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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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지금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갈망, 그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채우려는 마음을 말한다는 욕망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중년이라는 나이 안에 있는 두 남녀의 처절한 갈망 어린 몸짓과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과연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인간의 욕망이란 이성을 넘어 감성의 세계에서 아니 일반적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라는 선을 넘어서게 만드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 가만히 멈춰있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찬란했던 불나방과 같은 시간은 오롯이 행복으로 남을까.

 전화는 거기서 끊켰다.
 
나는 책상 한쪽에 놓여 있는 대형 지구의를 끌어당겼다. 러시아를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지만 이르쿠츠크엔 가본 적이 없었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바이칼 호 근처였다. 초승달 보양의 바이칼 호에 대해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수심이 세계에서 제일 깊은 호수라는 것뿐이었다. 지구의에서 찾아본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 남쪽 끝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본문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우리 앞에 던져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의 소식이 전화를 통해서 전해지기도 하고 이 전에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한 누군가를 만나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빠져들어 모든 시간을 잠식해 버릴 정도로 무섭게 흡입해버리기도 한다. 이미 인생의 반을 달려온 김진영을 보며 나는 그 정도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달관은 아니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아니 무언가 태연하게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세상은 그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그 곳이 죽음을 향해 가는 마지막 여정이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나방처럼 오늘만을 사는 이와 같이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으며 그 길이 마치 이 세상의 마지막 소풍을 가는 길처럼 가볍지만 묵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가정의 가장인 그는 회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책을 맡고 있다. 모든 것이 평온하다 못해 너무도 익숙한 일상 앞에 그의 눈에 들어온, 그보다도 이미 나이가 많은 천예린을 보며 김진영은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천예린과 묵직하기만 할 것 같은 김진영의 만남은 처연할 정도로 치열하게 서로를 탐닉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넘어 그녀를 쫓기 위해 매 순간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 취해있는 그를 바라보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라는 상념에 빠져보기도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이런 형태의 사랑도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도 전에 다채로운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천예린을 보노라면 눈 앞에 있지만 잡히지 않는 그 모습이 더욱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겐 두 아이와 평생 나만 의지해 살아온 아내가 있습니다. 한 여자에 홀려 그들을 버리고 떠나왔지요. 머리핀을 무의식적으로 갈 때 의식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나를 죽이고 싶어했다는 것을. 지금도 천예린보다 더 빨리 더 고통스럽게, 더 완벽하게 나 자신의 명줄을 끊고 싶어하는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본문

 그들이 들어서는 안 될 그 선을 넘어섰을 때 아마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어쩌면 몰랐을 줄도 모른다. 그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을 넘어 그들에게 드리울 미래가 어찌되었건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서로를 향해 피어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 드리운 모든 짐을 던져 버린 채 그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피어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들에 대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을 넘어 그들만이 통용되는 이 세계에서 나는 그들에게 어떠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현실이 드리우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내달리는 그들의 열망에 대해 찬사를 보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친 짓이라며 그들을 책망을 해야 할까. 아직은 쉽지 않은 이 이야기가 훗날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게 될지,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다시 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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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 조세핀 하트저

 

 

 

독서 기간 : 2015.06.1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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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딸 - 가깝고도 먼 사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심리학
이우경 지음 / 휴(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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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어느 날인가 지하철 앞 좌석에 앉아 계신 중년의 한 남성을 보면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에서는 아버지, 라는 호칭 대신에 여전히 아빠, 라고 부르지만 애교도 없이 뻣뻣하게 구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며 앞에 앉은 그 남성이 마치 나의 아버지인 냥 아련한 마음이 일었다. 그토록 강인하면서도 때론 두렵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세월의 무게가 더해진, 이제는 너무도 작아 버린 아버지를 보며 위풍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씻겨 사라져버린 것인가, 라는 생각에 애잔함이 밀려든다. 

 어릴 적 나는 아빠를 꼭 닮았구나 라는 말을 싫어했었다. 뽀얀 피부에 부드러운 살결을 타고난 외탁을 한 동생과는 달리 친가의 모습을 더 많이 닮아 빼빼 마른 체형에 거무튀튀한 피부는 왠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릴 적에는 아빠의 외모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면 나이가 든 지금은 아빠의 성향을 꽤나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어느 새 아버지에 물들어 버린 나의 모습들을 하나씩 찾아보게 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는 것을 보며 과연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단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분노나 원망감, 깊은 아픔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딸은 아버지에 대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고 마음 깊숙이 복합적인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아버지와 딸 사이에 미해결 과제가 남아 있는 탓이다.
 
