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맨 칭기스칸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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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해당 작품을 지난 2005년 처음 접하고 당시 내 이메일 아이디(nomad)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작품으로 당시 내가 만든 아이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할 수 없이 아이디 뒤에 'e'를 붙이며 아이디를 변경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당시 나는 작품을 읽고 앞으로의 시대는 유목민의 시대가 올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만들었음에도 아이디가 주는 의미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들볶는 주변인들 때문에 바꾼 것이 지금도 맘에 걸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당시의 분위기를 상기하며 작품을 읽은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유목민 시대는 앞으로 대세 - 지금도 약간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미풍 수준으로 조만간 태풍 

수준으로 우리 사회에 밀려 들 것으로 나는 예측하고 있다 - 가 될 것이고 그 내용과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며 작금 우리 사회 및 국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폐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를 들어 ‘MZ세대의 현상도 다 유목민 시대의 연장선상이라 여겨지며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떤 방면에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지는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연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 분명한 것은 나는 대책이 있고 앞으로 찬찬히 주변에 적용해 나갈 것이다 -

 

한 가지 퀴즈!

대세 연예인 유 모씨, 대중들에게 바보 이미지가 강한 김 모씨, 계그계의 대부이자 버럭 대마왕 

이 모 개그맨과 팔짱과 레이저 눈빛으로 한 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변호사 우 모씨, 엄마 찬스의 주역임에도 아니라고 우기시는 소년원생들의 대모를 자청하셨던 추 모님, 단군 이래 최대의 업적을 남기셨다고 지금도 틈만 나면 주장하시는데 가끔 주변인들을 모른다고 외치시는 이 모 정치인님들 각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나폴레옹(115), 히틀러(219), 알렉산더(515)보다 더 넓은 영토(777)를 정복했던 인물이며 새 천 년을 여는 시점에 워싱턴 포스트가 뽑은 1001년에서 2천 년까지의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정된 칭기스칸에 관한 이야기다.

(중반 이후는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서와 비슷해 정리에서 제외)

유목민, 그러면 몽골의 칭기스칸 시대의 유목민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당시의 그들이 그렇게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핵심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요인은 아마도 그들이 주고받았던 한 문장

소닝 새항 요 밴?(무슨 새로운 소식 없냐?)'

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유추가 가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해당 문장에는 도전정신’, ‘탐구정신그리고 개척정신등 현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 기업 및 기업인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반드시 갖추어야 할 그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몽골족의 첫 모습은 8세기 중엽 흑룡강의 중상류인 에르군네강유역이라 하며 9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이 붕괴되면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토번제국과 중원의 당 제국역시 쇠퇴의 조짐을 보이며 그동안 눌려 지내던 군소 세력이 발흥하면서 나타났다.

12세기 초인 1206년 칭기스칸은 예케 몽골 울루스를 건설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일부 발췌 정리해 보면

 

- 몽골 유목민들은 1203년을 대단히 중요하고 뜻 깊은 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1) 씨족제를 해체하고 천호제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을 구축해 사회적 대개혁을 감행했고

  2) 1204년 몽골제국 출범의 기반을 닦았으며

  3) 1206푸른 군대의 정비와 함께 칭키스칸이라는 칭호를 얻기 때문이다


- 몽고군은 포로를 잡아 보유하고 있는 기술재주를 통해 기술자 집단을 원했다.

  과거제도를 통해 세워진 중원의 유교 문명은 몽골군에게 냉혹히 거부되었다. 암기 능력만을

  테스트하는 중원의 과거제도는 몽골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 효용의 가치가 적어진 중원의 지식인들은 야한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데

          ‘금병배라는 소설도 당시에 나온 것이다.

 

- 1115년 건국된 금나라는 몽골고원에 대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 왔다.

  그 결과 금나라의 무차별적 도륙 정책은 몽골고원의 비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특히 금나라의 세종(1161~1189)이 펼친 감정(減丁)정책’ ‘몽골고원의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없앤다는 정책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도 같은 정책이었다. 칭기스칸은 1162년에 태어났다.

   ---> 1211년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대한 보복을 결의한다.


- 1218년 대규모 통상 사절단을 콰레즘(페르시아 길목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오코나를 통해 

  술탄 무하마드에게 보내지만 그의 친척인 이날치크 카이르칸이 사절단을 처치하자 

   ‘코릴타를 개최하고 콰레즘을 멸살시킬 것을 결의

   ---> 11만의 콰레즘 군이 주둔하는 사마르칸트 요새는 누구도 1년 내에 함락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몽골군은 3일 만에 함락하고 기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도륙

 

- 술탄 무하마드가 제거된 것을 확인하고 기독교 문명이 쉼쉬는 키에푸 루시(러시아)’로 방향을

  돌린 몽골군을 1223킵차크족키예프와 연합해 몽고군을 공격하지만 전멸 당하는데 그

  전투는 이후 유럽의 기독교 문명에 몰아닥친 파란의 전주곡이 된다.

 

- 몽골군(푸른 군대)은 금나라를 꾀뚫어보고 있었지만 금나라는 푸른 군대의 존재 유무를 몰랐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금나라 군대는 푸른 군대가 침범했을 때만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반면 

  푸른 군대는 자신이 싸우고 싶을 때 싸웠다.

