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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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식민지 지식인들의 시각은 양가적일 수밖에 없다. 

증오와 부러움 사이가 그들 시선의 위치가 된다.
압제자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한 꼭지점을 이룬다면,
선진 문명에 대한 감출 수 없는 동경과 부러움이 또 하나의 꼭지점을 이룬다.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는 이 극단 사이에서 그들의 시선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물론 시선의 향방에 따라 행동의 양식은 매우 상이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같은 욕망이 그들을 지배한다.  
 

우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민족 대표 33인의 대부분이 친일에 가담했던 것, 이광수와 같은 민족주의자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술한 지배 논리에 동의했던 것, KAPF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론자들이 혁명과 독립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 그 증거이다. 

 
어쩌면 이러한 모순은 식민지 지식인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눈을 떴고,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자연스레 더욱 강한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누구보다 조국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에서 탈피하고 싶어했다.
자연히 욕망은 자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은 욕망이 싹트게 만들고, 한계는 욕망을 자라게 만든다. 


고바야시 다키지가 1929년에 발표한 소설 <게공선>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식민지 지식인들의 심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문학사에서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던 작가들은 이상이나 박태원 등의 모더니스트들 뿐만 아니다. KAPF와 동반자 작가들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  
특히 모더니스트들이 형식과 기법을 통해 국제적인 감각을 드러냈다면, KAPF와 동반자 작가들은 내용과 인식을 통해 같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백신애의 <꺼래이>, 이기영의 <고향>, 임화의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그들도 일본의 계급문학, 특히 NAPF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바로 이 <게공선>이다.


이 작품의 창작방법론은 교과서적이다.
사회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전형'으로써의 한계 상황을 제시하고 있고, 그 속에서 모순을 자각하고 '학습'을 통해 주체적으로 변모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으며, 묘사 역시 '현장감'을 드러낼 수 있도록 생생하다. 

 
사실, 이 작품을 읽게된 계기는 위와 같은 문학사적 관심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빈민, 양극화, 워킹푸어(working poor) 문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cf. 아마미야 카린, <성난 서울> http://blog.aladin.co.kr/rahula/3978782 )


그런데 작품을 읽고 보니, <게공선>이 21세기의 사회문제를 대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내용 상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표현과 상황 설정의 대표성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런 것들이 현재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대표적인 예인데,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도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증언이다. 

   
  “살해당하는 걸 안다면? 바보야, 언제야 그게. 지금 살해당하고 있잖아. 조금씩 살해당하고 있잖아. 조금씩 말이야. 저놈들은 굉장히 능숙해. 권총은 당장이라도 쏠 것처럼 언제나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경솔한 짓은 안 해. 그건 수단이야. 알겠어. 저놈들이 우리들을 죽이면 자기들한테만 손해란 말이야. 진짜 목적은 우리에게 일을 많이 시켜, 기름틀에 넣고 꼭꼭 짜내듯이 돈을 잔뜩 버는 거야. 그렇게 지금 우리는 날마다 당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어때, 여기를 보라구, 엉망진창이잖아." : pp.153-154.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한 우리 계급문학의 대표작, 즉 백신애, 이기영, 임화의 작품에서 <게공선>과 같은 세련됨을 느끼지 못했다. 
현재에도 그러하다면, 같은 시대를 공유하면서 활동했던 작가들이라면 더욱 큰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지 않았을까?

언제나 그렇듯, 뒤쳐진 자는 서럽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먼저 눈뜬 자들은 더욱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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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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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리와 심령 사이의 거리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심리와 심령은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심리는 그의 몫이지만, 심령의 그의 몫이 아니다.  

같은 관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빼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 폭발적으로 제시되는 사건 전개와 추리, 원인 찾기 등은 잘 짜여진 추리소설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대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저자가 히가시노 게이고이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과 재주에 비하면 이 작품은 분명히 범작이다.  