분석 심리학자들은 아버지에게 각별한 영향을 받은 딸을 특별히 아버지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딸들은 형제자매 중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딸이기도 했고,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닮아가는 딸이기도 하다. –본문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의 조합이 익숙한 탓에 사춘기를 넘어 성인이 되고 나서는 되려 아버지와의 관계가 서먹하게 느껴졌다. 여자이기에 그리고 엄마와 더 친숙하게 지냈던 탓에 나는 내 안에 엄마의 모습들이 담겼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이 안의 책을 펼쳐보는 순간, 알고 보면 세상의 딸들에게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딸과 아버지는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는 묵직한 유대관계라는 한 배 안에 함께 하고 있는 존재란 것이다.

 마지막 증상은 ‘RAD’라고 한다. 아버지가 없는 여성은 분노라는 큰 냄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노먼 라이트의 생각이다. 이런 여성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먹는 것, 성적인 관계, 알코올, 성공에 집착하는 것으로 환기시키기도 한다. 분노는 우울의 또 다른 얼굴이듯이 분노하던 여성은 해결되지 않는 슬픔을 안고 살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 딸의 문제를 노먼 라이트는 마음 속의 구멍이라고 표현했다. 아버지가 채워져야 할 자리에 빈 공간이 있어 늘 허기감과 상실감을 갖고 산다는 것이다. –본문

 늘 그저 묵직하게 그 자리에 지키고 있는 것이 가장이자 아버지의 모습이기에 자식들에게, 특히 딸에게 있어서 그다지 많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나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그의 빈 자리 혹은 그가 있는 자리의 그림자는 크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딸에게 그의 영향을 조금씩 전해주고 있었고 그것은 결국 딸들의 인생에 있어서 사라지지 않는 자국과 같은 것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 안의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마를린 먼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수 많은 딸들의 이야기를 마주하며 아버지의 존재가 그녀들에게 침잠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아버지의 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들의 삶을 딸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지나온 나의 삶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구나, 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아버지를 탓하며 그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나의 삶 안에도 오롯이 나의 것이 있기에.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아닌 서로의 공간 안에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나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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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남자운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된다 / 이와츠키 켄지저

 

 

 

독서 기간 : 2015.06.16~06.18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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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5.6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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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메르스의 한파 때문에 싱숭생숭한 요즘의 나날 속에서 어디를 다니는 것보다도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오늘, 조용히 앉아 6월달 샘터를 읽어 내려가 본다. 이전에는 무언가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이 샘터를 펴 보았다면 이번 달의 샘터는 왠지 모를 걱정과 근심 속에서 이야기를 펼쳐 보았는데 내 주변에 녹아있던 근심과 걱정은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언젠가 제 칼럼에 이런 얘기를 한 게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건강, , 권력, 명예를 모두 가진 분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더구나 돈, 권력, 명예 이 세가지가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다고. 그렇다면 과연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건강, 의미 혹은 보람 있는 일, 그리고 사랑일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다면 확실히 행복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본문

  

 

행복이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건강에서부터 사랑과 보람 있는 일일 것이라는 발행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버지에 대한 애잔한 기억을 넘어 이번 달에는 달에 대해 애잔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인 권대웅을 만나게 된다.

하늘과 맞닿은 달동네에서 그는 소년을 넘어 청년이 되고 시인으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막막함만이 밀려 들던 그때 그에게 있어 세상에 자신이 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으며 그 때의 시작으로 현재 그는 달을 기반으로 애잔한 빛을 전해주는 달과 같은 시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달 시로 대중과 교감하면서 권 시인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달동네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시절에 진 마음의 빚을 갚을 방법을 생각해냈다. 달에 대한 시에 그림을 곁들여 시화전을 열고, 그림 판매 수익금은 달동네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에게 보내자는 것. 도움이 필요하지만 세상에 손 내밀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삶에 드리운 그늘을 달처럼 밝혀주고 싶었다. 본문

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주고 싶다는 그의 마음처럼이나 시는 물론이거니와 그는 프로젝트를 열어 동네 책방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만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달빛 아래 그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가 이제는 세상을 향해 스스로 달이 되어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따스한 그의 이야기를 넘어 영화 <봄날의 간다>의 촬영지 속의 삼척을 보노라면 유유히 이 곳을 거닐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김이나 작가의 할아버지에 대한 초상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나의 할아버지의 기억을 함께 떠올리기도 하고 엄마의 손에 대한 그리움도 떠올려보기도 한다.

