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 호라티우스

 

 * * *

 

 

 

그래, 그래도 할 수 없지. 늙는다는 것의 보상은, 하고 피터 월시는 모자를 손에 들고 리전트 파크를 나오며 생각했다. 그건 단지 이런 거야. 정열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하지만, 그래도 ─ 마침내! ─ 삶에 최고의 맛을 더해 주는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지. 지난날의 경험을 손안에 넣고 천천히 돌려가며 빛에 비추어 보는 힘을.(106∼107쪽)

 

 

 * * *

 

 

고백하기 싫은 일이지만(그는 모자를 다시 썼다), 이렇게 쉰세 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사람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인생 그 자체, 그 모든 순간, 지금 바로 이 순간, 햇볕 속에서 리전트 파크에 있는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과분할 지경이었다. 전 생애도 그 맛을 온전히 끌어내기에는, 이제 그럴 힘을 얻고 보면, 마지막 한 방울의 즐거움, 마지막 한마디의 의미까지 다 끌어내기에는 너무 짧았다. 의미도 즐거움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더 순수하고 개인적인 데가 적었다. 다시는 클라리사 때문에 괴로워했던 만큼 괴로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107쪽)

 

 

 * * *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 있을 수나 있는 일일까? 그 옛날의 비참함과 고통과 특별한 열정을 잊지 못하면서도? 하기야 전혀 다른 일이기는 했다 ─ 훨씬 더 즐거운 일이지 ─ 물론 이번에는 여자 편에서도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바로 그 때문에 배가 출항했을 때 그처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었다. 그는 단지 혼자 있고 싶었고, 선실에서 그녀의 사소한 배려들 ─ 엽궐련이며 노트, 여행용 담요 같은 것들 ─ 을 발견하고는 짜증이 났었다. 누구라도 본심으로는 다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오십이 넘고 보면 더는 사람들을 원치 않게 된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하기도 귀찮아진다. 오십대의 남자 대부분이 본심으로는 다 그렇게 말하리라고 피터 월시는 생각했다.(107쪽)

 

 

 * * *

 

 

세월의 저편으로부터 ─ 포장도로가 풀밭이었던, 늪지였던 때로부터, 매머드와 엄니의 시대를 거쳐, 고요한 일출의 시대를 거쳐 ─ 이 풍상에 찌든 여인은 ─ 왜냐하면 치마를 입었으니까 ─ 오른손을 내밀고 왼손은 옆구리에 움켜쥔 채 서서 사랑의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백만 년을 이어 온 사랑, 하고 그녀는 노래했다. 승리하고야 마는 사랑! 백만 년 전에, 지금은 가고 없는 연인과 오월의 들판을 거닐었다네, 하고 그녀는 읊조렸다. 여름날처럼 길고 긴 세월이 지나 ─ 붉은 과꽃만이 타오르던 여름날, 하고 그녀는 추억했다 ─ 그는 가버리고, 죽음의 거대한 낫이 저 크고 높은 산들을 휩쓸어, 마침내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머리를 땅에 누일 때면, 그 머리가 차디찬 잿더미로 변할 때면, 신들이여 부디 그녀 곁에 자줏빛 히스 다발을 놓아 주시기를. 석양의 마지막 햇살이 어루만지는, 그 높다란 무덤 위에.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행렬도 끝이 나리니.(109∼110쪽)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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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9-01-22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육십이 넘고 보면. . . 어떤 기분이 들까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기도 귀찮아지지 않을까요?

oren 2019-01-22 11:27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몸이 늙는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따라 늙으니 더 서러울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9-01-22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자는 나이 사십을 ‘불혹(不惑)‘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는데, 저는 나이 오십에도 ‘불혹‘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다르게 생각하면, 이렇게 자신을 반성하며 지내면, 그나마 늙음을 깨닫지 못하는 장점이 있기는 할 것 같네요..^^:)

oren 2019-01-22 12:27   좋아요 1 | URL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하는 말들은 어쩌면 성인군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는 걸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실감하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2019-01-22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2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01-22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천명을 오십이라고 했는데 백세시대 요즘 50은 청춘이라고 할수 있지요.다만 사회적으로 50은 반명퇴 상태에 해당되는 분들이 대다수라 남은 기간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재취업 자영업등등) 모든이들의 고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ㅜ.ㅜ

oren 2019-01-22 18:52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네요.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이순이니 하는 ‘나이라는 숫자 앞에 붙이는 고상한 수식어들‘조차 결국 민생고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요. 이런 댓글을 쓰다 보니 문득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언급했다는 ‘고정된 수입‘의 무게를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 * *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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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도스토예프스키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젊어서부터 삶이 송두리째 요동치는 고통들을 겪었다. 16세때 인자한 어머니를 잃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까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형 하나밖에 없었고, 이 무렵부터 간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 평생 동안 그 질병에 시달렸다. 스물여덟이던 1849년에는 몽상적인 과격파 청년들의 비밀단체에 가입했다가 긴급 체포되었고,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는 총살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구제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4년 동안 혹독한 강제노역을 겪은 뒤 출옥하고 나서도 시베리아 전선에 주둔 중인 군대에 배치되어 4년을 더 복무했다. 그가 예전의 신분이었던 세습 귀족으로 되돌아온 건 체포된 뒤 8년이 지난 1857년, 36세때였다.

 

그는 마침내 1859년에 뻬쩨르부르그로 되돌아온다. 그때부터 그는『가난한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등을 잇따라 발표하고, 1866년 1월부터 『죄와 벌』을 연재하기 시작해 그해 12월에 완결한다. 『죄와 벌』을 집필하는 동안에도 늘 곤궁했던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악덕 출판업자와 소설 출판 계약을 맺는데, 이때 출판사와 약속한 소설을 제때 끝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속기사를 고용한다. 그 덕분에 그는 『죄와 벌』을 연재하는 와중에도 29일 만에 거뜬히 『노름꾼』을 탈고할 수 있었고, 그때 한 달 가까이 속기를 맡았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곧바로 결혼한다. 45세이던 그해야말로 작가에게는 여러모로 삶에 이정표를 세운 해였던 셈이다.

 

『죄와 벌』 또한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살인을 다룬 문학작품 가운데 이토록 유명하고도 널리 알려진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작품에 필적할 만한 작품으로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부친 살해를 다룬 저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제아무리 살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 주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오이디푸스의 운명적인 비극은 다른 두 작품과는 그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 핵심 주제가 야망으로 표현되는 권력욕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일견 『죄와 벌』을 닮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살해 동기 속에도 '나폴레옹이 되려는 권력욕'이 은연중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맥베스와 달리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동기는 그보다 훨씬 더 순수하면서도 어리석을 만큼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맥베스는 권력을 뺏기 위해 아무런 죄가 없던 덩컨 왕을 죽이고, 더 나아가 맥더프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살해하지만, 결국에는 '살인'을 저지른 직후부터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가 자신마저 맥더프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오롯이 파멸적인 비극이다. 그러나 아무런 죄가 없는 노파를 죽인 뒤 돈을 훔쳐 자신의 암울한 현실을 일거에 타개하려던 청년 라스꼴리니꼬프는 맥베스와는 조금 다르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부터 휴학생 신분에서 졸지에 끔찍한 살인죄를 저지른 추악한 범죄자로 전락한 주인공은 거기서 단 한발짝도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극심한 불안과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면서 열병에 빠진다. 계획했던 범행은 성공했지만 정작 범행의 목적인 힘을 얻는 데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다. 그는 범행 이후 끝모를 번민과 고뇌와 참담함을 두루 맛본 끝에 간신히 절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자백과 재판을 거쳐 시베리아의 강제노역 작업장에 당도하고 나서야 희미하게나마 갱생을 엿보기 시작한다.