 

2. 추리의 무게 

그러나 작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변모가 발견되었다.  
추리의 무게감에 대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추리소설은 '추리'라는 창작기법에 기반을 둔 소설이다. 즉, 이 기법을 활용하기만 했다면 그 어떤 작품도 모두 추리소설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분류체계로 묶이지만, 그 수준은 천지 차이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소설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추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이 가진 깊이와 넓이에 좌우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의 질은 매우 높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인식 때문이다.  

   
    “내가 운전하지 않았어.”
  “알아.”
  그렇게 말하며 기우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신스케 쪽에서 물었다.
  “당신이 먼저 그렇게 하겠다고 제안한 건가?”
  “물론이지. 미도리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
  “그렇다면 그녀를 대신하기로 한 건 애정 때문이었나? 아니면 타산?”
  “타산?”
  “그녀나 그녀 집안에 대해서나 약점을 쥐게 되는 셈이니까.”
  “아,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난 그대로 그녀를 경찰에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애정 때문이었다고 하면 폼이야 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 순간에 타산이 작용했던 기억도 없어. 굳이 말하자면, 습성이라고 해야겠지.”
  기우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습성?”
  “피고용자의 습성.”
  “아하.”
  신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 pp.390-391.
 
   

이처럼, 삶의 다각적인 면모, 다소 고단하고 피로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에 가까운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어쩌면 우리의 장르소설, 특히 추리소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젊은 소비자만을 고려하면 인식의 폭을 넓히기 어렵다.
역설적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의 폭이 넓은 늙은 작가들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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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탐정사무소 3
칸자키 슘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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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럭저럭 근근히 살아가는 탐정의 그저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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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 부엌 이야기 심야식당
호리이 켄이치로 지음, 아베 야로 그림, 강동욱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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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이 책은 만화가 아니라 에세이라는 점이다.
비슷한 북디자인과 편집 때문에 만화로 착각한 이들도 제법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만화가 아니다, 만화 <심야식당>에 나온 음식을 소재로 삼아 작성한 에세이이다.  

태생은 다르지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이것을 잊지 말자.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호리이 켄이치로이지 아베 야로 가 아니다.
일부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라도 아베 야로의 것으로 착각한 독자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러했다.

이 역시 분명히 밝힌다. 아베 야로가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하게도 호리이 켄이치로 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인물이다. 책에 수록된 소개는 이렇다.  

교토 출신의 프리라이터이자 칼럼니스트. 잡지 '주간 후미하루'에서 기발한 발상에 근거해 조사한 결과를 맛깔스럽게 글로 풀어 쓴 에세이 '호리이의 척척 조사'를 인기리에 연재 중이다. '뭐든지 조사하는 프리라이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톡톡 튀는 에세이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뭐, 이런 사람이라면 알려지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의 에세이 시장에 전문성 자체가 확보되지 못한 탓이다. 

우리나라에서 에세이는 작가, 문필가, 유명인사 등이 취미삼아 집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적지 않은 글들은 대필(代筆)된 것이기까지 하다.) 우리나라의 에세이들은 대부분 저자의 신변잡기, 시사문제에 대한 단산 등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그 때문이다.

요컨대 전문적인 테마를 갖춘 수필이 창작되기 어려운 환경인 것이다.

물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르포르타주(reportage) 속칭 '르포'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형식은 대중화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어렵고, 딱딱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전문 에세이, 그리고 전문적인 에세이스트가 차고 넘치는 일본의 현실은 부럽기만 하다.
더구나 대중이 손쉽게 공감할 수 있는 테마 에세이라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분야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글은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바로 이 책이 그러하듯이, 애당초 이런 식의 글은 일본이라는 문화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면 쉽게 이해될 수 없다.  

난삽해 보이기도 하고, 실없는 소리만 지껄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경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서 이런 글의 형식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미 몇몇 작품을 접했기 때문이다. 