 초반의 걱정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서 훈훈함만이 남아있다. 언제나 편안함을 전해주는 샘터를 통해 7월까지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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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샘터 2015년 5월호 / 월간샘터 편집부


 

 

독서 기간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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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7
오쿠다 히데오 지음, 정숙경 옮김 / 북스토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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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직장에 다니다 보면 느끼게 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직장의 일이 힘든 것보다도 사람 때문에 힘든 경우가 더 자주 발생하며 이 경우, 일보다도 훨씬 더 큰 스트레스로 압박이 가해진다는 사실이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공간인 회사 안에서 일을 넘어선 사람에 대한 강박은 이 안에서의 시간들을 웃음 가득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두려움으로 가득한, 그야말로 벗어나고 싶은 미로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제 겨우 5년이란 시간을 직장인이라는 신분으로 살아왔지만 그 짧은 5년이란 시간 속에서 수 많은 일들을 지나온 듯 하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회사 동료들과의 일들을 생각해보면 회사 안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느냐, 이 문제가 가히 심도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이 자칫 묵직할 수 밖에 없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오쿠다 히데오는 그의 지난 날의 이야기들처럼 가벼우면서도 유쾌하게 <마돈나>에 담아내고 있다. 
 
이 몽상은 좋아하게 된 여자의 퇴직이나 인사이동 혹은 그녀에게 애인이 생긴 순간 끝나고, 다시 원래의 평온한 나날로 돌아가게 된다. 죄 없는 놀이라면 놀이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아내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 하루히코는 연애에 서투른 인간이다. 지나치게 폼을 잡는다. 여자에 대해 순진한 환상을 품고 있다. 물론 사내 소문도 무섭다. 이 나이쯤 되면, 자신이 소심한 인간이란 것쯤은 자각하게 된다. –본문

 결혼 15년차에 들어선 오기노 하루히코 과장의 부서에 새로운 신입 사원이 등장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하루히코의 이상형인 구라타 도모미를 보면서 그는 또 다시 가슴이 설레게 되고 이전에도 몇 번 경험했던 이 현상이 어서 정리되기를 바라면서도 그 설렘에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삶에 활력소가 되어 오늘도 회사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중년의 남자로 이미 아이도 있고 아내도 있는 그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는 모습을 보며 20대의 나였더라면 하루히코를 마냥 비난하며 그러해서는 안 된다, 라고 칼같이 잘라서 말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나로서도 하루히코의 행태에 대해 올바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상상의 나래마저 흉악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그의 조심스런 도발적 망상에 함께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음이 가면 자연스레 행동의 변화도 오는 법. 이미 10여년 넘게 함께 살을 부비고 산 그의 아내 노리코는 남편의 변화를 직감하게 되고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 마음이 사그라들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서 던지는 그녀의 한 마디. “위로라도 받을 생각일랑은 하지도 마. 그렇게는 안 되니까.” 라고 하루히코에게 말을 건네고 그 말을 들으며 하루히코는 도모미의 얼굴을 떠올리지만 다시금 그 생각을 산산이 조각 내고 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이야기를 지금에서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나의 생각이 틀이 넓어 진 것인지 아니면 이전의 도덕적 관념들이 무너지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확실한 것은 흑백의 논리를 넘어 회색의 논리가 더 넓어졌다는 것이다. 아직은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루히코나 노리코의 모습이 모두 그럴 수 있어,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뒷돈의 관습에 대해 말하는 <총무는 마누라>에서부터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춤을 추겠다 선언한 아들처럼 회사 내에서도 정치적 연맹 따위는 관심 없는 아사노의 이야기를 담은 <댄스>를 넘어 개인적으로는 <보스>의 이야기가 가장 와 닿는 것 중 하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와 닿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되고 싶다는 갈망의 의미가 더 큰 것일 수 있을 텐데 외국계의 회사에 근무하다 어느 날 갑자기 신임 부장으로 자리를 맡게 된 하나마 요코를 바라보는 다지마 시게노리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보스>는 내가 꿈꾸는 나의 모습이었기에 요코처럼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계속 품으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시게노리는 초조해졌다. 마누라를 데리고 갈 곳이 아니라고. 호스티스들도 싫어할걸.
 
