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 그리스 군주의 거울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9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젊은이들 사이에 희망에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리더가 부재(不在)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은 3년 전에 본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작품으로부터 아주 크게 공감받은

구절이었던 부분인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도 처음 접했을 당시의 감흥으로

나를 흥분시키고 있어 소감을 밝히는 글의 도입부에 올려 보았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현 상태를 아포리아상태라고 한다. 아포리아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 ’길이 없음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런 아포리아 상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일개 한 범부(凡夫)가 작품을 통해 느낀

사항을 중심으로 몇가지 기록해 보았다.

- 작품이 첫 발간 당시는 위 상황이 적확했으나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출구를 찾아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는 생각하나, 아직까지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처우문제, 패악질 수준의 졸부들과 특수 계층, 집단들의 갑질 문제, 확실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폄훼 문제, 어린아이를 놓고 대놓고 장사하려는 일부 저질들

문제, 4대 강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문제, 뻑하면 킬조선이니 헬조선이니를 외치는

인간들 문제만큼은 해결 전망이 아직은 요원한 상태로 시급한 남북문제와 북미간의

중재자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출구를 찾고자 하는 가시적

노력이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

나는 사회와 국가를 변화, 개조시킬 아무 힘과 권력이 없는 상태이지만 사실 전에도

그런 힘은 없었었다 그렇다고 넋놓고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저질스런 인간들의

행태를 언제까지 손가락질하며 탄식할 수만은 없어 이런저런 눈치 안보고 여기에 몇자

끄적거리며 나의 울분과 함께 의견을 기록해 놓았다.

 

첫째, 군주에게만 그 책임을 강조하지만 말고 군주가 이끄는 무리의 구성원으로서 또한

군주를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참다운 구성원으로서의 절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뽑아놓고 그 다음날부터 선거부정‘, ’인터넷 조작이 어떠니 하며 어렵게 뽑아

놓은 지도자를 부정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좀 더 자숙하고 자숙해서 흘러간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려 애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럴 시간에 우리 손으로 뽑은 나는 뽑지 않았지만 - 대통령이 정말 제대로 일다운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 격려와 박수를 보내주면 어떨지를 생각해 보는데..., 참으로 백성들의 절제가 아쉬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무슨 의도를 갖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범부들에게는 우리의 군주를 심판할 시간은 아주 많다. 임기의 반을 지나고 있는 중도의 시점이지만 아직 일다운 일도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않은 지도자를 대상으로 일 못한다고 난리치며 호들갑 떨지말고 일단

제대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군주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힘을 실어준 다음에

그래도 일을 못했다고 판단이 되면 군주를, 군주가 소속된 단체나 정당을 투표

응징하면 될 것을 왜 이리들 난리인지 모르겠다.

자기 뜻에 안 맞는다고 삭발식이요, 항의시위요, 세종대왕 앞에서 텐트 농성이요,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대중이 모였다 하면 국민 대다수가 뽑은 사람을 향해 막말과

비속어를 쏟아내니......정말로 답답한 시간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나라와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아포리아인데 이를 해결할 지도자들의 여기에

더해 아포리아식 행동을 부추기고 있어 답답한 세상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어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 보통사람들 모두가 절제심을 갖고 본인의 일에 충실할 때 우리를 옹죄고

있는 이 시대적 아포리아는 빨리 해소될 것이라 보여진다.

둘째, 이런 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참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이슬을 먹고도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분출하는 식물도 있지만, 독을 머금고 살육

의 기회를 엿보는 독사도 나오듯이 소크라테스라는 훌륭한 스승을 두었어도

플라톤과  같은 훌륭한 제자가 있었던 반면, 나라를 팔아먹다 시피한 불세출의

배반자 알키비아데스라는 인간도 나왔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로 교육과 개인적 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나마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기에 향기로운 (플라톤)‘이 만들어진 것이었던

반면 독사(알키비아데스)‘도 만들어진 것이지 그런 교육도 없었다면 어떤 독사로

발전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약간의 억지적 주장이기는 하지만)

 

개인적 인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사건이 있다.

최근 모 대기업의 입사 부정문제 사건을 들여다보니 특정 인물이 자신의 자녀를 해당

기업에 입사시키기 위해 중간 과정도 없이 인.적성 검사 시험을 본 모양인데 거기서도

탈락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합격되어 문제가 된 모양이다.

사건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인적성 시험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해당 인력은 우리 회사에 다닐 자질이 없다는 이야기

라는 것이다. 인적성 검사에 떨어질 정도의 성품의 소유자라면 그 사람의 적성과 해당

기업이 맞지를 않아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해당 기업을 다니지 말았어야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다녔다는 이야기는 당사자의 후안무치적 성격을 그대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고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후안무치적 성격을 누가 물려주었을까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따라서 어떤 자녀가 양육되었을지 생각해 보면 금방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사회적으로는 끊임없는 정신교육과 절제 교육이 뒷받침되고 각 가정에서는

미래의 주역이 될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성교육이 수반되지 않을 때 우리의

이 사회의 아포리아는 지속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느 신문의 컬럼을 읽어보니 좋은 대학이란 대학 입학시험 성적이 높은 학생들

뽑은 대학이 아닌 실력이, 인성이 그저 그런 학생을 훌륭하게 만들어내는 대학

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국민 모두 작금의 아포리아 환경을 우리 손으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일류국민, 일류국가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데, 우리 개개인은 이류, 삼류로 태어났을 수 있겠지만 실제 그런 부류는

없을 것이지만 - 실 생활에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일류 국민, 일류 국가의 구성원이

될 수는 없을까?

셋째, 올바른 멘토가 있어야 한다.

나는 독서를 시작한 이래 수많은 작품을 통해 멘토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또 멘토로

인해 새롭게 변화되고 발전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격해 그 내용을 독후감

에 기록하면서 멘토의 중요성에 대해 아마도 수 천 만 번은 주장해 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시 중언부언 여기서 멘토의 중요성에 대해 세세히 열거하지 않겠다.

이 점에 착안하여 뭔가라도 붙잡고 이것만이 희망이다라고 외치듯이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발전적인 멘토로서의 역할을 하다보면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작금의 우리가 겪고 있고 당면해 있는 아포리아는 사실 정치적 리더십의 아포리아에서

기인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그런 혼란을 부추기는 인사들 탓으로

돌리기 이전에 그런 이들을 우리 손으로 뽑은 것부터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인간들

안 뽑겠다는 다짐 차원에서라도 우리부터 먼저 솔선하여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올바른 절제된 구성원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군주의 거울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생각해낸 인물은 로마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라고 한다. 그가 그런 용어를 만들어낼 당시 그가 실았던 시대는

절대적으로 아포리아적 시대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용어와 책을

만들어 낸 이유가 무엇일까를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특히 작품 2부에 소제목으로 언급되고 있는 사항들은 제목만이라도 읽고 음미해 보는

시간을 별도로 갖는 것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을 정리해 보았다.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군주의 거울]

 

군주의 거울 탄생 배경?

군주의 거울은 기원후 8세기, 유럽이 본격적으로 중세로 접어들던 카로링거 왕조 시대

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문학의 리더십 교과 과정이다.

,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탁월한 리더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싹트기 마련이다.

 

탄생배경 1)

기원후 800년 샤를마뉴 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취임하면서 단일 국가 개념과

봉건제가 생겨나면서 국가 및 지역간의 경쟁과 인근 제후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질 때

세상이 혼탁하면 할수록 대중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나라의 미래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 탁월한 리더를 갈구하게 되면서 특별한 인문학 교과 과정으로 개발된 것.

중세시대에 처음 등장한 군주의 거울은 프랑스 북동부 베르됭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장인 스마라그두스가 쓴 군주의 길로 추정된다.

 

탄생배경 2)

476년 서로마제국의 함락이라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유럽 지성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헌의 가치가 새로운 성찰을 촉구하며 탄생한다.

 

왜 하필 그리스일까?

인구 30만 명이 전부인 아테네를 크세르크세스가 지휘하는 500만 명 이상의 강력한

페르시아 군대가 침공하면서 ’1차 아포리아에 빠지게 되었고, 이어서 벌어진 함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읊던 동족끼리, 같은 헬라어를 쓰는 피붙이끼리 올림픽이 열리면

함께 뛰고 달리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을 초래하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2차 아포리아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일련의 그리스의

아포리아는 군중의 거울이 될 고전의 탄생을 촉발시키게 된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그의 바톤을 이어받은 투키인디데스가 두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전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 그는 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아테네를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게 한 리더의 문제에 대해 정확히 분석하며 아포리아 상태에 직면했을

때 선택해야 할 리더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아테네는 공권력으로 소크라테스를 독살함으로써 ’3차 아포리아에 빠지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의 죽음에 펜을 든 수제자 플라톤과 애제자인 크세노폰

그리스의 아포리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왜 그리스에서 아포리아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위대한 통찰의 글인 국가키루스의 교육이라는 장차

군주의 거울이 될 불세출의 명저를 남기게 된다.

 

위기는 기회를 만들지만 아포리아는 인간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분별력을

    낳는다.---> 이것이 그리스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P 34)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 헤로도토스의 역사‘]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소개되고 있는 예화의 참 뜻?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도입부에 리디아(터키)의 크로이소스 왕솔론(아테네의 입법

개혁자)‘의 대화를 등장시키는데 그 이유?

작은 나라 리디아 왕이나 큰 나라 페르시아의 왕은 인간의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또한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행복에 대해 등장시키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헤로도토스는 한 어리석은 군주의 행복(크로이소스)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보여주어

이런 허황된 행복의 추구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 우리가 결코 본 받지 말아야 할 인물의 반면교사로써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또 베네치아의 16세기 르내상스 거장 틴토레토가 그린 불카누스에 의해 발각된

비너스와 마르스의 불륜이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다를 바 없는 실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헤로도토스는 참모들의 찬반 의견을 모두 청취하고 일시에 내린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를 즉각 수정할 줄 알며, 새롭게 내린 합리적인 결정을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군주의 거울로서 크세르크세스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종국에는 그의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끄집어 내고 있다.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그는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지략과 과감한 추진력 부분에서

후대의 군주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을 갖춘 군주의 거울이 됐다.

