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민음사 세계시인선 5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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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작품에서 시적인 감상을 얻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왜 힘든가? 그 이유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1) 그 나라 말 특유의 운율과 상징을 느낄 수 있는 번역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역된 모든 시는 우리에게 자유시나 산문시로 읽히기 쉬운데, 그것은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보르헤스의 시선집이니 자유시를 추구했던 초기의 작품과 정형시를 추구했던 후기의 작품을 모두 망라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연결되는 부분으로, 이 책의 제목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는 보로헤스의 시집 제목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 시집에 대한 번역이 아니라, 시선집에 가까운 성격이다. 물론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보르헤스의 시를 한 작품이라도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소개하려는 노력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자칫 이런 식의 제목달기는 독자에게 혼란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당연히 한 권에 대한 번역으로 생각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2) 번역된 외국 시를 읽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각주의 문제이다.

의도적으로 각주를 사용하는 시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각주는 독서의 흐름을 방해한다. 더구나 시와 같이 작품의 내적 흐름이 강조되는 장르에서는 각주의 사용은 참으로 큰 걸림돌이다. (시에서 각주보다 미주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번역자들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좀더 친절하게 해주기 위해서 각주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보다는 감상에 더 비중이 실렸어야 하지 않을까? 꼭 이해가 필요한 내용이라면, 작품이 끝난 뒤에 짤막한 해설을 다는 것이 더 효과적인 번역이 되지 않을까? 보르헤스의 소설전집을 읽을 때도, 그 엄청난 각주의 양에 질려, 정작 본문의 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보다야 덜하지만, 이 책에서도 각주로 인해서 자연스러운 감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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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이윤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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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유가 필요하다. 경제적인 여유나 육체적인 여유가 아니라, 한 행 한 행 꼼꼼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정서적인 여유와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곰씹어볼 수 있는 이성적인 여유. 이러한 점을 고려하자면 이 시집에 대한 나의 독서는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동안 가까이 하지 못한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의 허기를 채우기에 너무 급급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겁지겁 책장을 넘겨버리는 중에도 알 수 있었던 것은, 시인 이윤학이 사용하는 언어의 그물이 평이하면서도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집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범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거나, 독특한 소재를 다루었더라도 그것이 돌출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온화하고 화해를 지향하는 상상력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시집의 많은 이미지들은 파괴와 죽음(혹은 무덤)과 연결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 - '내가 당신 무덤을 파먹었지/내가 그곳을 열어보았지 / 너무 깊은 데 당신이 묻혀 / 그 추억을 파먹는 데 꼬박 / 천년이 흘렀다.'(<경주 - 느티나무, 무덤 위에서 죽다>)와 같은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괴와 죽음의 이미지가 나오더라도, 그 이미지들을 서술하는 목소리가 담담하고 달떠있지 않기 때문에, 느낌이 중화되어 전달된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자칫 회피적인 중도, 혹은 무책임한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다잡아주는 것이, 조밀한 언어의 그물이다. 얼핏 보기에는 평이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제의 미덕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언어의 사용이 작품의 무게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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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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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은 상상력을 주된 무기로 하는 작가이다. {비명을 찾아서}와 {역사 속의 나그네} 등에서 내보였던 <역사의식이 바탕에 깔린 SF적 상상력>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근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SF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일을 다루어, 현실의 문제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명을 찾아서}의 경우, “아직도 일제강점기가 계속되고 있다”라는 다분히 논쟁적인 상상력이 바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의 또 다른 스토리 라인을 만들고 있는 부하직원에 대한 戀情이나, (발표당시의 사회상황인)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비판 등이 잘 살아나도록 하는 시너지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상상력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그 상상력이 결여된 이번 작품은 다소 실망스럽다. 그의 상상력이 현실에 착륙해버리고 나니, 후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그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빛나는 상상력의 마법성 안에서만 찬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 복거일의 다른 요소, 즉 현실에 대한 인식과 대응감각, 문체, 구성 등은 그만큼 평이하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한 작가가 모든 요소에 능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끊임없이 변신하고자 하지만, 그 변신이 성공적이기 쉽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부분은, 이 작품의 인물 관계 설정이 {비명을 찾아서}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점이다. 아내와 딸을 사랑하지만, 옛 여인을 잊지 못하는 무명 詩人, 그리고 다분히 관념적인 그와 주변 인물들의 성격으로 인해서, 다양한 방면의 지식에 대한 소개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거의 유사한 설정과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비명을 찾아서}에 비해서 이번 작품인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의 경우가 훨씬 평이하게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반복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상상력과도 연관되는 부분이다. 앞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설정과 상황이 가상의 공간에 대한 안내와 설명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지만, 뒤의 작품에서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안내와 설명은 군더더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딸이 쓴 마법사에 대한 동화가 더욱 부각되었다면, 작가의 상상력이 유지되지 않았을까? 작가가 진정으로 이 작품을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리고 싶었다면, 그 동화도 역시 비슷한 주제로 완성되어 가고, 그 동화로 인해 현실의 깨달음을 유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으리라. 그러나 동화와 현실은 유리되어 버렸고, 그랬기에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화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현실도 모두 살아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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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타치오를 먹는 여자
류소영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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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지극히 소소한 이야기들. 류소영의 소설이 취하고 있는 제재는 대부분 그러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소설이 될 수 있는가? 차라리 수필이나 꽁트라면 좋았을 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과연 소설이 될 수 있는가? (이 작품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와 「피스타치오를 먹는 여자」와 같은 작품은 분명하게 소설로 읽혀졌다.)

... 원론적으로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제재라면 문제가 다르다. 소재야 어디에서든지 취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제재는 작품의 주제를 구현하는데 기능을 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즉, 문제는 “류소영이 사용하는 소재가 작품의 주제를 구현하는데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 된다. ... 물론, 이 작품집이 전반적으로 소설이나 꽁트와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이러한 소재선택의 문제뿐만 아니라, 구성적인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평이한 구성과 서술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 걸친 긴장감이 떨어지고, 긴장감이 떨어지니 아기자기한 소재만이 전면에 부각되어 오른다. (소재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 소재 역시 가볍고 평이하다. 이것이 이 작품이 삶의 예리한 단면인 단편소설이 되지못하고, 그저 기발한 소재를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이야기로 읽히게 된 이유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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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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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라는 제목에 매혹되어 작품을 고르다. 또한 내가 읽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굳빠이 이상>이 흥미로웠기 때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이 그러한 매혹이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물론 몇 가지 작품에서 주목되는 모티프가 발견된다.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에서 나타나는 ‘도서관’, 기억력의 대가인 옛날 ‘사서’와 분류의 대가인 요즘 ‘사서’의 대비 등이 그러하고, 「뒈져버린 도플갱어」에서의 ‘속도’를 느끼는 폭주족의 모티브도 주목되었다. 그러나 작품집 전체에 대한 인상은 다소 산만하고,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금 더 정제된 형식과 서사구조로 그러한 모티프를 담을 수 없을까? 이 작품집이 구사하고 있는 모티프가 주목되긴 하지만 그리 참신하지는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구태여 대중문화들과 연결시키고 산만한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무조건 새롭기만 하다고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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