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1
김호경 지음, 정형수.정지연 극본 / 21세기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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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얼마 전에서야 징비록을 보고서는 이것이었구나, 그 당시의 아련하다 못해 참담했던 기록이 이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계속 읊조렸던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이거니와 지나버린 과거 속의 것으로만 생각했던 임진왜란과 재유정난의 기록을 징비록을 통해 다시 마주하며 그 당시의 현실은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울컥함이 치밀어 오르게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며 권력 싸움만 하고 있던 선조의 안일함에 대한 분노와 그저 제 나라에 살고자 하는 수 많은 백성들이 주검이 되어야만 했던 아득했던 시간을 이제 겨우 책 페이지를 넘기며 알아갔다는 것이 원통하게만 느껴졌다.

호성공신은 임란 때 임금을 모신 공신들 아니더냐? 나는 공신이 아니라 죄인이다. 그리 많은 백성들이 도륙되었는데, 호성공신이라니! 게다가 화상을 그려 후대에 자랑스럽게 남기겠다?”
 
꾸짖음 뒤에 탄식이 새어 나온다
.
 
군자를 운운하는 자들이 부끄러움도 모른단 말인가…… 지금 조정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자들…… 모두가 죄인이야. 그건 주상도 예외가 아닐세
.”
 
선전관과 화상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
 
주상께 전하시게. 류성룡은 이미 죽었으니, 다시는 찾지 마시라.” –본문

이전에 읽었던 징비록이 류성룡이 남긴 원문의 것이었다면 이번에 마주한 징비록은 류성룡이 남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여 그려진 소설로서 현재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대하드라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서 일까. 이전에 읽은 징비록보다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것은 물론 당시의 상황이 실제의 영상으로 그려지는 느낌이라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들수록 변하지 않는 그 날의 기록들을 마주해야 하는 지금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너무도 평온해서였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안일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권력이라는 틀 안에서 끝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넘어 오랫동안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왜의 변화를 감지하는 기척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찌 황윤길과 김성일의 눈으로 대변할 수 있었을까. 한반도를 넘어 밀려드는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는 것은 모른 채 이 안에서만 아웅다웅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려 했던 이들 모두의 눈과 귀는 이미 덮여 실제의 것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살상으로 수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이 되어 이 나라를 적시고 있다.  

 정발은 가까스로 일어났으나 어느새 다가온 왜적이 칼을 힘껏 치켜들고 그대로 정발의 심장에 꽂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정발은 부산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불길과 함성이 서서히 잦아드는 성에 시체가 가득했다. 목이 없는 몸뚱이, 팔이 없는 시체, 아이를 안고 처참하게 죽은 어머니.
 
이것이 이 나라의 운명이로구나
…….” 
 
눈을 부릅뜬 채 정발은 숨을 거두었다. –본문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밀려드는 조총 부대의 침입 속에 죽어가는 수 많은 이들과 성을 버리고 천거를 하던 왕과 그 왕을 보필하며 이 나라를 지키려는 이들의 모습 등 수 많은 이들의 바람이 한 대 뒤엉켜 처참하게 전해지고 있다. 조선 땅에 백성들이 발 디딜 곳은 점차 사라지고 왜적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을 때에도 이순신의 천거에 대해 평범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나라를 지키기엔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오가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씁쓸하기 그지 없을 뿐이다. 명분을 중시했던 그들의 입이 떠드는 사이 계속해서 조선은 점차 왜적으로 뒤덮이고 있다.

 겉으로는 다들 나라를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막상 위급이 닥치면 왕이야 어찌 되든 자기 살길부터 찾는 것들이오! 내가 백성들을 버렸다고? 대궐을 불태운 백성들을 보시오! 언제고 다시 돌아가 왜적들과 싸울 과인을 생각했다면 과연 그럴 수 있겠소? 내게 백성을 버렸다는 오명을 씌우고는, 이때다 싶어 왕실 재물을 훔쳐 달아난 도적들에 불과하오. 백성! 백성! 백성! 그 백성이 도적이 되어 과인을 버렸단 말이오!”
 
