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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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 마이크 아이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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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프리 초서(출처 : 위키백과)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영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이 작품을 쓴 제프리 초서(1342∼1400)는 일부 문학비평가들로부터 영문학 사상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겐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이 유명한 작품은 중세를 대표하는 걸작들인 단테(1265∼1321)의 『신곡』이나 나관중(1330?~1400)의 『삼국지연의』 보다는 조금 뒤늦게 나왔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인『천일야화』(1500년경)나 근대 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라블레(1483∼1553)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보다는 훨씬 앞서 나왔다. 말 그대로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에 다시 한번 슬쩍 비춰보면 이 작품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대략 1387년부터 집필되기 시작해서 작가가 죽은 해인 1400년까지도 막바지 작업이 이뤄졌던 작품이니, 조선이 건국되기도 전에 쓰여지고, 한글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세상에 널리 퍼져 읽혔던 작품인 셈이다.

 

이 오래된 중세의 이야기가 서양 문학사에서 우뚝 솟아오른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유 하나는 아주 명백하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위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신들의 이야기'였다면, 초서의 이야기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이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가장 대비되는 작품은 물론 단테의 『신곡』이었다. 그 위대한 서사시가 '신성한 코미디'였다면, 초서의 서사시는 '인간의 코미디'였다. 단테가 신을 사랑했다면, 초서는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을 사랑했다. 단테는 <지옥편>에서 <천국편>에 이르는 여행을 통해 파멸, 정화(淨化), 지복에 이르는 길들을 묘사했지만, 초서는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이르는 순례 여행을 통해 인간 삶의 복잡다단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단테의 여행이 상상 속의 상징적인 세계로의 여행이었다면, 초서의 여행은 14세기에 30여 명의 순례객들이 영국의 질퍽한 도로 위로 말을 타고 떠나며 나눴던 실제 세계에서의 여행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했다. 초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화자들은 런던 교외에 실재했을 법한 타바드라는 여관에서 순례 여행을 시작하며, 최종 목적지인 캔터베리 대성당이라는 실재하는 장소에서 끝난다.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제프리 초서와 결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인물은 셰익스피어였다.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셰익스피어(1564∼1616)는 초서보다는 훨씬 나중에 태어났지만 그로부터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들까지도 산문으로 변역된 상태로 읽는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태생적으로 시인이었고,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대부분 운문시로 쓰였다. 영어로 쓰인 최초의 걸작이자 더군다나 운문으로 쓰인 탁월한 이야기들을 셰익스피어가 그냥 지나칠 리는 만무했다. 셰익스피어는 『캔터베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그보다 훨씬 세련되고도 독창적인 이야기들을 무수히 새로 지어냈다.

 

초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화자로 등장하는 순례자들의 다양한 신분 만큼이나 각양각색이지만 그렇다고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초서는 주로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혹은 키케로나 세네카의 여러 작품들에서 인물이나 이야기를 끌어온 경우가 적지 않은데, 초서가 두루 섭렵했던 이들 작가와 작품들이야말로 셰익스피어도 똑같이 사랑했던 작가들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으로 알려진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서뿐 아니라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도 거듭 등장하며, 티투스 리비우스와 플루타르코스가 비중있게 다룬 고대 로마 시대의 '루크레티아 성폭행 사건'이 『캔터베리 이야기』 에 다시 등장하고, 셰익스피어에 의해 설화시(說話詩)인 「루크리스의 능욕」으로 재탄생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인 페트라르카와 복카치오와 단테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초서 이후에 등장한 작가들 중엔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몽테뉴(1533∼1592)와 세르반테스(1547∼1616)에게 끼친 영향들도 적잖게 발견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초서의 이야기 가운데 아내의 정조를 극단적으로 시험하는 이야기인 <옥스퍼드 서생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나중에 쓰인 『돈키호테』에 담긴 액자 소설 가운데 하나인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와 몹시 닮았다. 그런데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는 이 두 이야기의 진정한 모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담긴 <케팔루스와 프로크리스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초서와 세르반테스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기 보다는 도리어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양분을 빨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초서는 생애의 대부분을 왕실 사업의 감독관이나 왕의 경제 사절 등 고위 공무원으로 지냈는데, 그의 삶의 일부분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자못 흥미롭다. 초서는 젊어서 한 때 영국왕 리처드 2세와 프랑스 공주 마리의 결혼을 위해 수 차례에 걸쳐 프랑스를 다녀온 적도 있으며, 초서의 아내는 랭커스터 공작(존 오브 곤트)의 부인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랭커스터 가(家)의 에드워드 3세(1377년 사망)의 셋째 아들이 바로 랭커스터 공작이었고, 그의 맏형(에드워드, 검은 갑주의 왕자)의 아들이 당시 국왕이었던 리처드 2세(1377∼1399년 재위, 1400년 살해)였다.

 

랭커스터 공작의 아들은 영국사에서도 빛나는 인물인 헨리 볼링브로크였다.(그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해 낸 가장 흥미로운 인물인 '폴스타프'와 절친일 정도로 청년 시절에 온갖 기행을 일삼았지만 즉위 이후에는 국왕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명군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국왕 리처드 2세는 나약하고 무능했다. 국왕인 어린 조카보다 더 막강한 힘을 지닌 랭커스터 공작은 언제나 늠름했던 그의 아들 헨리 왕자와 함께 언제나 요주의 인물이었다. 늘 왕위에 불안을 느낀 리처드 2세는 결국 헨리를 프랑스로 추방시키지만, 훗날 때맞춰 씩씩하게 영국으로 귀환한 헨리는 무능한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다. 셰익스피어가 쓴 역사극 열 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바로 '헨리 볼링브로크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극화한 《헨리 4세》이고, 그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끝에 감옥에서 비참하게 살해된 '리처드 2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리처드 2세》또한 그에 못잖게 인기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셰익스피어와 초서 사이에 놓인 유별난 인연을 새삼 헤아려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쯤에서 잠깐 리처드 2세 때문에 영국에서 추방당하는 헨리 볼링브로크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지게 된 아들에게 따스하고도 지혜 넘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친 랭커스터 공작(존 오브 곤트) 사이에 있었던 대화 장면을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로 잠깐 감상하고 넘어가자.

 

존 오브 곤트

 

태양이 내려 쪼이는 장소는 모두가 다

현자에겐 항구요 아늑한 정박지니라.

곤경에 처해서는 이렇게 생각해라 ㅡ

곤경처럼 도움이 되는 것 또 없다고.

전하께서 너를 추방했다 생각지 말고, 네가 전하를

멀리한다고 생각해라. 괴로움을 심약하게 받아들이면,

괴로움은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르는 법.

가거라. 영예를 쟁취하라고 내 너를 보내는 것 ㅡ

전하께서 너를 추방하심이 아니다. 아니면,

생명을 삼키는 역병이 대기 중에 맴돌아,

네가 신선한 풍토를 찾아 도피한다 생각하거라.

네가 무엇을 값진 것으로 여기든, 네가 가는 곳에

그것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뒤에 남긴다 생각 마라.

지저귀는 새들을 악사들로 여기고,

네가 밟는 초원을 골풀 깔린 접견실로,

꽃들은 아리따운 여인들로, 그리고 네 발걸음은

흥겨운 무도의 율동이나 춤으로 여기거라.

이빨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슬픔도 그걸 조소하고

가볍게 여기는 자를 몰 힘이 약해지나니.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제1막 제3장> 중에서

 

초서와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캔터베리 이야기』로 되돌아 오자. 이 방대한 중세의 이야기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치된 성인(聖人) 토마스 베켓을 참배하러 영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신분의 순례객들이 차례로 화자로 등장하는 게 가장 큰 특색이다. 그런데 캔터베리는 어떻게 당대 최고의 순례지가 되었을까.

