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 살기 싫어 몽테뉴를 읽었습니다
이승연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 6


코로나로 인해 오랜 시간 외국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다 보니 산다는 게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등등을 고민하다 살고 싶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작품을 접했다.


당초 해당 작품을 선택한 의도와는 달리 책장을 넘기다 보니 본 작품이 과거(2019)에 몽테뉴의 철학을 

소재로 출간된 작품 어떻게 살 것인가?’(사라 베이크웰 著, 책 읽는 수요일라는 작품과 유사한 생각이 들어

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시 해당 작품을 읽고 정리해 둔 서평을 찾아 여기에 일부를 언급해 

본다.  당시 작품을 읽고 나는 이렇게 정리를 했었다.

1.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2. 주의를 기울여라            3. 태어나라  

4. 책을 많이 읽되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5.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6. 작은 요령을 부려라                  7. 의문을 품어라               8. 나만의 뒷방을 마련하라  

9.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라                                        10. '습관'이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11. 절도 있게 살라                    12. 인간성을 지켜라            13. 아무도 한 적이 없는 것을 해 보라

14. 세상을 보라                        15. 너무 잘하지는 마라   

16. 철학적인 사색은 우연한 기회가 있을 때만 하라                 17. 성찰하되 후회하지 마라            

18. 통제를 포기하라           19. 평범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되라      20.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  

(* 소 제목만 놓고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니 해당 작품을 사서 읽어보시라!)


당시 작품을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까르페 디엠]이었으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렸지만 아직 진정한 

카르페 디엠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 나의 경우 까르페 디엠의 화두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딩 선생이 학생들에게 강조한 화두였는데 작품을 

  읽은 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나는 그 화두 속에서 방향을 잃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기가 어려운 화두가 아닌가 생각한다 -


시간이 흘러 또다시 새롭게 접한 몽테뉴 철학을 이야기한 본 작품을 통해 추가적으로 두 가지 사항이 눈에 

들어와 여기에 옮겨 보면, 하나는 70% 자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도움은 필요한 사람이 요청할 때 도움을 

주어라였는데 이런 문구를 선정한 배경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야기하고 싶지 않다.


저자는 작품 에세에서 저자가 구상한 글 주제에 상응하는 문구를 발췌하여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투영시켜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있는데, 나의 으로 보았을 때 저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생활 속의 분노와 직장인으로서의 아쉬움’, ‘억울함’, ‘펼치지 못 한 자신의 꿈(?)’ 등을 전체적으로 깔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크게 든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386세대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나의 그런 생각을 확신하게 해 주는 느낌을 상당히 크게 받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 역시 

분노에 찬 작품을 써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작품 내용이 나의 기대를 져버릴 무렵 인상적으로 다가 온 두 문구가 있었는데,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답답한 요즘 세상에 나를 다른 이들도 동감할 수 있을 – 흔든 문구가 있어 여기에 

올려보면,


 “어떤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무엇이 가장 유리한 일인가를 택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곤혹의 상황에서 

  묘안이나 대책을 세워볼 수 없을 때 가장 확실한 길은, 더 공명정대한 방침을 잡아가는 일이다.(P134)"


라는 문구로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꼭 쉽지만은 사항으로, 후회로 점철된 나의 젊은 날에 

대한 반성을 듣고, 기록한 글처럼 여겨져 해당 문구를 읽고 또 읽으며 좋은 문구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려 

보았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위 문구는 인생을 사는 과정에 마주하게 되는 어려운 순간에 꼭 기억했으면 하는 문구로 

특히 사회생활을 하려는 초년생들이라면 꼭 마음에 새겨두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적어 보았다.


두 번째는 위에서 작가가 분노에 찬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유추한 근거는 ‘386세대’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한 내용 속에 있는 문구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한 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한 정부가 불완전하다고비난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수고 그 대신 더 나은 상태를 세우는 일은한 정부를 비난한 자 중에 수많은 

 사람이 헛수고만 했다.(P142)”


작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촛불 받침대들의 타락상(일부 사건은 아직 판결 나지 않아 전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을 보면서 언제까지 권력을 잡은 자들이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뻘짓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저자의 외침과 그런 외침에 동의하는 나의 관점에 힘을 실어주는 

문구를 어느 신문 오피니언 까페 기사에서 찾으며 나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386들은 젊은 나이에 사회 곳곳의 요직을 차지하더니 자녀 입시 비리 의혹 등으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들이 벌이는 각종 내로남불의 작태를 볼 때마다 텍스트를 이용해 관람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작업을 하는 미국 미술가 제니 홀저(70)의 대표작이 생각난다. ‘권력의 남용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Abused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 1982년 뉴욕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 게시돼 수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한 때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문장으로 꼽힌다


는 문구였다.

 

전임 정권에서 이루어진 통수권자들의 의혹의 시간에 대해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금융비리로 차떼기 

정당이니 어쩌니 하면서 해 쳐먹는 방식과 스케일만 달라졌지 구태의연한 비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는 

작금의 기득권층을 보면 답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지적질 할 때 지적질하는 자는 한 손가락을 사용하여 상대를 향(지적)하지만 나머지 네 손가락 

중 세 손가락은 굽혀져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지적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적을 할 때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점검하고반성할 점은 없는지 

앞으로 이런 자세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몰랐다면 지금부터라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본 작품을 좀 더 객관적이고도 생활철학적 지침으로 활용할 부분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집필 당시의 의도와 배경을 확인해 보려 했으나 타인들의 서평이 나의 관점과 너무 

달라 그냥 그대로 덮고, 작품에서 내가 공감하는 부분만 정리해 보았다.