 

헤로도토스의 결론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누렸던 권력과 부를 행복의 기준으로 착각한 인물,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어리석고 우유부단했으며 쓸데없은 과시욕에 사로잡혀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인물로, 테미스토클레스는 타고난 정치적 감각으로 승리를

쟁취했으나 권력을 향한 의지자 지나쳤고 재물 욕심을 억제하지 못한 인물로 평가.

---> 이들의 공통점은 오만이었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 이런 문제가

발생함을 역설하고 있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군주의 거울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의 핵심이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

 

태풍 전의 고요함

페르시아를 격퇴한 아테네에서는 소포클레스와 같은 뛰어난 비극 작가가 등장해

인간의 본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심각한 위기를 극복했을 때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바로 그 시기였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인간이 가장 극한 상황에서 품을 수 있는 내면의 슬픔과 좌절을

개인과 공동체(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과 교차시켰는데, 비극의 서사적인 원인은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비극이 공동체의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희극은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주목을 받았다.

 

그리스의 두 번째 아포리아, 펠레폰네소스 전쟁

- 페르시아 전쟁과는 달리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부터 긍지와 명예심이 자취를 감추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천륜을 저버리는 일도 서슴없이 감행하는 반문명적인 전쟁의

  형태가 나타난다. ---> 두 번째 아포리아 발생의 배경

-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하나는 제국의 논리에 대한 그리스인

  들의 새로운 해석으로 오늘날 국제정치에도 통용되고 있는 강대국의 외교정책으로

  단일 국가의 운영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제국의 논리를

  처음으로 이론화하였던 것이다.

-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리스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한 기록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영원히 반복될 보편적 역사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③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

-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보여준 승리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페르시아를

  물리친 문명국으로서의 자긍심이 그들을 점차 제국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

-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거의 모든 위기의 구조적 특징이 드러났고,

  이런 위기의 구조적 패턴에 대응하던 이상적인 리더들의 모습을 하나씩 보여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위기는 동일한 패턴으로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이었고 미래의

  리더들이 그 반복되는 위기의 패턴을 분별해 그 극복 방식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군주의 거울, 영웅 페리클레스

-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영웅이 탄생되었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서는 그리스의 페리클레스라는 영웅을 만나게 된다.   

- 페리클레스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였다.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여 많은 수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유명한 페리클레스이 추도연설’(P 110)이 나오는데,

  이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전쟁 패전의 책임회피나 면피성 발언 및 패전의 좌절의

  내용없이 위기의 순간에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확히 제시하였는데

   1)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

   2) 미래를 예측하는 식견을 갖추고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

   3) 조국, 회사, 가정 그리고 학교 등 자신이 소속된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함

   4) 재물에 대한 초연한 마음

-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면 이를 경계시켰고, 반대로 지나치게

  낙담하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발진티푸스로 그가 죽으면서 아테네의 몰락을

  촉발시켰고 잘못된 지도자의 출현을 재촉한다.

 

배신의 아이콘, 알키비아데스

- 알키비아데스의 스승은 소크라테스였으며 그는 페리클레스의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시칠리아 정복 전쟁 중에 자신의 조국을 배신했고, 적국에 가담하여 조국을 침공하는

  선두에 서기도 했으며, 동맹국의 왕비와 불륜 사실이 발각되어 도망하여 또 다른

  적국으로 변절하는 등 파란만장한 생을 산 인물이다.

- 이런 인물로 인해 아테네의 국력은 급격히 쇠잔해지고 마침내 동맹국들이 아테네로

  부터 떨어져나가자 마침내 스파르타에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 아테네의 패배는 페리클레스이 갑작스런 죽음 이후 등장한 지도자들의 한심한 행태

  때문이었다. , 아테네가 흥한 것도 패한 것도 다 사람 때문이었다.

 

[철학으로 아포리아에 맞선 스승과 제자]

그리스의 세 번째 아포리아, 소크라테스의 죽음

- 그리스의 구조적인 쇠락의 조짐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특히, ’타소스 섬에서의 금광석의 발견은 아테네를 배금의 도시로 변모시켰고

  물질적 풍요가 가치 선택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몸의 숭배현상이 나타나 몸짱

  얼짱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임을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려 했다.

- 당시 아테네는 말 잘하는 사람들의 도시였는데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바뀌게 된 동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포티다이아 전투)에 참여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은 이후 이런 변화가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 그는 이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한 인간의 덕목으로 간주하던 탁월함인

  아레테이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 포티다이아 전투 이전의 탁월함은 주로 신체의 아름다움이나 적 앞에서 기죽지 않는

  군사적 용맹을 뜻했는데,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이런 탁월함의 추구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자각하며 탁월함은 외모 지상주의가 아니라 절제하고

  헌신하는 자세로 바뀌었고, 진정한 용기는 남에게서 승리를 빼앗고 적을 살육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무엇보다 지혜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포리아가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기 위해 안달하면서도

  정작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음을 간파한 것이다.

- 3차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패전 원인은 알키비아데스의 배신같은 여타의 원인에

  기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유를 소크라테스의 탓으로 돌리고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이 제자이며 그들이 젊은이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아테네 위기의 원인이

  소크라테스라고 지목해 독배로서 처형하고 만다.

  --->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들, 반짝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와 착각이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불러온 것이다.

 

그리스의 마지막 아포리아에 맞선 제자, 플라톤

-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제자 플라톤은 정치가가 되려는 꿈을 접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 스승이 보여주려던 지혜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 플라톤은 이상 국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담아 국가라는 책을 집필한다.

  여기에는 관념적인 철학이 아닌 아포리아 시대에 직면한 한 철학자의 처절한 고뇌가

  담긴 책인 동시에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을 보여주기 위한 실천적인 시도였다.

- 플라톤이 꿈꾸었던 국가는 궁극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추구였으며 정의가 실현

  되는 곳이 바로 이상 국가였다. ’정의로운 사회란 소속되어 있는 각 집단이 각각의

  위치를 성실히 지킬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 플라톤은 한 나라의 통치자는 국가 전체의 방향과 같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며, 용기란 불굴의 투지가 아닌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욕망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소신을 버리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절제

  말로 일반 시민들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고 말한다.

  ---> 이상적인 나라는 지혜와 용기를 가진 소수의 통치자가 절제를 추구하는 다수의

         일반 시민을 통치하는 것에 대해 서로 합의한 뒤 그 통치권을 받아들여야 하고,

         바로 그것이 이상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결론이다.

* 국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절제의 미덕은 서구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9.11 사태)

  즉,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서구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개방적인 체제를 유지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일단 지도자가 선택되면 철저하게

  그 지도자의 통치에 따르는, 즉 절제의 미덕을 따른다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

- 플라톤은 아포리아가 초래된 이유를 잘못된 교육 방식 때문이라고 했다.

  ,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전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몸을 돌려 사물의 본질을 보게 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고

  강조함.---> 방향의 전환을 강조

- 플라톤은 아포리아 시대를 헤쳐나갈 군주는 현실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를 실재하는

  것이라 믿지 말고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으로 상징된 본질을 볼 것을

  강조하며 그 후에 반드시 다음 단계로 또 한 번의 방향 전환을 시도할 것을 요구.

 

[그리스의 마지막 군주의 거울] -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그리스 최고의 군주의 거울을 쓴 사람

- 군주의 거울 중 최고의 저서는 크세노폰키루스의 교육이다.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페르시아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여기에 동참해 줄 것을 크세노폰에게 요청하자

    자신의 입지를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소크라테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 상세한 관련 내용은 크세노폰의 작품 아나바시스’(독서일기 309)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본 작품의 주제와 거리가 있어 여기서는 축약을 제외함

 

플라톤과 크세노폰

- 플라톤과 크세노폰 두 사람은 아포리아의 시대에 대응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 플라톤이 사색하는 삶을 살았다면, 크세노폰은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따라서 철학적인 플라톤의 국가아 달리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엄정하고

  냉혹한 실상을 거칠게 다루는 현실적인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왜 군주의 거울이 되었을까?

- 키루스 대왕(성경에는 고레스 왕’)은 페르시아의 창건자로 지금으로 말하면 이란의

  국부에 해당하는 인물로 비록 이교도의 왕이었으나 여호와께서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하나님의 사자였기에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아로 칭송하고 있다.

   --->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주고,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정의의 수호자가 돼라]

- 키루스는 모든 정의는 법에 근거해야 하며, 법에 근거하지 않은 판단은 정의롭지

  않다고 하였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 한 나라의 운영을 책임진 군주의 첫 번째 임무는 선한 사람을

  악한 인간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중상모략이 판을 치지

  못하도록 선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맛 나는 세상, 살아갈 만한 이유가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정의로운 군주는 권리의 평등이 참된 정의라고 확신하며

  무지와 의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법이 엄중히 정한 바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플라톤의 정의와 개념이 상이)

 

[세월의 변화를 직시하라]

- 유럽인들에게 루돌프라는 이름은 사슴 코보다 무능한 군주의 대명사이다.

- 세월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읽지 못한 자는 비국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

 

[불확실성에 의존하지 말라] 

- 탁월한 장수는 자신의 운명을 불확실한 행운에 의지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것은 포르투나, 즉 행운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키루스와 그의 아버지 캄비세스, 그의 외삼촌 키악사레스간의 이야기)

 

-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참된 군주는 남의 호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늘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스스로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군주는 전쟁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절대로 행운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고난을 함께 나누라]

- ‘복종하는 자에게 명예를, 그렇지 않은 자에게 처벌과 불명예를 주는 것은 과거의

  방식인 강제적 복종방식이라고 하면서 지배자가 피지배자보다 더 지혜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미래의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식이 아닌

  지혜임을 강조하고 있다.