 

캔터베리 대성당의 대주교였던 토머스 베켓은 1170년에 헨리 2세의 측근이었던 '4인의 기사들'에 의해 살해된다. 국왕의 권력과 교회 권력 사이에 빚어진 극심한 갈등 때문에 결국 토머스 대주교가 국왕에 의해 살해된 것이었다.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제단 위로 승천하는 기적을 보았고, 교황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한다. 훗날, 대주교가 헨리 2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로마는 국왕에게 캔터베리로 순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국왕은 회개자의 옷을 걸치고 맨발로 순례를 떠나 캔터베리 대성당에 모인 모든 주교들로부터 채찍의 형벌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참회한다. 그후 모든 영국 군주들은 토머스의 무덤으로 순례를 하게 되고, 토머스 성인은 영국 최고의 성인이 된다.

 

초서가 살던 시대의 캔터베리는 로마나 예루살렘 혹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못지 않게 최고의 순례지였다. 그러니 런던에서 대략 56 마일 정도 떨어진 캔터베리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은 쉽게 구경할 수 있었고, 그들은 온통 구덩이가 패이고 수레바퀴 자국으로 가득한 질퍽한 길을 말이나 나귀를 타고, 혹은 걸어서 순례에 나섰다. 물론 그들은 도중에 수많은 거지와 사기꾼들과 싸워야 했고, 가짜 수도사들이나 창녀나 구경꾼들한테도 시달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레 무리를 지어 함께 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화자로 등장시켜 제각기 서로 다른 독특한 이야기를 펼치는 이유 또한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런던 근교 서더크의 타바드 여관에 모여 다함께 무리를 지어 순례를 떠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인 순례자들은 모두 33명에 이르렀고, 이 속에는 작가인 초서와 타바드 여관 주인까지도 포함된다. 그들은 머나먼 순례길을 떠나기에 앞서 흥미로운 내기를 한다. 순례를 떠나 목적지인 캔터베리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동안 각자 두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자는 것이다. 순례 여행이 따분하지 않고 훨씬 더 재미있도록.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는 모두가 크게 한 턱 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순례자들의 '길 위의 이야기'가 바로 『캔터베리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작가인 초서의 이야기를 포함하더라도 모두 24편에 불과(?)하므로 당초의 웅대한 계획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미완성작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화자들은 순례를 가는 길에 두 가지, 오는 길에 두 가지씩, 모두 네 가지의 이야기를 하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당초의 계획대로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작가가 오래도록 살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무려 128개에 이르는 실로 방대한 이야기가 될 뻔했다.(32명×4개씩=128개)

 

당초 계획의 1/5에 불과한 이야기만 담겼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초서가 등장시킨 화자들인 순례자들의 신분이나 옷차림만 하더라도 너무나 각양각색이고, 그들이 펼쳐내는 이야기 가운데는 지루한 설교조의 <본당신부의 이야기> 정도만 빼놓고는 모두 흥미롭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모인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다. 가령 배스의 여인은 서머싯셔, 학생은 옥스퍼드, 청지기는 노퍽, 요리사는 런던, 소환리는 링컨셔, 선장은 데번셔 출신이다. 이렇게 출신 지역이 다르다는 것 이외에도, 이 순례자들의 사회적 신분 역시 각각이다. 똥통을 수없이 나르는 농부의 초라한 행색은 기사의 위대한 업적과 대비된다. 또한 왕 앞에서조차 모자를 벗지 않는 최고 변호사는 신원이 의심스러운 요리사와 함께 간다. 세련되기 그지 없는 수녀원장은 거칠기 짝이 없는 방앗간 주인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모법적인 본당신부는 뻔뻔스런 면죄사와 대비된다. 서생의 지식은 무식하기 그지없는 사회자와 대조를 이룬다.(648∼649쪽)

 

 -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작품 해설> 중에서 

 

초서는 중세를 대표하는 천재 시인인 단테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깊이와 비통함과 강렬함, 방대한 학식과 복잡한 상상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또한 인정과 유머도 많았고, 인간의 약점을 재빨리 간파하면서도 동시에 관용하는 부드러운 시선을 가졌다. 또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재주가 탁월한 작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중세에 캔터베리로 순례를 떠난 여행객들이 우리의 옷깃을 붙들고 바로 곁에서 들려주는 듯한 온갖 흥미진진한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접할 수 있었겠는가.

 

몹시도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를 지금도 찾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나 우리나 결국 똑같은 인간임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사는 모습이 세월의 간극뿐 아니라 삶의 터전과 언어와 종교와 관습마저 완전히 다른 경우에도 그 본질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그런 이야기가 독특한 환경에 처한 독특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건 더더욱 흥미롭다. 14세기의 영국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지극히 자연스런 욕망들, 가령 결혼생활에서의 부부간의 주도권 싸움이나 재산 다툼이나 성욕(性慾) 때문에 빚어지는 온갖 헤프닝들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드러내 놓는다. 때로는 영국판 고금소총(古今笑叢)을 엿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음탕하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얘기들도 가득하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아쉬움 한 가지는 '운문 소설이 지녔던 묘미'를 맛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캔터베리 이야기』에 깔린 어조가 '언어의 아이러니'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까지 알고 나면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어쩌면, 영어라는 언어가 몹시도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던 무렵에 천재 시인이 온갖 다양한 방식과 기교를 통해 구사했던 '언어의 아이러니'를 산문으로 번역된 한글 문장에서 맛보려는 욕심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딱딱한 산문으로 번역된 부분을 우연히 맞닥뜨린 '운문 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니 그런 느낌이 더했다. 그 부분을 덧붙임으로써 '운율이 없는 번역'에 대한 아쉬움과 '언어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본다.

 

4월의 감미로운 빗줄기가
3월의 건조함을 속속들이 꿰뚫고,
모든 줄기가 그 생명력의 물기에 흥건히 적시어지고
그리하여 꽃들이 피어나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西風)은 그의 달콤한 입김으로
들녘과 작은 숲의 연한 가지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아직 이른 태양은 숫양궁(宮)의 반 여정을 지났을 뿐이며,
자연이 그들의 가슴에 춘심(春心)을 자극하여
뜬 눈으로 온 밤을 지새운 작은 새들은
애욕스런 노래소리를 쉴새없이 지저귄다.
이 때 사람들은 순례를 염원하게 된다.

 

 -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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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14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서가 세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그 메시지만 기억하네요 초서 이야기하면 일화가 생각나는데, 미문학사였던가 암튼 그랬는데, 강의 첫날 어디서 많이 본 분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알고보니 고등학교때 지리를 가르친 선생님이신겁니다 그분이 수업시간에 박학다식하게 딴 이야길 많이하셔서 참 재미있었는데 그분이 교사를 그만두고 교수가 되신거예요 초서의 <캔터배리 이야기>가 나오면 그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ㅎㅎ

oren 2018-11-14 10:19   좋아요 2 | URL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그런 기막힌 사연이 연결되는 일도 있군요. ㅎㅎ
저도 문학쪽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긴 합니다. 저도 대학에 다닐때 일이었죠. 군복무를 위해 3년간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 후 대학 4학년때 전공 과목 하나를 들으러 강의실 맨 앞자리 교탁 앞에 앉아 있다가 깜놀한 사건이죠. 강의가 시작될 무렵 고개를 들었더니 강의를 맡으신 분이 저랑 1학년 2학기때 같은 방을 함께 썼던 룸메이트 선배시더군요.(그 분은 경영학과에 다녔던 복학생 4학년 과선배였고, 졸업을 앞둔 무렵에 명문 대학원에 합격한 것까지만 알고 있었죠.) ˝아, 여러분, 잠깐만~˝ 하고는 둘이서 복도로 나가서 짧은 대화를 나누고 다시 들어와서 강의를 시작했더랬지요... ㅎㅎ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영화 <히말라야>와 '히말라야의 눈물'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 * *

 

저 멀리 히말라야에서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었다.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원정 대원들과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서 9명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시신 수습은 신속하게 이뤄져 벌써 내일 새벽이면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8000m급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 대장(49)을 포함한 한국인 5명의 시신이 지난 13일(현지시간)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발견됐다. 구르자히말은 네팔 히말라야 산맥 다울라기리 산군에 있는 해발 7193m의 산봉우리다. 원정대 가운대는 다큐멘터리 감독 임일진 엑스필름 대표(49)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

 

2015년에는 영화 <히말라야> 특수촬영(VFX) 원정대장으로 참여했다. <히말라야>는 히말라야에서 숨진 후배 대원 박무택(정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엄홍길(황정민)과 휴먼원정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임 대표는 2014년 봄 5주가량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며 눈사태와 크레바스·빙하 등 영화 속 컴퓨터그래픽의 배경이 될 소스 촬영을 이끌었다.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은 등반가가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이번 사고는 히말라야에서도 워낙에 낯선 곳에서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고의 원인조차 뚜렷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원정대 전원이 사망한 참사여서 더욱 슬프고 충격적이다.

