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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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석제의 소설은 이야기를 꿈꾼다. 산업사회의 눈으로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가하는 근대적인 양식인 소설이 아니라, 농경/유목사회의 눈으로 현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전근대적인 양식인 이야기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괴하고 범상치 않은 인생역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대적인 '캐릭터(character)'와는 다르다. 사실 성석제의 인물들에게는 '성격'이나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비틀어져 있을망정 전형적인 도박꾼, 깡패, 도둑, 허풍선이의 성격을 그대로 그러낸다. 그들은 독특한 '전형성'을 가진 인물들이지, 결코 '개성'과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다. (바로 이 점도 작가가 근대적 서사가 아니라, 전근대적 서사를 동경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文體의 측면에도 이러한 동경은 그대로 드러난다. 성석제의 문체는 근대적인 이성의 문체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감성의 문체에 가깝다. (이것을 신수정은 '시니피앙의 연쇄가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탁월한 지적이라고 파악된다.) 그가 구사하는 문체는 사랑방의 입담 좋은 아저씨나, 할머니의 문체와 유사하다.

이와 같은 성석제의 시도, 혹은 특색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확답은 유보하기로 한다. 그의 현란한 입담에 휘둘려 작품의 재미에 빠져있을 뿐, 아직 성석제의 작품을 냉정하게 판단할 거리를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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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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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엽기(獵奇)'의 사전적인 의미는 '괴이한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인데, 이 작품은 그러한 정의에 충실하다. 일단 그 소재에서부터 괴이한 것들이 등장하는데, 시체 유기·포르노그래피·신경쇠약·폭력·유괴·SM플레이·살인·방화 등이 난무한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그러한 괴이한 일을 행하는 주체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점이 그의 前作 {내가 사랑한 캔디}와 구별되는 점이다. 그 작품에서도 역시 주인공이 선하지만은 않지만, 적어도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을 전면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간의 순결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시대성/사회성을 배제했기 때문에 주인공은 전혀 동정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심리에는 적지 않은 트라우마(trauma)가 포함되어 있으며, 표면적으로 내보여지는 성격에도 적지 않은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이 소설이 흥미위주의 탐정소설이나, 도덕과 교훈이라는 사탕발림을 한 악한소설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흥미로운 장치이다. 즉,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서, 두 주인공은 善과 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前作에 비해서) 감추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시대적/사회적인 폭력성에 대한 비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비판은 야성을 잃어버린 동물들이 갇혀 사는 '동물원'이라는 공간과 야성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서울랜드'의 '모험의 나라'라는 공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마지막 싸움이 '서울랜드'의 '킹 바이킹'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시사적이다. 제도적인 울타리에서 제도에 벗어난 자의 마지막 몸부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런 장치들로 치장을 한다고 해서, 두 주인공의 행동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책무라는 명제는 낡아버린 것에는 틀림없으나 여전히 유효하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그 시대에 편승할 수 있는 자유와 그 시대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을 가진다. '엽기'가 하나의 문화코드로 제시되고 있는 요즘, 이 작품은 그런 흐름에 편승하고 있는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 속에는 그러한 흐름을 비판해야 하는 책무도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작가는 잊은 것이 아닐까? 작품의 어디에도 비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이를 언제 드러낼지, 기다려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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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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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 세기 전의 작품이니 그 감각이나 정서에 동감할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재기 넘치는 비판과 풍자는 주목할만한 부분이었다. 그러한 비판/풍자는 인간의 속물성에 화살을 겨냥하는데, 가령, '이 정도 일로 만일 웃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발이 두 개가 모자란 멍청이임에 틀림없다'라는 구절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이처럼 이 고양이에게 사람이란 멍청하고 추악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서구 세력에 대한 일본의 열등감도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근대화'라는 변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희화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동양의 정신'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 그것이 식민지배를 받지 않고 근대화를 수행할 수 있었던 나라의 특권이 아닐까?)

나체 신봉자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나체가 좋은 것이라면 자기 딸을 벌거숭이로 해서, 덩달아 자기 자신마저 벌거숭이가 되어 우에노 공원을 산책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못하겠다고? 못하는 게 아니고, 서양인이 하지 않으니, 자신도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실상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입고 테이코쿠[帝國] 호텔 같은 데로 출입하지 않느냐. 그 사연을 물어보면 별 것이 아니다. 그저 서양인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것뿐일 테지. -p.288.