 

- 지혜를 습득하는 빠른 길, 즉 왕도는 없으며 부지런히 노력하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자발적인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군주는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하며

  군주 자신이 백성을 섬기고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려고 노력할 때 가능함을 강조

고대 수사학자들이 강조한 대중연설을 통해 명확한 의사 전달방법

  첫째, 로고스의 수사학적 단계(지미 카터식 연설)

         합리성에 근거한 설득, 정확한 문법, 정확한 비유, 촌촐살인의 위트, 효과적인

         고전의 인용을 통해 자신의 뜻을 대중에게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

둘째, 에토스의 덕목(빌 크린턴식 연설)

        청중을 감동시키는 열정적인 태도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아라

셋째, 파토스적인 것(오바마식 연설)

        고난을 하께 나누는 것으로 백성들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식

 

- 탁월한 군주의 덕목은 파토스적인 삶을 인내로 살아가는 것이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먼저 고난을 감내하는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발적인 복종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군주에게 바치는 백성들의 선물이다.

    

[군주다움을 끝까지 지켜라]

[군주의 아내도 군주다]

 

[사람들은 군주의 뒷모습을 본다]

- 군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키루스는 늘 한 가지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수많은 부하들이 지금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은 각도에서 대상을 보고, 그 사람을 해석하고

  그 인물됨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승리의 방식]

- 키루스 대왕의 전쟁 원칙

   1) 적의 아군부터 무력화시킨다

   2) 수비가 아닌 공세를 취한다

   3) 적에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4) 병사들의 사기를 최대로 고취시켜 전진하게 만든다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라]

- 모든 인간은 사이렌(스타벅스의 로고 그림)의 유혹 앞에 굴복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

- 군주가 가지고 있는 부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때문에 군주는

  오히려 더 지독한 운명의 장난에 내던져질 확률이 높다.

  국가는 군주의 자질이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망한다.

[레거시를 남겨라]

- 17세기 신성로마제국(독일)에 대한 베스트팔렌 조약, 2차 세계대전의 얄타회담으로

  망신창이가 된 독일이 불사조처럼 부활해 EU의 맹주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독일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아젠다가 주어지거나 국가적 위기에 봉착을 하면

         국민 스스로가 비스마르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 독일인들에게 있어 철혈 재상인 비스마르크가 군주의 거울인 것이다.

 

[초심을 잃지 마라]

- 키루스는 대업을 달성한 뒤에도 근엄하게 행동하고,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횟수를 줄여 친구들의 질투심을 최대한 적게 유발하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 제국을 얻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얻은 후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욱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슬이는 용기를 가진 자에게도 가끔 주어지지만, 승리를 쟁취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절제와 인내 그리고 엄청난 주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은 사람이 아니다]

- 위대한 제국은 대리석이나 권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제국은 영토가 아니라 사람이다. 제국은 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 키루스의 인재등용 원칙

   첫째, 독실한 신앙심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신앙심 일반을 중시했다.

          어떤 종교를 믿던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절제심이 강하고 도덕적 기준이 높다고 보았다.

둘째, 자제심이 강한 사람

          사려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띌 때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지만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도 그런 짓을 삼간다

셋쩨, 탁월함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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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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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 역사 속 영웅들....그들을 알아야 미래를 엿볼 수 있다 -

 

내가 본 작품을 접했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고대 로마의 영웅들을 통해 각 인물들이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통해 또 그들의 여러 공적의 분석을 통해 지금을 살고있는, 나와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현실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작품을 접했으나

나의 그런 바램과는 달리 작품은 개개인별 특정 분야나 그들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아닌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결혼, 출산, 육아 등 포괄적인 사항을 언급하고 있어

해당 인물을 평가하기가 난해하였고,

 

간간히 기술되어 있는 영웅들의 전투 내용과 그들이 행한 실질적인 정치 및 위민정책에 대한 \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글로만 접하려고 하다보니 당시의 역사적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된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동안 막연하게마 알고 있었던 내용에 추가하여 새로운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은 다소의 위안이 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인 작품의 아쉬움을 달래기애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것은 영웅은 절대

미인을 싫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그런 미녀로 인해 망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뤼쿠르고스 ]

- 스파르테(‘스파르타의 그리스어 이름이다)의 입법자로 기원전 800년경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

  되는 인물로 지금도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P 17)

- 그는 헤라클레스의 11세 손으로 수년간 라케다이몬의 실질적인 왕이었다.(P 99)

- 개혁 가운데 으뜸가는 위업은 원로원 창설이다. 왕들의 통치를 완화하고 중대한 사안에 대등

  한 표결권을 가짐으로써 국가에 안정과 절제를 가져다 주었다. 28명의 원로원 의원들은 민주

  주의에 대항할 때는 왕들의 편에 섰고, 참주정치의 출현을 막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백성의

  힘을 강화해 주었다.(P 26)

- 법률을 성문화하지 않았는데, 국가의 번영과 탁월성에 기여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대한

  원칙은 시민의 습관과 태도에 뿌리내리고 있어야만 든든하고 변함이 없으며 젊은이 각자에게

  입법자 역할을 하는 교육에 의한 강요보다 더 강한 구속력이 있다고 하였다.(P 38)

- 아이들을 아버지의들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가의 공동 재산으로 보았다.(P 43)

  아이들이 7살이 되면 국가가 아이들을 맡아 규칙과 제도 아래 함께 놀고 배우게 했다.(P46)

-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권선징악의 요소를 가미해 온 도시를 훌륭한 본보기로 가득 채워 그들이

  그런 본보기와 늘 마주치고 접촉함으로써 선()을 향해 나아가는 형성기에 감화받게 하였다.

                                                                                                                   (P 62)

- 백성들이 이방에서 전염병을 옮겨오는 것을 막는 것보다 나라가 나쁜 관습에 감염되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P 63)

- 그는 곡기를 끊고 굶어 죽었다, 정치가는 죽으면서도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 만큼 정치가의

  인생 종말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덕행(德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

  이었다.(P 67)

- 그의 주된 관심사는 한 도시 전체의 행복도 한 개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탁월함과 내부화합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조치와 제도의 목적은 자신의 백성이 자유롭고 자족적이고

  절제를 지키되 가능한 한 오래 그런 상태로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P 70)

 

[솔론 ]

- 그리스 일곱 현인 중 한 명으로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되면서 양측 모두

  에게 보호자가 되고자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시민들이 신분이 아니라 재산 등급에 따라

  각종 관직에 진출하게 한 것이다.(P 73)

- 솔론은 자신의 법을 서사시 형식을 빌어 반포하려고 했다.(P 78)

- 솔론은 참주가 되기를 거절했지만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 지나치제 부드럽지도 않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도 않았으며 법을 제정함에 있어 자기를 뽑아준 자들의 환심을 사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설득에 따르거나 권위에 순종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항에 대해서

  만 개혁을 추진했다.(P 96)

-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가 취한 조치는 빚 탕감이 아니라 이자 경감이었는데, 아테나이인들은

  이 온정적 조치에 만족하여 이 조치뿐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진 도량형의 확대와 통화 가치

  절상에 대해서도 짐 덜어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P 97)

- 그가 행한 여러 개혁 조치들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당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어느 편에

  도 가담하지 않은 자의 공민권을 박탈하도록 규정해 놓은 법이다. 이는 더 낫다고 정의로운

  편에 즉시 가담해 위험을 같이하며 그들을 도와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P 105)

- 또 다른 법 중 인상적인 것은 사생아들에게 아버지를 부양할 의무를 면제해 주는 법이었다.

  결혼이라는 미풍양속을 무시하는 자는 자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자

  를 데려가는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은 당연한 응보인 것이다.(P 109)

- 솔론은 일하지 않는 자를 지원해주기보다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

  했다.(P 111) * 그 밖에 소제목 18~25까지의 솔론 개혁의 내용은 무수히 많다.

- 군주의 거울(김상근 )에도 언급되고 있는 크로이소스와의 대화는 솔론의 의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화로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가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창고를 보여주며 자기보다 더 행복

 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면서 그는 바로 자신의 동료 시민인

 텔로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는 조국 위해 싸우다 영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하자. 크로이소스는 다시 묻는다. 그러자 솔론은 다시 답을 하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바로

 형제 간의 우애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두 사람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다라고 답하면

 서 그 형제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을 들어드렸으며 그 어머니는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이야기한다

솔론은 이 예화를 통해

우리의 평범한 지혜는 인생이란 흥망성쇠를 거듭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우리가 지금 잘 나간다고

해서 기고만장하거나, 아직도 바뀔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어떤 사람의 행운을 찬탄하는 것을

금하고 있소아직 살아서 위험을 무릎쓰고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인데 어떤 선수를 우승했다고 선언하며 영관을 씌워주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고 효력이

없다

크로이소스에게 일침을 가한다.