류성룡은 기가 막혀 눈을 감았다. 분명한 사실 앞에서 입이 열개라도 지금 당장은 벡성들을 비호할 핑계가 하나도 없었다. –본문

부산에서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입은 너무도 빠르게, 그 어떠한 막힘도 없이 한반도를 한성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 안에 죽어나간 수 많은 백성들의 죽음보다도 자신의 안위가 더 우선이고 긴박했던 선조는 이 나라가 세워진 근간인 도성을 버리고서는 백성들을 원망하며 그렇게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계속 이어지는 패전 소식은 실낱같던 희망을 점점 앗아가고 있으며 그 와중에 울린 해유령에서의 승전보 뒤로하고 신각은 아련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편의 책장을 덮으며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지난 역사라는 것에서 그저 먹먹함만이 밀려든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전혀 통하지 않은 과거 속의 그 수 많은 날들 안에서 조금만 달라졌다면 이 모든 기록들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만이 계속 된다. 1편을 넘어 2, 3편의 이야기는 더욱 아득한 것들이겠지만 계속 이어 읽어 나가보려 한다. 그것이 류성룡의 바람대로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를 헤쳐나갈 수 있는 주춧돌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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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 김연수저

 

   

 

독서 기간 : 2015.06.07~06.09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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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식탁 - 먹고 마시고 사는 법에 대한 음식철학
줄리언 바지니 지음, 이용재 옮김 / 이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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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언제부터인가 TV를 켜면 음식에 관한 프로그램을 쉬이 만나볼 수 있게 된다. 음식을 맛보는 프로그램에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태 등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은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시키고 어느 새 멍하니 몰입해서 화면 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노라면, 이른바 푸드 포르노라고 까지 말하는 현상 속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너무도 쉬이 알 수 있다.

 인간이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 , 주의 食은 어느 새 기본적인 의미를 넘어서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들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의 욕망이 담긴 요소로 변모되고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우리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이 아닌 현재의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을 즐기기 위한 食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 <철학이 있는 식탁>에서는 오롯이 아름다움과 맛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음식에 대해서 그 안에 담긴 수 많은 의미들과 물음을 던져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음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자연, 동물은 물론 우리 인간끼리 관계,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통합 또한 감안해야 한다. 더군다나 철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뜬구름을 잡기 십상이지만, 음식은 우리의 현실 감각을 지켜준다. 먹고 마셔야 하는 필요보다 더 기본적인 건 없으니, 음식과 철학을 한데 아우르더라도 철학을 하더라도 사람이 되어라 라는 데이비드 흄의 충고를 잊을 위험이 없다. –본문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는 것은 근래에 들어서나 고민했던 것들이 아닐까. 이전에는 그저 먹고 배를 불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해서 돌아보며 의문을 던지고 이전에는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일 텐데 그저 저렴한 가격에 식 재료를 구입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요즘은 과연 이렇게 저렴한 식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과연 이 모든 것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게 된 것인가, 에 대한 고민에도 빠져보게 되며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의 것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기농 제품이라고 해서 우리는 그것만은 믿고서 먹을 수 있는 것일까? 치즈를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해주는 이야기를 보노라면 채식주의자를 위한 치즈라고 한다손 치더라고 이 안에는 동물 응유효소의 일부분만 제외된 것으로 실상 동물 자체에 대한 복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채식주의 협회 인증을 받은 제품이라던가 유기농 제품이라고 해서 기존의 제품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기 보다는 아주 일부분의 것들만 달라진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것이 마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듯이 소비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그다지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 노름을 해, 스스로 편하고자 죽여도 되는 불경한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을 가르는 선을 긋는 방식으로 도살을 완전히 반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심지어는 완전 채식가를 포함한 모두가 그러한 선을 긋는다. 하지만 제정신이라면 박테이라나 바이러스를 죽이는 데는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거의 모든 인류는 병균을 옮기는 이를 기꺼이 죽일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이가 필요하다면 해충도 죽일 텐데, 대부분은 그저 덫을 놓는 정도를 선호할 것이다. –본문

 특히 <배려 있는 도살>이란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배려있는 도살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계속된 물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어떠한 생명을 거둬들이는 것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해충박멸과 식재료를 위해 거둬들이는 것의 차이는 무엇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도살을 하는데 있어서 동물이 느끼게 되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바라보게 한다.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살아야 하는 아프리카 초원 위를 누비는 얼룩말이 행복한 것인지, 사육장 안에서 살고 있는, 너무도 편안하게 살고 있는 얼룩말이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그들의 비교를 객관적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농장에서 태어난 동물의 삶과 야생의 파란만장함 속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무엇이 더 나은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을 고민에 빠지게 된다.