몽테뉴는 갔지만 그가 한 이야기는 아직도 살아서 우리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

가수 아니 예인 나훈아로 인해 소크라테스가 테스형으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몽 형하고 조만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자못 궁금하다.


- 우리가 죽음에서 주로 두려워하는 것은 습관적으로 죽음에 앞서 오는 고통이다.(P 20)

- 많은 사람이 사실보다 공상 때문에 죽음을 더 크게 본다.(P 28)

- 우리는 죽음의 근심으로 삶을 방해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을 방해한다.(P 29)

- 현재에 만족하는 정신은 미래의 일로 번민하기를 꺼린다.(호라티우스, P 29)

-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죽음을 대비하라.(P 33)

- 삶의 효용은 공간에 있지 않고 사용에 있다.(P 35)

- 실컷 산다는 것은 세월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그대의 의지에 달려 있다.(P 35)

-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터무니 없는 기적 없이 평범한 사람의 본보기로 질서 있게 사는 인생이다.(P 36)

- 삶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집중의 속도를 올려야 한다.(P 39)

- 침묵이 어떤 말보다 강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로써 위로 방법을 찾는 듯하다.(P 55)

- 어떤 괴로운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것을 억제하기 보다는 바꾸는 편이 간단하다.(P 57)

- 변화는 언제든 괴로움을 덜어주고 풀어주고 흩어준다. 싸워서 괴로움을 이길 수 없다면 빠져나가며 그것을 

  피하려고 비켜선다.(P 58)

- 늘 고통에 대항해서 마음을 긴장시켜야 한다. 물러나거나 뒤로 빼면,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는 파멸을 

  불러온다. 육체가 굳어질수록 짐을 지기에 든든하듯 마음도 그렇다.(P 58)

- 멕시코인들은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아이야, 너는 참으라고 이 세상에 나왔다. 참아라견디어 내라 

  그리고 잠자코 있어라라는 말로 아이를 맞는다. (P 58)

- 피할 수 없는 것은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P 59)

- 어떤 신이 고통쾌락을 뭉쳐서 뒤섞어 놓으려고 했다가 그것을 잘해낼 수 없자, 이들을 꼬랑지끼리 

  붙들어 매어놓기로 작정했다.(소크라테스, P 59)

- 불행을 갖지 않음은 많은 행복을 가짐이다.(P 59)

- 소통은 공감이 전제될 때 의미 있는 것이고, ‘소통이라는 것이 꼭 말일 필요도 없다.(P 61)

- 우리가 진짜 불행한 이유는 불행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부정적 의미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P 64)

- 인생은 고해(苦海)’. 그러니 운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P 64)

-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걱정하지만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P 70)

영광에 도달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우리가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을 양심으로 하는 데 있다.(P79)

- 정신의 가치는 높이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데 있다.(P 80)

-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 진리가 시공간을 관통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 늘 같은 형태와 색깔을 띠기 

  때문이다 (P82)

- 나는 내가 곤궁할 때 나를 맡길 가장 안전한 곳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몽테뉴, P 87)

- 사람들은 쉬운 길을 택한답시고 남의 힘에 의지하며 몸을 던진다.(P 87)

- 우리의 소유와 필요를 확대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운과 역경의 타격에 부닥친다.(P 88)

- 한 사람의 꿈이 야심과 동의어가 될 때 그 꿈은 사람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P 90)

- 야심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이유는 바로 그 근저에 비굴함과 노예근성이 있어서다.(P 91)

- 인간의 행복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P 99)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P101)

- 불확실성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고, 인간보다 더 가련하고 오만한 것은 없다.(플라니우스, P 106)

- 행복 지수는 감탄의 횟수와 정비례한다.(P107)

- 인간 본성의 가장 큰 결함은,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다시 젊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한 발은 무덤 속에 있는데도 욕망과 추구는 출생만 하고 있다.(P112)

- 죽음은 우리 의지에 달렸다. 죽음에 대한 자유가 없다면, 삶이란 노예가 되는 일이다(P117)

- 상대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을 속이기보다 자신이 맡은 임무를 실패하는 게 낫다.(P131)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진실한 영광이 있다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견고성에 있다.(P133)

-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의지가 틀어지는 경우는 빠른 

  길을 가려고 할 때가 아닌가 한다.(P137)

- 운으로 얻은 재산을 있는 그대로를 맛보려면 마음이 있어야 한다그것을 소유함이 아니고 누릴 줄 

  알아야만 행복하게 된다. 그 소유자가 건전해야만 획득한 재물을 잘 누린다.(호라티우스, P163)

-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강도가 아닌 빈도이다.(P165)

- 어린애의 교육에서 의욕과 애정을 돋우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P200)

- 욕망은 결핍일 때눈 집착하게 되고, 풍요일 때눈 피로를 느낀다.(P226)

- 신이 가르치는 사랑을 내가 아는 바대로 실천하고 산다면 나로서는 그게 믿음이고 종교다(P2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말하는 홀가분한 죽음, 그리고 그 이후
정현채 지음 / 비아북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7


하나님을 믿으며 천국과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나로서는 죽음을 학문적, 경험적으로 해석해

기존의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런 작품이 상당히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나 작품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지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환생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는 계속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내 주장이 옳고, 확고하다면 남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 보는 것이 시각을 넓히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진정한 탐구의 자세라 생각하는 바이다.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기독교적 천국관의 간극을 

어떻게 메우는 것이 참다운 기독인의 자세일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작품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물질과는 다른 차원인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과학의 잣대로 들여다봐야 건질 수 있는 게 

  없다과학 교육을 받은 정신과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연구해 본 결과 사후 세계의 증거를 

찾았다고 하니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작품을 접하면서 이 문구는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이런 관점도 있을 수 있으니 생각해 보고 관심이 있는 사람은 더 

공부해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 증거를 내놔라’,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할 이야기가 없다.

