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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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는 그가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토니오 크뢰거」)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이 말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고 있는데, ⓐ 예술가의 길, 즉 유미주의적인 태도와 ⓑ 시민의 길, 즉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태도라고 할 것이다. 수록작품의 목록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두 가지 길이 극명하게 파악된다.

예술가의 길에 해당하는 부분은, 내게 있어 그리 큰 울림을 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부족하다거나, 그가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인 성향으로 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유미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부분에 동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를 창작했을 그 시절과 그의 창작물을 읽는 내가 살고 있는 시절이 그만큼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시절은 너무 변했고, 그에 따라 그의 논리도 낡아바렸다. 특히, 예술가를 천재적인 영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라는 견해에는 쉽게 동감할 수 없다. 물론 '천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예술가는 그러한 천재성에 의해서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는 부단한 자기 단련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시민의 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의외의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흔히 토마스 만은 나치에 동조했던 작가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동조했기 보다는 그것을 방조했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에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아예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역시 당시 독일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인종차별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2번 인용 참고]) 하지만 이후 작품에서 그는 현실에 대해 눈을 돌리며, 파시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목이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면서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발을 붙인 채, 선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 그것을 파악했다는 점이 이 작가의 위대한 점이고, 그 둘의 조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그의 작품들의 빼어난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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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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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가지는 사회적인 가치는 대단하다. 또한 SF소설로서의 흥미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재미'이다. 소설이 아무리 대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장르적, 혹은 기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의 기본이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책들이 시간의 압제를 견뎌내고 빛을 발하고 있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많은 책들이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도 경쾌한 발걸음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의 내부에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지적될 수 있는 이유는 과도하고 일방적인 설명이다. 물론 설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흠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책이든 등장인물의 의도(혹은 작가의 의도)가 설명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장'으로까지 이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이 작품의 많은 설명들은 많은 부분 주장에 닿아있다. 특히 사회주의 이론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대부분이 주장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동감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방적인 주장은 공감의 유무와 상관없이 버거운 법이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일방적인 선악의 대립이다.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는 것은, 분명한 폭력이고, 파시즘적인 논리이다. 동지 아니면 적,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미워하는 사람. 이 작품도 이러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두고 있는 작품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이다. 왜 이리도 다양한 인간들이 그러한 두 가지 유형으로만 나뉘어져야 하는가? 이 작품은 압제에 대한 저항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또 다른 압제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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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새 행복한 책읽기 4
이지현 지음, 김형준 그림 / 계림닷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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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동화는 야무지고 단단하다. 흔히 생각하는 동화의 이미지에 '야무지다'와 '단단하다'라는 설명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동화 역시 <작가에 의해서 '잘' 말들어진 이야기>라는 기본을 다시 떠올린다면, 그와 같은 특성은 참으로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나라 문학의 여러 분야에서 아쉬운 점이 참으로 많지만, 동화라는 특수한 분야에서는 그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동화작가는 많이 양상되고 있지만 창조적인 작품은 별로 발표되지 못하는 상황, 외국 유명 작품의 아류작에 불과한 기획동화가 양산되고 있는 추세, 그리고 무엇보다 동화작가들의 작가의식 부재 등등, 참으로 우리의 아동문학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할 때, 이지현의 동화는 참으로 야무지다.

동화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작품도 아이들의 시각에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곧 함부로 작품을 쓰거나 유치한 생각의 조합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간과하고 지나가는 문제들을 다루기에 '아이들의 시각'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삶의 진실들을 다루기에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측면을 잘 살려내고 있다. '어떠한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세상살이에 물들어버린 어른보다, 상대적으로 순수한 아이의 시각이 더욱 올바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동화는 어린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동화는 아이들이 읽을 수 있고,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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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파즈
무라카미 류 지음, 김지룡 옮김 / 동방미디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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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참으로 쉽지 않은 텍스트이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데, 아마도 나의 성적인 취향이 SM플레이를 과도하게 싫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선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을 생각하기 이전에, 무라카미 류가 선택하는 소재에 먼저 질려버린다. (사실, 이러한 것은 장 주네나 장정일의 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따지고 보면, 류의 소설은 잘 읽히는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또한 매우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흔히 가볍다고 설명하고는 하지만, 단순하게 '가볍다'라고는 치부해버릴 수 없는 힘을 그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작품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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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루
윌리엄 깁슨 지음, 안정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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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의 매력은 시간이 지난 뒤에 발휘된다. 당시에는 그저 공상에 불과했던 것이 현실로 되는 순간, 『해저 2만리』에 나오는 가공할 성능의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핵잠수함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멋진 신세계』의 유전자 조작이 현실의 게놈 프로젝트로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 SF소설은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96년, 이제 막 인터넷이라는 문명이 시작되던 때였다. 물론 그때 이미 인트라넷 기술과 기본 개념은 설정되었던 상황이었지만, 그것을 발전시킨 개념들은 2002년 현재의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있다. 사이버스공간의 형성 및 활성화, 해킹을 통한 개인 정보의 유출(작품에서는 ‘접속분기점’을 통해 행동의 유추분석), 사이버 아이돌스타(작품 속의 ‘아이도루’ 아이도루(Idoru)라는 표현은 아이돌(Idol)의 일본식 발음이다) 등이 이 책에서 예측하고 있던 사이버 문명들이다.

물론, 이외에도 그리 신선하지 않고, 현실에서 구현되지는 않지만, 동시통역기, 손끝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컴퓨터 운영체계를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이미 많은 SF영화에서 사용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컴퓨터의 운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등도 앞으로 구현될 수 있는 상상력이라고 판단된다.

SF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를 돌아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저 가능성에 불과한 것들을 현실처럼 구현하여, 그것들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내보인다. 『1984』의 파쇼 독제에 대한 구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구현이 나타난다. 특히 이 작품과 다른 작품이 변별되는 것은, 정치/사회/과학과 같은 문제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경고라는 점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이버캐릭터와의 연애, 스타시스템에 대한 비판 등이 이 작품이 주된 경고이고, 이것이 다른 어떤 분야에 대한 경고보다 독특하고 공감되는 부분이다.

이미 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다른 것들이 바탕이 되지 않는 문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생하지 못한다. 다른 것들이 기반에 속하는 것이라면, 문화는 기반 위에 쌓아올린 누각이다. 언제 허물어질지 알 수 없는 누각.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기반이 흔들려버리면 허물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공중누각.(이 작품에서도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는 사이버공간과 해킹을 통한 개인정보의 누출이라는 문제를 함께 다루게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의 속성 때문이다.)

문화, 그것도 대중문화의 첨병이면서 메카니즘인 인터넷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의 상상력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 지, 그 정확한 시기를 판단하기 힘들다. 다만 이 작품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현실이 등장할 때, 이 작품의 힘은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이 되어버린 허구는 더 이상 허구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테니까. 어쩌면 이것이 SF소설의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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