 돼지 도살을 전문으로 하는 공장의 풍경을 보며 동물을 고기로 만드는 현장이 실은 끔찍하기 그지 없는 순간이지만 마치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처럼 사그라드는 것은 인간의 배려가 동물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의 배려 때문일 것이다.

 도살에 대한 순간을 넘어 한 생명의 죽음은 고스란히 인간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레기로 변모되어 가는 것을 보며 씁쓸함만이 전해지게 된다. 그저 테이블 위의 한 접시의 음식을 넘어 그 음식이 현재의 자리에 오기까지, 그리고 다시 사라지기까지의 그 과정 속의 하나하나를 바라보면 과연 그 동안 음식이라는 것을 그저 먹는 행위로만 바라보았던 모습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읽는 내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고민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면서 과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내 식탁 위에 오른 것들은 오롯이 나의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믿었던 나에게 있어서 과연 그것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되뇌게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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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 기쁨 / 애덤 고프닉저


 

 

독서 기간 : 2015.06.05~06.08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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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의 숲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8
안보윤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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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아저씨도 내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ㅡ 너는 그냥, 서툰 거겠지. 어린애들의 특권이다. 멍청하고 성급한 건 어린애니까 가끔은 그런 식의 엉뚱하고 어리석은 결론을 내기도 하는 거다. 괜찮겠지. 그 정도는. 난 어설프 서툰 것드리 싫지 않다. 그런 건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거든. (중략
)
ㅡ 난 멍청하지 않아요
.
ㅡ 그래, 어리지. 그것뿐이다. 그러니 돌아가. 돌아가서 제대로 정어리를 먹는 거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은 뒤에 비리거나 느끼하거나 토할 것 같단 생각이 들면
.
ㅡ 들면? 그땐 어떻게 해요
?
ㅡ 뱉어. 뱉고 입을 행궈. 삶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거거든. 정어리를 먹고, 그게 맛이 없으면 뱉고, 그 다음엔 고등어나 고래를 먹는 거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지. –본문

마지막 결론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었나 보다. 아직 괜찮다,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옥죄일 필요는 없다, 라는 무던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서는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아직 정어리의 맛도 모르면서 이 모든 것이 버겁다고 던져버리고 싶은 나에게 정어리를 먼저 먹어보고서 그게 아니면 다른 것을 찾아 나서면 된다고 말하는, 올빼미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른바 알마의 숲이라 불리는 기묘한 숲 안에서 노루와 알마, 삼촌과 올빼미의 이야기는 현실의 모습을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그들만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눈과는 다른 형태의 눈과 안대를 하고 다니는 동물들과 눈이 내리면 다른 세계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사람들과 주인에게 버림 받은 것인지 모를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는 이 숲은 상처 받은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며 그렇기에 이 안에 있는 이들은 어딘가 상처를 받아 아픔을 안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만을 드러내며 누군가로부터 연민의 눈길을 바라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 그저 그 공간 안에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틀렸어, 노루. 나는 이 위태로운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 언제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오히려 생의 순간순간을 더욱 사랑스럽게 치장해주는 거야.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생의 심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드는 거라고. 내가 가진 모순은 견디는 삶에 대한 게 아니야. 그렇게 많은 걸 포기하고 선택한 삶인데도 마음껏 정열적으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게 억울한 거지. 감정과잉은 독이니까, 적당히 시큰둥하게 살수밖에 없다고 할까. -본문

요새 말로 하면 시크하며 잔망스럽기 그지 없는 알마는 소년을 노루라고 부른다. 소년이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 했던 바람과는 달리 노루 엉덩이 아래 깔려있는 채로 발견된 이후로 소년을 노루라 부르는 알마는 늘 소년의 모든 것에 촌스럽긴을 외치며 핀잔을 주고 있지만 알마 역시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여느 사람들처럼 드러낼 수도 없다. 그녀가 감정을 드리우는 순간,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로 가득해 질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심장은 그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멈춰버릴 테니 말이다. 살기 위해서 늘 감정 따위 없이 냉혈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알마를 보며 안쓰럽다, 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알마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

ㅡ 무엇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아요?
ㅡ 후회하지 않는 선택 같은 게 있겠냐.(중략
)
ㅡ 네가 뭘 선택하든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어. 발 빠른 놈이거든.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 –본문

