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
성석제 엮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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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는?" 

  이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제일 감칠맛나게 쓰는 사람은?" 

  이라는 질문이라면 제법 대답을 찾을 수 있겠다.  

 

  더구나 여기에 '현재 살아있는 작가 중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면, 

  나는 더욱 편한 마음으로 대답을 고를 수 있다.  

 

  성석제,  단연코 이 사람이다.  

  나는 그를 김유정 → 이문구 → 성석제로 이어지는 '감칠맛 문장'의 적통자로 꼽는다.  

 

  뭐, 중언부언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의 작품을 읽어보시라, 그것이 가장 분명하고도 간단명료한 설명이 될 것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지만 《쏘가리》라는 짧은 소설모음집을 권한다.  

  성석제식 입담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바로 그런 인물인 '맛있는 문장들'을 추천한다고 하니, 어찌 기대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책은 성석제의 이름을 건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고심하면서 읽을 것은 아니다.  

  맛난 음식을 먹듯이, 그저 '후루룩짭짭' 읽어내려가면 되겠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여러 작가의 작품 중에서 맛있는 부분을 소개한 뒤에, 짧은 추천이유가 붙어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음처럼 성석제의 문장관(觀)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문호(文豪)의 작품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게 아닙니다. 대표작이라 해서 엄숙하게 큰 줄거리만 이야기할 뿐 세세한 묘사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작품이든 작은 물방울 하나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요. 물방울이 모여 샘이 되고 샘물이 개울물이 되며 개울물이 강물이, 강물이 바닷물이 되고 마침내 수증기가 되고 저 높은 곳에서 구름으로 떠돌듯 소설도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해서 만인을 감득시키는 걸작이 되겠지요. (p.40.) 

 

  이처럼 빛나는 편린을 찾아내는 것 역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당근 ☞ ☞ ☞
  •   여러 작가, 여러 작품의 핵심을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문장 뷔페! 
  •   몰랐던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 + 알고 있던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재미  
  •   추천의 글이 오히려 재미있어 질 수도 있다는 소소한 반전
      
  채찍 ☜ ☜
  •   어디 뷔페에서 음식의 제맛을 맛본 적이 있었던가! 
  •   역시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보편타당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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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대장 내친구 작은거인 22
이지현 글, 정승희 그림 / 국민서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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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신한 아이디어로의 짧은 이야기

 - 한국 동화는 왜 짧은가? (하나) 



  한국 동화는 대부분 분량이 짧다. 

  "동화는 아이들이 보는 이야기이니 길 수가 없지 않겠는가"라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톨킨의 <호빗>이나 프랭크 바움의 <오즈> 시리즈 등의 외국 동화를 고려하자면, 적어도 모든 동화가 짧은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한국에서는 긴 동화가 나오지 못하는가?"로 이어진다.

  동화에는 분량이 긴 것과 짧은 것이 모두 존재한다. 그러니 분량이 짧은 동화가 주로 나온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다만, 발표되는 작품 중에서 압도적인 수가 분량이 짧은 작품뿐이라면 문제가 된다. 

  한쪽 주의주장을 되풀이하거나, 하나의 시각에 편중되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문학의 창작방법이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도 역시, 문학을 한정시키고 편협하게 만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문화, 그리고 그 일부로의 문학은 숲이다. 한 가지 종류의 나무만 무성하다고 해서 숲이 형성되지 않는다. 숲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이 어울려 사는 공간이다. 키 큰 나무도 있고, 덤불도 있고, 키 작은 풀들도 있다. 그 뿐인가, 크고 작은 산짐승들과 사람들도 이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이들이 모두 공존해야 비로소 숲이 된다.   
  문화는 숲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서로 공존할 때, 비로소 그 문화는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동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종류의 동화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그 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 우리가 특정 분량의 동화만 발표되는 현실을 문제 삼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이야기를 집중해보자. 한국 동화들은 왜 짧은가?
  결코 단순한 문제는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좀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몇 가지 의심되는 것들만 지적하겠다. 

  

  1) 출판 시스템의 문제 
 

  우리의 출판 시스템은 장기적인 기획이 거의 없다. 출판 산업의 규모와 수준 자체가 지극히 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출판시장은 구조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 반복되고 있는 '돌려막기'가 바로 그 주범이다. 

  콘텐츠 생산에서 수익을 내고 그것을 다시 콘텐츠 개발에 투자하는 안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만들어낸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우선 돈을 외상으로 끌어쓰고 그 부족분을 또다른 콘텐츠를 만들어내어 채워넣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왜 문제인가? 외상을 외상으로 채우다보니 콘텐츠를 무조건적으로 단기간에 만들어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성급하게 기획과 개발이 이루어지다 보니,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는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중에서 오직 <무한도전> 만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고정적인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는 항상 단발성의, 혹은 같은 포멧을 반복하면서 장소와 게스트를 변화하는 방법 밖에는 아이템을 만들 수가 없다. 이들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도전>만큼의 마니아층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예를 통해서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꼭 장기 프로젝트가 좋은 것은 아니다. 단발성 아이디어들이 참신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단발적인 것만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동화를 포함한 우리의 출판 시장이 가진 문제도 그러하다. 짧지만 참신한 시각을 가진 동화들은 많이 배출되고 있다. 내게 이런 긴 상념을 끈을 제공해준 이 작품, 이지현의 <울보 대장> 역시 그러하다.