다시 이야기해 웃자고 한 이야기를 듣고,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인간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과거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통해 또 부친의 죽음을 통해 그 죽음이라는 실체가 누구에게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으나 그 당시만 해도 죽음은 나와는 아직 관계가 그리 크지 않은 하나의 사실이라는

생각 속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죽을 것이고 언제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나의 사고

속에 잠재하면서 죽음은 이제 내 주변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

학창시절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젊은 나이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제는 웬지 그 죽음이 모두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작품을 읽으며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여러 사례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 책 한 권으로 표현하기가 부족해 그냥 조용히 정리하고자 한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해 내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결과와 저자의 내용이 상통

하는 것만 여기에 정리해 보았다.

- 훌륭한 죽음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며그 일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화해이다.


- 조선시대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 것은 '유교'였는데,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음을 혐오하고 현세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종교학자들은 분석한다.


- 사후세계에 대한 상당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신비가 '스베덴보리'는 

  "죽어서 육신을 벗어난 신참 영혼은 사후 1차 영역에 머물게 되는데 고독감, 무력감결핍감

   고통, 환멸 같은 감정을 느껴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이때 마음을 열고 간절히 기원하면 

   수호영혼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서 사는 동안 오염되었던 삶을 정화하게 되고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고 복구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원래 맑고 순수했던 영혼을 회복하고 

   나면 영혼의 주파수가 높아져 완전히 다른 상위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 ‘신비가란 기존 종교의 도그마적인 교리를 거부하고 의식 상태의 변성을 통해 궁극적인

      실재와의 조우와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 영매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가진 관심, 불안, 실수 집착 등을 사후세계로

   계속 지니고 간다.


- 근사체험을 경험한 제임스 밴 프래그는 사후 세계로 건너간 영들과 만나 오랫동안 모은

  정보 중 특이한 점

   1) 저쪽 세상에 가면 인생을 회고하는데, 자신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똑같은 상처를 경험한다.

   2)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은 다른 형태로 다른 차원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다.

                                                                                                      (샤르댕 신부)

-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며 각 영혼은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지상의 육체적 존재와 비물질적인 

  영적 존재 사이에서 진보와 퇴보를 거듭한다.

  많은 사람들은 카르마를 징벌의 과정으로 여겨 현생의 삶이 과거 생에서 행한 잘못에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르마는 징벌이 아니라 각 개인이 과거 생에서 행한 실수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보상하는 기회이다.

- 기 기독교에서도 환생론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으나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기독교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이 삭제되었다.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진보적인 

  지성들에 의해 환생론은 다시 지지를 받게 되었다.

- "가족이란 전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생에서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맺어진 인연이

  다. 각자 역할을 맡아 영적인 성장을 서로 돕는다"(영매리사 윌리엄스)


- 우리는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통해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우주를 오가며 지구에 온 목적

  을 통해 완성할 때까지 길고 긴 여정을 계속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인 윤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내재된 불성이나 신성을 조금씩 

  실현해 나가도록 이끈다.   


- 죽음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의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로스 박사)


- 대다수의 과학자와 의사들은 인간의 두뇌가 곧 의식이어서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근사체험은 뇌의 활동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과학자나 의사 들로서는 받아들이기 몹시 불편한 사실이다.

- 근사체험의 열 가지 요소

   1)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         2) 긍정적인 감정           3) 체외이탈의 경험    

   4) 터널을 통과함                   5) 밝은 빛과의 교신       6) 색깔을 관찰 

   7) 천성의 풍경을 관찰            8) 먼저 떠난 가족, 친지와의 만남     

   9) 자신의 생을 회고              10)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인지

- 근사체험 경험자는 인생의 목적을 더 잘 이해하며, 영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아울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큰 폭으로 감소하였다. 사후생에 대한 믿음과 일상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크게 증가

  

- 체외 이탈이란 의식이 에너지화가 되어 육체와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이야기해 자신의 몸을 빠져 나와서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상태로 근사체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 죽음을 맞기 직전이나 죽음을 맞은 바로 그 시각에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지 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삶의 종말 체험이다.

  여러 관찰을 통해 임종이 시작되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대상이나 존재가 마중을 

  나오며 또한 환자들은 현재의 세상과 죽음 이후의 세상을 함께 볼 수 있다고 한다.

- 임종이 임박하면 인간 뇌의 필터 기능이 약화되거나 해제되면서 보통 때에는 보거나 듣지 

  못하던 것을 인식하게 되는 상태, 이것이 종말체험의 실체이다.

-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 같은 현상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그러면 환자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두려움을 훨씬 덜 느끼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근사체험과 더불어 삶의 종말체험은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이라는 것을 시사

  하는 것이다.