늘 레고만 소년에게 쥐어주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던 남자와 청소년 심리 상담사로서 사회적 명성을 쌓아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여자에게 노루가 다시 돌아갔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삼촌과 올빼미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그는 틈을 통해서 다시 그가 있던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이 알마의 숲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가에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 자꾸 일게 된다. 그리하여 나도 그 알마의 숲에 잠시 들어가 멈춰버린 세계에서 나를 다독이고 오고픈 마음이 든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그 곳에서 나의 마음만은 회복될 수 있을 이 미지의 장소를 한동안 꽤나 그리워할 것 같다. 그리고 올빼미의 마지막 이야기는 버겁기만 한 오늘을 견디게 해주는 이야기로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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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집 / 최상희

독서 기간 : 2015.06.0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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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 - 사춘기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불온서적들
이재익.김훈종.이승훈 지음 / 시공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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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빨간 색은 경고나 주의를 요망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통용되는 색으로 사용되고 있다. 빨간 글씨로 써 있는 문구는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를 색을 넘어 압박감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때론 금기 시 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어찌되었건 빨간 색으로 적힌 글자는 그 글자 이상의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 <빨간 책>이라는 제목을 보며 대체 이 안에 어떠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빨간 책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라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춘기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 몸과 머리를 흥분시킨 책들을 담아 놓았다는 문구를 보며 판도라의 상자를 마주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판도라의 상자처럼 마지막에서야 희망이라는 한 줄기 빛을 마주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종합 선물 세트를 열어보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은 후일담이지만 말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떡하니 <세계명작소설집>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데 <황홀한 사춘기>는 청계천 가판대에 숨어 있어야 하는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부모님께서 생일선물로 사 주시고 <황홀한 사춘기>는 보다 걸리면 엄마한테 테니스라켓으로 맞아야 하는가?
나는 수차례에 걸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으면서 <황홀한 사춘기>와의 차이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문학 공부를 가장 열심히 했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본문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어떻게 나뉘는지에 대해 고심했던 저자의 지난날의 회고를 바라보며 문학 작품을 읽고 나서도 대체 이 내용이 왜 세계문학전집에 있으며 고전이라 불리는 것일까, 라는 고민을 했던 나의 모습과도 오버랩 되어 전해진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그저 혼자만의 고민과 결국 자괴감에 빠져들었다는 것이고 그는 문학에 대해 탐구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의 고민들을 읽어 내려 가다 보면 야하지만 야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그의 목소리에 이 책이 읽어보고 싶어진다.

그즈음에서야 나는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이해했다. 해결되지 않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자동차를 만들고 서양 철학의 꽃을 피운 독일인들이 어떻게 그토록 잔혹한 전쟁을 벌였는지, 내가 직접 경험한 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질서정연하고 친절한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태평양전쟁을 감행하고 수 많은 마루타들에게 생체 실험을 했는지 수수께끼가 풀렸다. 
내가 찾은 범인은 이데올로기였다. 이데올로기에 고취된자들이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합의하에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사건의 저모를 정리했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나는 이데올로기가 마치 바이러스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본문

언제인지 기억도 아득한 예전에 한 친구가 영화 <마루타>를 보고 나서 그 안의 장면을 들려줬었는데 그 끔찍한 이야기가 진짜라는 사실에 기함을 하곤 했다. 도무지 인간이 한 짓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생체 실험이 자행된 그 역사의 기록이, 알아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외면하고서는 친구의 이야기를 잘라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 그만 말해, 듣고 싶지 않아, 라며 강의실을 나왔던 그날의 기억 위로 이 책을 통해 두 번째 <마루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여전히 끔찍한,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배신과 두려움만이 떠오르던 나에게 있어서 그는 나지막이 말하고 있다. 이 안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가진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것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파괴할 수도 있으나 또 다른 면으로는 이데올로기의 확립으로 그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양면의 칼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이념의 장을 어떻게 펼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이 <마루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빨간책>이라는 이름을 하고서는 실제 발췌한 내용은 빨간 색 글자로 담겨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그토록 빨강의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그러니까 금서나 악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들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긴 양서를 전해주고 있기에 이 안의 이야기들 역시 한번씩 읽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들에게 있는 빨간책의 목록에 무엇을 또 추가하면 좋을지, 나만의 빨간책 리스트를 모아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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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이동진, 김중혁저


  

 