 

더구나 이번 원정에서 목숨을 잃은 김창호 대장은 '순수 알피니즘'을 고집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다. 김 대장은 언제나 모험적 등반을 시도하는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했고, 등정의 결과 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줄곧 실천했던 산악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집에서 집으로(From Home To Home)’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내세울 만큼 '안전한 귀가'를 위해 누구보다 사전 준비에 철저했던 산악인이었다.

 

소위 머메리즘이라고도 불리는 '순수 등로주의'를 개척했던 인물은 19세기의 풍운아로 불렸던 영국인 알버트 머메리(1855∼1895)였다. 그는 위대한 등반가였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경제학 연구에 몰두하여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저서까지 출판한 지식인이었다. 그 책은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불멸의 고전인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도 자세히 인용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산악 고전인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독서에 몰두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 밀턴, 워즈워스, 테니슨의 여러 작품 속 싯구절들이 셀 수 없이 자주 폭넓게 인용되어 있으니 말이다. 한낱 무모한 등반가인 줄로만 알았던 그가 그토록 탁월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머메리는 19세기 말에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에 도전한 위대한 등반가였다. 그는 두 번의 등정 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하여 친구들과 헤어져 구르카 병사들과 함께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보인 마지막 모습이었다. 머메리는 그렇게 낭가파르밧 최초의 희생자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낭가파르밧은 머메리가 죽은 후 58년 동안 숱한 실패와 비극과 대참사를 겪은 끝에, 머메리 사후 58년이 흐른 뒤인 1953년 7월 3일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원정대를 이끈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이 이뤄졌다.

 

 

(낭가파르밧, 높이/8,125m, 출처 : 위키백과)

 

'근대 스포츠 등산의 비조'로 불릴 만큼 위대한 족적을 남긴 희대의 반항아가 남긴 한 마디는 알피니즘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었고, 알피니스트들은 그 누구도 머메리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남긴 말은 이랬다.

 

"길이면 가지 말아라."

 

위험에는 다른 학업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육과 정화(淨化)의 힘이 있으며, 사람이 자기가 '완전히 사치와 유약에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다. 산은 이따금 일을 좀 지나치게 밀어부쳐서 교수대, 교수틀, 낙하 발판 등의 시설을 다 갖춘 사형 집행인조차 도저히 더 훌륭하기를 바랄 수 없는 절박한 사멸(死滅)의 환영(幻影)을 산의 신봉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그라지는 저녁 노을이 절규하는 바람과 눈에 쫓겨 발걸음을 재촉하고 복수의 여신들이 능선을 따라 미친 듯이 대상을 사냥할 때, 절벽은 흔히 냉혹하고 절망적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용감한 동료들과 불굴의 정신은 몰려드는 위난의 거미줄을 잘라 내고, "세월이 지나 옛 일을 회상하는 것도 즐겁노라"는 느낌 또한 언제나 있는 것이다.


- 머메리,『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방랑자라고하는 것은, 선인들의 발자취를 정확히 따라가면서 산 속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찍이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찍이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혹은 또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 데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황량하게 드러난 슬랩, 능선의 모난 깎아지른 발판, 그리고 거멓게 불거진 걸리의 얼음은 그의 존재에 대한 생명의 입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감정을 분석할 수 있는 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할 수 있는 체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 머메리,『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 

 

 

이번에 김창호 대장이 원정에 나섰던 구르자히말은 전문 산악인들도 등반하기를 꺼릴 정도로 험산이라고 한다. 특히 남벽은 수직으로 3천 미터가 넘어 아직까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김창호 대장이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소식을 들으니 문득 7년 전 이맘때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가 실종된 박영석 대장이 떠오른다.

 

사실 김창호 대장과 박영석 대장의 죽음은 많은 점에서 서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등반가였고, 등정 주의보다는 등로 주의에 집착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박영석 대장은 2011년 10월 세계적 난코스였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됐으며, 당시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있던 김창호 대장은 자원해서 박 대장의 시신 수색조에 합류했다. 밧줄로 몸을 묶고 박 대장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끝내 박 대장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유명 산악인들의 이름은 익히 들어 왔어도 그들과 직접 맞닥뜨린 적은 거의 없었다. 1994년에 코오롱 등산학교에 다닐 때 허영호 대장을 강의실에서 만난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섰다가 우연히 오은선 대장과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그리고 히말라야에서 하산한 뒤에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포카라에 들렀다가, 그곳에 있는 산악박물관에서 또다른 유명 산악인들을 더 많이 만났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히밀라야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박영석 대장과 고미영 대장도 있었고, 이번에 비운의 사고를 당한 김창호 대장도 있었다.

 

- 박영석 대장,
   1989년 랑탕리룽(7,225m)에 최연소 원장대장으로 도전해 동계 세계 최초 등반. 
   1991년에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으나 100m 추락후 이틀 동안 의식을 잃는 사고를 당함.
   2001년 K2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인 최초 14좌 완등, 세계에서는 8번째 기록.
   2004년과 2005년 남극점과 북극점 정복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2011년 안나푸르나(8,091m) 남벽에 신루트 개척을 위해 나섰다가 강기석, 신동민 대원과 함께 실종.

(포카라 산악박물관에 걸린 사진)

 

 

 - 고미영 대장.
    2006년부터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등정에 나서 4년간 11좌를 등정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등정한 낭가파르밧에서 하산하던 중 '칼날능선'에서 실족하여 사망했다.

(포카라 산악박물관에 걸린 사진)


 

 

 - 세계 최단기간 14좌를 완등한 김창호 대장, 촐라체 사고로 두 손을 잃은 박정헌 대장.

(포카라 산악박물관에 걸린 사진) 

 

 

잊을 만하면 반복해서 날아드는 히말라야로부터의 비보는 앞으로도 결코 끊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머메리의 말대로,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코 히말라야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알프스의 고산을 즐겨 올랐던 독일 철학자 니체는『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의 어느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경험에 영원성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이번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원정 대원들이 구르자히말에서 목숨을 걸고 새기고자 애썼던 '영원성의 낙인' 만큼은 오래도록 깊게 각인되었으리라 믿는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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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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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10-19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보기에 따라서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인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수 있다고요. 자신이 뜨거운 열정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oren 2018-10-19 23:15   좋아요 2 | URL
이번 사고는 히말라야 탐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대참사‘였어요. 특히나 8,000미터급 고봉에서 흔히 발생하는 기상 급변이나 한 두 사람의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등반 사고도 아니었고요. 베이스캠프에 머물던 등반대가 한꺼번에 9명이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계곡에 처참하게 내동댕이처진 사고였으니까요. 그 누구보다 모험적이고, 늘 준비에 철저했고, 공부하는 산악인의 상징이었던 김창호 대장의 죽음은 여러모로 애석하고 애통한 면이 많은 듯합니다. 고인의 미망인도 대학때 만난 후배 산악인이라니 ‘등반가의 숙명‘을 넉넉히 이해하리라 믿고, 세 살배기 딸아이도 먼 훗날 언젠가는 아빠의 삶을 이해하리라 맏습니다.
 

 

 

밤을 줍다가 덜컥 겁이 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왜 겁이 났냐고?

밤을 줍다가 뱀을 만나서?

적어도 오늘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 밤을 줍다가 뱀을 만난 건 지난 주 일요일 오후였다.

그날은 새벽 일찍 서울을 떠나 당일치기로 성묘차 고향을 찾았었다.