 

『죄와 벌』에는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직접 겪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생한 삶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까닭없이 두 여인을 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자 자신의 나폴레옹적 비전을 최초로 시도한 때가 스물세 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작가가 러시아 군대를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로 들어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집필하기 시작한 때도 스물세 살 되던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은 가난 때문에 학업조차 잇지 못하는 고학생이었지만 두뇌가 명석한 데다가 장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지녔으면서도 순수하고도 착한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을 옥죄는 답답하고 궁핍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오랜 번민 끝에 전당포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지만, 범행 이후에도 좀처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크게 뉘우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 정도의 난관 조차도 제대로 뛰어넘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 내몰려 안절부절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이토록 반항적인 기질이야말로 온갖 간난신고에도 아랑곳없이 위대한 작품을 쓰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게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가 허구헌 날 골방에 틀어박혀 온갖 공상과 자신만의 이념에 몰두하는 모습 또한 궁핍한 여건 속에서도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려 지내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본질적으로는 닮은 게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는 아무런 죄가 없는 노파를 살해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 추악한 범죄라고 여기지만, 인류의 숱한 영웅들이 저지른 유혈 사태와 범죄나 다름없는 대규모 살육 전쟁에 비하면 도리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치부한다. 이런 대목들이야말로 '인류 문명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면' 쓸모없는 존재들은 얼마쯤 쓸어내 버리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일까 싶은 작가의 '테러리스트적 면모'가 다분히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록 몇 푼의 돈을 위해 노파를 살해하지만, <범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직접 써서 잡지에 기고할 정도로 나름대로는 아주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된 확신범이었다. 그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기 위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한 자리에서 예심 판사인 뽀르피리와 나눈 대화 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저는 다만 <비범한> 사람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 즉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중략) 더 나아가서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논문에서 모든 사람들 …… 예를 들면, 아주 고대로부터 시작해서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입법자들과 제정자들은 새로운 법률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선조로부터 전해져서 사회에서 성스러운 추앙을 받은 낡은 법률을 파괴했고, 만약 유혈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피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만을 보더라도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범죄자들이었다는 생각을 발전시킨 거지요. 이런 인류의 은인과 건설자들의 대부분이 특히 무서운 살인자들이었다는 점은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상궤를 벗어난 사람, 즉 조금이라도 뭔가 새로운 것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천성상 물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히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겁니다.(377∼378쪽)

 

 

그는 자신을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지목한 예심 판사 뽀르피리와 치열한 두뇌 싸움을 펼친다. 자신이 결코 범죄자일 수 없다는 탄탄한 방어 논리로 무장한 채 상대방의 날카로운 공격을 매번 무력화하고, 급소를 찔리는 와중에도 교묘한 반격의 틈을 찾아낸다. 그러나 범인이 반격하면 할수록 뽀르피리의 합리적인 의심은 더욱 굳건한 확신으로 변해갈 뿐이다. 이토록 급진적인 사상으로 꽉 찬 용모준수한 열혈 청년을 그 누가 한번쯤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심 판사 앞에서 그가 격정적으로 토해낸 열변을 잠깐만 더 들어보자.

 

재료가 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거쳐서, 이제까지는 신비로 남아 있는 일종의 과정, 종족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결국 이 세상에 수천 명 중 한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독립적인 사람을 태어나게 하려고 애쓰기 위해,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더 독립적인 성품의 사람들은 어쩌면 수만 명에 한 사람 정도밖에 태어나지 않을지 모르지요. 그리고 그보다 더 독립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수십만 명에 한 명꼴로 태어날 것이고, 독창적인 사람들은 수백만 명의 한 명이고, 위대한 천재, 인류의 완성자는 어쩌면 지구상에서 수억의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 간 이후에야 나올지 모르는 일이지요.(382쪽)

 

 

이 대목에서 분출된 라스꼴리니꼬프의 과격한 주장은 마치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책에서 그대로 옮겨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닮아 있어서 놀랍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칸트와 헤겔까지도 즐겨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였으니, 그가 다윈의 진화론이나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몰랐을 리 없다. 그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더 젊었던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그토록 좋아했던 것도 '뿌리깊은 교감'의 산물인 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질은 어느 평론가의 표현 대로 '그리스도와 사탄이 뒤엉켜 서로 싸우는 모순의 경기장' 같았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 역시 작가와 닮은 데가 적지 않다. 불쌍한 이웃을 보면 자신이 가진 마지막 몇 푼까지도 아낌없이 건네주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순수한 모습부터 작가를 닮았다. 위대하고 고매한 사상이나 뜨거운 인류애를 갈구하고 고민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좁고 답답하고 벽지마저 누렇게 변색된 초라한 구석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인 라스꼴리나꼬프의 모습 속엔 휴머니스트이면서도 과격한 테러리스트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 작가의 모습이 언제나 겹쳐 떠오른다.

 

『죄와 벌』은 주인공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 때문에 빚어지는 인간 내면의 어둡고 복잡한 구석들을 극한까지 파고 들어갈 정도로 몹시 심각하고도 무거운 작품이지만, 그 자체로는 아주 스릴 넘치는 탐정 소설이자 범죄 심리 소설의 형식을 겸비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공부까지 그만둘 정도로 극단에 내몰린 청년이 한 달 동안의 심각한 번민 끝에 살인을 저지르지만, 막상 끔찍한 범행 이후의 모든 상황들은 (훔친 지갑은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과 공포의 연속일 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를 통해 움켜 쥘 얼마간의 돈만 있으면 눈앞에 닥친 온갖 현실적 장애들은 단번에 모두 걷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범행 이후의 온갖 위험천만하고 곤란한 처지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범행을 위해 그가 자신의 방을 빠져 나오면서 살인 도구로 미리 점찍어 두었던 도끼를 확보할 때부터 어그러진다.

 

소설 속 이야기는 7월 초의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해질 무렵, 뻬쩨르부르그의 골목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벌』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음울한 묘사가 이내 뒤따른다.

 

거리는 지독하게 무더웠다. 게다가 후텁지근한 공기, 혼잡, 여기저기에 놓인 석회석, 목재와 벽돌, 먼지, 근교에 별장을 가지지 못한 뻬쩨르부르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독특한 여름의 악취, 이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청년의 신경을 한꺼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이 지역에 특히 많은 선술집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와 대낮인데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의 모습을 더욱 불쾌하고 음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순간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의 얼굴에는 침을 수 없다는 듯 혐오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그는 멋진 검은 눈동자에 짙은 아맛빛 머리털을 가진 미남으로, 약간 큰 키에 균형이 잘 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대목 하나만 읽더라도 독자들은 이야기의 시공간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간다. 주인공이 처해 있는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빼닮은 듯한 공간 배경은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정신 세계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 뚜렷이 대비되는, 꽤나 매력적이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얼마나 멋진가. 이 청년의 외관이야말로 주인공의 정신 세계가 결코 평범하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은 어느 하나 산뜻하거나 흡족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의 옷은 차라리 넝마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센냐야 광장에서 가까운, 창녀촌들이 운집해 있는 뻬쩨르부르그 한복판에 위치한 이 거리와 골목은 수공업자들과 공장 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으므로, 색다른 모습을 한 사람과 만난다고 해서 놀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 그런 세계다.

