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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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승우, 성실한 작가. 한 땀 한 땀 작품의 구석구석까지 신경을 쓰는 믿음직한 작가. '고지식할 정도로 진지하고, 두려울 정도로 신랄하게 지배와 억압을 비판하며, 관념의 토르소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사변적인 작가'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그의 성실함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그러나 그만큼 작품이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 답답함은 가시지 않고 있다. 역시 관념과 사변이 충만하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가볍지 않고 감각적이지도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진실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話者인 '나'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다. 작품의 초반에서 '나'는 사변적이고 일정한 지적인 수련을 거친 인물처럼 묘사된다. 특히 그가 내뱉는 사랑이나 편애에 대한 분석은 무척이나 날카롭다. 그러나 중반에 이르러 드러나는 그의 과거는 매우 충동적이며 분노에 찬 인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몇 번인가의 가출과 돌출행동, 그리고 맹목적인 저항. 초반의 면모는 퇴색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반이 되면서 그의 성격은 다시 변화한다. 이제 그는 평화와 화해의 전도사로 변모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분노를 잠재하고 있는 인물에서 탈피한다.

물론 등장인물의 성격이 항상 고정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특히 장편소설의 주인공인 경우에는 변화하지 않는 인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변화의 전개가 극단적이지 않고 타당성을 확보하느냐가 문제가 될 뿐이다. 사실, 결과만으로 보자면, 변하기 전과 변화된 후의 간극이 클수록 흥미를 끌 수 있다. 즉, 극단적인 변화일수록 더욱 극적인 반전의 효과가 크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정교한 구성이 요구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의 경우에는 그 변화의 과정이 극단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충분한 타당성을 가진다고도 판단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칫 다중인격을 가진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상을 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 그가 너무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는 상황을 설명하고(과거를 회상하면서까지), 사건을 진행시키며, 마지막에는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상황에 대한 설명이야 어느 인물이나 가능한 것으로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은 행동적인 인물의 몫이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색적인 인물의 몫이다. 그런데 작품의 화자인 '나'는 이 두 경향을 모두 혼자 짊어지고 있다. 그러니 그의 성격은 통일되지 못한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작품의 후반부, 즉 '나무'라는 상징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에 대한 문제이다. 나무에 대한 의미부여는 a) 어머니의 야자나무, b) 나의 상상, c) 그녀의 꿈, d) 형의 노트 등의 네 가지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다른 상황, 서로 다른 시간에서 그 의미를 떠올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모두 같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가 이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독서의 중요한 문제이다. 이 부분에 대한 독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 작위적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고, 2)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무리 없이 읽힐 수도 있다. 2)의 경우라면 상관이 없지만, 1)의 경우라면 이 부분은 작품의 흐름에 큰 결점이 된다. 구조적인 면은 이 부분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지지만, 독서의 흐름에서는 그리 좋은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몰랐을까? 성실한 작가 이승우가? 알았다면,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구성방법을 사용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만큼 '나무'의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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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TIGO 2008-10-0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선 이 소설의 구조에 대해 말씀드러야 하겠는데요. 우선 주인공의 성격변화를 보면
이 소설은 <극화되어 있는 소설>입니다. 긴 시간에 이루어지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그러니 성격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요. 그의 성격은 낭만주의자의 그것을 빼 닮았습니다. 병적인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나무의 의미는 우선 형식과 구조를 볼 때 어머니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형의 이야기로 이어지
는 이야기가 너무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대구>의 형식을 가지기에 나무의 의미는 어쩔
수 없이, 혹은 당연히 같은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야기의 두
가지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비서관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과 형과
순미가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 말입니다. 물론 이야기는 다르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기표는 다르지만 기의는 같습니다. 그렇기에 나무의 신화가 같을 수 밖에. 이승우 씨가
이야기를 만들면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네요.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15
서정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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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비현실화. 이 시집이 가지는 힘은 이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것이 힘이 될 수 있는가? 충분히 가능하다. 사건의 허점을 돌출시켜, 사물을 비틀어볼 수 있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은 힘이고 권력이다. 권력자들이 검열이라는 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 그렇게 비틀어서 현실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삐딱해졌는가? 싸구려 포즈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결과는 아니더라도 과정,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가?