- 훌륭한 죽음의 주요 요소

   1) 통증 완화 조절             2) 명확한 의사 결정            3) 죽음 준비      

   4) 훌륭한 마무리 : 갈등해소, 인사

   5)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여                 6)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1) 사랑해요     2) 고마워요    3) 용서합니다     4) 안녕히 가세요

-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죽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끝나거나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 < D = S - M >에서 D Despair(절망), S Suffering(고통) 그리고 M Meaning(의미)

  뜻한다. 즉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절망에 빠지지 않지만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의미를 잃으면 절망에 굴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책으로부터 얻은 잡지식

- You Don't Know Jack." : 당신은 쥐뿔도 모른다

-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최고의 축복이다.(소크라테스)

- 인간은 저승사자의 입맞춤보다 더 달콤한 키스를 맛본 적이 없으리라.(신비가, 다스칼로스)

-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키케로)

-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폰 프란츠)

- 삶의 영예는 한 번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는 데 있다.(넬슨 만델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하일기 첫걸음 - 조선 최고의 고전을 만나는 법
박수밀 지음 / 돌베개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7


본 작품은 연암의 열하일기를 대하는 독자의 읽는 방법과 작품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작품으로 본 작품을 비롯한 고전을 접하는 방법론을 언급한 작품으로 이해하고 싶지만 

저자께서 십 수 년간 연암 박지원을 연구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너무도 연암을 불세출의 인물로 내세우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각자적인 인물로 극대화해 평가하고 있는 면이 약간은 아쉬운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을 비롯한 고전을 접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일반론에 있어서는 훌륭한 

고전의 길라잡이역할을 하는 작품이라는 점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아래 내용은 일반적인 사실과 함께 저자의 개인적인 주장이고, 해석이기 때문에 작품을 접하는 각자가 

저자의 이런 주장을 절대 절명의 기준점으로 세울 필요는 없다고 보며 각자의 시각과 판단으로 각 내용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이 이 작품을 비롯한 일반적인 고전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저자는 열하일기에 대해

  “형식으로 보면 특별 장르 복합서, 문학적 성취로는 삶과 제도를 성찰한 특별한 여행기이며사상의 깊이로

   는 심오한 사상서이고, 문제의식으로 보면 성리학의 틀을 뛰어넘어 사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상을 말해 주고 싶었던 한 경계인의 발분저서(發奮著書)’이다.


- 열하일기는 연암의 친척 박명원이 최고 책임자가 되어 총 270여명이 사행 갈 때 연암을 개인 수행원 

  자격(‘반당이라 했으며 이들은 자신의 개인비용으로 갔다)으로 데리고 갔는데 청의 건륭제가 자신의 생일

  축하연을 예정에 없던 북경이 아닌 북경에서 400리 떨어진 열하라는 곳에서 치르게 되는데 사행단이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글로서 적은 것이다.


- 열하일기는 사행 당시 아무 벼슬도 없던 일개 야인이 쓴 글을 국왕까지 읽어 보았을 정도로 숱한 화제를 

  뿌린 작품이며 그 파격적 문체와 새로움, 아슬아슬한 내용 때문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일으킨 작품으로 

  추후 문체반정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 작품은 출발지점인 한양에서부터 기록되지 않았고, 출발 날짜보다 한 달 뒤인 압록강을 건너는 시점부터 

  시작되고 있다.


- 명나라 시절에는 천자(天子)에게 조회를 간다는 의미로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고, 청나라 때는 

  연경으로 사행 간다는 의미로 연행록(燕行錄)’이라 했다.


- 열하일기는 여행 감상문처럼 읽어서는 안 되며 어떤 장면, 어떤 시간에 사건 연암의 숨은 의도를 생각하며 

  읽는다면 작품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 올 것이다

  또한 열하일기의 형식적인 구성을 보면, 맨 처음엔 날짜를 적고 다음에는 날씨다음에 들르는 공간과 

  거리를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 연암은 북학의서(北學議序)’에서 조선 선비들은 좁은 땅에서 태어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고 들은 것이 

  적은 탓에 선입견과 편견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기에 마음으로 보고 듣는 자다. 기존의 지식에 갇히지 않았으니 선입견과 편견이 

  없다. 소경은 은유의 일종이며 연암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핵심어다.


- 열하일기에는 현상에 숨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새로운 질서에 대한 경계인의 갈망이 담겨져 있다.

   * ‘경계인이란 복수의 이질적인 집단에 동시에 속하거나 어떤 집단에도 명확하게 속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어서 두 사회나 집단 사이에서 얼치기가 되는 자.(크루트 레빈, 미국)


-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단어는 북학파(북학派)’의 핵심단어로 당시 조선의 선비는 실제의 삶보다 

   형식에 집착했고, 백성의 가난한 삶은 방치했으나 연암은 먹고 사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이용과 후생이 이루어져야 정덕(正德)’이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 열하일기의 3분의 1 가량이 필담의 결과물로 필담을 쓴 종이를 담초(談草)’라 했다.


- 남에게 보고 들은 것을 가지 생각 없이 그대로 전하기만 할 뿐 조금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배움을 

  ‘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고 한다.


- ‘춘추는 공자가 엮은 책으로, 본래 춘추는 노나라 사관이 자기 나라 240년 역사를 기록한 궁정 연대기

  였다. 공자가 여기에 자신의 역사의식과 세계관을 담아 필삭(筆削)하여 춘추를 지었다.

  '춘추에서 공자는 주()나라를 높였는데 이러한 존주(尊周)정신을 담은 공자의 정신이 불변의 의리를 

  담은 책으로 조선에서 받들어져 왔다.