 

작가는 이야기를 곧장 '사건 현장'으로 빠르게 이끈다. 소설이 시작되자 말자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일>을 위한 '최종 리허설'을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간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주저하는 인간형은 결코 아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 모드로 일변한다. 이야기의 템포 또한 더욱 빨라진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떠올릴 수 있는 음악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모짜르트의 교향곡 25번 G단조의 1악장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도입부를 극적으로 팽팽하게 잡아 당기면서, 어딘지 모르게 '천재의 열정과 고뇌와 슬픈 운명'까지도 예감하게 만드는 바로 그 오묘한 음악 말이다.

 

이렇게 해서 저 유명한 <뻬쩨르부르그의 고리대금업자, 14등 문관의 과부 노파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따 이바노브나 연쇄 도끼 살인 사건>은 뜻밖에도(!) 아주 신속하게 실행된다. 그 어떤 물증이나 목격자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것도 소설이 시작된지 겨우 사흘째 되던 날 저녁에 말이다. 여기까지가 제6부까지 길게 이어지는 『죄와 벌』의 제1부 내용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정한 이야기는 정작 그 다음부터라고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닥치는 '인간으로서 맛보기 싫은 거의 모든 나쁜 감정들'은 그때부터 바야흐로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치고 나서 소설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2부에서 제6부에 이르기까지 길게 펼쳐지는 '인간 심리의 드라마'는 마치 한 편의 '고뇌하는 인간이 맛보는 지옥에서의 향연'에 내내 동석해 있는 기분이 든다. 기껏(?) 서막에 불과했던 제1부에 비해 그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바닥을 모를 정도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작가는 지금부터야말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 여행이 제대로 시작될 터이니 너무 어둡고 컴컴하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벨트를 단단히 매라는 식의 친절을 베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야기의 템포는 단 한 번도 안단테로 바뀔 겨를을 허용치 않는다. 주인공의 운명은 벌써부터 거센 폭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끔찍한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온 세상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을 것처럼 사납게 덤벼든다. 극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기절하고 만다. 사흘 동안의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끝없는 고독감과 음울한 소외감에 몸부림친다.

 

 

는 이 순간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위로 도려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169쪽)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삶을 향한 무서운 에너지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악마처럼 교활하고 대범하게 '투쟁'을 선택한다.

 

 

내겐 인생이 있다! …… 그 늙은 할망구와 함께 나도 죽은 것은 아니다! 천당에서 고이 잠드시길, 그걸로 된 거다. 노파도 이제 평안히 쉬셔야지! 이성과 빛의 왕국이 도래했다 ……. 의지와 힘의 왕국이 온 거야 ……. 어디 두고 보자! 한번 겨뤄 보자고!(274쪽)

 

 

제3부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내면에 깊이 감춰져 있던 다른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절친인 라주미힌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둡고 음울하고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때로는 냉정하고 비인간적이다 싶을 정도로 무정한' 친구이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데다가, 그게 또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친구였다.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지닌 생각의 위험성을 간파한다.

 

 

네가 한 모든 말 중에서 정말로 <독창적인 것>은, 내 생각에는 정말 무서운 일이지만, 어쨌거나 네가 <양심상> 유혈을 허용한다는 점이야.(383쪽)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노파를 살해하고 난 직후부터 극도의 혼란과 공포와 좌절감을 맛보고 나서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강인한 힘'에 대해 스스로 의심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서운 꿈으로도 나타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노파의 정수리를 도끼로 힘껏 내리치지만, 고개를 숙인 노파는 <온 힘을 다해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자제하며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소리를 죽여 웃기> 시작한다. '노파도 이제 평안히 쉬셔야지!' 라고 말하던 호기로운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제4부에 이르러 라스꼴리니꼬프의 투쟁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는 여전히 예심판사인 뽀르피리로부터 '합리적인 의심'을 받는 유력한 살해 용의자에 머물러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나 목격자가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여전히 '범행'을 부인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여전히 승리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건 승리가 아니라 차라리 패배에 가까웠다. 그의 눈앞에 슬며시 등장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걸 증명한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지만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두운 분신이다. <우리에게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 그래서 내가 우리는 같은 들판에 열린 딸기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를 알고 있는 아주 위험한 존재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번민 끝에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을 때 그가 엿들었던 것이다.

 

제6부의 대단원에 이르러 라스꼴리니꼬프는 '출구가 없는 담답한 공간'에서 숨을 쉴 공간을 열망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언제나 그의 주위를 맴돈다. 그에게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는 결국 소냐의 간곡한 설득 끝에 자수하지만 그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심한 때문이었다. 그는 경멸 어린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는 내가 생각도 없이 그들 모두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마음 속 깊은 신념으로부터 굴복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인가!(767쪽)

 

그는 광장으로 걸어나가 소냐로부터 명령받은 대로 <대지에 입을 맞추고 민중들에게 절을 하지만> 끝내 <내가 죽였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수를 위해 경찰서에 들어가서도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다시금 발걸음을 되돌려 그곳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경찰서 마당에서 절망에 찬 표정으로 그를 간절히 바라보는 소냐를 발견하고는 다시 위층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범행을 자백한다.

 

<바로 제가 그때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의 여동생 리자베따를 도끼로 살해하고 돈을 훔친 사람입니다.>

 

에필로그에서 이어지는 뒷 이야기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아직도 완전한 회개로 옮아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이제 감옥에 들어와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금 예전의 모든 행동들을 되돌아본 결과, 자신의 범죄 행위들이 그렇게 어리석고 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는 생각했다. <내 사상의 어떤 부분이 천지개벽 이후로 세상을 휘저으며 서로 부딪치고 있는 서로 다른 사상과 이론들보다 더 어리석단 말인가? 흔해 빠진 영향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적이고 폭넓은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물론, 나의 사상도 전혀 그렇게…… 이상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오! 5꼬뻬이까 은화의 값어치밖에 나가지 않는 허무주의자들과 현인들이여, 그대들은 어째서 길을 가다가 멈춰 섰는가!>(800쪽)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을 읽으면서 내내 떨치기 힘들었던 생각 하나는 '톨스토이에게는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없는 것들의 목록'이었다. 이 두 작가야말로 러시아 문학에서 언제나 거대한 쌍벽을 이루고 있으니 두 사람의 비교는 어쩌면 불가피한 구석이 있다. 내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그 목록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무도회, 춤, 공작, 백작, 황제, 시종무관, 장교, 저녁만찬, 귀족, 귀부인, 삼두마차, 외국여행, 사냥, 카드 게임, 영지, 대지주, 저택, 하인, 대자연에 대한 묘사, 사랑의 심리학, 지배계층 등등.

 

물론 이와 반대되는 것들도 떠올랐다. '톨스토이에게는 없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있는 것들의 목록' 말이다.