조상님들의 산소를 오르내리며 더러 길가에 널브러진 알밤을 줍기도 하고,

밤나무에 잔뜩 매달린 밤송이들이 탐나 더러 나뭇가지를 던져 가며 밤을 쬐끔 털기도 했다.

논두렁을 오가며 부드럽게 피어 오른 억새를 쓰다듬으며 고향의 가을 정취를 듬뿍 맛보기도 했고.

 

그렇게 새벽잠을 설치며 시작된 성묘 나들이도 거의 다 끝날 무렵이었다.

아버님의 산소에서 스무남은 걸음쯤 떨어진 곳에 제법 큰 밤나무 한 그루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올커니, 저 밤나무 아래에 가면 알밤들이 제법 많겠군, 싶었다.

그래서 밤을 더 줍기도 귀찮다는 동생들은 제쳐 두고 형과 함께 둘이서 밤나무 아래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낫으로 마른 풀과 잔가지를 괜시리 이리저리 헤쳐 가면서.

혹시나 뱀이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서로 곤란하니까.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부산을 떨면서 뱀들에게 일종의 경고음을 울린 셈이었다.

 

생각보다 그 밤나무 아래에는 알밤들이 별로 없었다. 누가 미리 다녀갔는지도 몰랐다.

안 되겠다 싶어서 수풀과 잔가지들이 무성한 좀 더 안 쪽으로 헤쳐 들어가 볼 작정을 했다.

혹시라도 모르니 낫을 휘들러 이리저리 잔가지와 수풀들을 자꾸만 쳐댔다.

혹시라도 뱀이 있으면 서로 곤란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내 제법 큰 뱀 한 마리가 몸뚱이를 흐느적거리며 나와는 반대편으로 내빼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머리 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뚱이의 절반 이상은 넉넉히 내 눈에 보였다. 서너 걸음쯤 떨어진 곳이었다.

대체로 거무스름한 색을 띈 녀석이었는데 몸통 중간쯤에 흰 줄이 하나 뚜렷이 나 있는 게 특이했다.

 

"어이쿠! 뱀이네!"

 

놀라 소리치면서 나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뒤로 빼기 시작했고, 깨끗이 벌초가 된 아버님 산소 쪽으로 물러났다.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던 형도 그 소리를 듣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밤나무 밑에서 서둘러 빠져 나왔다.

 

'밤은 왜 뱀과 한 획 차이밖에 나지 않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 *

 

오늘도 아무런 예고 없이 아내와 함께 밤을 주으러 모처(?)를 다녀왔다.

 

아내가 하는 말인 즉슨, 어제 오후에 호수공원에 나갔더니 도토리가 엄청 많이 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밤을 줍던 그곳에도 틀림없이 오늘쯤엔 알밤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예측이 과히 틀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기껏 한 시간 남짓 밤을 주웠는데도 무려 15Kg이나 주웠던 것이다.

 

 

 - 오늘 주운 밤들_01

 

 

 - 오늘 주운 밤들_02

밤을 주워 오면 가장 먼저 거실 마룻바닥에 쫙 펼쳐 놓고 '뉘 골라내듯' 선별작업을 해야 한다.

밤벌레가 침투한 흔적이 약간이라도 있는 밤이 탈락 1순위다. 씨알이 너무 작은 밤도 탈락이다.

그런 밤들을 골라내기만 해도 대략 두세 되쯤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골라낸 밤들은 집근처 정발산을 오르내릴 때 청설모와 다람쥐들 먹이로 던져 준다.

 

맨 처음으로 그 밤나무 산을 알게 된 건 아내의 고교 친구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번 추석 연휴에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서 2박 3일 일정으로 템플 스테이를 왔는데,

위치를 자세히 알고 보니 우리가 사는 동네와 그리 멀지 않으니 바람이나 쐬러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 공양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서둘러 집을 나서서 찾아갔더니 밥도 공짜였고, 커피도 공짜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바람을 쐬며 이리저리 절간 주위를 산책하며 거니는 동안,

템플 스테이를 와 있던 아줌마들이 밤을 잔뜩 주웠다면서 자랑을 하며 지나갔다.

절 주변을 여기 저기 잘 살피면 토실토실한 알밤들을 제법 많이 주울 수 있다면서.

 

그래서 시작된 알밤 줍기가 오늘로서 벌써 세 번째였다.

맨 처음엔 절간 담벼락 바로 아래 비탈에서 자란 밤나무 주변을 공략했었다.

그런데 그 밤나무 아래는 너무 비탈이 심해서 접근조차 그리 쉽지 않았다.

또한 밤나무 주위에는 예상치 못한 물건들도 더러 버려져 있었다.

꽃을 담았던 플라스틱 바구니 정도는 제법 양호한 편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좀 더 접근이 쉬운 다른 '밤나무 밭'을 수소문했다.

 

절에서 내려오다가 왼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밤 밭'이 나온단다.

대략 20분쯤 걸어가면 무슨 옹달샘이 나오고, 거기서 몇 십 미터만 더 가면 된단다.

아내 친구와 셋이서 그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부지런히 옹달샘을 찾았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밤송이가 잔뜩 널브러진 지역이 그 오솔길 주위로 여기 저기 있긴 있었다.

비록 아쉬운 대로 아무데서나 알밤을 줍기 시작했다.

밤이라는 게 그저 줍는 재미지 수확량이 무에 그리 중요하랴 싶었다.

그래도 셋이서 줍기 시작하니 한 시간 남짓에 각자 이삼 킬로쯤은 너끈히 주워모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공략일은 지난 주 토요일 오후였다.

가을 날씨가 너무나 화창해서 어디로든 나들이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날씨가 좋은 핑계였다.

시장에서 사 온 먹다 남은 찐 옥수수랑 쥬스랑 커피를 새참으로 먹기 위해 조그만 배낭에 챙겨 넣었다.

삼겹살을 구울 때 자주 쓰는 집게도 두 개나 챙겼고, 비닐 봉다리도 서너 개 챙겨 넣었다.

맨 처음 셋이서 주울 때보다 밤이 훨씬 더 많았다. 연휴가 지난 탓인지도 몰랐다.

한 시간 남짓 주웠는데도 집으로 돌아와서 재어 보니 무려 8키로나 되었다.

 

오늘도 밤을 줍기엔 제법 좋은 타이밍이고 날씨인 듯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걸쳐서 가을 태풍이 지나간 탓에 밤들이 우수수 털리기도 했을 테고,

이번 주말을 넘기고 나면 밤들이 차츰 변색되면서 자연으로 돌아갈 채비에 바쁠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갖은 핑계를 찾은 끝에 또다시 밤줍기에 나섰다. 벌써 세 번째였다.

먹다 남은 케익과 과일 쥬스, 집게, 비닐 봉다리에 더해 오늘은 장갑까지 챙겼다.

예상했던 것보다 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내려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수확이 알찼다.

산비탈을 이리저리 누비며 40분쯤 주웠더니 두 번째 방문때 수확량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흐르는 땀도 식힐 겸 새참을 먹고 나서 조금만 더 줍고 가자고 했다.

그렇게 다시 10분쯤 밤을 줍고 있는데, 아내가 조용히 외쳤다.

 

"여보! 이리로 와 봐"

"응, 알았어, 여기도 밤은 많은데, 뭘."

"그게 아니라니까, 암튼 얼른 이리로 와 봐."

"알았어, 금방 갈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연신 밤을 주워 담으며 허리를 굽힌 채로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오, 과연 거긴 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전인미답의 신천지가 확실했다!

떨어진 밤 송이가 가득했고, 밤송이 안팎으로 밤들이 쏱아져 널브러져 있었다.

서둘러 밤을 줍다 말고 덜컥 겁이 났다.

이거 혹시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밤 줍기를 멈추고 하산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내려오면서 드는 생각은 이랬다.

그래도 우리가 이 정도로 밤을 줍는 게 범죄 행위까지는 아닐 꺼야.