- 연암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그 제도가 오랑캐에서 나왔더라도 백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고 부국강병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똥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조선, 똥을 소중한 자원으로 이용하는 중국, 연암은 여기에서 문명의 차이를 

  확인하였고, 똥을 이용하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 백이와 숙제가 같은 발자취로 살다 갔음에도 백이만 호명할 때가 많은 이유는 백이가 맏이이다 보니 

   대표해서 거론하는 것일 뿐, 백이와 숙제가 다른 위상을 지닌 것은 아니다.


- 조선의 사신이 북경으로 들어가는 문은 조양문이다. ‘유리창은 본래 각종 유리와 벽돌을 굽는 가마공장

  이었는데, 북경에서 가장 번화한 시장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 중심지이자 서적 출판과 유통의 중심지로

  변한다. 조선 선비들이 바라본 유리창은 서적의 메카, 물품을 사고파는 시장, 지식교류의 장, 연회의 

  공간이었다.


- 연암은 이별할 때 물가를 배경으로 하면 그 정서가 극대화 된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장소성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터인데, 공간을 추상적인 배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정서와 

  긴밀하게 연결된 체험의 장소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공간의 장소화라 부른다.


- 일상의 지식도 왜곡된 진실을 담은 경우가 많으므로 따져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주체적으로 판단할 때 실체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연암은 이를 명심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 연암은 중국의 땅을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생각하고 새로운 장소 경험을 했다.

  중국이라는 공간을 거대한 문명 체험의 장소로 바라보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새로운 체험의 

  공간으로 생각했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생뚱맞게도 작금의 시대에서 중국과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과 나름대로의 

해법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는데,


- 먼저 중국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면,

  작품 속에 중국인들의 과거부터 가자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그것은 바로 

  ‘청심환이다.

  연암이 활동하던 시기에 중국인들이 조선의 사신단들을 환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진짜 청심환을 얻을 

  요량이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 이어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이야기도 연암의 시대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추사 역시 중국인들에게 호감을 살 때 조선의 청심환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 데 

  중국인들이 조선의 청심환 효과가 우수해 그런 것도 있겠으나 중국산에는 가짜가 너무 많아 믿을 수가 

  없어 조선의 청심환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작품을 떠나 과거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위조 상품’ 제조 능력이 아주 뛰어났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하여간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고래로부터 생활 습성이 그리 형성된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공자와 맹자, 법가와 한비자 등등의 도덕적 인물이 태어나면 뭐하는가 후손들이 도덕이 출장 가고 사기성 

  특질이 보초를 서는 저 모양이니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상한 국민이 아닌가?

  요사이 집 값이 최근 미친년 널 뛰듯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데, 특정 지역에는 손바닥 만한 작은 평수가 

  ‘억대를 넘는다고 합니다. 

  집을 가진 주인은 집 값이 올라 좋을지는 몰라도 그 가격의 폐해는 반드시 언젠가 자신의 자식과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진 자들의 담합투기로 집 값을 올려놓고서는 정부 정책이 잘못되어 그러니 못살겠다 난리를 치고 

  있지만 웃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맨날 하는 이야기지만 남 탓하지 말고 인간의 입은 왜 한 개이고, 귀가 왜 두 개인지를 정확히 그 의미를 

  알고, 가장 훌륭한 리더와 구성원간의 통치 및 관리 도구는 소통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데 

  그것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나는 십 여 년 전부터 집이 두 채 이상이거나 소위 땅값 급등지역에 사는 공무원은 절대 부동산 정책을 

  검토하는 부서에서 일하게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했었는데, 그게 최근에 이야기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가지를 더 첨언하면 강남쪽 부동산 정책은 강북에 사는 공무원이, 강북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에 사는 

  공무원이 주관하게 하고 적당한 인물이 없으면 외부 용역을 주어서라도 – 현직에서 해당 기획을 맡은 

  공무원은 해당 업무를 떠나도 10년 이내에 자신이 부동산 관련 업무를 기획한 지역으로 이사는 물론 

  투자도 못하게 만드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별, 업무별 상피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저성장 시대이면서 확실한 돈벌이 아이템이 없는 시대에 단시간 안에 돈 버는 방법은 아주 아주 

  간단합니다.

  ‘작전세력과 결탁해 주가를 조작하거나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카더라 프로젝트를 내세워 금융권을 

  상대로 화이낸싱을 추진하거나, ‘인천공항에 배만 들어오면 항구가 대규모 카지노 단지가 만들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대본으로 만든 부동산 기획이렇게 3가지 일 것입니다

  굳이 하나를 더 추가하라면 요새 뜨고 있는 백신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일 겁니다

  이 중에서 머리에 든 것 없이 입으로만 단 시간에 돈 버는 매력적인 방법은 부동산이기 때문에 너도 나도 

  ‘기획 부동산에 몰려드는 것이고 돈 싸 들고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자유 민주국가이니 부동산으로 돈을 벌든, 허황된 백신으로 돈을 벌던 투자하는 인간들은 스스로의 책임

  으로 투자를 할 것이고 이익을 보던 손해를 보던 자신의 책임 아래 일어난 일이니 국가가 그런 사업이 

  아주 부도덕한 방식이 아닌 이상 뭐를 하던 그런 상업적 행위를 터치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이유가 뭘까요?