 

선술집, 주정뱅이, 창녀, 가난한 사람들, 빈민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 부랑아, 병자, 고아, 농아, 사생아, 비열한, 악한, 사기꾼, 협잡꾼, 감옥, 죄수, 살인, 범죄, 도시 빈민가에 대한 묘사, 범죄의 심리학, 피지배계층 등등

 

이들 목록은 비단 작가의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의 삶 자체가 이들 목록의 내용 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동안 자주 도박으로 큰 돈을 잃고 매번 궁지에 몰렸던 탓인지 고통 받는 영혼을 탐구하는데 아주 특출난 재능을 발휘했고, 악의 세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맹렬하게 뒤쫓았다. 어떤 작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런 경향 때문에 그의 독보적인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드러내 놓고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양대 봉우리 사이가 아무리 멀다 해도 가끔씩은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희미한 오솔길 하나쯤은 엿보일 때도 있기 마련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이어주는 오솔길이 하나 있다면 거기에서 두 작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은 적군의 총사령관이자 우두머리일 뿐이고, 러시아 총사령관 꾸뚜조프 장군의 맞상대일 뿐이었다. 나폴레옹이 마침내 모스크바까지 진군했을 때 그는 '거대한 환영식'과 '황제의 알현'을 기대했지만, 꾸뚜조프는 도리어 모스크바를 텅텅 비워놓고 외곽으로 군대를 후퇴시킨 뒤 잠복 근무 상태로 결정적인 때를 기다렸다. 다친 짐승이 지쳐서 제발로 도망칠 때까지. 인류의 황제가 될 뻔한 나폴레옹은 그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패퇴하고, 빌니우스에서는 '숭고와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나폴레옹을 주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진짜 《거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사람은 툴롱을 호령하고 파리에서 대학살극을 벌이고, 이집트에서 군대를 《잃고》, 모스끄바로의 진군에서 50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빌니우스에서는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그런데도 죽은 후에는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았는가. 즉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아니, 아마도 이런 사람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398쪽)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상념들을 떠올리고 나서 갑작스레 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는 거의 웃움을 터뜨릴 뻔한다.

 

<나폴레옹, 피라미드, 워털루, 그리고 여위고 추한 14등 문관 미망인, 노파, 고리대금업자, 침대 및 붉은 궤짝 ㅡ 설령 뽀르피리 뻬뜨로비치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것들을 소화시킬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것들을 소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미학이 방해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노파의 침대 밑에 기어들겠느냔 말이다! 아하, 엉터리 같은 이야기다 ……!> (399쪽)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누구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러시아 청년 대학생의 묻지마식 노파 살해 사건>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주 친숙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좌와 벌>, <선과 악>, <가난과 불행>, <선한 목적과 악한 수단>, <정의란 무엇인가?>,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가?>, <빈부차이는 얼마만큼 용인되어야 하는가?> 등등이 바로 그런 주제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대체로 『고리오 영감』에서 보여준 <발자크의 돈>과 『위대한 유산』에서 보여준 <디킨스의 곤궁>과 『레미제라블』에서 보여준 <빅토르 위고의 불쌍한 사람들>이 기묘하게 뒤섞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앞선 작가들이 충분히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인간 심리의 탐구'라는 측면에서는 그들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가 '세계 최대의 심리 작가'라는 명성을 얻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죄와 벌』은 그런 명성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다. 아직도 『죄와 벌』을 만나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면 더이상 죄를 짓지 말고 달콤하게 벌을 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죄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아직까지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끝끝내 숨기고 자백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빗댄 표현이다. 벌을 받으라는 말은 이쯤에서 자백하고 당당히 감옥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의 형무소로 떠난 라스꼴리니꼬프처럼.(그 청년도 버틸 데까지는 버텼다!)『죄와 벌』을 읽는 일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든 거대한 '정신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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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1-19 2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을 오래전에 읽었어요. 두꺼운 줄 모르고 책에 완전히 빨려들어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를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밤12시 넘어까지 책을 봤어요. 읽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천재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류 문명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면‘ 쓸모없는 존재들은 얼마쯤 쓸어내 버리더라도 -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헷갈리기 시작하더군요. 살인을 했지만 주인공의 주장이 그럴 듯해 보였거든요.

님의 글 중 압권을 제가 뽑았어요. - 작가는 지금부터야말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 여행이 제대로 시작될 터이니 너무 어둡고 컴컴하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벨트를 단단히 매라는 식의 친절을 베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하 ~~ 재밌습니다. 정말 그런 분위기로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매혹시키죠. 잠시도 한눈을 팔 틈을 주지 않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심리 묘사에 능해 심리학자 같다면 톨스토이는 교훈을 말하는 교장선생님 같죠.

저는 4대 비극 중 <리어왕>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어요. 자식에게 버림 받고 거지꼴이 된 리어는 이렇게 절규하죠.
˝이건 리어가 아니다.˝라고. 자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고 자식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던 어리석은 리어왕의 운명은 파국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고전 읽기, 저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데미안, 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래전 이미 읽은 것이라서 재독인 셈인데 새 책으로 사 놔서 기대됩니다. 아까워서 아직 첫 장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ㅋ 책을 사 놓고 아까워서 손을 못 대고 있는 이 심정을 이해하실런지요. 얼마간 빳빳한 종이책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제가 펼치기 시작하면 밑줄을 치는 바람에 새 책이 중고가 되어 버려서요.

쓰다 보니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너무 꼼꼼히 읽는 바람에 쓸 말이 길어졌나 봅니다.
좋은 글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oren 2019-01-19 22:39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죄와 벌』을 그 어떤 소설보다 ‘단숨에‘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최소한 사나흘은 걸렸지 싶어요. 워낙 책을 천천히 읽는 습관이 있어서요. 부지런히 메모도 해 가며 읽는 습관도 한 몫 했고요. 책을 읽을 때 강렬하게 다가오는 느낌들을 ‘메모‘로 붙들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그 구절들을 다시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걸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제 멋대로 느낀 감정의 일단을 나름대로 솔직하게 전달해 볼까 싶어 일부러 평소와는 달리 표현하고자 했던 부븐을 콕 집어서 제 글의 압권이라고 추켜세워 주시니 괜히 쑥쓰럽기도 합니다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박진감 넘치는 인간 심리 묘사‘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천재 음악가였던 모짜르트의 교향곡 25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가면서 이 글을 써 보기도 했고요. 모짜르트나 도스토예프스키나 인류가 낳은 천재임은 너무나 분명하니까 말이지요.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저도 청년(!) 시절에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읽을 생각은 아직까지도 가져보지 못했네요. 그 대신 저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다시 읽고픈 열망은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 작품을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읽었으니까 도대체 뭘 얼마나 제대로 알고 읽었겠나 싶은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거든요. 더군다가 그 작품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뒤늦게 완성한 대작인데 말이지요. 사실, 이번에 『죄와 벌』을 읽은 것도 ‘다시‘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만나기 위한 예비 작업 성격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고요.