왜냐하면, 템플 스테이 하러 온 사람들도 이미 숱하게 그 주변에서 밤을 주웠고,

절간 스님들도 으레 그쪽에 가면 밤을 많이 주울 수 있다고 귀뜸해 주기도 했고,

그 야산에서 밤을 줍는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그동안 적잖이 우리 눈에 띄었고,

무엇보다도 그 야산과 그곳에서 자란 밤나무의 주인이 명백히(?) 따로 있었더라면,

진작부터 이곳 저곳에 '경고 간판'을 내걸었을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밤을 줍다가 밤이 너무 많아서 덜컥 겁이 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밤이 많았다.

 

 

 * * *

 

 밤 관련 책을 찾았더니 이런 책들이 나온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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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8-10-0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고향에서 포도밭 하는 친구네 갔다가 밤을 엄청 주웠답니다. 포도밭 주인의 딸인 친구 왈,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밤이 떨어진 걸 본 건 처음이라네요. 해마다 사람들의 손을 타고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7년의 밤>이 빠졌네요.ㅎㅎㅎ

oren 2018-10-08 18:29   좋아요 0 | URL
올해는 밤이 한꺼번에 익었다가 빠르게 우수수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직도 지천에 널려 있는 그 많은 밤들이 이제는 죄다 썩어 없어지겠구나 생각하니, 저 밤나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많은 밤들을 봄부터 가을까지 열매로 영글도록 그토록 애썼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단단한 가시로 무장시켜서 말이지요.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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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1809∼1849)

 

포는 아주 오래 전에 활동했던 작가였지만, 그의 작품을 읽으면 옛날 사람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런 느낌을 주는 작가는 아주 드물다. 그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천재였다.

 

그의 생몰연대를 살펴 보면 놀라운 사실이 두 가지나 한꺼번에 발견된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때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200년도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아주 젋어서 삶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대략이나마 살펴 보면 그가 얼마만큼 과거의 인물이었는지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이제 막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가던 시절을 살았다. 포와 동시대에 활약한 미국의 작가라고 해봐야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 너새니얼 호손(1804∼1864), 롱펠로우(1807∼1882) 정도다. 포는 바로 그런 때에 활동했고, 평생을 불운에 시달린 끝에 일찍 죽었고, 늘상 비주류 작가로 활동했다.

 

그에게는 추리소설의 창시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따라 붙는데, 그보다 세 살 아래인(!) 찰스 디킨스(1812∼1870)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특히 흥미롭다. 그 영국 소설가가 연재 중이던 작품의 결말을 포가 너무나 정확하게 예측해서 디킨스를 경탄에 빠트렸던 것이다. 디킨스 또한 추리 소설에 대해서라면 대가다운 솜씨를 지닌 작가였는데, 포가 디킨스의 구상을 훤히 꿰뚫어 보았던 셈이다.(디킨스의 미완성 유작인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추리소설 세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디킨스의 몇몇 작품에서도 추리 소설적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위대한 유산』에서는 기괴하게 늙어가는 노파인 미스 헤비셤을 둘러싼 온갖 비밀들이 '죄수의 탈옥 사건'과 함께 복잡하게 맞물리며, 『황폐한 집』에서는 체스니 월드의 대저택에 사는 데들록 부인의 갑작스런 실종 사건이 '여주인공 에스더의 출생의 비밀'과 맞물려 숨가쁘게 진행된다.)

 

포의 부모는 유량극단의 배우였다. 그런데 포가 두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부모를 병으로 잃고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다. 자식이 없던 사업가인 앨런 부부의 가정에 입양되어 좋은 교육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포가 버지니아 대학교에 다닐 때 큰 빚을 졌고, 돈 문제로 양아버지와의 갈등을 겪은 끝에 의절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전형적인 남부 명문가의 아들로 자라온 그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포는 대학 1학년을 중퇴하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입대하여 2년 만에 특무상사까지 진급한다. 이왕이면 장교로 근무하는 게 낫겠다싶어 전역한 후 이듬해에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지만 반 년 만에 근무 태만으로 처벌을 받고 퇴학당한다. 

 

오갈데 없던 포는 고향인 볼티모어로 찾아가 고모인 마리아 클렘의 집에서 지내면서 어린 여사촌 버지니아의 공부를 돌봐주는 한편 문필활동에 전념한다. 이 때 볼티모어의 잡지에 50달러 상금 단편 공모에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가 당선되면서 작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여러 문학 잡지의 편집자이자,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작품을 발표해도 기성 문단의 문인들과 관계가 편치 못했고(특히 기성문단의 대표 격인 롱펠로를 심하게 공격했다.), 잡지의 사주들과도 끊임없는 충돌을 빚었다.

 

1836년에 포는 고종 사촌 버지니아와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 당시 버지니아의 나이가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된 탓에 홋날 여러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버지니아와 사촌간인 것을 두고 근친상간이 아니냐는 혐의도 있었고, 아동성애자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도 뒤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사촌간의 결혼은 흔한 일이었고, 사춘기 소녀들의 결혼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은 지나치게 악의적이었던 듯하다. 애석하게도 포와 버지니아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내가 오랜 투병 끝에 1847년 결핵으로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마저 잃은 포는 가눌 수 없는 절망감과 심한 우울증과 알콜 중독 증세에 시달린 끝에 2년 후 열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인생은 가난, 절망, 비참, 알콜 등으로 점철되다가 갑자기 끝난 셈이었다.

 

그의 단편소설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시가 한 편 있다. 『애너벨 리』라는 시다.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는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ㅡ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소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네.

그래서 명문가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천상에서도 반쯤밖에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날 시기했던 탓.

그렇지! 그것이 이유였지(바닷가 그 왕국 모든 사람들이 알 듯).

한밤중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싸늘하게 하고

나의 애너벨 리를 숨지게 한 것은.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ㅡ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ㅡ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지는 못했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ㅡ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 정규웅 번역, 애너벨 리

 

이 시는 포가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어린 아내 버지니아 클렘을 추모하여 쓴 애도시이다. 죽은 아내는 15세나 연상인 자신과 결혼하여 내내 가난과 폐결핵으로 고생만 하다가 그의 곁을 떠났다. 더군다나 혹한 속에 담요도 없이 짚을 깐 침대에서 쓸쓸히. 그러니 그녀를 잃은 포의 심정이 얼마나 애절했겠는가. 바닷가 왕국, 천사들의 시기, 애너벨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없으면 달도 별도 뜨지 않는 캄캄한 세계 등으로 그려지는 '환상의 바닷가 세계'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그 시인은 단 하루도 더 살기 어려울 것 같은 절절함이 느껴지는 시다.

 

『애너벨 리』를 읽고 영감을 얻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자신의 대표작인 『롤리타』에서 애너벨을 부활시킨다. 롤리타를 만나기 전에 험버트가 '바닷가 공국'에서 만난 열세 살 소녀의 이름이 바로 애너벨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 아득한 여름의 빛 속에서였을까. 아니면 그 아이를 향한 과도한 욕망은 나의 선천적 이상을 입증하는 최초의 사례에 지나지 않았을까? …… 그러나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애너벨의 죽음이 안겨준 충격 때문에 그 악몽 같은 여름날의 좌절감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것이 연애를 가로막는 영구적인 장애물로 작용하는 바람에 청춘을 쓸쓸히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안다. …… 애너벨이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깃든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우리는 만나기 오래전부터 똑같은 꿈을 꾸었다. 서로의 기억을 비교해보니 신기하리만큼 유사점이 많았다. …… 아, 롤리타,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었더라면!(24∼25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포의 단편소설들은 초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기괴하거나 어쨌든 몹시 극단적이다. 절망감에 시달리고, 모순적이며, 자기분열적인 작가의 성격이 깊게 베어 있다. 작가 스스로 '도착적인 것(the perverse)'이라고 부른 비현실적이고 예외적인 소재를 추구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 또한 크게 엇갈렸다. 아주 현대적이거나 심지어 탈현대적인 모든 것의 선구자라는 견해와, T. S. 엘리엇이 말한 대로 '재능이 탁월한 사춘기 이전 젊은이의 지성'을 가진 작가, 즉 미성숙한 작가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룬 작품들로는 이 책의 맨 앞에 수록된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나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이 특히 인상적이다. 북대서양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추락했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어부의 체험을 다룬 이야기는 셰익스피어가 폭풍우를 소재로 삼아 쓴 「템페스트」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산더미같은 폭풍우와 맞서 싸우는 영화 「퍼펙트 스톰」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거대한 소용돌이에 대한 너무 생생한 묘사 때문에 발끝이 저릴 정도다.