나중에 크로이소스가 퀴로스에 대패하여 화형으로 죽게 되자 크로이소스는 솔론과의 과거 대화

를 상기하면서 크게 각성하였다‘(P 118~120) 

 

[테미스토클레스 ]

- 아테나이의 정치가로서 아테나이의 해상강국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함(P 129)

- 그는 천성적으로 명예욕, 출세욕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 등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사교 모임에서 조롱거리가 되자 다른 현악기의 현을 조율할 줄은 몰라도 작고

  시시한 도시를 맡아 영과스럽고 큰 도시로 만들줄 안다는식으로 상대로 제압하기도 하였고

  (P 132), 사람의 논리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을 때는 하늘의 조짐과 신탁을 활용하기도

  하였다.(P 144)

- 아이기나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해양전투력의 강화를 역설해 100척의 삼단노선을 건조해

  전쟁에 대비해 아테나이 시민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나 일부에서는 든든한 중무장 보병

  대신 선원과 바다 사공을 만들었다는 비난도 들었다.(P 135)

- 그는 정적인 아리스테이데스도편추방시키는 데 성공하나 그 자신도 도편 추방되는 불운을

  맞이하기고 한다.(P 138)

- 가장 큰 업적은 헬라스의 내전을 종식시켜 헬라스 도시가 서로 화해하고 페르시아와 전쟁 중에

  는 상호간의 적대 행위를 뒤로 미루도록 설득한 것이었다.(P 138)

- 아테나이인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타너스 취급을 한다며,

  날씨가 궂으면 가지 밑으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기만 하면 가지를 쳐 자라지 못하게 한다

  고 말하곤 했다.(P 158)

- 그는 동맹국들을 돌아다니며 돈을 강요하였고, 자신의 업적을 너무 나타내려 해 동료들의 미움

  을 사서 아테나이인들로부터 도편 추방되는데, 이는 어떤 사람의 권세가 특출하여 민주주의적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으레 행하던 일이었다.(P165)

- 도편 추방된 그는 전쟁 상대국가였던 페르시아로 넘어가 정치활동(P 166)을 한다.

  페르시아에서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되자 저를 살려주신다면 전하께서는 탄원자를 구해주시게

  될 것이오나, 저를 죽이신다면 전하께서는 헬라신인들의 적을 죽이시게 됩니다라는 말로써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P 173)

- 그는 또 페르시아 왕에게 사람의 말이란 수놓은 양탄자와 같아 펼치면 여러 가지 문양을 드러

  내지만 말아버리면 그 문양을 감추거나 일그러뜨리는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감언이설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P 174)

 

[페리클레스 ]

- 아테나이의 정치가로서 명문 출신으로 철저한 민주정치의 신봉자로 아테나이를 그리스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파르테논 신전 등과 같은 오늘날 전해오는

  고대 유명한 유적들을 다수 신축했다.(P 183)

- 페리클레스에게는 세 명의 스승이 등장하고 있다.

  음악 선생은 다몬‘, 철학은 제논그리고 가장 가까이 지냐며 민중선동가의 어떤 호소보다

  힘 있는 위엄을 심어주고 타고난 품위를 더 높여진 사람은 아낙사고라스였다.(P 190)

- 페리크레스는 본성상 민주주의자가 아닌데도 소수의 부자들 대신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했다.(P 193)

- 그의 생활 자세는 절제그 자체였다. 공직에 있는 동안 친척 결혼식에 참석한 것 말고는

  친구는 물론 그 누구와도 식사를 같이 한 적이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P 194)

- 페리클레스는 민중이 금세 싫증내지 않도록 민중 앞에 이따금 모습을 드러냈고 급한 사안에

  대해서만 드물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밖의 일들은 친구들이나 다른 연설가들이 처리하도록

  했다.(P 194)   

- 타고난 재능에 덧붙여 고매한 사상과 완벽한 실천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자연철학 덕분

  이었으며, 자신이 배운 것을 언변술에 적용함으로써 그는 다른 웅변가를 훨씬 능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올림포스의 주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P 195)

- 페리클레스는 헬라스 국가들과 비헬라스 국가들에서 비롯되는 막강한 힘, 예속된 종족들이나

  우호적인 왕들이나 동맹을 맺은 왕조들이 지켜주고 있는 통치권 등 아테나이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더 이상 민중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바람처럼 변덕스러운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P 208)

- 그는 민중의 희망과 두려움을 두 개의 키처럼 이용해 그들이 오만할 때는 제 때에 제동을 걸고

  의기소침할 때는 북돋워주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P 209)

 

* 작품 내용이 절대 분량이 페리클레스의 전공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전쟁사나 주요 인물들과의 역학관계에 능통하지 않는 한, 작품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축약함.

 

[알렉산드로스 ]

- 아드리아 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군인이요 지도자로 세계를 무대로 정복활동

  을 편 최초의 영도자로 그리스의 언어와 제도를 동방 세계에 뿌리내리게 하여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P 243)

- 소년 시절부터 그는 자제력이 높았다. 다른 점에서는 성급하고 격정적이었지먼 육체적 쾌락에

  는 탐닉하지 않았고 그런 것들을 즐기더라도 상당한 절제를 보였다.(P 248)

- 군자금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 나서는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잘 나누어주었다고

  하며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자 부하가 전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을 남겨두시렵니까?‘라고

  묻자 그는 나는 희망을 남겨두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P 264)

  특히, 점령지 해안지대에서 보내온 진귀한 과일이나 물고기를 측근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P 279)

- 행운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투를 위해 이상적인 지형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승리는

  그런 행운보다는 그가 갖춘 장군으로서의 자질 덕분이었다.(P 273)

- 알렉산드로스는 적에게 이기는 것보다 자신에게 이기는 것이 더 제왕답다고 여겼는지 절대

  여인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는 여인들의 신체 아름다움에 자신의 절제와 극기의 아름다움을

  대비시키며 마치 생명 없는 입상들인 양 여인들을 대했다고 한다.(P 276)

- 자신의 군대가 수많은 전리품들로 방해받아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먼저 자신과 측근

  들의 짐수레를 불사르더

 

* 페리클레스 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작품 내용이 절대 분량이 알레산드로스의 전공과 관련된

  여러 전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전쟁사나 주요 인물들과의 역학관계에 능통하지

  않는 한, 작품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실정으로 축약은 여기까지

 

[마르쿠스 카토 ]

-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단련, 불굴의 정신력, 엄격한 도덕성, 적극적인 정치활동 등으로

  재정관, 집정관 등 주요 보직을 엄정하게 수행하였고, 감찰관에 임명되어 활동할 당시에는

  엄격한 법집행으로 감찰관 카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함.(P 359)

- 특히, 로마인들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을 신인(新人)‘이라고 불렀는데

  그들도 카토를 그렇게 불렀다.(P 360)

- 쾌락은 악의 가장 큰 미끼인 만큼 피해야 하며, 혼의 가장 큰 장애물은 몸인데 혼은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몸의 감각들을 멀리할 때에만 자유롭고 정결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었다.(P 364)

- 카토는 자기는 나쁜 짓을 하고도 벌 받지 않기보다는 옳은 일을 하고도 보답받지 못하고

  싶으며,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되 자신의 잘못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P373)

- 선량한 시민이라면 자기가 칭찬을 받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칭찬을 받을 만해도

  칭찬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P 391)

- 카토는 재산보다는 집안을 보고 아내를 골랐는데, 그것은 부유한 여자들이나 집안이 좋은

  여자들이나 다 같이 위엄과 자긍심이 있지만, 가문이 좋은 여자들은 원래 수치스러운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모든 일에서 남편의 뜻을 더 잘 따르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P 392)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傳]

- 두 번이나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감찰관까지 지낸 인물로, 로마의 특권층이면서 가난한 시민들

  에게도 제국의 부와 성과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의 소유자였음

- 농지개혁 등과 같은 혁신적인 개혁을 단기간에 추진하려는 과정에서 기존 세력과 부딪혀 목숨

  을 잃게 되는데, 그의 죽음으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P 407)

- 부자들은 가짜로 꾸며낸 소작인들의 명의를 이용해 소작지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고,

  결국에는 대부분의 땅을 공공연히 자신들의 명의로 소유했으며 자신들의 땅에서 자유민들을

  쫒아내고 외국노예들을 시켜 경작하게 하였다.(P 416)

- 기득권층을 대상으로 토지개혁에 임해서는 민중의 요구가 정당하고 또 민중은 나라를 지키려

  고 큰 위험과 고통을 겪고도 사소한 대가를 돌려받는 만큼 그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자고 기득권층에 호소하여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의견이 수용된다.(P 423)

* 기타의 내용은 티메리우스의 토지개혁과 관련된 회의와 관련된 내용과 죽음의 순간에 관한

  내용으로 더 이상의 공적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임

 

[가이유스 그락쿠스 ]

- 위에서 언급한 티베리우스의 동생으로, 티베리우스의 토지개혁이 실패하자 정치에 뛰어듬

  형이 추진하던 농지 분배법을 부활시켰으나, 그가 추진하려던 시민법이 외면당하고 로마민중이

  외면하자 자살하고 만다.(P 437)

 

[카이사르 ]

- ’줄리어스 시저라는 영어식 이르으로 더 잘 알려진 율리우스 카이사르‘, ’귀족파의 우두머리인

  술라가 죽은 뒤, 민중파였던 그는 로마로 돌아와 출세가도를 달린다. 카이사르는 군사들에게

  충성심을 심어주고 호감을 사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그런 능력이 그의 강력한 집권과

  영토 확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P 461)

* 그와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은 역사와 관련된 사항으로 여기서는 제외

- 카이사르는 수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힘들게 성취한 것들을 즐기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그러한 성공들은 미래의 성취에 대한 자극제가 되어 그의 마음속에 더 위대한 업적에

  대한 계획과 새로운 영광을 향한 열망을 심어 주었다(P 536)

- 카이사르의 통치는 카이사르 자신의 처신에 관한 한 독재와는 전혀 무관해 보였으나 측근들

  때문에 인기를 잃었다. 측근들 중에서도 안토니우스가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며 가장 심하게

  탈선했던 만큼 가장 비난 살 짓을 했다.(P 567)

 

[안토니우스 ]

- 카이사르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파르살르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도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 공을 세운다. 카이사르의 생질로 입양된 옥타비아누스와 경쟁 구도를 펼치다 다시

  화해하고 레피투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이끈다.

