자신을 수발하러 다녔던 졸개의 작품 전개 방식을

약간 본 떴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는 순간이다.

아무튼 김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섬뜩한 감각력에 무한 찬사를 보내는 바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작품의 소재와 같은 상황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신유박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 된다.

특히,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지만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할머니인 정순대비(貞純大

)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계열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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