아무튼 진솔하고도 긴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카알벨루치 2019-01-19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대한 페이퍼, 그로테스크한 리뷰를 작성하셨네요~👏👏👏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어여 다가가고 싶네요!

oren 2019-01-19 22:48   좋아요 2 | URL
작품의 분량도 그렇지만 깊이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아서 짧은 글로 이 대작을 요약하기가 쉽진 않더군요. 맨 처음엔 지금 분량의 두 배쯤 되는 아주 상세한 리뷰를 썼는데, 그걸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짧게 줄일 수 없겠다 싶어서 그걸 다 버리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쓰느라 애를 좀 먹긴 했답니다. 그래도 분량이 너무 길어 다소 흉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싶어서 그냥 올려 봤습니다. 여기서 또 절반으로 더 줄인다고 해서 특별히 나아질 것도 기대하기 힘들겠다 싶었고요.^^

카알벨루치 2019-01-19 23:10   좋아요 1 | URL
아름답습니다 오렌님의 문학사랑과 열정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저도 좋은 영향 받고 갑니다

요즘 정말 짧은 글이 도외시되고 동영상과 이미지만 난무하는 세상에서 깊고 깊은 사유의 파이프를 지난 긴 글이 박수받길 진정으로 고대하며 응원해 봅니다 ~ㅎㅎ

oren 2019-01-19 23:23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의 뜨거운 성원에 글 쓴 보람을 느낌니다. 늘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1-19 23:39   좋아요 1 | URL
이 정도 쓰실라믄 얼마나 사투를 벌이셨을까 그런 생각에 더 감동이 됩니다 고전을 후벼파볼려면 얼마나 산고를 겪어야하는지... 몸살은 나지 마셔요!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입문한다면 오렌님 덕입니다 ^^

oren 2019-01-20 13:26   좋아요 1 | URL
무슨 사투까지야 벌였을라고요. ㅎㅎ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곧장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으면 결국 두고 두고 후회가 남긴 하더라고요. 책을 읽은 직후가 아니라면 그 생생한 감동을 도저히 되살려 낼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는 방금 읽은 책을 다시 요모조모 뜯어 보고 작가의 생각까지도 찬찬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 과정에서 그 작가와 작품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어쨌든 『죄와 벌』은 이미 숱한 전문가들이 다양한 연구논문을 쓸 정도로, ‘인간 심리에 관한 탁월한 절창들‘이 너무 많아서, 쓰고 싶은 말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책이었는데, 그걸 짧은 리뷰 하나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더라구요.

제가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었던 얘기들은 가령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술주정뱅이 퇴역 관리였던 마르멜라도프네 가족의 비극(이 가족의 비극 가운데 특히 아내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의 비극은 흡사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아 여인들』을 보는 듯하더군요. 그녀의 처지가 여러모로 ‘헤카베‘와 너무 닮아 있어서 도스토예프스키도 틀림없이 그 작품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싶더군요.),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정화하는 과정(이건 흡사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가운데 《자비로운 여신들》를 보는 것 같았어요. 오레스테스가 누이동생인 엘렉트라와 함께 친모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하고 나서 ‘복수의 여신들‘에 쫒기는 ‘오레스테스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에도 거듭 다뤄질 정도로 고대로부터 아주 익숙했던 비극의 주제였으니,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점을 몰랐을 리는 없겠다 싶어요.) 스비드리가일로프와 라스꼴리니꼬프와의 대비(스비드리가일로프야말로 ‘죄와 벌‘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고하게 보증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어서요.), 『죄와 벌』에 엿보이는 니체의 철학(특히, 니체의 ‘초인 철학‘을 그대로 빼닮은 듯한 문장들이 여럿 나타나고, 이 작품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자연 풍광 묘사에서 하필이면 ‘아침노을‘이 강조된 점도 니체의 책 제목인 『아침노을』을 떠올리게 만들더군요.)

하여튼, 이 작품은 ‘그냥 이렇게 넘어갈 게 아니로구나‘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들었어요. 이 작품의 후반부에 라스꼴리니꼬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심판사 뽀르피리의 입을 통해 표출했던 작가의 말처럼요.^^

* * *

당신의 논문을 읽고 나서, 나는 그것을 따로 간직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 그때 따로 간직하면서 생각했지요. <음, 이 사람은 그냥 이렇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로구나!> 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전제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 다음 작업에 열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65쪽)

카알벨루치 2019-01-20 13:34   좋아요 1 | URL
오렌님의 댓글을 좋아요 클릭 한번으로 퉁치기엔 너무 미안하네요 댓글도 고퀄리티라 ㅎㅎ

인생에 인간이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100년이고 그렇게 따지면 하루에 한권 읽는다 가정했을때 3만6천5백권의 책을 읽을수 있다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생의 살아갈수있는 숫자와 이 세상에 널려진 책의 숫자는 비교불가한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연 우리가 어떤 책을 선택해서 읽어야할지 고민이 요즘 됩니다 끝이없는 계산인데, 암튼 오렌님 글도 댓글도 최애 팬으로 남고 싶네요 ㅎㅎㅎ

oren 2019-01-20 13:43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께서 일부러(?) 댓글창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인 ‘얼마나 사투를 벌이셨을까‘ 라는 말씀을 남겨 주시는 바람에 뜻밖에도 꽤나 긴 댓글을 쓰게 되네요. 그 정도로 격한 표현이 없었다면 결코 꺼낼 생각조차 하기 힘든 속 깊은 내용까지 포함해서요. 암튼 늘 저를 북돋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카알벨루치 2019-01-20 13:46   좋아요 0 | URL
사투 맞습니다 ^^ㅎㅎㅎ

oren 2019-01-20 13:47   좋아요 1 | URL
사투는 아니고요.. ㅎㅎ... 고투라면 그나마... ㅎㅎ
 
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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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저녁 8시 무렵, 해가 지고 있었다.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악취와 먼지에 가득 찬 도시의 공기를 탐욕스럽게 흠뻑 들이마셨다. 약간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야수적인 에너지가 그의 타는 듯한 눈동자와 누렇게 뜬 해쓱한 얼굴에서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몰랐고, 또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단번에 지금 당장.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슨 수로 끝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지니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념을 쫓아 버렸다. 상념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다만 이렇게든 저렇게든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상관없어.> 그는 필사적이고 질긴 자기 확신과 결단성을 가지고 이런 말을 되뇌고 있었다.(225∼226쪽)

 

(나의 생각)

 

전당포 여주인과 그녀의 여동생까지 도끼로 살해한 뒤 극도의 혼란과 공포 때문에 실신하고 마는 라스꼴리니꼬프는 며칠 만에 간신히 깨어난 후 라주미힌과 조시모프에게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관심과 염려로부터 그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절망에 휩싸여 그들을 자기 방에서 내쫓는다. 절규하면서.

 

「나를 내버려 둬! 나를, 모두 다!」 라스꼴리니꼬프는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언제쯤 나를 내버려 둘 거야, 이 고문자들아! 나는 너희들 따윈 두렵지 않아! 나는 아무도, 아무도 이젠 두렵지 않아! 저리 나가! 난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다고! 제발!」

 

그들을 모두 내쫓고 간신히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무작정 거리로 나선 라스꼴리니꼬프가 마땅히 찾아갈 만한 데가 과연 어디 있으랴.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무슨 수로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지도 모른 채 방황하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은 살인을 저지른 죄인에 대한 분노보다는 까닭모를 연민과 동정에 훨씬 가깝다.

 

 

 * * *

 

 

<그게 어디였더라.>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인간은 비열하다……! 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비열하다고 하는 놈도 비열하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230∼231쪽)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제2부>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여기서 인용한 책 속 내용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문득 떠올린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 이야기조차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사형수 체험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라스꼴리니꼬프조차 저토록 간절히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데, '벨린스끼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죄목'으로 체포되어 졸지에 사형 직전까지 내몰렸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얼마만큼 더 간절하게 삶을 이어가고 싶었을까.

 

 

 * * *

 

 

벌써

코사크 사람 하나가 성급하게 다가와

총을 보지 못하게 두 눈을 묶는다.

그리고ㅡ그는 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ㅡ

그의 눈길은 이제 눈멀기에 앞서

탐욕스럽게 저쪽에 펼쳐진

저 작은 한 조각 세상을 바라본다.

아침빛 속에 교회가 타오르는 것을 본다.

최후의 행복한 만찬을 위해서인 듯

그 접시는 성스런 아침노을로

가득 채워져 불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갑작스러운 행복감에 넘쳐

죽음 뒤의 신의 삶을 그리워하듯 교회를 바라본다….

