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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밑줄긋기)
「존경하는 선생.」 그는 득의만면해서 말문을 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極貧)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25쪽)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과연 어느 누가 이런 대화를 들려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그들은 이토록 통절한 가난을 느낄 정도의 표현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 어쩌면 그에게서라면 이 정도로 처절하고 절박한 느낌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는? 찰스 디킨스? 혹은 발자크? 작가의 형편상으로는 이 두 작가의 표현이 그나마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도 뭔가 이토록(!) 비장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좀체 느끼기 어려운 뭔가가 느껴진다. 뭔가 찌르는 듯한 혹은 깊숙히 찔리는 듯한. 그런 느낌만을 강조한다면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에 훨씬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를 찌르는 것이 있구나. 애석하게도, 심장을? 심장을!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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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만 묻지요, 젊은 선생, 혹시 …… 음, 음, 선생은 아무 희망도 없이 돈을 꾸러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꾸러 가본 적은 있지요 ……. 그런데 희망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조금도 희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꿔줄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는 거니까요. 아주 선량하고 사회에 유익한 그 시민이 결단코 선생에게 돈을 꿔줄 리 만무하다는 점을 선생은 확실히 아신다는 겁니다. 제가 묻지요, 그가 무엇 때문에 꿔주겠습니까? 그는 내가 갚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동정 때문이라고요?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을 좇고 있는 레베쟈뜨니꼬프 씨는 동정이 우리 시대의 과학으로도 금지되어 있고, 정치경제학이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왜 꿔주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꾸러 가는 겁니다. 그리고…….」
「대체 왜 가는 거지요?」 라스꼴리니꼬프가 끼어들었다.
「어쩌면 찾아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니면 더 이상 찾아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어떤 인간이든 아무 데라도 찾아갈 만한 곳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디든 반드시 가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처음으로 노란 딱지를 받고 거리로 나갔을 때, 나는 그때도 역시 갔었지요…….(내 딸은 노란 딱지로 산다오…….)」(2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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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모습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아시겠어요, 선생? 난 아내의 양말짝마저 술과 바꿔 마셔 버렸습니다. 신발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발로 마시는 건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양말이었습니다. 마누라 양말짝까지 마셔 버린 겁니다! 염소 털로 만든 아내의 목도리도 마셔 버렸지요. 전에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 물건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추운 구석방에서 살고 있는데, 아내는 이번 겨울에 감기가 들어서,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합니다. 애들은 어린것이 셋인데,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그 여자는 어릴 때부터 깨끗하게 자란 터라, 쓸고 닦고 아이들을 목욕시킵니다. 가슴이 약해져서 폐병기가 있는데, 난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마시는 겁니다. 마시면서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 한 가지, 비애만을 찾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배가시키려고 마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절망한 듯이 고개를 탁자에 떨궜다.(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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