  푸른 군대는 인간이 갈 수 있는 대지 전체를 무대로 삼은 반면 금나라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한

  곳에서 눈에 보이는 작은 영역만을 무대로 했다. 푸른 군대는 전력을 아껴가며 싸운 반면 

  금나라 군대는 선택 당한 부문만으로 총력을 다해 맞서야 했다.


- 자신의 실수를 상사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병사가 있을 정도로 군율이 강했으며

  그들은 무기가 있으면 절대로 도망가지 않았고, 전쟁을 할 때도 지휘관이 신호를 내릴 때까지

  후퇴하지 않았다이런 여러 요소가 겹치면서 킵차크 칸국몽골인이 4만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럽인 25백 만 명을 통제할 수 있었다.

 

- 농경 정착 사회는 수직 마인드 사회로 그런 사회에 사는 정착민들의 삶을 가장 확실하게 지켜

  주고 막아 주는 것은 바로 자리. 안정된 자리만 확보할 수 있으면 삶은 끝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창의력이 필요 없고 기억력이 중요시되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사는 사회였다.

  반면에 유목민들의 수평 이동 마인드는 농경 정착 세계를 넘나들며 사는 사회로 위가 아니라

  옆을 봐야 하는 수평 마인드의 사회로 살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회로 다른 사람이

  소중해 진다.

  또 수직 마인드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자리는 착취와 군림의 수단이 아닌 역할과 기능을 발휘

  하는 곳이 되며 이동효율정보의 개념 속에서 시스템이 태어나게 된다.


- 몽골군이 강했던 이유는 전리품의 공평한 배분, 부하들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 특히 노예나 

  포로에게도 무한한 가능성과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고, 전투 자원(편제, 무기, 말 등)의 효율적인

  호완성과 군수 보급과 병참 시스템이 뛰어났고 평소에 대규모 사냥을 통해 연습하면서 숙달된

  군사들의 기동성이 가미되면서 그 효과는 배가 되었다.

  참고로 칭기스칸 군대가 콰레즘을 공격할 때 주로 부유한 성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함락 후 그 성에서 식량을 보급 받으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 12세기 후발 신흥국이었던 몽골 제국이 선진 정착 문명국가를 격파한 근간은 바로 군사 기술

  , 전쟁 기술이었는데, 칭기스칸은 신기술의 수입과 발전을 위해 기술자 집단을 극도로 

  우대했다.

  기술 패권주의의 정수는 금나라 투항 시 그들로부터 압수한 세계최초로 개발된 원시적 다연장

  로켓포인 비화조회회포(回回包)’는 몽골군의 큰 전력으로 자리 매김한다.

  또한 대상들을 활용한 정보전 및 심리전도 몽골군의 가장 큰 무기로 활약하게 된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정보 인프라 군사 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역참제의 개발도 몽골군이

  강해지게 한 큰 요인으로 이는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몽골을 지탱하는 데 큰 역할은 한 사준마(四駿馬)의형제인 보오르초, 잘 라이즈족의 모칼리,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칠라운, 주르킨 출신의 보로콜이었으며

  사맹견(四猛犬)제베, 코빌라이, 젤메, 수베에테이였다.

 

- 몽골의 징병과 징세는 그 지역 사정에 밝은 인물들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납세를 거절

  하면 각지의 전략 지점에 배치된 몽골군이 처리했다.

 

- 칭기스칸은 몽골고원 통일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기여한 너커르집단을 새 시대의 주도 

  세력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너커르란 동무, 친구, 동지라는 뜻으로 칭기스칸의 세계 정복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집단을 의미하며 너커르는 칭기스칸 권력의 핵심이자 신질서의 상징

  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천호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군사 조직의 개편을 넘어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군사, 사회의 종합 통치시스템이자 총력 동원 체제의 등장을 의미했다.

 

- 유목 방식은 2가지가 있는데

  1) 쿠리엔식 : 부족 전체가 집단적으로 이동항는 형태의 유목 방식

  2) 아일식 우목 : 두세 가구가 한 무리를 이루어 광활한 초지를 소유하며 유목하는 방식

 

- 칭기스칸의 말을 한데 모아 놓은 대자사크격언 빌리크는 칭기스칸이 단행한 여러 개혁 

  조치와 개혁방향, 구상, 원리들이 들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칭기스칸의 정복 전쟁은 자연 재해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폐를 만든 것은

  중국이었지만 지폐의 대량 발행을 통해 본격적인 화폐경제를 이룬 것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때 일이었다.

   ---> 몽골인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을 단일 화폐 경제권으로 통합했다. 그 덕택에 동양과 

        유럽 간에 대규모 무역이 가능해졌다. 곳곳에 무역항이 발달하고 외국인이 모여들었다.

 

- 무굴제국이라 할 때 무굴이란 힌두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 몽골의 언어는 소리는 있지만 글자는 없다. 대부분 소리만을 빌려 번역하고 통역한다

  이것을 통사(通事)라고 한다.

 

[작품에 나타나는 몽골어]

- 바아토르 : 용사 

일종의 국회’ : 코릴타(상원격), 케식텐(하원격)

- 사원 : 부하라 

고탈 : 군화

- 너커르 :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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