 

그 때 그들이 그의 눈 위로 밤의 띠를 둘렀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피가 색깔을 가지고 돌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물 속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삶이

피로부터 솟구쳐 나온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바쳐진 이 순간이

한 번 더 자기 영혼을 통과하며

모든 잃어 버린 과거를 씻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전 일생이 다시 깨어나서

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유령처럼 스쳐간다.

창백하고 잃어 버린 잿빛 유년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아내,

세 개의 파편 같은 우정, 두 잔의 즐거움,

명성의 꿈, 한 더미의 수치.

그리고 그림으로 된 충동이 잃어 버린

청년 시절을 혈관을 따라 굴린다.

그들이 자신을 기둥에 묶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전 존재를

그는 한 번 더 깊은 내면으로 느낀다.

사려 깊은 생각이 어둡고 무겁게

그 자신의 그림자들을 그의 영혼 위로 던진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검고, 침묵하는 걸음걸이를 느낀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그가 손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는 것을,

심장은 점점 약하게…  약하게…  그러다가 이제 더는

뛰지 않는다.

1분이 지나면…  그러면 끝이다.

코사크 사람들은

저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을 이룬다… .

총을 맨 벨트는 흔들리고…

손들은 방아쇠 소리를 내고…

북이 울려서 공기를 가른다.

그 1초는 수천 년 나이를 먹게 한다.

 

그 때 외침소리 하나,

멈추어라!

장교가 앞으로

나선다. 종이 한 장이 하얗게 펄럭인다.

그의 음성은 맑고도 분명하게

기다리는 적막 속으로 파고든다.

차르(러시아의 황제)께서

그 성스러운 의지의 은총으로

판결을 취소하셨다. 이제

판결은 감형되었다.

 

그 말들은 아직

낯설게 들린다. 그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혈관 속을

흐르는 피는 다시 붉어지고,

솟구쳐 흐르며 다시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망설이면서 마비된 관절에서 물러서고

두 눈은 아직 캄캄하지만 영원한 빛이

둘러싸며 인사하는 것을 느낀다.

형리는

말없이 묶은 끈을 풀어주고

두 손이 갈라진 자작나무 껍질 벗기듯

하얀 천을

타오르는 관자놀이에서 벗겨낸다.

비틀거리며 두 눈은 무덤에서 빠져 나온다.

아직도 약하게 눈이 먼 채로

이미 사라졌던 존재 속으로

다시 서투르게 더듬으며 들어간다.

(201∼204쪽)

 

 -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죽음에서 건져올린 삶-사형 직전의 도스토예프스키

 

(나의 생각)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1849년 12월 22일이었다. 황제의 특사로 형 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강제 노동형으로 감형되고, 시베리아의 비참한 수용소에서 4년 동안 유형 생활을 보낸다. 젊은 시절부터 이토록 드라마틱한 체험을 겪은 사람이었으니, 그의 작품이 지옥을 넘나드는 것처럼 생생하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법하다. 도스토에프스키의 많은 작품들 속에 작가의 체험이 핏빛처럼 선연하게 뿌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싶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필연을 두고 우연을 가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탄생한 데에도 무수한 우연이 개입되어 필연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어쩌면 이같은 생각조차도 '우연과 필연' 사이의 불가해한 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심리의 '참을 수 없는 구분의 욕망'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숭고와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어느 위인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연과 필연 사이의 거리도 그만큼 바싹 붙어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어째서 이것이 이런 형태로 생겼고 다른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것은 이런 형태로 생겼기 때문이다. "우연이 상황을 만들고 천재가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우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천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연이나 천재라고 하는 말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이 말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단계를 나타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지를 못한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알려고 하지 않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인간의 성질로부터 동떨어진 행위를 일으키는 힘을 본다. 왜 그것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다.(1542-1543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에필로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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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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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존경하는 선생.」 그는 득의만면해서 말문을 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極貧)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25쪽)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과연 어느 누가 이런 대화를 들려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그들은 이토록 통절한 가난을 느낄 정도의 표현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 어쩌면 그에게서라면 이 정도로 처절하고 절박한 느낌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는? 찰스 디킨스? 혹은 발자크? 작가의 형편상으로는 이 두 작가의 표현이 그나마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도 뭔가 이토록(!) 비장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좀체 느끼기 어려운 뭔가가 느껴진다. 뭔가 찌르는 듯한 혹은 깊숙히 찔리는 듯한. 그런 느낌만을 강조한다면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에 훨씬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를 찌르는 것이 있구나. 애석하게도, 심장을? 심장을!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 한 가지만 묻지요, 젊은 선생, 혹시 …… 음, 음, 선생은 아무 희망도 없이 돈을 꾸러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꾸러 가본 적은 있지요 ……. 그런데 희망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조금도 희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꿔줄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는 거니까요. 아주 선량하고 사회에 유익한 그 시민이 결단코 선생에게 돈을 꿔줄 리 만무하다는 점을 선생은 확실히 아신다는 겁니다. 제가 묻지요, 그가 무엇 때문에 꿔주겠습니까? 그는 내가 갚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동정 때문이라고요?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을 좇고 있는 레베쟈뜨니꼬프 씨는 동정이 우리 시대의 과학으로도 금지되어 있고, 정치경제학이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왜 꿔주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꾸러 가는 겁니다. 그리고…….」

 

「대체 왜 가는 거지요?」 라스꼴리니꼬프가 끼어들었다.

 

「어쩌면 찾아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니면 더 이상 찾아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어떤 인간이든 아무 데라도 찾아갈 만한 곳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디든 반드시 가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처음으로 노란 딱지를 받고 거리로 나갔을 때, 나는 그때도 역시 갔었지요…….(내 딸은 노란 딱지로 산다오…….)」(26∼27쪽)

 

 

 * * *

 

 

「이게 내 모습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아시겠어요, 선생? 난 아내의 양말짝마저 술과 바꿔 마셔 버렸습니다. 신발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발로 마시는 건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양말이었습니다. 마누라 양말짝까지 마셔 버린 겁니다! 염소 털로 만든 아내의 목도리도 마셔 버렸지요. 전에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 물건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추운 구석방에서 살고 있는데, 아내는 이번 겨울에 감기가 들어서,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합니다. 애들은 어린것이 셋인데,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그 여자는 어릴 때부터 깨끗하게 자란 터라, 쓸고 닦고 아이들을 목욕시킵니다. 가슴이 약해져서 폐병기가 있는데, 난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마시는 겁니다. 마시면서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 한 가지, 비애만을 찾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배가시키려고 마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절망한 듯이 고개를 탁자에 떨궜다.(28∼29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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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 사 놓은지가 언제인데 싶네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처절한 가난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기에 그런 대작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불행이 성공의 이유이다”라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늘 해 봅니다

oren 2019-01-10 12:00   좋아요 1 | URL
<죄와 벌> 같은 책이 책장에 고시 모셔져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괜시리 이 책을 쓴 작가와 작품에 대해 까닭모를 불경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하더군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은 이후 아주 오랫동안 작가에 대한 외경심을 떨치기 어려웠는데, 언젠가 우연히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통해 그가 겪은 지독한 가난과 도벽은 물론 한 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얘기까지 접하고 나니 그가 경험했을 삶의 깊이가 도대체 얼마만큼 깊었던가를 새삼 헤아려보게 되더군요.^^

카알벨루치 2019-01-10 12:02   좋아요 1 | URL
저도 올해안에 꼭 읽고 리뷰 한번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 멋찐 하루 되십시오!~

oren 2019-01-10 12:39   좋아요 1 | URL
올해는 오늘 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열한 달도 더 남았으니 <죄와 벌>만큼은 아주 여유롭게 읽으실 듯합니다.^^ 카알벨루치 님의 멋진 리뷰 기대할께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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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득히 들려오는 장닭의 울음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졸음과 납덩어리 같은 아른함이 몰려오는 뜨거운 여름 한낮이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지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지는 그때, 그 우렁찬 계명(鷄鳴)이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다.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쾌적하게 울려온다. 이튿날 아침 풀밭에서 그 열매를 찾다가 눈에 띄었을 때의 기쁨이란!