 

붉은 죽음이라는 무서운 역병을 피해 왕과 귀족들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성에서 사는 동안 그곳에서 벌어지는 기괴하고도 환상적인 이야기를 그린 「붉은 죽음의 가면극」은 공포 영화 「Goast Ship」을 떠올릴 정도로 소름이 돋고 무섭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포의 작품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가장 심오하게 그린 작품은 「리지아」가 아닐까 싶다. 보기 드문 학식과 환상적인 미모와 음악적인 언어 등등 세상의 모든 남자가 바랄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춘 리지아를 아내로 둔 남자의 이야기다. 그토록 완벽한 아내와 더없이 행복하게 살던 그는 하루 아침에 그녀를 병으로 잃는다. 고귀한 가문 출신의 리지아는 아주 막대한 양의 재산을 남기고, 그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황량하고 외딴곳에 있는 사원을 구입한 뒤 거기서 칩거한다. 그는 음습하고 황량한 사원의 외관은 그대로 두지만 실내만큼은 왕궁을 능가할 만큼 호화롭게 꾸미고 나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숙녀를 '리지아의 후계자'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주인공은 리지아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새로 맞은 아내를 혐오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끝내 병들어 죽는다. 수의를 입힌 로웨나 곁에 머무는 동안 남자는 리지아에 관한 수천의 기억에 빠져들고, 마침내 죽은 로웨나가 리지아로 환생하는 모습을 본다.

 

이제 그녀의 이마와 뺨과 목도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온기가 그녀의 몸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심장도 약하게 뛰었다. 아내가 살아났다. 나는 더욱 열정적으로 그녀를 소생시키는 일에 덤벼들었다. …… 그러다 갑자기 혈색이 가시고 맥박이 멈췄으며 입술은 죽은 자의 표정으로 되돌아 갔다. 곧 그녀의 몸 전체가 얼음장처럼 차디차게 식은 채 납빛을 띠었고, 경직 상태에 접어들어 팽팽한 윤곽을 잃어버리고 마치 여러 날 동안 무덤에 묻혔던 시체 같아 보였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이중성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은 「어셔가의 몰락」과 「윌리엄 윌슨」을 꼽을 수 있다. 「어셔가의 몰락」은 익숙한 공포 소설의 원형에 가깝다. 컴컴하고 우중충하고 적막하던 어느 날 '나'는 어셔 저택을 찾아간다. 저택의 주인은 소년 시절 단짝 친구 중 하나였다. 황량하고 음침한 모습의 어셔 저택 안에는 오랜 병환에 시달리는 여동생 메들라인과 오빠인 로더릭 어셔가 살고 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갑작스레 죽은 여동생을 지하 납골당에 매장하는 일을 도와 주는데, 며칠 후 폭풍이 휘몰아치는 한밤중에 둔중한 문이 열리고, 그 문밖에 수의를 입은 매들라인 어셔 양이 우뚝 서 있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면서 흔들거리다가 오빠 쪽으로 꽈당 넘어졌고, 그를 시체로 만들어버린다. 혼비백산한 '나'는 그 저택을 피해 도망쳐 나오는데, 그때까지 여전히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우와 함께 어셔 가의 저택 건물도 지붕에서부터 지그재그를 그리며 쪼개지더니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윌리엄 윌슨」은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가 잉글랜드 지방의 고색창연한 마을에 자리잡은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똑같은 이름을 지닌 친구를 만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 학교에서 5년 동안이나 생활하는 동안 윌슨은 끊임없이 '나'를 쫓아다니며, '나'를 흉내내고, 대들고, 조소한다. 마침내 나는 그 아이를 견딜 수 없이 증오하게 되고, 그 학교를 떠난다. '나'는 이튼으로, 옥스퍼드로 학교를 옮겨 다니지만, 그는 어김없이 거기까지 찾아온다.

 

로마의 카니발 기간 동안 어느 공작의 궁전에서 개최된 가면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젊고 명랑하며 아름다운 공작 부인을 초조하게 찾는다. 바로 그 순간 어깨에 가벼운 손길이 느껴지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낮고도 지긋지긋한 속삭임'으로 다가온 윌슨과 마주친다. 분노에 휩싸인 '나'는 그 녀석을 옆방으로 끌고가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마침내 결투 끝에 그를 칼로 찔러 죽이고 보니, 가면과 외투를 벗은 그의 모습은 '나' 자신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사람은 윌슨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동안 나는 마치 나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네가 이겼고, 내가 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너 또한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넌 세상과 천국과 희망에 대해 죽은 존재니까! 넌 여태까지 내 안에서 존재해 왔으니까. 너의 모습과 똑같은 내 모습을 보면서, 나를 죽임으로써 네가 얼마나 철저하게 너 스스로를 살해한 것인지 똑바로 보라고."

 

 

「배반의 심장」과 「검은 고양이」는 살인범의 도착적인 심리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배반의 심장」에 나오는 주인공은 아무 이유도 없이 함께 사는 노인을 죽이고, 「검은 고양이」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양이를 죽이고, 나중에는 뜻하지 않게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하는데,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범행이 발각되지 않을 게 가장 확실해진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범행의 발각'을 자초한다는 점에서 똑 닮았다.

 

「구덩이와 추」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끔찍한 공포를 그린 작품인데, 사방이 벽으로 갇힌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시시각각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와 처절하게 씨름하는 모습은 '악몽' 그 자체다. 지하 감옥의 가운데는 썩은 곰팡이의 고약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깊은 구덩이가 파져 있고, 죄수의 몸은 나무 틀처럼 생긴 것 위에 단단히 묶여 있다. 감옥의 천장에서는 시계추처럼 생긴 강철 칼날이 쉿 소리를 내며 자꾸만 아래로 내려온다.

 

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여하튼 그 장치가 아주 조금만 밑으로 내려와도, 날카롭게 번뜩거리던 그 도끼가 내 가슴을 후려칠 거라는 기대에 신경 마디마디가 다 떨려 왔다. 내 신경을 떨게 한 요인, 내 몸을 움츠리게 한 요인은 희망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아 종교재판소의 지하 감옥에 갇힌 자에게 속삭이던 것은 희망 ㅡ 고문대 위에서조차 개가를 올리는 바로 그 희망 ㅡ 이었다.

 

 

끈에 묶인 사형수가 최후에 시도하는 탈출 방법은 차마 눈뜨고 지켜보기 어렵다. 주위에 들끓는 쥐들로 하여금 자신을 묶은 끈을 갉아먹을 수 있도록, 자신이 먹다 남긴 양념이 묻은 음식 조각들을 끈 위에 열심히 문질러대기 때문이다. 죄수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향해 덤벼드는 거칠고 대담한 쥐들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손가락이 박히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상은 적중한다. 수백 마리의 쥐가 음식이 발라진 결박끈 주위를 바삐 돌아다니고, 그 짐승들이 목 위에서 몸을 비틀고, 그것들의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더듬지만, 초인적인 인내 끝에 결박은 느슨해지고 마침내 죄수는 결박에서 탈출한다.

 

사형수가 겪는 극한의 공포 단계에서 난데없이 붉은 눈을 번뜩이는 '쥐'가 등장한다는 점은 몹시 흥미롭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이 작품이 조지 오웰의 『1984』에도 조금은(?)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반역 혐의로 체포된 주인공 윈스턴이 거듭되는 가혹한 고문에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다가 최후로 끌려간 곳은 악명 높은 '101호실'인데, 거기서 윈스턴이 마주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바로 쥐였기 때문이다.