<야구장 습격사건> http://blog.aladin.co.kr/rahula/3797858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http://blog.aladin.co.kr/rahula/3992137
<오! 수다> http://blog.aladin.co.kr/rahula/2963059

흔히 문학이 독자를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한다.대중과 괴리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이미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이는 내용의 문제도 있지만, 글쓰기 방식이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새로운 시대에 부합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 방식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전문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에세이, 이것이 그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에도 이런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http://blog.aladin.co.kr/rahula/3689544 
 

앞으로의 선전을 기대한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시도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실패가 없이는 성공 또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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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의 혼 1
타카타 야스히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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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 만화의 근성이 음악과 만났다.
제목부터 근성을 보여준다. 팍팍!  

'혼(魂)'이라니, 이 낱말처럼 일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또 있을까?

논의의 범위를 '일본 만화'로 한정하면 위의 설명은 더욱 타당해지리라고 믿는다.
다음 작품들 간의 유사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 <마징가>를 필두로 한 각종 슈퍼로봇 시리즈, <내일의 죠>의 뒤를 따르는 각종 스포츠만화, <쇼타의 초밥(Mr.초밥왕)>을 비롯한 많은 수의 요리만화…  
이 복잡다단한 소재와 주제를 가진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야 말로, '혼'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근성'과 '도전'을 핵심으로 하는 소년 만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스토리텔링 또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친구가 생기고, 그들의 도움으로 더 큰 난관을 해결한다는 '에스컬레이트 시스템'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소년 만화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1.  주인공이 이미 소년이 아니다.

소년 만화의 주인공은 소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모무한 도전은 소년이 해야 아름답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모든 걸 불태워야 하는 도전을 계속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더러, 구차하기까지 하다.  

소년은 아무리 모든 걸 불태워도 다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없지만,
어른은 모든 것이 불타버리는 순간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린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소년은 내일을 위해 살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무모해도 아름답다.
하지만 어른은 오늘을 견디며 살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모해지면 구차해진다.  

<내일의 죠>는 소년에서 시작해 어른이 되어 끝난다.
그가 마지막 게임에서 왜 모든 것을 불태웠는지를 생각해보라.
그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세계 무대로 나서는 순간, 그는 소년의 세계를 뛰어넘었다.
죠가 아름다운 이유는 마지막까지 불탔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끝내 소년으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엔카의 혼>에서 주인공의 위치는 분명히 소년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셀러리맨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과 같은 핏줄을 가진 작품으로 <시마과장> 시리즈를 꼽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본다.
둘 다 셀러리맨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있으나, 삶을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소년처럼 무모하게 부딪히기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도 무모하다고 느껴지는 한계의 상황에서,
시마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권모와 술수를 동원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하지만 <엔카의 혼>에 나오는 타츠는 어떤 한계가 오더라도 자신의 마음은 굽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를 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그의 마음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문제는 그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곧 '좋은 노래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다.
이런 순도 높은 열망은 어른의 마음이 아니라, 소년의 마음이다.  

즉, 그는 셀러리맨의 탈을 뒤집어쓴 소년인 것이다.
이것이 소년이 아닌 주인공이 소년 만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유이다.  

 

2. 쇠퇴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

주인공의 소년성보다 중요한 것은
노래 중에서도 노쇠한 장르인 엔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 말고도 음악을 소재로 한 만화는 많다.
그러나 여타 작품들이 다룬 음악은 대부분 젊은 장르, 록 또는 힙합이다.  

그에 비해 엔카는 낡디 낡은 장르,
작품 속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것처럼 노쇠한 자들을 위한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지향점은 '도전'이나 '대결'에 있지 않다.
오히려 '부활', '화해', '해소'에 스토리텔링의 핵심이 놓인다.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이 주는 매력,  
어쩌면 엔카(트로트)에서 이별을 많이 다루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런지? 

 

소년의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어른,
늙고 쇠퇴하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해하는 어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어른,

... 이 만화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한,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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