 

아침나절 길다란 낫을 가는 망치 소리는 잠을 깨우는 울림이다. 공기에서는 취할 듯이 짙은 향내가 난다. 이제부터 뜨겁고 건조한 하루가 되리라. 이글이글 열을 지은 채원(菜園)의 풀줄기가 햇볕 속에서 찌듯이 익어가리라.

 

화려한 농촌의 소음으로는 길다란 장대에 달린 나무 갈퀴로 마른 풀을 뒤적거릴 때 들려오는 메마른 바삭거림이 있다. 그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어느덧 경건한 기도 소리 들리는 밤을 생각하게 된다. 초원 사이로 열린 오솔길을, 그리고 마주 걸어오는 쟈네트의 어깨 위로 드리워진 새하얀 수건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사랑스러운 끄적임.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라는 구절 다음에 한동안 막혀버린다.(14∼15쪽)

 

(나의 생각)

 

장닭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 너무 오래다. 한겨울 새벽을 힘차게 열어젖히던 그 우렁찬 목소리가 그립다. 까마득한 옛날,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던 암탉들이 소 외양간이며 마루 밑에도 숨겨 놓곤 하던 달걀의 따스한 감촉도 그립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을 때마다 괜스레 훼방이나 놓곤 하던 그 옛날, 그 암탉들은 우리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 * *

 

 

마을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나는 즐겨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웃에서 들려와서는 안 된다. 얼마간 바람결을 타고 불어와 조화된 소리여야 한다. 그 금속성은 내 어린 가슴을 한껏 설레게 했었다. 프랑켄의 장터에 자리잡은 대장간에서는 섬뜩한 느낌의 풀무가 훨훨 타오르는 석탄 불길 속에서 용해되고 있었고, 시커먼 칠을 묻힌 대장장이가 멀찌감치 서서 쇠망치로 달아오른 쇳덩이를 때리면, 불똥의 빗줄기가 꿈처럼 아름답게 곡선을 그으며 어두운 대장간 창고 안으로 비산(飛散)하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분수의 낙수 소리. 중세풍의 슈바벤 할 시(市)의 어느 주막 앞에는 분수가 하나 서 있어 온 달밤을 지새우도록 전설과 동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15∼16쪽)

 

(나의 생각)

 

까마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우리 마을에도 대장간이 있었다. 그 대장간은 마을의 신작로를 살짝 벗어나 냇가로 이어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대장간 바로 옆에 '상여'를 보관하던 곳집이 있어서 어린 아이들에겐 괜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대장간은 주로 여름철에 바빴던 것 같다. 우리가 대장간 구경을 실컷 즐길 수 있었던 때도 주로 '매미'를 잡기 위해 그곳까지 진출했던 여름방학 때였으니까. 아무튼 대장간 구경은 소리 보다는 빛이 중심이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두드릴 때마다 불똥이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좋은 구경거리도 없었다. 

 

 

 * * *

 

 

폭풍이 몰아칠 때 소나무 수관(樹冠)을 휙휙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도 노래를 한다. 이 두 개의 소리에 나는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 있다. 바람 부는 날 고성(古城)이나 농장의 뜰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도깨비라도 나올 듯 매우 기묘한 것이다.

 

거울처럼 잔잔하게 잠든 호면(湖面)에서 보트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 보라. 끌어올린 노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구원의 물방울. 알아보기도 힘든 자디잔 물체와 들릴 듯 말 듯한 소음. 그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스러져가는 것이다.

 

바다의 소음. 칠흑 같은 밤, 그것이 그윽하게 성난 듯이 백사장의 조약돌이나 해변의 암석에 탄식하듯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를 야릇한 그리움과 설렘 속에 몰아넣는다. 그것은 속세의 음성이 아니라 해신(海神)의 음성이며, 수정(水精)의 유혹하는 호소이며, 인어의 노래이다.

 

산골짜기에서 와르릉 꽝꽝 바위 구르는 소리. 저 푸른 절벽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무시무시하게 쿵쾅거리는 굉음! 다시 한번 이 죽음의 음성은 바로 곁에까지 왔다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깊고 탐욕스럽게 가슴 깊숙이까지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던가.(16∼17쪽)

 

(나의 생각)

 

몹시도 추운 한겨울, 썰매를 타러 나간다거나 연을 날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 닥치면, 문풍지 바른 문틈 사이로 '우웅~ 우웅~' 하는 겨울바람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그런 날에는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하루종일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든다거나 자전거를 만들며 놀곤 했다. 그런 날 점심 매뉴는 으레 김치와 콩나물이 적당히 버무려진 질펀하면서도 뜨끈뜨끈한 비빔밥이었는데, 거기다 고추장을 적당히 비벼 먹으면 이내 후끈하게 땀이 났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수수깡 놀이는 저녁나절까지 계속 되곤 했다. 그런 날에는 '우웅~ 우웅~'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도 온종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리곤 했었다.

 

 

 * * *

 

 

전차바퀴의 덜컹거리는 운율을 나는 더없이 사랑한다.

 

또 그르릉거리는 뱃고동과 추진기 주변을 소용돌이치는 물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닻의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 배를 정박시키는 말뚝의 삐걱대는 소리. 투박한 시골의 우편마차 위에서 철썩 내리치는 채찍의 울림. 비행기 모터의 성급한 붕붕거림. 이것은 귀가 겪는 순수한 음향의 모험들이다. 고도(古都)의 아치 성문을 덜그럭덜그럭 지나는 말발굽 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방랑하는 시인 아이헨도르프를 생각하고, 마리안네 폰 빌레머(장년기 괴테의 애인)의 여행복에서 풍기는 라벤더의 방향(芳香)을 생각하게 된다.(17쪽)

 

 

 * * *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와 그 위에 얹힌 물주전자의 노랫소리는 나를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부엌, 파란 그릇들로 가득 찬 할머님의 부엌, 곡식과 과일 냄새 풍기는 농촌의 부엌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와 같은 소음인 것이다.