다카하시를 보니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렇게 넓은 장소도 아니고……” 시게노리는 횡설수설했다
.
 
제기랄. 따라오게 할 것 같아. 남자에게는 남자만의 성역이 있는 거야.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는다
.
 
다지마 씨, 가게 전화번호 가르쳐주세요. 제가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 물어볼게요
.”
 
요코가 은근한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본문

 여자들의 사회 진출이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유리 천장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이 <보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남자들의 세계를 넘어 당당히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요코의 모습은 외경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만의 리그에 입성한 그녀를 온몸으로 대항하고 있는 시게노리의 모습이 점차 요코에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만들어가는 나날처럼 회사의 모습을 꿈꾸며 희망찬 내일을 꿈꾸게 된다.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봤고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담긴 <마돈나>는 역시 유쾌하면서도 거침없는 이야기들로 보는 내내 편안하면서도 그 안의 이야기들에 또 한 번씩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오피스 판타지에 대한 그의 이야기처럼 어찌되었건 유쾌한 회사를 꿈꾸며 내일을 위해 힘을 나게 하는 이 이야기는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쉬이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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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남자 / 하라 고이치저

 

 

 

독서 기간 : 2015.06.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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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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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르's Review

 

 그저 표지 속의 이 남자, 오베를 보는 것으로 지나쳤다면 나는 그를 그저 심술궂은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들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남자의 사연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말이다. 책을 펼치기 전 대체 그를 이토록 짜증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란 궁금증으로 열기 시작했다면 책을 읽는 내내 점점 나는 오베라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애잔함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의 이 심술맞은 표정이 되려 먹먹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불만을 안고 있을 것 같은 그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그의 삶 안에 담아 놓고 있었다. 

 

이미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 그의 심술궂은 얼굴 이전에 그의 삶에는 어떠한 굴곡이 있었는지 <오베였던 남자~>의 이야기로 그의 과거를, <오베라는 남자~> 부제로 현재 그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하나씩 나열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의 현재는 그가 지나온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의 오베는 물론 현재의 오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4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소냐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수 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혔다. 같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베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한 편이라도 읽도록 하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택 단지로 이사하자마자 그ㄷ는 몇 주 동안 내내 저녁마다 헛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장들이 거실에 놓였다.

 "책들을 어디에 보관은 해야 하잖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드라이버 끝으로 엄지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콕콕 찔렀다.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문

 

 오베는 그런 사람이었다. 감언이설을 전하기 보다는 묵묵히 곁에 있는 이의 마음을 헤아려 조용히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냐를 만났을때, 그리고 소냐의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 소냐가 사고를 당했을 때도 오베는 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오베는 소냐를 사랑했고 그런 소냐를 떠나보낸 후 그는 오늘이라도 당장 소냐의 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이웃들은 그의 계획 안에 계속 끼어들어 오늘을 내일로 미루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는 오늘 죽을 심산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는 대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머리에 한 방 날리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부엌을 정리하고 고양이를 내보내고 좋아하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자세를 잡았다. 이 시간이면 고양이가 매번 집 밖에 내보내달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계획을 짰다. 오베가 그 고양이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는 몇 안되는 특징 중 하나는 , 녀석이 다른 사람 집에 똥 싸는 걸 꺼린다는 점이었다. 오베도 그랬다. -본문

 

 사랑하는 아내를 따라 이 생을 떠나려 하는 그의 계획을 보노라면 이 책이 자칫 무겁거나 어둡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안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다보면 오베는 툴툴거리면서도 그가 속한 세계의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현재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트레일러로 자신의 집의 벽을 긁은 이들을 계속해서 도와주는 것은 물론 기차에 뛰어들기 위해 갔던 역에서 누군가를 구하는 것은 물론, 주민자치회의 자리를 빼았었던 루네가 아니타의 품을 강제로 떠나지 않도록 화를 내면서도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모든 것이 소냐를 만났을 때 웃으며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애잔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의 페이지를 읽고 나면 먹먹함이 밀려든다. 오베는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제서라도 그는 조용히 웃고 있지 않을까.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웃음이 마치 멀리서 들리는 느낌이다.

 

 이 책을 덮고나서 나는 오베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 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면, 이 한 평생의 소풍이 행복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오베는 더 이상 심술맞은 남자가 아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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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 사는 남자 / 피터 S. 비글저 

 

 

독서 기간 : 2015.06.07~06.09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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