  그후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캇시우스를 제거하고 로마 세계를 양분하지만 곧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허송 세월을 보내다 옥타비아누스와 벌인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하고 끝내는 자결로 세상을 마감한다.(P 557)

- 그는 역경 속에서도 최선의 자질을 드러내는 특징이 있었다. 방탕스러운 생활을 해 오면서도

  부하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섞은 물을 마시고 야샹과일의 뿌리를 먹는 등 병사들 앞에서 솔선

  수범하는 등 선심을 잘 쓰며 친구들과 군사들에게 아낌없이 호의를 베풀었다는데, 이것은 그가

  권력을 잡는데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고 한다.(P 579, 563) 하지만 그의 전반적 생활 태도 때문에

  올곧고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P 569)

- 안토니우스는 일단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카이사르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며 군대에서 카이사르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P 568)

-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의 낭비벽과 어리석은 생각을 대부분 뿌리 뽑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그의 과오를 알아차리고 나서부터이다.(P 571)

- 클로디오스의 미망인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와 재혼했을 당시 그녀는 통치자(안토니우스)

  통치하고 지휘관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났을 때 안토니우스는

  여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지고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기 용이했다고 한다.

(P 571)

   안토니우스의 성격이 단순하고 사태 파악이 느린 편이다 보니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은

   그에게 결정적인 재앙으로 다가왔다.(P 589)

-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브루투스와 캇시우스 일파와 모의하는 과정에서 주고 받은 정보를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끝까지 알리지 않았으며(P 575)

  거사에 성공한 후,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문건에 자기 사람들의 이름을 삽입하여 많은

  사람들을 관리나 원로원으로 임명하는 등 정권을 좌지우지 했다.(P 576)

- 2차 삼두정치의 주역이었던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의 소개로 카이사르의 친구가 되면서

  톡톡히 덕을 보았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에 우호적이었다.(P 580)

-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키케로를,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외삼촌인 루키우스 카이사르

  를 내주고, 레피두스는 자신의 아우인 파울루스를 내주며(살해하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P 582)

- 소 패러그래프 53부분은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안토니우스의 부인)와의 치열한 관계와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어떤 방시으로 홀렸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P 625~6)

- 안토니우스는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꼭두각시가 되어 보병이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훨씬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대패하고 만다.(P 638)

  특히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전쟁 중에 도망치는 것을 보고 모든 일을 잊어 버리고

  자신을 위해 싸우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배신하고 달아났다.(P 644)

- 안토니우스가 패전 뒤 자살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녀는 자기 자식들이 자신의 왕권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요청한다.(P 659)

- 클레오파트라는 39세에 코브라에 의도적으로 물려 죽었다고 한다.(P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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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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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작품 제목과 같은 행동을 한 인물로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영웅중의 영웅이라고 항시

생각하고 있는 분의 이름이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아 무척 실망스러웠던 작품이지만 나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어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고 살고 있는 요즘 세대 인간들이 읽었음

하는 작품이다.

그의 이름은 어니스트 새클턴이다.(그가 누구인지는 여러분들이 찾아보시길...)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주제로 다루었던

인간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쓰러질 수는 있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자체였기 때문이며, 오늘날 크게 칭송받고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의 범위가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부하들을 자신의 목숨같이 아껴서 생환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저자가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대한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작품은 최악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타이타닉호 선장인 에드워드 스미스’ - 그는 아마 그 어떤

형태의 선박 사고가 나도 매번 그의 이름이 언급될 것이다 - 와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

예로 들었고, 반대로 영광스런 패배자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별칭인 사막의 여우라 불리었던

에르빈 롬멜과 새로운 사고를 부르짖으며 글라스노스트(개방, 투명성 서구 여론에 대한 신중한

접근)와 페레스트로이카(국가, , 총체적 개혁)를 천명하며 썩은 물처럼 정체되어 있던 소비에트

체제를 부숴버린 고르바초프를 들고 있다.

(이들의 세부적인 이야기는 본 작품을 사서 읽을 것을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작가의 주장에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는 바로 쿠바의

영웅이요 사회주의 영웅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다.

저자는 그를 위대한 패배자라 외치고 있는데, 나는 그를 이전의 체 게바라 평전통해서도

접하고 평하였지만 그를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인물로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작품에서 전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평가하면서 게바라는 이 세계에 비해

너무나 선한 모든 사람이 결국 악한 세상 때문에 죽고 마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였다며 영광스런

패배자로 선정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정말 그런 숭고한 정신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했는지가 궁금하며 오히려 그를 보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IS’알카에다가 생각났으면 생각났지 과분하게도 위대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행동을 읽다 보면 우리의 문학작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속에 등장하는 곽오주라는 인물

- 작품 속에서 그는 어린 아이를 자신들의 행동에 걸림돌이 된다고 죽이고 있다 - 과 뭐가 다른지

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이런 관점과 시각에 대해 무식한 놈이라고 욕을 할 수도 있다.

역사도, 자본주의에 맞서 처절히 싸운 용사도 모르는 놈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시각도 있지만 나의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는 단순히 현실 세상에 부적응 상태를 보이다 우연히

그런 길로 들어선 인물이고 거듭난 것이지 어떤 시대적 사명감에 의해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

나의 관점으로는 그는 현실에 부적응을 보여 일상의 돌파구를 찾아 분쟁 지역을 찾아 나선 그런

평범한 인물이었거나 분쟁지역만 찾아다니며 자기 스트레스를 풀 요량으로 게릴라전에 참여한

인물(전투 용병)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어니스트 새클턴’(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면 찾아 보시라)같은 인물로

나는 미국의 엘 고어부통령을 들고 싶다.

그의 행동은 지금도 툭하면 우리 대통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질하는 한국적 민주주의

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을 했기 때문이며 아직도 좀 세상을 안다고 외치는 인간들과 매스콤을 통해 민중적 스타일의 스타적 자질이 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는 일부 모자란 인간들이

툭하면 지랄치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그는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

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패배자로 또 매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 여왕(헨리 7세 증손녀)헨리 16그리고

독일의 황제이자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빌헤름 프리드리라는 인물을 들고 있다.

이들이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는 작품을 사서 읽으며 느끼기 바라고 나의 경우는 그들의 이름을

마주하다 보면 우리 정치판에 항상 문제를 몰고 다니는 문제적 인사들이 항시 떠오르고는 하는데 실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쯤 읽어 보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헨리 8세와 둘째부인 에블린 사이에 태어나 일세기를

풍미한 엘리자베스영국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왕위로 올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상세한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도 그들이 그런 찬스를 잡을 수 있을지가

오늘도 궁금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독일 수상까지 될 뻔하다 실패한 독일의 라이너 바르첼이라는 분이 1962자신이

속한 당의 전망 보고서에서 주장했다는 문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어 여기에 옮겨 보면

앞으로는 히틀러와 전쟁 그리고 궁핍을 경험하지 않았고 복지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신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될 것이다. 종교적 관심은 뒷전으로 밀리고, 권위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으며, 원자력 시대와 자동화 시스템이 새로운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일보다는 자유가 더 중요

한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문구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도 섬뜩한 예지력에 놀랄 뿐이다.

 

작품에는 여러 유형의 실패 인물들이 나오고 있다.

비록 후세들이 접하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가 승자들의 자랑거리로 일관된 천박하고도 승리

지상주의적 편향된 비망록이고, 일부 패배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위가 승리자의 비망록 못지

않게 작금의 시대에 고귀한 이야기와 교훈처럼 전해지고 있는 이유는 억울하지만, 분하지만

그리고 애통하지만 패배깨끗이 승복하고 인정할 줄 아는 그런 아름다운 행동과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패배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고, 승자를 승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소아병적 인물들에게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후세들은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대 놓고 아주 크게 이야기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것이다.

- 세계사적으로 보면 대표적인 게 일본이고,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사적으로 보면 하여간 엄청

  많다. -

아마도 이렇게 말이다.

역사 속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팔뚝이 엄청 굵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자 자신의 팔뚝을 여러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 이리저리 휘두르다

 팔뚝에 지가 맞아 쫄딱 망했    

 

그 밖에 언급되고 있는

- 요한 스트라우스(아들에게 가려진 영광)

- 렌츠(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 라살(마르크스에 눌린 패배자 - 노동 운동의 메시아)

- 트로츠키(스탈린에게 쫓겨난 패배자)

- 오스카 와일드(시대의 방랑자)

- 크누트 함순(경솔한 말로 세계적인 명성에 먹칠한 작가)

- 리제 마이트너(노벨상을 빼앗긴 물리학자)

- 앨런 튜링(2차 세계대전을 도운 수학자, 그와 관련된 사항은 영화로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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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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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작품은 400년 전부터 100여 년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들이 어떻게 일본 사회를

관찰했고, 일본의 식자층과 어떤 교류를 했는지 또 그들의 사회상을 통해 무엇을 감지했는지를

조선 사절단(?)의 시각으로 탐구 정리한 내용으로

첫째는 일본의 어느 부분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고,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 유래를 했는지

둘째는 일본의 어떤 점에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는지

셋째는 일본에서 배우고 실용화할 만한 것과 조선 후기에 사회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의 담론을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탐구하는

넷째는 양국 문인들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있었는지

다섯째 문자를 통한 인간적 교류가 조선 문인들의 정신세계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위의 시각은 저자의 시각으로 그대로 옮겨 보았다....작품을 읽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찰한 내용으로 많은 일본 관찰기를 짧은 작품으로 축약하다 보니 부분적으로 미진한 부분도

있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개인적으로는 일본인의 특질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작품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도 서로 마주 앉아 뭔가를 논하기가 껄끄러운 이웃인 일본, 일본인에

대하여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껄끄러움이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당시 일본이 시행하고 있던 관직의 구임제세습제를 비롯한 장인 우대정책이 심도깊게

논의되던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주자학파당 싸움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부끄러움은 둘째치고 그들의 정책적 혜안에 부러운 생각만 들었다.

특히, ’장인 우대정책의 경우 오늘날 기술 일본의 토대를 마련해 준 단초를 보는듯하였다.