 

헤센과 프랑켄의 작은 마을들, 고향에서의 잊을 수 없이 화려한 밤의 소음들이 있다. 밀가루 덮인 농촌의 물방앗간 방파제 위로 단조로운 파도를 치면서 끊임없이 좔좔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버릇에 젖은 어느 주정뱅이가 포도(鋪道) 위를 비틀비틀 비척거리고 걸어가며 끊임없이 끄륵대는 트림 소리. 돌풍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이의 손마디인가, 덧문을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 문간 구석에서 새어나오는 어느 처녀와 총각의 입맞춤 소리. 그리고 교회 탑의 시계가 뚝딱거릴 때마다 녹이 슨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18쪽)

 

(나의 생각)

 

언제나 쌀가루가 뽀얗게 덮여 있던 우리 마을 방앗간은 언제 없어지고 말았던가. 벼베기도 다 끝난 초겨울쯤, 볏가마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방앗간에 갈라치면, 그곳엔 언제나 곡식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아저씨가 계셨다. 온갖 벨트들이 바삐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새하얀 쌀알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던 그 풍경들이 새삼 그립다. 가끔씩 바삐 돌던 벨트가 멈춰 서면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참았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엔 소음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방앗간이 멈춰 설 때마다 방앗간 뒤켠에 있던 큼지막한 발동기의 시동 거는 소리만큼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도 드물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던 백남봉의 소리 모사에서도 언제나 백미는 발동기 시동 거는 소리였다.  ‘돼지가 새끼를 납니다. 그때 나는 소리입니다. 꿀꿀’, ‘부산에서 인천으로 날아온 지친 기러기입니다. 끼룩 끼룩’ 하면서 온갖 소리를 멋지게 흉내 내던 그 옛날의 소리 모사꾼들의 목소리도 이젠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 * *

 

 

풀베기를 끝낸 초원 위를 구름처럼 떼지어 나르는 뇌명(雷鳴) 같은 찌르레기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는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벌써 여름이 갔구나, 철새들이 먼 여행을 준비하는구나, 또 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ㅡ 하는 가슴 속의 일말의 울적함을 떨칠 수가 없다.(18∼19쪽)

 

 

 * * *

 

눈(雪)이 일으키는 소음도 내가 사랑하는 소리에 속한다. 섬세하고 알알한 싸라기 내리는 소리에서부터 봄철 높새바람에 무너져내리는 눈사태의 우레 소리까지. 마을 우편배달부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걸어오는 발소리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ㅡ 반갑고 궂은 소식, 아득히 먼 세계가 이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차역의 덜커덕대는 소리. 도시의 왁자한 소음. 해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뜨거운 그리움이 사박거리며 함께 들려오는 것이다. 미움과 사랑, 환희,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죽음의 발소리까지.

 

썰매를 끄는 말방울 소리. 그것 역시 신비스럽다. 들리는가 하면 어느덧 지나쳐버린다. 그렇게 불현듯 스쳐 불어가는 것이면서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리이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연주할 때, 그것은 얼마나 묘한 일인가! 꽥꽥 긁어대며 활주(滑奏)하는 불협화음 뒤에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의 장려하고 거창한 음(音)의 바다가 높이 펼쳐지는 것이다.(19쪽)

 

(나의 생각)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겨울방학때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빨간 색 자전거를 타고 오던 우편배달부였다. 그 아저씨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달려오다가 우리집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소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우편물 가방을 열어젖히면, 거기선 어김없이 '연재 만화'가 실린 소년동아일보가 특유의 신문지 냄새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 당시엔 어린이용 '연재 만화' 만큼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도 드물었다. 연재 만화 속의 풍경들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아득히 먼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 * *

 

 

뚝…… 뚝……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지난날 수업 시간에 들리던 납같이 무거운 소음. 교실에서는 선생님의 피로에 지친 울먹한 음성이 들려왔다. "Nemo ante mortem beatus" ㅡ 어느 누구도 죽음에 직면해서 행복을 구가할 수는 없다. 소년은 노(老) 교수의 육중한 지혜에는 아랑곳없이 창 앞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비스듬히 걸려 있는 전선줄 위로 수백 개의 물방울이 나란히 매달려 있어서, 일순간 가만히 방울 지어 있다가는 다음 방울에 밀려 곧 부서져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뚝…… 뚝…… 그것은 대자연의 언어이며, 구름의, 하늘의, 무한한 세계의 언어이다. 또한 그것은 바다의 인사이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넘쳐흐르는 샘물의, 돌 고드름 열린 종유동으로부터의 인사이다. 소곤거리는 분수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인사이며, 나이아가라와 라인 강의 뇌성(雷聲)이며, 아득한 해안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이다 ㅡ 이렇듯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야성과 위대함, 충만함과 풍요함이 이 단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20쪽)

 

 

 * * *

 

 

봄날 저녁 떼지어 들끓는 풍뎅이의 붕붕거림. 이제 곧 붉은 만월이 떠오르리라. 거리는 어느덧 시골 처녀들의 다감한, 조금은 구슬픈 노랫소리로 가득 찬다. 하모니카의 부드러운 선율이라도 끼어든다면, 그곳에야말로 깊어가는 밤의 알 수 없는 고뇌와 감미로움이 자리잡는 것이다.

 

아코디언 켜는 소리. 그 소리를 못 들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깊은 밤, 방 안에서 무엇인가 가구에 딱 부딪히는 소리. 누가 오는 것일까? 아니면 가는 걸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었을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들의 잠자리를 굽어보시는 어머니였을까? 요정이었을까? 겁 많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밤중 방 안에서 나는 유령 같은 소리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환희에 겨운 두 연인의 잔 부딪치는 소리. 춘삼월, 습기 찬 풀밭에서 연주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 ㅡ 그것은 목신(牧神)이 새로이 인생의 불멸을 구가하는 소리였다.(20∼21쪽)

 

 

 * * *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눈 녹은 물줄기가 홈통으로 흐느낌처럼 후둑후둑 쏟아지는 소리. 물고기가 잔잔한 수면으로 팔딱 뛰어오르는 소리. 어린아이의 종종거리는 발소리. 바람 잠든 날, 전선줄의 윙윙거리는 소리 ㅡ 이것은 마을 소년들이 먼 곳의 사람들의 욕설처럼 변덕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스런 기상의 신호이다.

 

아, 한 잎 가랑잎이 살그머니 떨어질 때, 가슴 아프도록 지친 소리. 아직도 나무에는 여름이 달려 있는데 어느덧 한 잎이 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팔락거림이나 출발을 앞둔 말의 울음소리는 얼마나 우렁차고 자랑스러운 소리이며 승리의 소리인가! 대목을 앞둔 장터에서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목쉰 음성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희가 막 사이로 미끄러져 나와 감사와 축복, 자랑과 기쁨의 미소를 띄울 때, 터져 나오는 갈채 소리는 얼마나 감동적인가.(21∼22쪽)

 

(나의 생각)

 

불현듯 스치며 떠오르는 옛 추억들은 섬광처럼 반짝 빛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게 특징이다. 그처럼 짧게 스쳐 지나가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누구에겐들 없겠냐마는, 그런 느낌들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포착하고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수필가였던 안톤 슈낙의 글 솜씨가 참으로 부럽다.

 

 

 * * *

 

 

찾아오는 여인의 발소리는 온 심장과 기대를 끌어당긴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정원에 깔린 자갈 위로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온다. 가볍고 날렵하게 사뿐사뿐 걷는 우아하고 경쾌한 발소리. 축복의 발소리, 후광을 지닌 발걸음, 그것은 걸음 중의 걸음 소리이다.

 

정적의 소리야말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무위(無爲)로부터, 근원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심연의 흐름 ㅡ 바로 오르간의 음악 소리요, 조개껍질의 소리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 속을 흐르는 피의 음악이다. 심실(心室)의 노래이며, 자체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인 것이다.

 

한껏 부풀어 격동하는 심장을 가진 자는 축복을 받은 자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입맞춤은 심장을 그렇게 고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질주하며 울리는 격동을 듣고 있다. 이 이중창을 듣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축복단은 일이란 지상에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이다.(22∼23쪽)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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