 

"자네의 꿈속에 자주 나타났던 공포의 순간을 기억하나? 자네 앞에는 시커먼 벽이 있었고, 짐승 우는 소리가 자네 귀에 들렸지. 벽 맞은편에 무시무시한 게 있었네. 그게 뭔지 자네는 알고 있었지만, 감히 그걸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 벽 맞은편에 뭐가 있었나? 바로 쥐들이 있었잖았나?"(397∼398쪽)

 

 - 조지 오웰, 『1984』 

 

 

극한의 공포와 절망감, 심연으로의 추락이나 가차없는 몰락, 음습함과 기괴함이 가득한 게 포의 작품들을 특징짓지만, 「도둑맞은 편지」에 이르면 그런 기분이 싹 가신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부터 뭔가 다르다. 더군다나 이 작품에서는 탐정의 원조인 뒤팽이 등장한다! 그가 바로 훗날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도둑맞은 편지」는 중편 길이의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과 함께 '추리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작품이다.

 

포의 문학적 특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 있는 여러 문학 장르에서 '개척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추리 소설이나 공포 소설뿐만 아니라 공상 과학 소설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쉽게 감지된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마음의 어두운 구석에 자리잡은 불가해한 심리들이 짙게 깔려 있다. 기괴하거나, 공포스럽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끝없는 추락에 내몰리거나, 혹은 괴기스럽게 복수하거나. 어찌 아니 그랬겠는가. 그의 인생 자체가 늘 불운의 연속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가난과 우울과 절망과 비참에 내몰렸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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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8-09-22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점점 한 작품, 한 작가만 다루시는 게 아니라 그 깊이와 외연도 확장되어 가시네요.
어릴 때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고 무서워 이불뒤집어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잠 못 이루던 여름밤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세상에 벽속에 시체라니요.ㄷㄷㄷ
이 끔찍한 상상은 <수사반장>의 벽장속의 귀뚜라미 시계로 이어지며 제 어린시절 불면을 만들어냈었죠.;;;;
수사반장의 그 에피소드는 대강 이렇습니다. 주택 공사장 인부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그 중 한명이 실종됩니다. 살해혐의는 충분한데 시체가 없죠. 시간은 흐르고 집은 완공되어 입주합니다. 얼마 뒤 신고가 들어옵니다. 벽쪽에서 자꾸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고요. ...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 저 벽 너머의 공포를 항상 상상하게 해준 포였습니다.
쓰신 내용 나중에 다시 천천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짬 내어 들어와 대략적으로 읽었네요.
추석 연휴 평안히 보내십시오~

oren 2018-09-23 15:31   좋아요 0 | URL
한동안 웅편거작들을 꽉 붙잡고 오랫동안 거기에 탐닉하는 재미를 붙여왔는데, 최근에 몇몇 작가들의 단편들을 읽어보니 나름대로 독특한 재미가 있더군요. 그런데, 포의 단편들은 너무나 최신의 작품들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주 현대적이면서도 기발한 상상들이 가득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추리소설들과 괴기 소설들의 원형이 바로 포에게서 비롯되었구나 하는 느낌도 많이 들었고요.

가장 놀랐던 건 물론 포가 쓴 「애너벨 리」였어요.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에 등장하는 그 열세 살 소녀가 다름아닌 포의 애너벨이었다니... 포의 단편이라도 읽지 않았더라면 그 둘 사이의 연관을 새까맣게 모를 뻔했어요. 포와 애너벨, 포와 나보코프, 험버트와 롤리타와 애너벨의 연관 등에 얽힌 사연들을 찬찬히 음미하면서 『롤리타』를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치솟았지만, 꾹꾹 눌러 참고 있습니다.^^

생매장 이야기는 「검은 고양이」, 「어셔가의 몰락」, 「아몬티야도 술통」 등등에 거듭 등장해서 나중엔 별로 놀랍지도 않던데, 아주 어릴 적에 일찌감치 그런 작품들을 읽고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하기 어려운 남모를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어릴 때 들었던 귀신 이야기는 단 한 번만 들어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으니까요. 저는 어릴 적에 살았던 고향의 종갓집 연못 못둑에 근사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백 년 수령의 소나무 위를 배회했다는 ‘하얀 상복의 귀신 이야기‘를 듣고, 그 소나무 아래를 지나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지나다녔는지 모른답니다.(물론 그 소나무는 아직도 그대로 서 있지요.) 특히나 깜깜한 밤에 홀로 그 소나무 아래를 지나칠 때면 간이 콩알만 해져서 진땀이 빠작빠작 날 정도였지요. 뭐, 지금은 그 이야기가 언제 존재하기나 했었나 싶을 정도가 되었지만요. 고향을 떠나온 지 어느새 30년도 훌쩍 지났으니까요.

페크pek0501 2018-09-30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깊고 넓음의 독서에 대하여 존경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님의 글을 보면 늘 자극을 받게 되고 많이 배우게 됩니다.

알라딘 메인에서 책을 살펴보다가 님의 페이퍼를 발견하여 꼼꼼히 읽고 책을 구입한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독서의 방향을 제시 받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기회가 되어 말씀드립니다. -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8-10-01 00:24   좋아요 2 | URL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아주 다양한 생각들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하고, 구름처럼 빠르게 휙휙 스쳐가기도 하는 듯해요. 그런 생각들을 제때에 얼마쯤이라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다시는 그 생각들을 영영 되살리기 힘들 때도 많은 것 같고요.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책 내용을 곰곰 되짚어 보고, 어느새 가물가물 사라지기 시작하는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붙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해봐야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기도 하고요. 리뷰나 페이퍼로 정리하지 않으면 그런 기회는 영영 사라질 때가 아주 많으니까요.그래서 때로는 숙제하는 듯한 무거운 기분이 들더라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글로 차분히 정리해 보려고 끙끙거린답니다. 그런 글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옆가지로 뻗어나가더라도 일부러 내버려 두기도 하고요.

어떤 책이든 그걸 다 읽고 난 직후의 아주 생생한 느낌이나 생각들은 너무나 증발하기 쉬운 얄미운 속성들을 지닌 듯해요. ‘나중에 적당한 시간이 나면 글로 한번 정리해 봐야지 …… ‘ 라는 생각 때문에 정작 독후감을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 책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돌이켜 보면 속상할 때도 많고요. 그래서 이런 글이라도 남기고 나면 괜한 안도감이 들 때도 있답니다. 나중에라도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느낌들을 되살펴 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 제가 받았던 느낌을 전달해 드릴 수도 있고요. 아무튼 단 한 번의 작업으로 꽤나 먼 미래까지 무언가가 계속 연장되는 효과를 얻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인 듯해요.^^

늘해랑 2019-01-0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동감하네요. 저또한 항상 좋은 책을 읽고 나중에 잘 정리해야지 하면서 놓쳤던 일이 매무 많았거든요ㅠㅠ
근데 이 글을 보고 다시금 그때그때 후회하지않고 해야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의 고민이 혼자만 생각했던것이 아니라는게 느껴져서 위로받고 갑니다.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ㅋㅋ

oren 2019-01-04 16:34   좋아요 0 | URL
네.. 제 글에 공감해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투르게네프(1818∼1883)

 

투르게네프는 러시아를 빛낸 위대한 소설가에 반드시 포함되는 작가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덜 알려져 있고 또 그만큼 덜 친숙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작가가 한창 시절을 보내던 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매력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만큼의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 탓도 있다. 그는 그만큼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딱 200년 전에 태어난 작가에게 우리가 과연 얼마나 친숙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러시아 작가인데 말이다.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자면 우선 그가 살았던 시대부터 조금 더 고찰하는 게 순서이지 싶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완성되던 해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 무렵의 세계를 좀 더 넓게 둘러 보면 이렇다. 구대륙에서는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휩쓴 끝에 알프스를 넘어 러시아 원정(1812.5∼1812.10)까지 감행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 여파로 이듬해 파리가 함락되고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된다(1814년). 새로운 유럽의 국제 질서는 빈 회의에 맡겨지는데, 빈 회의가 잠시 난항을 겪자 그 틈을 비집고 나폴레옹은 파리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100일 천하로 끝나고, 워털루 전투(1815년)에 패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난다. 빈 회의가 끝난 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창으로 신성 동맹이 성립되고, 영국 · 러시아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이 4국 동맹(1815년)을 맺는다. 저 멀리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1821년)하고, 그리스는 지난한 독립 전쟁(1821∼1832)을 겨우 시작한다.