오늘의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면을 보이고있는 전형적인

이류국가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작품을 읽다보니 그런 특징이 어제오늘 갑자기 생긴 특질이

아니라 수백년 전부터 그들 민족성에 내재되어 있던 DNA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풍(文風)‘에 언급된 내용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사행원들은 가는 곳마다 글과 시문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일본인들을 연일 대하다보니 피로가 누적되어 사절단 고유의 업무를 추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다른 업무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 추후 이런 일만 전문으로 대응하는 제술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졌을 정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원들은 어렵게 자신들을 찾아와 시문을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헛걸음을

시키고 싶지 않아 전심을 다해 대응하지만 짧은기간에 많은 양의 시문을 전하다 보니 일본인

그들에게 전해주는 일부 내용이 부실했다고 한다.

당시 사행원으로 갔었던 홍세태라는 분은

필답집이 금세 간행되는 일본을 보면서 자신이 남긴 글이 누군가에게 비평받을 가능성을 생각

한다면 진땀이 난다

고 토로했지만 물리적으로 이를 막지 못했다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부 질이 떨어지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사행원들의 이런 고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던 일본의 식자층들은 관대하지 않았고 자신들

위상을 높이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식자층 중 대표격인 오규우 소라이와 제자들은

사행원들과 주고받은 시문집을 한데 엮어 문사기상’(問槎畸賞)을 간행하는데, 그의 제자 중

타나카 토오꼬오라는 인물이 서문에 조선 사절단을 이렇게 언급하였다.

지리소(支離疎)의 턱은 배꼽에 묻히고 상투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애타타(哀駝它)

추한 얼굴로 천하를 놀라게 한다

지리소란 불구를 애타타는 추남을, 문사(問槎)는 조선통신사를 기상(畸賞)은 기이한 글을

감상한다“(P 249)“

 

전체적인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다.

나는 위의 구절을 몇 번씩 읽으면서 일본인의 특질이라는 것이 어제오늘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래로부터 민족적 DNA에 내재되어 있는 부류들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그런 잡스런 인간들의 수준 낮은 혈기방장함에 일희

일비하지 말고 과거 일본을 다녀와 따스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려 했던 선조들의 마음으로

일본의 오늘을 알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기록하신 본 작품을 읽으며 따스한 눈길과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려 한다.

어쨌든 여기에 부분별로 정리해 보았다.

 

[삶과 죽음]

 

1) 정유재란 당시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강항에 의해 관찰된 일본인은

    낙사오생(樂死惡生)’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하였으며 당시 조선이 주희의 생명관에 영향

   받은 호생오사(好生惡死)’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부류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며 긴 칼은 남을 죽이는데, 중간 것은 방어하는데, 작은

   것은 자살용으로 지니고 다녔다.(P 28)

2) 조선 문인들이 일본인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 경생(輕生)’이다.

   이 말은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인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형용사가 되었다.(P 33)

   전국시대 일본에서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무사의 정체성이었다. 일본의 군기소설인

   태평기에는 무사의 도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이름을 중시하는 것을 의로 삼는다라는 말도

   보인다.(P 31)

3) 야마모또 조오초오의 하가꾸레에서는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생과 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면 된다 즉,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언제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P 32)

4) 명나라 문인 제갈원성이 쓴 양조평양록에서 일본인들은 흉악하고 교활하여 신의가 없고

   성질이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라고 했다.(P 34)

5) 어려서부터 권력자의 집에 붙어 밥을 얻어먹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정이

   없이 자라서 가족에 대한 유대 의식의 결여가 삶에 대한 집착의 결여로 이어지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P 38)

6) 전국시대에는 과감하게 죽는 것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구적(仇敵)을 죽이고 자결한 사람에 대해 참다운 대장부라고 감탄하면서 애석히 여기지

   않았고 그 자손에게 너는 과감하게 죽은 사람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지위 높은 사람과 혼인

   할 수 있게 하였다.(P 39)

7) 1600년대에 명절인 단오에 수 천 명의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두 조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도

   하고 평소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복수를 행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행사를 보며 일본의 국속

   (國俗)은 사람을 잘 죽이는 자를 대담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에도 적용이 되어 가족이라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P40)

8) 1617년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눈 한번 흘긴 것도 반드시 보복하고, 말 한마디에도 시기를

    부려 사람 죽이는 것을 능사로 삼고, 굽히지 않는 것을 장기로 여긴다라고 했다.(P 42)

9) 조선 문사들이 가장 큰 혐오감을 느낀 대상은 타메시기리할복이다.

   타메시기리란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체를 시험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P43)

[원 한]

 

1) 임진왜란 170년 후,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수괴이자 역수 로  

   불리우는 등 당시 나라를 멸망시킨 그에 대한 원망이 일본인의 의식에 남아 있는 한 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나 일본이 대륙침략의 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토꾸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메이지 정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이다.(P 55~57)

 

2) 1596코니시키 유끼나가의 신하 요시라의 증언을 보면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얼마나 원망

   을 사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P 59), 조헌의 항의신편을 엮은 안방준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일본의 민간에서는 히데요시는 조선에는 일시의 적이나 일본에서

   는 만세의 적이라는 이야기를 있다고 하였다.(P 61)

3) 1603년 에도막부를 개창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기 위한 국서에

   평적(平賊)’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는 히데요시를 얕잡아서 하는 말이다.(P 62)

4) 에도시대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P 67)

   코오자이 시게스께라는 병법학자도 히데요시를 전쟁만 일삼는 포악한 군주로 보고 있었다.

   명분없이 조선을 침략하여 전쟁을 반복했기 때문에 결국 토요토미 일가 전체가 멸망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P 69)

   * 토요토미가 죽은 후 쿄오또에 토요꾸니신사가 세워졌고 인근에 조선에서 가져온 조선인의

     귀를 매장한 미미즈까가 있다고 한다.

5) 어지러움이 히데요시 시대에 극에 달하여 사람들은 모두 염고징창(厭苦懲創)‘의 뜻이 있었다.

   ‘염고징창염고는 싫어하고 괴롭게 여긴다는 뜻이고, ‘징창은 뉘우치고 교훈을 삼는다는

   뜻이다.(P79)

 

[제 도]

 

1) 조선 문인들이 남긴 일본 견문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제도 및 사회

   구조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강항의 경우 적중봉소라는 상소문에서는 일본의 지리, 경제,

   정치제도를 상술하면서 수많은 조선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P 85)

2) 전통적으로 조선은 병농일치제였으니 일본의 경우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병사가 되고, 우둔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농민이 되는 병농분리제였다.(P 86)

   --->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군사제도를 개혁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이런

          관찰 보고서가 나왔다.

3) 국가의 근간이 백성에게 있는 이상 국가운영의 목적은 양민에 있다는 것이 조선 사대부들

    기본적 정치관이다. ‘양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사회구조는 조선 사대부의 정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었다.(P 97)

4) 토꾸가와 정권은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위장하면서 일본 전국에 막부의 권위를 과시했고

    (P100), 혈기 왕성하고 적개심 충만한 매서운 무사들을 수하로 거느린 다이묘들을 통합하고

   정권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토꾸가와막부의 과제였다.(P102)

5) 백성은 병, , , , 승이 있는데, 오직 중과 공족(귀족)에만 문자를 해독하는 자가 있고

   그 나머지는 비록 장관의 무리라도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P105)

6) 일본은 과거로 인재를 뽑는 법이 없고 벼슬은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세습이어서 세습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에 대해 제대로 실무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다.(P107)

7)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종료되며 봉건제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일본이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타 국가와 전쟁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세습제가 오래 유지되어

   사회에 정착한 결과 사람들이 그에 반감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P110)

 

[통 치 법]

 

1) 도꾸가와막부는 정치적인 불안요소가 두가지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히데요시 시대의 충성스런 부하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둘째는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다.(P 127)

2) 전통적으로 조선 사대부들은 신분제가 정착한 상태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으나 자기실현의

    욕구나 분수를 넘어 기존 계층질서를 거스르려는 욕심을 가지지 않는 일본인의 심성이

    토꾸가와체제를 밑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P 125)

3) 교묘한 법술로 다이묘오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막부의 붕괴를 예상하고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닌 심복여부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서로 의구심을 품고

    상대의 동향을 엿보는 그들의 모습을 본 것이다.(P 129)

4) 일본은 보직의 세습제를 보편적인 제도로 알았지만 중요 자리인 로오주우’, ‘경도소사대’,

    대판성대등과 같은 주요 보직은 선별하여 등용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정치제도 중 조선의

    관심을 끈 것은 구임제(久任制, 직책을 오래 맡기는 제도)’였는데, 이 제도에 대한 건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P 132)

 

[사치와 번영]

 

1) 사행원들이 묘사하는 풍요로운 일본은 과장된 부분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선 사절들은

   당시의 일본을 풍조가 오염된 나라로 보았다.(P 147)

2) 막부가 각지의 번주들에게 다이묘오 야시끼(무사들의 주거지)에서 마음대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우둔하게 만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P 149)

3) 도꾸가와 막부의 재정은 다이묘오가 세금을 거두는 곳 외에 따로 직할지에서 세금을 거두어

    풍족하게 했고(P 151), 막부는 광산지역을 직할지로 하여 관리를 파견해 직접 지배(P 152)

    했는데 비록 왜황이라도 감히 간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사를 맡은 관료들이 각기 영지를 부여받아 그 영지에서 걷는 세금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울 조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P 152)

4) 일본인들의 식사량은 적었으며 무사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평소 두끼 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 반면, 당시 조선인들은 하루에 먹는 식량으로 그들의 3일분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P 159)

5) 조선이 일본의 해외무역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18세기 들어서로 그 때까지 조선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거두었다. 16세기부터 일본은 해외무역을 활발히

    전개해 나가사끼를 비롯한 3개 지역의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그 이익이 감소한 반면 반대로

    일본은 풍요로운 삶을 구가했다고 한다.(P 163~169)      

[기 술]

 

1) 에도 시대에 일본을 다녀온 조선 사절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일본의 기술로서

    일본 서기를 보아도 일본 기술 가운데 상당수가 한반도에 기원을 갖고 있다.(P 175)      