  세금을 많이 내기 위해서, 국가 발전을 위해서 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일단은 자신이 더 잘살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남는 돈 자식에게 물려줄 요량으로 그리 했을 

  것이니 결국 조세정의를 위해, 결과가 공평하기 위해 출구를 틀어 쥐면 됩니다.  

  다시 말해 부의 세습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집 값 잡는 방법의 출발은 부의 세습을 막는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한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재벌들의 자식들이 수 조 원씩의 재산을 상속받으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하이에나들이 수 억 원씩 

  버는 부동산 갑부들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던 할 이야기가 무지하게 많지만 이렇게 글을 맺으려 합니다.

  용인 에버랜드 뒤편에 가면 삼성그룹 창업주의 묘소가 있는데 몇 평인지 확인해 보시고 

  죽은 자의 수의에 왜 주머니가 없는지 생각해 보시고

  여러 방송에서 나오는 각종 살인사건 프로그램을 유심히, 찬찬히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은 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한 짓이던 좋은 짓이던 간에 돈 많이 벌면 행복하고 오래갈 것 같나요?

  분명한 것은 돈이 적으면 약간은 불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불행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없어 불행하고 돈이 있어 행복한 세상이라면 세상 살 맛 나지 않지요 비록 개천에서 용이 사라져가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은 절대 불편부당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에게 모든 것 권력, 명예, 부귀, 건강 등 - 을 주지 않습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있는 자들의 불행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있는 자들에게도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우리 같은 서민들은 분명 갖고 있을 것이니 너무 상대적인 평가를 통해 자신을

  환경을, 부모를, 세상을 탓하지 맙시다죽어도 짊어지고 가지 못할 땅이고 돈인데……


  마지막으로 돈이 없어 세상이 힘들어 자살을 예정한 사람들 자살하신 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에게 

  한마디 합니다. 절대 자살하지 맙시다.

  자살하면 정말로 있는 자, 가진 자, 돈 많은 자들에게 진짜로 패배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복만 생각하시고 줄기차게 뛰어다닙시다. 미친 놈처럼 말입니다.

  나도 그렇지만 아직도 당신에게도 기회가 있습니다. 용기를 내서 살아봅시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이 연경을 다녀오면 기존의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이념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을 던져 

  주었듯이 나는 본 작품을 통해 위와 같은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 답답한 마음에 몇 줄 적어 

  보았습니다.

 


책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 양반들이 말의 고삐를 잡고 앞장서 가는 이를 견마잡이라고 했는데, 고삐는 거덜이라고도 했다

  견마를 치장하는 데 많은 돈을 쓰다 살림이 기울어지는 일이 생기자 거덜 나다라는 관용어까지 생겨났다.


- 우리나라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작(酬酌) 문화다. 수작이란 술잔을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말을 주고 받다가 농을 하기도 한다. ‘수작 부리다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


- 사람의 성품이나 능력을 잘 알아보는 식견을 지인지감(知人之鑑)이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 - 처지와 상황을 이기고 열정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
안호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권유도 7


종교인이라면 또 종교적 신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종교적 거듭남의 이야기 

내지는 그 개인들이 경험하고 체득했을 종교적 관점과 성찰을 언급한 내용에 대해 한번쯤은

관심을 갖고 접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나의 견해로는

우리가 차를 몰고 다닐 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자신이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주행 중인 차량에 이상은 없는지 여부를 간략하게나마 확인하기 위해 계기판을 들여다 보면서 

운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앙적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섬김의 자세는 맞는지 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기도의 방식과 내용에는 문제가 없는지, 혹시 하나님이 주셨을 사명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를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점검을 위해서라도 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 고루하지 않은지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을 항상 up date하고 또 점검할 때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끔 종교적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외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는데 읽을 적마다 항상 새로움과 경이로운 관점으로 인해 놀라고는 한다.

요번에도 그런 결과를 얻었다.


- 부모의 기도가 멈추지 않는 한 반드시 자녀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기도하는 자의 자녀는 결단코 망하는 법이 없다.


- 포용의 범위를 넓혀 사고와 이해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것은 기회주의나 비굴한  타협과는 

  다르다. 진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내려놓음이며 본질과 핵심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본질과 핵심을 견고하게 붙들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 포용은 본질을 붙들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핵심을 붙잡고 그 외에는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포용의 정신이다. 이해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는 통로이다.


-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질 수 있는 착각 중 하나가 내 잘못과 실수로 벌어진 죄의 책임과 

  하나님의 책망, 진노의 징벌을 핍박과 환난이라 착각하고 포장하는 것이다

  징벌을 핍박과 고난이라 착각하면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회복은 회개에서 시작.


-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구원해주신 이유는 없지만 구원해 주신 목적은 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시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목적대로 살아갈 때만 진정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 당신에게 지금 원치 않는 상황과 고난, 문제와 질병, 실패와 고독이 찾아왔다면 이 아픔과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여 지금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가기를 소망

  한다


- 사명은 내가 선포해서가 아니라 내 모든 권리를 하나님께 이양하고 나의 익숙함과 안락함도 

  포기하고 내 경험도 꺽을 때 시작된다.


- 하나님 수준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순종을 막는 이성의 개입과 자아의 벽을 깨고 내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 내 이성과 경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나에게 주신 사명의 삶을 

  살려 할 때, 그때부터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책임져 주신다


- 설교란 내가 먼저 받고 누린 은혜를 나누는 것이지, 누군가를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 전도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 하나님 아버지의

  피맺힌 소원이다.