이외에도 눈에 걸렸던 것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군국주의적인 요소이다. 물론 이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고 하기는 힘들고, 당시 일본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피해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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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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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라고 모든 작품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리고 객관적인 눈에서 보자면, 이 작품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 동안 그의 다른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 작품에 만족을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우선, 아쉬웠던 점은 'Leviathan'이라는 거창하고 상징적인 제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관계와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개인의 삶을 다루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개인적인 삶은 그에 합당한 표현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창한 제목은 자칫 실망을 안겨주기 쉽다.

조금만 더 인내를 발휘해보자. 작가에 대한 믿음을 조금 더 유지하고, 우선 이 작품의 내용과 제목을 파악해보자. 소설의 나레이터는 피터 아론, 주인공은 벤자민 삭스. 소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제목에 대한 암시는 벤자민이 쓰던 미발표 소설의 제목이라는 것.

그렇다면 당연히 이 제목에 대한 주도권은 벤자민에게 있다. 피터는 충실한 기술자에 불과하니까. 그는 쾌활하고 활력 있는 젊은 소설가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포진해 있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가있는 상태, 그래서 미세한 충격에도 쉽사리 무너져 버리고 마는 상태, 이것이 벤자민과 피터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의 징조 - 즉, 괴물이다(벤자민에게나 피터에게나 모두 같다. 다만 벤자민이 이 괴물의 접근에 더욱 민감할 뿐이다). 특히 벤자민과 그의 아내의 관계는 이러한 괴물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모든 측면을 자신의 시각에서만 파악하려는 아집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 '리바이어던'은 현대인의 생활에 숨어있는 폭력성, 일상의 허위성에 관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제목에 대한 이해는 얻어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였던 기발한 이야기의 전개와 거침없는 상상력 등에 비해서 이 작품의 이야기는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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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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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란 무엇인가? 많은 작가들의 오만한 참회처럼, 힘겨운 求道行인가? 혁명의 수단인가? 아니면 서글픈 마스터베이션인가? 이 정의들은 모두 맞고 또한 모두 틀리다. 이는 소설쓰기를 통해서 파생된 결과임에는 분명하지만,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설쓰기, 나아가 소설이라는 예술작품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핵심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전설과 닮아 있으며, 소설쓰기는 전설 만들기의 근대적 변형이다.

근대는 무엇인가? 거칠게 말하면 '사회적인 자아의 패러다임이 개인적인 자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던 시대적인 특징'이다. 이를 통해 '전설'이라는 사회적 자아가 '소설'이라는 개인적 자아로 전환되었다는 가설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 간과했던 부분이 있다. 창조자의 태도에 관련된 부분이다. 전설의 창조자는 전설을 만든다는 것을 알 뿐,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변형시킬 수 있었다. 그가 만들고자 한 것은 오직 이야기일 뿐, 그것이 독창적인 이야기인지,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하는 작품이 가진 의미를 알 뿐, 자신의 작품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감히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작품에, 혹은 작품을 만드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문제인가? 소설이 이왕 이야기라면, 의미 있는 이야기가 좋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알아버렸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개인적인 자아'라는 것을 몰랐을 때에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내 이야기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설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스스로 독창적인 재담가라고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 독창적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뒤로, 전설은 더 이상 만족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창적인 이야기, 즉 소설이 요구되었고, 그것은 독창적이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에조차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또 한 번 알아버렸다.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소설에 부여한 의미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인식에서 발생하는 것이 '탈근대적 글쓰기', 즉 작가가 유별난 개인임을 포기하고 글쓰기 과정을 그대로 폭로하는 것, 바로 메타 픽션이다. 아랑의 전설이 있고, 그 전설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을 밝히는 소설이 있으며, 결국 그것은 소설 속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메타 픽션. 이것이 이 작품의 구조이다. 액자 속에 또 다른 액자가 들어있는 형상.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결국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니고 다른 진실이 존재했으며, 진정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다른 진실도 진실이 아니고 또 다른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사실, 이 질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질문 밖에 있다. 소설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근대적인 발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근대적 발상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행위부터 잘못이다. 애당초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작품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의도도 역시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소설은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전설처럼, 끊임없이 작가와 독자에 의해서 재생산되는 것이 이야기이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되어 가면서. 소설도 역시 마찬가지.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는 말처럼, 작품은 끝나지만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감동)는 새롭게 시작된다. 그런데 메타 픽션은 여행의 허망함을 폭로해버렸다. 허망함을 알았으니 누가 다시 길을 가려 하겠는가? 메타픽션이 이야기가 되려면 결국 그 허망함을 딛고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결말이 다시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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