    일본은 예부터 외국에서 숙련 기술자를 불러 일본 국내에 정착(P 177)시킨 반면, 조선은

    표류하면 그곳에서 배를 새로 만들어 돌려보냈는데, 여기에 도착하면 모두 부수어 그 법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P 201)

2) 일찍이 일본에서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에게 천하일(天下一)’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기술을 장려했다고 하며, 비록 그의 기술이 자기보다 꼭 낫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신다.(P 180)

3) 사행록을 보면 일본 백성들이 사는 일반 가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았고 민가를 관찰한 경험의

    축적은 이용후생을 주장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도량형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P 187)

 

[문자 생활]

 

1) ‘문자란 한자를 말하고 초량의 통사란 쓰시마의 통역을 말하는데, 중요한 사항은 한문 필담

   으로 처리하고 사소한 일은 통역을 통했는데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15세기 경에는 사절들은 구어에 의한 소통보다는 한문에 의한 소통을 선호했다.(P 205)

2) 왜인 중에서 글에 능하다는 사람도 단지 언문을 사용할 뿐 문자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했으며 오직 승려무리만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P 207)

3) 17세기 전반에 기록된 사행록에서 사행원들의 소통은 대개 승려가 담당했는데, 이는 중국에

   다녀온 승려들이 불교 경전을 비롯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활발한 문화활동을

   전개한 결과이다.(P 213)

4)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수많은 서적과 더불어 활자인쇄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가져갔으며, 조선에서 가겨간 인쇄술을 토대로 많은 책이 간행되었다.(P 217)

   이 결과 일본인들은 조선 사행원들이 남긴 시와 필담집을 한 달 이내에 출판했다.(P 219)

5) 사행원들에게 가장 곤란한 것은 시도때도 찾아와 글과 시문의 평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제술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정도라고 한다.(P 221)  

6)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문사들에게는 영달의 길이 아예 차단되어 있었다.

   아무리 독서와 글쓰기에 힘써도 비참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조선통신사와의

   시문교류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P 223)

[문 풍]

 

1) 에도시대에는 승려에 한정되었던 한문능통자가 급증, 한문으로 글을 쓰고 경서를 읽고 중국

    고전에 소양을 쌓은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P 247)

    일본의 문풍을 선도한 인물이 오규오 소라이아라이 하꾸세이이다.(P 248)

2) 1711년 오류오 소라이와 그의 제자들이 조선 사행원들과 주고받은 수창시를 모아 문사기상

    (問槎畸賞)이라는 문집을 발간하는데, 소라이 제자 타나까 토오꼬오가 서문 중에

 

지리소(支離疎)의 턱은 배꼽에 묻히고 상투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애타타(哀駝它)는 추한

 얼굴로 천하를 놀라게 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지리소란 불구를 애타타는 추남을, 문사(問槎)는 조선통신사를 기상(畸賞)은 기이한 글을 감상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P 249)

---> 조선 사절의 시를 혹평하고 자기 학파 문인들의 시를 극찬하는 것이 소라이학파 문인들의

      특징이었다.(P 252) 그들은 당시 조선 선비들이 사문난적으로 폄하하는 반주자학적 풍조를

      이끌고 있었다.(P 260)

3) 조일 양국의 문인 등이 나눈 필담 자료를 보면 주자학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조선 사절과

    주자학을 비판하는 일본 문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논쟁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P 262)

[교 류]

  

1) 서동문(書同文)이라는 말은 조선이 중국과 문자를 공유하면서 중화의 문물을 수용했음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동문이라는 말에는 중화중심주의적 함의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동문 의식이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적 세계관을 전제로 성립된 관념.(P 278)

2) 조선 사절이 일본에 파견된 이래 가장 활발한 문학교류가 이루어진 것이 계미통신사 때로

    사행록에 많이 언급된 네 명의 문인이 키무러 켄까도오’, ‘카메이 난메이’, ‘나와 로도오’,

    지꾸조오 다이뗀이다.(P 279)

3) 일본이 소라이 숭배자들을 향해 주자학의 정당성을 타이른 원중거(조선 사절)’를 당연시

    했듯이, 왕세정과 이반룡의 고문사학에 경도한 소라이를 해동부자로 숭배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조선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가소럽게 여겼다.(P 297)  

 

[문화와 풍속]

 

1)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불교를 믿거나 신도식 의식을 치르는 등 유교적 의례가

    하나도 없는 일본을 미개한 것으로 인식했다.(P 312)

2) 일본인의 종교생활을 묘사하는 데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신도이다.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의

    토착신앙과 연결되면서 일본인의 종교적 신앙심 위에 군림함을 확인했다.(P 317)

3)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까의 만남은 일본에 주자학이 유입되는 큰 계기가 된다.(P321)

4) 풍속 가운데 조선 사절들이 가장 혐오한 것이 동성혼(同姓婚)‘이성양자(異姓養子)‘

    제도였다.(P 329)

5) 일본을 유교화를 위해서 조선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이익이다.(P 338)

    일본은 동아시아의 유교세계에 포섭하는 것은 최선의 비왜책이었다.(P 340)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일본에 관한 재미난 상식]

1) 저팬(japan)의 어원은 치팡구(Cipangu)’.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한 최초의 외국어 표기다.

2) 한중일 삼국에서 일본이 통칭된 것은 8세기 초로 이전에는 달랐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이 바뀐 것이다.

   ‘라는 이름은 난쟁이’, ‘단구라는 의미로 일본인들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가 일본 사절에게 일본으로 개명을 지시하여

   그 때부터 일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중국 역사서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황제까지 로비를 통해 설득시켜 국명까지 바꾼 나라다. 독도를 자기 것으로 우기는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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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패권 경쟁과 한국의 전략 - 미중 충돌과 한국의 지정학적 위험 그리고 통일
이춘근 지음 / 김앤김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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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은 초강대국이며 작금의 패권 국가인 미국에 맞서려고 용쓰고 있는 중국에 포커스를

맞추어 진정 중국이 미국의 바톤을 이어받아 차세대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 논하면서

그 경우 지정학적으로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강국에 끼어있는 우리들은 어떤 포지션에 위치

해야 될 것인가를 여러 자료를 근거로, 저자의 연구를 기초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국제정치적인 안목이 일천한 나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 사람들은 중국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중국은 우리에게 미국과

는 본질이 다른 나라다. 한국과 한국 국민을 결코 동등하게 인정할 수 없는 전략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역시 통일된 한반도는 결코 자신들이 다루기 어려운 강한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기에 한국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쥐스랑이라는 사람이

미국 남북 양쪽에는 약한 이웃들이 있고, 미국의 동쪽과 서쪽에는 물고기가 있다.(147)”

고 이야기 한 반면, 중국은 14개 국가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을

감안할 경우 약 19개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147)

따라서 국경선의 길이는 국토 면적이 비슷한 양국가이지만 경계선의 길이는 미국 12,034인데

반하여 면적도 적은 중국이 22,117이다.(146)

다시 말해 중국은 미국에 비해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하드웨어적인 측면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특히 미국은 지역적 패권의 출현을 저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세력균형 전략’(109)을 수립하여

유럽 및 아시아를 제패할 강대국의 부상을 사전에 견제하는 것(111)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중국의 도전은 태생적으로 미국과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며 그런 어려움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한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성취하려하지 않는다.

미국은 이미 원하는 바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이제 미국의 대전략은 남이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초점이 맞춰져 있다.”(108)

이런 전략으로 인해 사사건건 미국과 중국는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이 틈새에 끼인 한국은

점차 더욱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나는 다른 여러 요소들 보다 나의 눈과 생각을 사로잡은 것이

  1) 미국은 21세기 미국패권 유지의 관건이 동아시아와 중국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2) 중국의 성장이 지금 수준에서 둔화되거나 멈출 경우 미국은 한국을 더 이상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한국에서 손을 뗄 수도 있다.

  3) 중국은 고도성장이 멈출 경우 끓어오르는 국내적 불만 요인을 밖으로 표출할 가능성이 높다

  4) 오늘의 중국은 자기 나름의 규칙을 정해 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선진 산업국가

     들의 규칙을 수용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229) 하지만 중국이 미국이 만든 게임의

     규칙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성실히 따를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237)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정해놓은 규칙을 언젠가는 파기하고 자기 고유의 규칙으로 세계를 제패

하고자 할 것이다.(238)라는  4가지 결론들이다.

 

그 중에서도 3번에 해당하는 국내적 불만 요인의 외부 표출 가능성이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많은 식견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돌아가는 사항만 갖고도 충분히 예견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표적인 것이 싸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문제를 하나 하나 들춰놓았다가 어느 시점에 폭발시켜 국민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릴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아무리 무식한 내가 봐도 뻔한 작전 수순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우려되는 현실은 상기 항목 중 2번과 3번이 동시에 일어나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다.

그러면 완전 낙동강 오리알도 그런 오리알이 없을 것이며 22세기 조공사절이 국경을 뻔질나게

넘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살 길은 없는 것일까?

있는데 여기 써 봐야 자칫 매국노 소리를 듣기 십상이고 보수꼴통이라는 소리 듣는게 뻔해서

크게 언급하고 싶지 않으며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국민감정이 아니라 국가이익이 되어야 한다고 나도 생각하는 바이다.

 

3.1100주년이 지난주 지났다.

이제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실리를 얻고 안정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주변국들과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언제까지 사과받기에 집착하다 우리 국가의 운명을 구렁텅이에 쳐 넣을 것인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작품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나의 관점에서 축약했으니 더 심도있고 알찬 내용을 보시려면 꼭 작품을 사서 읽어야 이런 작품

쓰시는 분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 더욱 알찬 내용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저는 출판사 및 저자와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독자입니다.