독서 기간 : 2015.05.3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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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간 - 인문학자 한귀은이 들여다본 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와 그림
한귀은 지음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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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어디서인지, 누구를 통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엄마는 딸을 낳으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너도 나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구나.’ 라는 연민과 회한의 의미가 담긴 눈물을 떨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엄마도 그러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 이 질문을 해본 적은 없는 듯 하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며 세상에 더 깊이 들어오게 되면서 보이는 것들 것 바라보면 여자로서 산다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몸서리 치게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전보다 여자가 살기에 좋아졌다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고단한 그녀들의 삶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한 30대의 나에게는 버겁기만 한 또 다른 그녀들의 삶은 어떠할지, 그것을 바라보고자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연인의 지고 지순한 밀어는 남이 듣기에 따라 코미디가 되기도 한다. (중략)
그런데 우리는 이 코미디를 사랑한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며, 그 말의 기운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헤어졌으며 상대를 죽도록 미워했으며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웃으면서(혹은 비웃으면서)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이 코미디는 그 무엇보다 슬픈 장면으로 탈바꿈한다. 우리는 그런 순수한 연인을 보며 왈칵 눈물을 쏟게 되는 것이다
.
시간이 그렇게 만든다
.
시간은 많은 것을 가르친다. 시간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이 욕망의 투사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결혼이란, 그 욕망의 투사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에 진입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본문

이미 <엄마와 집짓기>를 통해 저자의 이야기를 만나본 적이 있던 나로서는 서문에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 안의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그 순간의 문제는 어느 새 시간이 지나버리면 그저 과거로 자리하게 되고 그렇게 매 순간 생경한 것들을 마주하고 또 이겨나가야 하며 그 안에는 사랑도 있고 우정도 있고 배신도 있고 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결국은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배워가며 나를 찾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배워가게 되는 것이다.

이게 겨우 30대 초반의 문턱을 지나온 나로서는 나와 비슷한 이들의 고민은 무엇일지, 그들은 어떠한 이야기 틀 안에서 아등바등하고 있을지, 그리고 내가 지나왔고 앞으로 지나갈 삶의 모습 안에서 드리울 수도 있는 또 다른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열어보게 된다. 그저 흘러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오롯한 삶이 담겨 있다는 생각에 페이지를 넘기는 것마저도 경건하게 넘기게 된다.

그러니까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엄마 스스로가 성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숙씨가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스스로를 성장시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성장으 힘으로 진정한 사랑을 만날 것이다
.
진숙씨의 삶은 유예된 모라토리움이 아니다. 아이와의 진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본문

매일 쏟아지는 결혼을 위한 커플들에 대한 소식만큼이나 이제는 너무 익숙하기까지 한 이혼과 별거의 문제 앞에 서 있는 진숙의 이야기를 보며 그녀의 삶의 이유가 아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면 무척이나 서글펐을 것이다. 그러나 진숙씨에게 아이는 그녀가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성장시키는 근원이 되는 것으로 아이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닌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가 더 강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를 넘어 여자로서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저 되는대로 자신의 삶을 던져버리는 것이 아닌 다시 다잡아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찬란하기까지 느껴지는 것은 지금 그녀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된 일일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이야기 보다는 10대와 60대에 서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더 살갑게 다가왔는데 10대의 소녀 모습은 30대가 넘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엄마의 마음을 10대이지만 조금씩 알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감복해서였을 테고 아직은 아득하기만 한 60대의 모습 안에서도 내가 느끼는 것들과 다르지 않은, 그러니까 60대라고 해서 감정 따윈 없는 그저 늙은 한 인간이 아닌 그 안에는 나와 다르지 않는 여자가 있다는 것에서 숫자를 넘어 교감을 하게 된다.

60이 넘어서도 저런 장면에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아픈 나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랑에 마음 아파야 하는가. 사랑의 장면을 보며 자기 연민을 느껴야 하는가. 이제 여성호르몬도 거의 바닥이 났을 텐데, 내 몸의 무슨 작용으로 나는 지금껏 울컥하는가. –본문

이 안의 모든 것이 나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나와 다르다, 라고 만도 할 수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이기에 꽤나 집중해서 읽어내려 간 듯 하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안의 내가 담겨 있는 그녀들의 삶이 늘 밝을 수만은 없겠지만 나름의 소소한 행복이 담겨 오늘을 이끌어 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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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녀 / 케이티 워드저

독서 기간 : 2015.06.02~06.03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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