-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그 

  분의 뜻과 마음을 알고 헤아리는 것이다.


- 우리 인생이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음이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우리

  보다 훨씬 더 큰 계획과 위대한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 나를 드리는 것이 예배라면 나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내 생각을 드리고 내 계획을 드리고 

  내 자존심과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 기도는 최후의 방법이 아닌 최선의 방법이다.


- 설교의 완성은 성도의 몫이다. 설교자는 목숨 걸고 말씀을 준비하여 선포하고, 말씀을 듣는

  이는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삶이 거룩하게, 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해야 한다.


- 죽을 때까지 잃지 말아야 할 신앙의 가치는 바로 감사이다.



[작품에서 인용된 성경문구]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7:1~2)


2.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리라.( 41:10)


3.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14: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명길 평전 보리 인문학 1
한명기 지음 / 보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8


언제부터 나는 독서를 마치면 무거운 주제이거나 내가 평소에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용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몇 날 며칠을 읽은 작품을 갖고 혼자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는 했다

일종의 병이 아닐까?

이유는 하나다.

작품 내용과 주제를 되씹어 보면서 왜 그랬을까?”,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반복되는 점은 없는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등등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이런 쓸데 없는 주제를 갖고 고민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본 작품을 갖고 이야기하기 전에, 위와 같은 관점으로 작품을 분석해 보고 음미해 보았을 때

순전히 개인적인 소견이다 -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의 편협함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크게 든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나라 건국일의 기준을 갖고 내노라 

하는 학자(?)에서부터 얼치기 역사학자까지 총망라해서 정치권과 벌이는 이전투구를 보면

내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 것이다.

단언컨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현상은 반드시 또 반복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과 접근 방식은 십인십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좌도 우도 아닌 입장에서 정의를 분명히 세워놓고 이를 

달리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정권을 잡은 기득권층에 의해 근본부터 다시 평가하려는 모습을 보면

역사학계가 예산이 남아 보도 블럭을 다시 까는 구청 수준도 아니고 국가의 뿌리가 되는 사항을 

완전 통째로 들고 엎어버리고 권력의 입맛에 맞게 재 편집을 해 버리니 정말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또 해석하고 평가하는 잣대가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사회라면 누구도

역사 앞에 당당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상한 역사 논리를 들고나와 사회와 나라는 물론이고 일반인들 사이

에서도 분란을 일으키게 하는 삼류 학자들과 거기에 편승해 발광하는 정치 모리배들은 정말 

정신차려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지는 작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의 다툼 속에서 최명길 선생이 보여주신 행동은 사건의 중심부에 있었던 인조

인정하듯 결코 폄하될 수 없을 만큼 큰 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는 대세를 저버린 

희대의 간웅으로, 죽어서도 평가조차 제대로 못 받는 사항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그 분이 활동

했던 시기는 물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진정한 평가를 방해하고 있는 노론을 추종하는 

학자들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역사를 접하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저명한 인물임에도 후세에 알려진 게 거의 없거나 

기록이 전무한 분들은 대체적으로 당시의 주류층이 아니었기에 전해지거나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게 현실로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해당 작품 역시 최명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500여 페이지에 달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작품을 찬찬히 뜯어보면 거의 비슷한 이야기와 사례가 매 장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고 있어 최명길 선생 개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보다는 주변부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참으로 아쉬운 작품이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이유는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분의 치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극히 부실했거나

아니면 오랑캐 청과 은혜를 베푼 명나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닥경(닥치고 공경해라)’’

하려는 주류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해 그와 관련된 자료가 폄하되고 훼손되어 그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보다는 편향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주류학자들의 방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국심이 더 든다.

역사를 연구하는 후손들이라면 양이던 음이던 모든 것을 수렴해 연구해야 진정한 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자료가 적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는 외눈박이 역사적 사실에 목을 매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지난 2019 6월경 화살맞은 새 인조대왕”(김인숙/서경문화)라는 작품을 읽은 후 서평을

통해 인조대왕의 재임기간 동안의 문제점에 대해 열거한 적이 있는데 해당 작품은 인조를

중심으로 한 정치 권력의 문제점을 분석한 내용으로 생각하였으며 여기에 다시 당시 요약을

정리해 보면

 1왕권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아버지 정원군에 대한 추증 문제로 신하들과의 날 선 대립이연일 

     이어졌고

 2) 반정에 대한 부담을 떨치기 위한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선조의 딸)에 배려와 사위에 대한 불신

 3) 청나라의 압박과 조선 출신 통역관들의 안하무인격 횡포로 인한 스트레스

 4)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궁궐 내 저주사건과 잦은 병치레로 인한 스트레스

 5) 왕과 세자의 혼사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왕의 권위에 대한 추락과 도전

 6) 송시열과 치열하게 다투었을 ’예송문제‘

등으로 조선의 역대 그 어떤 왕보다 더 많은 골치 아픈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판단된 게 나의 

소감인데,

작품은 청나라(실리)’명나라’(명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로가 옳다고 주장만 하는 

권력층의 이면과 함께 전쟁으로 인한 조선 사회의 정치, 사회적 혼란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는 평을 하고 싶다.

저자께서는 권력층의 탁상공론적 분열 속에서 오로지 국가와 종사의 안위, 백성을 헤아리려는

최명길 선생에 대해

 1) 책임과 희생정신

 2) 유연함과 포용력 냉철한 현실 인식과 전략 마인드 

 3) 현실에 발을 디디고 대안을 제시했던 경세가

로 평가하신 점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하는 바이다.