 

[20세기 이후 패권의 역사]

- 오늘의 러시아는 미국과 냉전을 벌일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나라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균수명도 줄어들고 있고, 경제력이 늘어나기는커녕 거꾸로 줄어들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력은 현재 미국의 1/7로 이태리 수준이다”(37)

 

- 1990년대 소련 붕괴이후 미국 언론에 국제뉴스의 양은 1/3로 줄어 들었다. 냉전 종식 이후

  10년을 역사의 후일이라 묘사하고 있다.(38)

 

- 미국의 세계 패권을 누구보다 싫어하고 미워한 집단은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급속한 경제력

  성장을 시작한 중국이었다.(40) 미국이 벌이는 반테러 전쟁의 본질은 이슬람에 의한

   세계제패 방지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41)

- 중국의 경제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고도성장을 할 경우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패권 경쟁은 도전국의 의도보다는 도전국의 능력으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다.(43)

 

[패권 변동에 관한 일반 이론]

- 기존의 강대국이 도전하는 강대국에게 평화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물려준 경우는 거의 없었고,

  기존의 강대국은 도전국의 도전에 격렬하게 대응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적 규모의 대전쟁이

  일어났던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51)

 

- 힘의 전이 이론에 의하면, 힘이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패권국의 지위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것이고, 패권국으로서 유리한 지위를 향유하고 있는 미국은 자신의 지위를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결국 두 나라는 지배권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54)

- 중국의 국력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급속도로 성장하여 언젠가 경제력과 군사력의 측면에서

  미국을 능가할 상황이 온다면, 미국은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2016년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대해 본격적인 제동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69)

 

- 국력의 충만함을 느낀 중국은 주변 국가들에 대해 안하무인식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의 힘이 세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75)

 

[미국과 중국의 세계관과 국가전략]

- 미국인과 중국인이 보는 세계가 같지 않다.

  미국은 약소국을 비록 형식적으로나마 자신과 대등한 나라처럼 대해줌으로써 양자 사이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본 반면,

  중국은 이웃의 약소국이 형식적으로나마 중국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할 때, 즉 약소국과

  강대국의 위계질서가 형식적으로 인정될 때 국제질서와 평화가 유지된다고 믿는다.

   ---> 중국인들은 아직도 대국과 소국 사이에는 지켜야할 규칙이 있다고 생각한다.(78,79)

 

- 서양이 인간관계의 수평적 면을 강조했다면 중국은 인간관계의 수직적인 측면을 강조(82)

 

- 대국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주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는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

  이지만 소국들끼리 싸우는 전쟁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위계적 관점이 지금도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이어지고 있다.(88)

- 중국인들은 다른 모든 국가들이 과거 중국의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던 아시아 국가들처럼

  행동하면 세계에 질서와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96)

 

- 대부분의 나라 국민들은 우리 의식의 기반공통의 과거에 두고 있지만 미국 국민은

  공통이 미래에 두고 있다. 미국은 우리는 과거는 다를지 몰라도 미래가 같다라는 이념 아래

  건설되었고 그같은 사상은 오늘날 최고 정점에 도달해 있다.(101)

 

- 미국이 패권국으로 등극한 1990년대 10년 동안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이 10%대 성장을 이룬데

  반해 미국은 무려 39.2%의 경제성장을 이뤘다.(104)

 

- 과거 미국은 패권 도전잘르 일본이라고 상정하고 일본을 사전에 견제하는 전략을 취했다.

  미국은 일본 경제력의 예봉을 꺽어 버리기 위해 일본에 플라자 합의를 강요함으로써 일본

  엔화를 절상시켜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20을 맞게 했다.(112)

 

[미국과 중국의 미래에 관한 논쟁]

- 중국이 패권국이 되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그 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고도의 경제성장이 앞으로도 수십년 이상 지속되어야 하고, 세계 최고수준의 군사력

  정치적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127)

 

- 2040년 중국 경제가 123조 달러의 GDP(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경제규모)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2008년부터 2040년까지 매년 10.8%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뤄야 가능하다.(132)

  ---> 중국의 노동자수는 인구 통계학적 관점에서 더 이상 풍부하지도 않으며, 새로이 일자리를

         구하는 신규 노동자들이 수십 년 전에 노동자들이 받았던 수준의 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해당 이론은 오류다.(137)

 

- 중국의 고도성장이 멈추는 날, 공산주의 독재정치 체계는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며

  그 경우 중국은 강대국이 될 가능성으 고사하고, 지금과 같이 통일된 국가를 유지하기도 어렵게

  될지 모른다.(145)

 

- 중국은 분열될지 모른다는 주장이 간간이 나오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서 분열과 통합이 반복

  되어 왔기 때문으로 근본적 이유는 중국사회에 항상 만연한 정치, 경제적인 불평등에서 문제가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 중국의 정부 관리들이 경제성장률 제고에 급급한 나머지 건설업 등 사회 간접자본 건설에

  전력투구한 결과가 결국 버블 붕괴로 나타나고 있다.(160)

 

- 중국 비관론의 결정판 인구 통계학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 국가 흥망성쇠를 분석해 보면 경제력과 군사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인구상황이다. 일본경제가 극도로 침체한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구의 노령화

    현상이었다. 중국의 경우 국민들이 부자가 되기 이전인데고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167~171)

  · 또 다른 비극(재앙)은 여자와 남자의 인규 비율이다. 인구학자들에 의하면 남녀의 비율이

    107:100이상이면 심각한 상황이라고 본다. 2000년 조사결과는 120:100이었다.(172)  

 

[미국과 중국의 국력 변동]

- 1990년 일본 경제력은 미국 경제력의 50.2%에 도달했었는데, 2014년 중국의 경제력은 미국의

  50.6%에 이르고 있다. 1990년이 일본경제의 몰락이 시작된 시점이라는 사실과 2014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성장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이다.(207)

* 기타의 지표에 의한 분석은 중국 자료의 불신으로 한번 정도 읽고 지나가면 될 것 같아 별도로

  정리하지 않았음. 그래야 책을 살 것이기 때문임.

 

[미국과 중국은 패권 경쟁을 벌일 것인가]

- 중국의 부상이 멈추는 경우 우리나라는 안보 문제에서 일정 부분 근심을 덜게 될지 모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파탄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210)

- 미국과 중국은 하나의 경제체제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동시에 상호경쟁하는 무정부적

  국제체제에 속해 있다. 두 나라는 이익이 충돌할 경우 언제라도 상대방을 적대국 취급을

  것이다.(224)

  ---> 미국과 중국의 경제 의존 관계가 결국 양국 간의 불균형과 갈등을 초래하고 갈등요인이 될

        수 있다.(235)

 

- 오늘의 중국은 자기 나름의 규칙을 정해 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선진 산업국가들의

  규칙을 수용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229) 하지만 중국이 미국이 만든 게임의 규칙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성실히 따를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237)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정해놓은 규칙을 언젠가는 파기하고 자기 고유의 규칙으로 세계를

  제패하고자 할 것이다.(238)

 

-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인가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미국을 앞서지 못한다면 패권 전쟁은 발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주변국과의 군사적 분쟁은 중국의 부상이 아닌 중국이 몰락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다.

  중국정부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할 경우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분쟁과 갈등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다.(240~241)

 

[중국의 군사력과 군사전략]

- 최근 5년 동안 중국 경제력이 하강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국방비 지출은 전혀 감소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255) 중국이 1994년 이래 2003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국방비를 매년

  17%씩 증가해 왔다.(257)

 

* 여기서는 전체적인 미중 관계를 분석하고 느껴보고자 하는 것이지 기타의 지표에 의한 분석은

  전문서적을 참고하면 될 것이기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음

 

[미국의 중국 견제 전략]

- 미국은 세일 혁명덕분으로 석유 자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게 되자

  대외 정책의 초점을 중동에서 반테러 전쟁으로부터 아시아에서 유래하는 패권도전에 대한

  견제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298)

 

[중국의 부상과 한국의 지정학적 고뇌]

- 중국이 부상하는 것도, 중국이 부상을 멈추는 것도 모두 한국 안보에 쉽지 않은 환경이

  것이다.(313)

- 한국이 한 때 미중 사이에서 균형자(均衡者) 역할을 자임한다고 했지만 이는 황당한 것임.

  그 이유는 균형자의 나라는 어떤 나라와도 동맹관계가 있으면 안 되고, 다투는 두 나라 사이

  에서 힘의 균형을 바꾸어 놓을 만큼의 국력을 보유하고 있어야한 하기 때문인.(315)

 

-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중국은 한국의 전략적 동반자가 될 수 없다. 중국의 한반도

  전략목표는 한국의 대전략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로 통일 한반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317)

 

- 북한과 중국의 동맹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한 한중 밀월관계는 불륜 수준일 뿐이며

  언제라도 파탄나게 되어 있다.(331)

  따라서 언제가 한 번 전쟁을 벌일 날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제일 확률이 높은 전쟁

  상대방이 중국일 것이다.(332)

 

- 중국은 언제든 대한민국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능력과 의도를 갖고 있다.(342)

 

[미중 패권 경쟁과 한국의 대전략]

-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안보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윽박지를 때마다 항상하는 말이

  그럼 전쟁하자는 말입니까?”였다.

  평화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다. 수단과 목적을 같은 차원에 놓고 전쟁이냐 평화냐를

  선택하라면 안 된다.

  평화란 언제라도 전쟁이라는 수단을 각오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할

  준비를 완벽히 갖춘 나라는 오히려 전쟁을 회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처칠 수상은 영국 국민들에게 전쟁과 평화 중 택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했다. 평화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348)

 

- 상대방에게 굴종함으로써 유지되는 평화를 결코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불행한 일은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상당수 국민과 정치인들이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굴종과 노예 상태는 평화상태가 아니다.(349)

 

- 가상 적국은 미운나라가 아니라 무서운 나라이다. ’가까이 있는 이웃나라 중에서 힘이 가장

  막강한 나라를 가장 무서운 나라오 상정하면 된다.(357)

 

- 한미동맹이라는 요인을 뺀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100년 전 조선보다도 오히려

  더 못할 수 있다.(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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