  섹스(sex)와 젠더(gender), 즉 생물학적 성과 사회학적 성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섹스는 타고나는 것인데 비해, 젠더는 학습되는 것,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섹스가 아닌 '젠더'의 문제는 동화에서 다룰 만한 가치를 가진다. 젠더의 형성은 대부분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이루어지며, 이때 잘못된 성역할 개념을 가지게 되면 이후에도 이성관계를 편협하거나 폭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왜곡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보 대장>은 젠더 중에서도 '남성성', 그 중에서도 마초적인 남성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다시 길이의 문제로 돌아가겠다. 이처럼 참신한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프다. 
  독창적인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분명히. 번뜩이는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충만하게 갖추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것은 조금 더 시간을 들이고, 더 정성을 들이고, 더 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은 그곳밖에 없는데. 

 

  2) 작가 의식의 문제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할 만한 것은 동화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의식수준이다. 
  한국의 동화작가들은 수준이 낮다, 따위의 아마추어적인 발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모두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존재들이다. 어느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빼어난 작가는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언제나 집단적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러한 예야 너무 많아서 모두 언급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한국의 작가라고 해서 좋은 동화작품을 쓰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좋은 작품의 기준에는 참신한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작품에 내포되는 철학이나 시대의식 등도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이는 이야기의 길이를 좌우하는 창작방법이기도 하다. 시대의식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다양한 양상을 고찰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게 되며, 철학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심도있는 논설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깊어지게 된다. 

  아이디어는 철학과 시대의식의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창작 동화에게는 바로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 <울보 대장> 역시 그러하다. 이 작품의 참신성이야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아이디어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다소 부족하다. 그만큼 이야기의 흐름이 급박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만드는 비밀의 화원에 대한 이야기, 장미의 가족사, 세영이 아버지의 이야기, 장미와 세영의 로맨드 등등은 조금 더 길고도 자세하게 다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부분이 더욱 더 보강되었다면 더욱 길고도 세밀한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쉬울 따름이다. 

 

  한국의 동화는 왜 짧은가?
  더 생각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내 부족한 글은 여기에서 끝을 내지만, 생각은 아직 남는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읽고, 그를 통해 생각을 발전시켜야 하리라. 
  



* 이 포스트는 네이버 블로그 <All that story>와 알라딘 서재 <서재에서 세상 읽기>에 함께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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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13 SE - [초특가판]
데자키 오사무 외 감독 / 덕슨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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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킬러만큼 마초에게 적절한 직업이 또 있을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직업상의 특성이 그러하고,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음모와 암투가 벌어져야 한다는 사실 또한 그러하며, 무엇보다 임무를 완수하든 실패하든 끝내 비극적 아우라를 짊어져야 한다는 숙명이 그러하다.

  그러하기에, 마초물 주인공들에게 '킬러'는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다.

  턱시토를 갖춰입고 마티니를 홀짝거리는 카사노바 스파이 007이 그러했고,
  호색한적 주접을 부리다가도 문득문득 스나이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티헌터가 그러하고(하긴, '호색'이야말로 마초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마초를 위한 그 유명한 작품이 있지 않은가, 영웅호색이라고).
  롱코트와 라이방으로 코디를 맞추고 베레테를 휘두르며 "강호에 의리가 떨어졌다"고 속삭이는 오우삼 영화 속의 주윤발이 그러지 않았던가.


  1968년부터 줄기차게 연재되고 있는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1983년 작품 <고르고13(ゴルゴ13)>의 주인공 듀크 토고도 역시 그 오랜 전통을 계승한다.

  그는 과묵하며, 신의를 지키고, 또한 냉혹하다. 요컨대, 킬러로서의 자질을 갖춘 것이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괴물적 체력이나, 불사(不死)에 가까운 생존능력, 마초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유혹의 기술 혹은 성교의 기술 등등은 악세서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초의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결단코 반성하지 않는다. 오랜 조력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도, 킬러라는 이유로 의뢰자의 아버지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누군가를 죽이고 죽임 당한 위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자신이 택한 킬러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혹은 무감각을 가장한다.