작품에 대해서는 요약을 하는 것은 작품의 가치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정리하는

것은 지양을 하고 독자들에게 한번쯤 읽어 보기를 강력히 권하는 바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감추어진 몇 가지 주변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는데


첫째, 최명길이 청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만들어낸 배경에 관한 것으로 그가 

       내세운 청과 화친하지 않으면 종사와 백성을 보전할 수 없다는 배경의 출발점을 엿보는 

       대목인데,

       “최명길을 통해 우계 성혼의 존재를 일깨워 주는데, 성혼은 최기남(최명길의 부친)

        존경하는 스승이었다. 성혼은 전란 중에 임금을 내팽개친 불충한 인물로 당대에 비난받는 

        인물로 주화파의 길을 걸었던 최명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명길에게 큰 영향을 준 

        최기남이 성혼의 제자였다는 사실과 성혼 또한 최명길처럼 임진왜란 당시 시의를

        거스르면서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했다가 곤욕을 치뤘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점이다. (* 성혼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언급 없이 인용해 보았다)


둘째, ‘적폐청산도 좋지만 우선적으로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하라

        평안도 관찰사 박엽구명 운동을 했는데

        해당 인물은 광해군 정권에서 수많은 구설에 올랐던 인물로 정사야사에 기록된 내용

        만으로도 삼뜩하고 부정적인 내용이 낭자하다는 인물이었지만 당시 최명길은 장수의 지략

        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하면서 박엽을 살려 두어야만 후금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그를 살리는 것이 나라의 장성을 보전하는 것이자 후금의 침략을 막는 

        길이라 여겼다.

        박엽은 장기간 평안도에 머물면서 후금과의 교섭 능력과 경험, 그리고 그가 확보하고 있던 

        후금과의 외교 통로가 상당했었던 인물로 최명길은 그의 능력을 중시했는데

        병자호란 당시 청인들이 박엽이 만약 있었다면 우리가 조선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

        이라고 할 정도의 오랑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또 다른 예는 장인 장만의 집사 출신이었던 정충신(이괄의 난 당시 공로자)’과 관련된

        이야기로, 최명길은 일단 사람의 능력과 재주를 인정하면 그의 다른 측면들을 별로 괘념치 

        않는 스타일이었다. 비록 전 정권의 인물일지라도 그의 경험과 능력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등용했다고 한다.

        (* 이 부분은 정권이 바뀔 적마다 구시대 적폐청산만을 외치는 우리의 위정자들이 새겨 

            보고 본 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했다)

셋째, 열불나게만 하는 ‘탁상공론에 집중하는 위정자들의 작태

        골수 척화신들이 보기에 인조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임금의 자격을 이미 

        상실한 더럽혀진 군주였다. 인조는 신료들이 자신을 오군으로 여기는 데 빌미를 제공한

        원흉으로 김상헌을 지목했다.”

        상기 내용은 저자의 관점으로 당시 집권층에 만연된 분위기와 리더가 부하를 바라보는 

        관점을 표현한 내용으로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현장에 있지 않았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든 내용으로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 정치현실을

        목격하고 기록한 듯한 내용이다.

        거기다 인조까지 자신의 부하를 부정적 시각 김상헌은 인조가 청에게 항복을 결심하고

        남한산성에서 내려왔을 때 죽음으로 항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조를 호종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 전력이 있다 - 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하여간 나라가 온전히 운영되거나

        외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정신전력과 단합력이 거의 바닥 수준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최명길만은 인조를 다독이면서 임금의 권위를 회복하는 문제, 조정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출사를 기피하는 풍조를 불식하고 인재 등용 문제, 전란으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문제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넷째 위정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정말 중요하다.

        좌의정 이성구는 청으로 끌려간 자신의 자식을 빼내기 위해 속환값(몸값)을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가격이 아닌 터무니 없이 크게 지불해 속환값 폭등의 단초를 제공해 이를 감당

        할 수 없었던 다수의 서민들에게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어 사회적 공분을 초래하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도 크게 꾸짖는데,

        해당 사건을 보면서 1620년대에 일어난 정묘호란에서 가진 자들이 보여 준 모습과

        1340년대 영불간에 벌어진 백년전쟁당시 칼레의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대비해 

        볼 때 시간적으로 300년 가까이 벌어져 있고, 도덕과 양심이 그래도 서양보다는 많이

        고양되었을 동양, 그것도 조선에서 배우고 가진 자라고 여겨지던 인간들에 의해 그런

        저급한 행동이 나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 한심한 것은 그 이후 5백 년 가까이 흐른 작금의 시기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우리의 위정자들 사이에서 주택 소유 문제, 갑질 문제, 음주운전

        문제, 비대면 종교모임의 권유 무시, 내로남불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정치권 문제가

        코로나로 인해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범부들을 더욱 더 서글프게

        하고 있다.  


        현대판 최명길 선생이 북악의 하늘 아래서 번민과 고뇌 속에서 진정으로 사람이 먼저다

        라고 외칠 그날을 학수고대해 본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되는데, 최초로 실패한 리더(위정자)는 단순히 실패한 리더로 기록

       되지만 역사의 실패 속에서 교훈을 찾지 못해 과거의 실패를 반복한다면 혼군()’ 

      혹은 무능한 리더 기록할 있음을 기억해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