방종은 통용되지 않는다. 책임질 수 있는 자유만이 용납될 뿐이다. 새로움이야 상대적인 가치일 뿐 언제까지고 새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새로움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아직은 더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의 詩作이 계속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나는 아직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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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박청호 지음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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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제목이다. 그 외에는 주목되는 부분이 없다. 제목도 그다지 좋은 설정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이 이미지를 만들기는 해도, 의미를 만드는 문장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 책의 제목은, 수록된 작품들의 전체 분위기를 대변하는 어떤 의미도 만들지 못하고, 그저 수록 작품들 중 한 작품의 제목에 불과하다. (사실, 이 작품도 이 제목의 분위기를 전혀 살려내지 못했다. 물론, 다른 매체에서 제목을 차용했다고 해서, 先行 작품의 느낌을 그대로 살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집의 경우처럼 표지디자인까지 先行 영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문제가 틀려진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의사소통의 不在'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등장인물들 간의 부재와 작가와 독자들 간의 부재가 그것이다. 1)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 부재 : 90년대 이후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작품집에서도 그런 성향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의사소통이 부재하는 상황'은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단면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소설 작품에서 그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도 비판될 어떤 여지도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의사소통의 부재를 빌미로 해서, 자신의 어려운 상황(사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어려울 것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강요와 넋두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2) 작가와 독자들 간의 의사소통 부재 : 소설은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집에는 그러한 의사소통을 위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어 소설을 써야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작가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배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도 없고, 문장은 감각적이나, 명확한 의미를 만들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 작품집의 문제는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이미지들의 차용만이 이루어질 뿐, 정작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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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은 없다
문성기 외 / 예솔(예솔기획)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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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읽은 책이다. 그러나 책의 성격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론서라기보다는, 현상진단 정도가 적합하다. 물론 현상진단이라고 해서 가볍게 넘겨버릴 수는 없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의 강점은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매우 높은 수준이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수의 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각기 다른 현상진단과 대안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고, 또한 그들이 제안하고 있는 대안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실에서 과연 얼마나 실현가능성을 가지는가에 있다. 예를 들어 한 저자는 OVA(Original Video Animation)을 우리에게 필요한 장르로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서, 다른 저자는 TV 시리즈의 제작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책 전체에 걸친 일관성은 많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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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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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지리멸렬한, 그야말로 '마이너리그'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인생역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장악하고 관장하는 요소는 바로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곧 삶을 메이저와 마이너로 구분하여 판단하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이와 같은 인식 태도 자체도 문제가 될 소지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의 역량에 의해서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부분인 것도 또한 사실이다.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도 모르지만, 성석제의 작품들 중의 많은 경우에서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소설들은 항상 삶의 마이너리그에 속하는 인물, 예를 들어 동네 건달, 무지한 아이, 혹은 실패한 인생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은희경과 성석제의 인식론적 출발점은 유사하지만, 그를 다루는 솜씨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를 나타낸다. 요컨대 그것은 '태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인데, 보다 상세하게 구분하자면 1) 어떤 리그에 스스로를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한 판단력 2) 그러한 판단에 대한 가치평가 및 적응태도 등이 차이를 형성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부터 살펴보면, 작품의 제목이 '마이너리그'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마이너리그에 속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메이저리그를 동경하며, 거기에 합류하기 위해서 발버둥친다. 그들의 인생이 몰락하고 몰락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그래도 저 친구보다는 몰락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해버린다

자신보다 못난 인물을 설정하고 위안을 얻으려는 태도, 이 작품의 인물들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한, 그들은 자신들이 마이너리거가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과 비슷한 무리들을 경멸하고 비아냥거리며 혹시 나보다 못난 저 녀석이 앞서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서 성석제의 인물들은 훨씬 홀가분하다.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이 마이너리그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소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시궁창에 빠져버린 자의 자유로움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이너만이 느낄 수 있는 천박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긴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해학이 발생한다.

해학이란 결국 가치 뒤집기, 그렇다면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절대로 즐길 수 없는 감정이다. 오직 낮아지려는 자만이 가치를 뒤집을 수 있다. 높아지려는 자는 가치를 지키려고 할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다시 한 번 은희경과 성석제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실 이번 작품의 문체는 은희경이 구사해오던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것은 다소 스타카토적이고 냉정한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은 날카롭지도 않고 제법 유장한 맛도 내보이고 있으며,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유장함과 능청스러움이야말로 성석제 문장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유사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지만, 은희경의 작품 속에서는 해학이 발견되지 않는다. 성석제가 삶의 씁쓸한 장면을 뒤집어 한판 웃음마당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은희경은 킬킬거리기도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씁쓸함이다. 물론 이때의 감정은 절대로 슬픔은 아니다.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밀도가 너무 낮고 천박한 감정이다.

논의를 뒤집어서, 결국 이런 식의 이율배반적인 면모를 가진 것이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반박할 수 있는 마땅한 논리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추악한 면을 그대로 내보이는 소설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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