  사실 이 작품의 내용이나 세계관은 뭐, 그리 길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스토리텔링도 느와르 필름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이다.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세련된 표현 기법이다.
  특히 초반 3분, 대사 없이 영상만으로 진행되는 하드보일드는 압권이다.
이 부분의 미장센과 시퀀스 구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 있다.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 작품은 3D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는 인정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이 작품의 3D는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다. 적어도 현대의 시각에서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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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Mazinger 1
나가이 고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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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보면, 
이렇게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끝장을 용납할 수 있는 체제가 부럽기도 하다.   
 

작가인 나가이 고(일본어: 永井 豪/ながい ごう, 1945년9월 6일~)는  
마징가Z에서 그레이트마징가를 거쳐 그랜다이져에 이르는 그 길고 긴 여정을 끝내고도
또 이야기할 거리가 남았다고 한다. 
 

어쩌겠는가? 맺힌 것은 풀어야 하는 법이다. 

문학가, 화가,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 PD, 음악가, 그리고 만화가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란 예술가는 장르를 가르지 않고 모조리 요절해버리는, 혹은 요절을 방조하는
우리의 현실에 비하자면야,

그 나이를 먹고서도 창작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사회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설은 전설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작가적 욕심이야 충족시켰을지 몰라도,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운 Z마징가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악마적 힘을 가진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소년의 성장"이라는 단순명쾌한 주제야
로봇만화의 규범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라 차치하더라도, 

매카닉 디자인이나 필살기, 게다가 적들이 지구를 침공하는 이유 등등의 설정은
마징가Z가 활약했던 1970년대 후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아쉽지만, 아쉬웠겠지만,
멈췄어야 하지 않았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설이 아름다운 것은 비장한 결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Good 

 ▶ 여전히 그리운 마징가Z, 거대 로봇의 선구자

 ▶ 노장의 창작욕이 발현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부러움

 ▶ (물론 팀 작업이겠으나) 한층 세밀해진 액션 및 매카닉 묘사

* Bad

▷ 차라리 재현되지 말았어야 할 그리움

▷ 성장이 사라지고, 선과 악 사이의 갈등도 빠져버린 열혈 소년 이야기

 
▷ 70년대와 다를 바 없는 매카닉 디자인과 필살기

▷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치덕치덕 덧칠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매카닉 다지인

▷ 그리스 올림푸스 신화와 근미래 로봇SF의 억지 결합

▷ <마징가Z>는 그렇다치고, <그레이트마징가> 팬들의 실망감은 어떻게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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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애사
이선미 지음 / 여우비(학산문화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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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에 주목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참신한 상상력 - 일제시대를 다루면서도 투쟁과 비탄에 빠지지 않으며, 때로는 발랄하기까지 한 바람둥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의 처음이자 끝이다. 

 
  나머지 부분에는 가치를 부여하기 힘들다. 
  결코 피해갈 수 없으며, 용서되어서도 안 되는 표절 사실은 제외하고라도, 
  아래의 이야기요소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다. 
 

  ① 피동적 여성과 그녀를 구해주는 마초적 왕자님이라는 컨셉 
  ② 그 왕자님은 바람둥이이지만,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반항아라는 진부한 설정 
  ③ 순진한 처녀가 바람둥이를 구원한다는 판타지적 스토리텔링 
  ④ 그 과정에서 오로지 남자의 성장을 통해서 여자는 행복을 느낀다는 마조시스틱한 캐릭터



  이 지긋지긋한 잔재들이 왜 이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긴, 이 작품이 '로맨스'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도 상상력이 좋기에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소설작품으로 생각해버렸던 것이다. 
  아쉽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이런 로맨스가 먹힌다는 말인가

 

 * Plus + 17

  •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킨 기발한 상상력 + 10
  • '일제시대'가 가진 문화콘텐츠적 가치에 대한 발견 + 5
  • Best Sentence 나여경을 향한 선우완의 대사 : "모두들 독립투사가 되어야 하나? 너희 이름 앞에 붙은 명예와 명성이 굴레라는 걸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군. 이런 말 할 자격 없는 놈이라고 비꼬지 마. 나라니 민족이니 독립이니, 관념이니 이상 따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는 하늘의 뜬 구름 같은 게 아닌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 그나마 보지 못하는 하늘의 구름 말이야." - p.182. +2

 * Minus -34 

  • 결국은 '순진한 처녀 바람둥이 길들이기' 이야기 -10
  • 피동적 여성형과 더욱 피동적 마마보이 -5
  • 친숙하다 못해 익숙한 스토리텔링요소 -3
  • Worst Scene : 어머니의 가르침 "여자는 말이다. 여경아, 사내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게다. 사내 넓은 가슴이 온통 한이고 분노인데, 집안 여자들 때문에 두 다리 묶어 주저않혀선 안 되는 법이지.(p.63.)" 그리고 그걸 듣고서는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이을 알게 된 것이다."(p.63.)라고 생각해버리는 여주인공. -1

 

 * Total  : basic 75 (C+) + 17 - 34 = 58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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