 

이제 다시 눈길을 러시아로 돌려 보자.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는 몹시 분주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치른 뒤에는 파리에 입성하여 빈 회의와 신성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그런데 1825년에 갑자기 사망한다. 이때 후계자 문제로 어수선한 틈을 타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반란이 일어난다. 나폴레옹을 추격해 유럽 원정에 나섰던 진보적인 청년 귀족들이 1816년부터 혁명적 결사를 조직해 활동해 오다가, 반동적인 니콜라이가 즉위하는 1825년 12월 26일에 행동을 일으켰지만 군대에 진압되고, 대다수는 잔혹하게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러시아 최초의 무장 봉기이자 러시아 혁명 운동사의 시작인 셈인데, 러시아 전역에 오래도록 커다란 충격파를 남겼다. 데카브리스트와 깊숙히 교유했던 푸시킨이 이 반란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겼고,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 또한 구상 단계에서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중심 소재이자 배경이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맨 처음 쓰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데카브리스트 혁명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겪는 지식인의 이야기를 쓸 참이었다. 그러자면 데카브리스트 반란보다 앞서 일어났던 나폴레옹 전쟁부터 먼저 고찰해야 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국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작가의 생각이 바뀌었다. 데카브리스트 지식인 몇 사람보다는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러시아 민중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이야기로 바뀌었고,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완전히 철수한 이듬해인 1813년까지의 이야기가 웅대한 장편으로 탄생했다. 『전쟁과 평화』에 딸린 에필로그에서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소소한 훗날 이야기들도 1820년 12월 초순에 이르면 한결같이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고 정지된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25년 12월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혁명 이야기는 『전쟁과 평화』에서는 끝내 담기지 못한다.

 

투르게네프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말고도 작가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860년 이후 검열이 가혹한 러시아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평생 동안 쫓아 다녔던 여가수인 폴린 비아르도를 따라 홀연 프랑스로 건너간 뒤 유럽에서 여생을 보냈고, 거기서 수많은 작가들과 교유하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가 교유한 인물들은 대표적으로 플로베르, 에밀 졸라, 모파상, 빅토르 위고, 알퐁스 도데, 조르주 상드, 헨리 제임스 등이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할 때는 푸시킨(1837년), 레르몬토프(1839년), 도스토옙스키(1845년), 톨스토이(1855년) 등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졌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을 탈고하던 해인 1861년에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심한 언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고, 1867년에는 바덴바덴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략 이만큼 투르게네프의 주변을 둘러보고 나면 그가 우리에게 조금은 덜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사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투르게네프와 그의 대표작인 『아버지와 아들』을 얘기하자면 이런 식으로 작가의 주변을 한번쯤 빙 둘러 돌아보는 방식이 약간은 유용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야말로 '세대 간의 갈등'이 핵심 주제인데, 세대 간의 갈등이란 결국 동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이며, 이런 세대 갈등의 요소들을 한겹 두겹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그 속에는 시대 자체가 차츰 변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수반되는 '세대들 사이의 다양한 인식 차이'가 깊숙히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굳이 200년 전쯤의 시대적 배경들을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시시콜콜 들추어 낸 이유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그런 역사적 배경 지식들이 적잖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세대 간의 갈등 속에는 뜻밖에도 나폴레옹, 나폴레옹 전쟁, 웰링턴 장군 등은 물론, 1825년에 일어났던 데카브리스트 반란,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황제 등이 심심찮게 자주 등장하며,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도 주요 인물로 활약했던 실존 인물인 꾸뚜조프 장군(러시아군 총사령관) 같은 인물까지도 등장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와 아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푸시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싯구절이 슬며시 인용되는 정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여서 조금도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와 아들』에 담긴 가공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차례다. 소설 제목의 원뜻은 『아버지들과 아이들』이지만 두 세대의 대립과 갈등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로 굳어졌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의외로 단촐하다. 아들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바자로프와 그의 대학 동창인 아르카디 키르사노프다. 아버지들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르카디의 아버지인 니콜라이와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인 파벨이다. 이들 네 사람은 당대 러시아 사회가 떠안고 있던 온갖 현안 문제들에 대해서 사사건건 견해를 달리하고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 충돌의 중심에는 늘상 바자로프와 파벨이 자리잡고 있다.

 

1859년 5월, 페테르부르크에서 학업을 마친 아르카디가 귀향길에 오른다. 그는 절친이자 스승 격인 바자로프를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영지인 마리노 마을로 함께 데려간다. '아버지 세대'인 니콜라이와 파벨은 귀족 출신들이고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인 데 반해, '아들 세대'인 바자로프는 잡계급 출신의 혁명적이고도 급진적인 민주주의자이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러시아의 농노해방(1861년 1월)을 앞두고 두 세대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파벨과 바자로프는 대면한 첫날 저녁부터 '서로가 강력한 적수'임을 직감한다. 당시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이슈였던 농노제도,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유물론과 관념론, 문학과 예술, 러시아의 미래 발전 방향 등등에 대해 어느 하나 서로의 견해가 다르지 않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벨이 보기에 바자로프는 '몹시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냉소주의자이자 천한 놈'일 뿐이었고, 바자로프에게 파벨은 철주한 귀족주의자이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현상'일 뿐이었다. 그들의 견해 차이는 너무나 커서, 그 둘 사이에 끼인 온건한 보수주의자인 니콜라이와 온건한 진보주의자인 아르카디가 곤욕을 치른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려 애써 보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파벨은 젊어서 한때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젊은 귀족 신분이었으나 어느새 영락하여 홀몸으로 동생의 영지에 얹혀 사는 신세다. 니콜라이는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 아들보다 더 어린 나이의 동네 처녀를 데려와 후처 삼아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런 시골 영지에 일부러 '친구 따라' 시골로 찾아와 손님 신세로 체류 중인 바자로프 또한 자신의 거처가 마냥 편할 리는 없다. 이런 기묘한 상황에서 서로 다함께 차를 마실 시간이나 식사 시간만 되면 파벨과 같은 '꼴통 보수'와 매번 마주쳐야 하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파벨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자로프가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다고 해서 무작정 그를 내칠 입장도 아니다. 아무리 그 청년이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조카가 가장 믿고 따르는 절친이자 일부러 손님으로 데려온 전도유망한 청년을 어떻게 함부로 내쫓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와 아들』에는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사이의 '세대 갈등'만 있는 건 아니다. 연인들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던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 속에 어김없이 다양한 유형의 커플들을 창조해 냈다. 그 가운데는 동네 처녀인 페네치카에 대한 향반(鄕班) 귀족 니콜라이의 동정 어린 사랑이나 카챠를 향한 청년 아르카디의 순수한 사랑 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아무래도 젊은 과부인 오딘초바를 향한 바자로프의 사랑만큼 특별하진 않다.

 

바자로프는 자칭 니힐리스트로서 '사랑의 감정' 자체를 냉소하고 배척하려 애쓰지만, 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과부인 오딘초바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마저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절감한다. 바자로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젊은 청년과의 불확실한 사랑 때문에 새로운 번민에 빠지기 보다는 안정과 평온을 선택하는 오딘초바는 냉정하고도 이기적이다. 사랑의 열병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자로프에게 결단코 먼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딘초바의 그런 태도 때문에 바자로프는 더욱 애타게 그녀 주위를 맴돌지만 그 두 사람의 사랑은 끝끝내 오딘초바에 의해 거부되고, 두 사람은 기약없이 결별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스스로 위로하고, 아픈 사랑에 대한 미련과 회한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도리어 안도하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잔상이 오래 남는다.

 

오딘초바는 바자로프가 뜻하지 않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방이 아니라 객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정하게 손가락 끝을 내밀었지만 얼굴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어 있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바자로프가 서둘러 말했다. "우선 당신을 안심시켜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한 평범한 인간은 오래전에 정신을 차렸고, 자기가 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에 떠나면 오랫동안 뵙지 못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연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이 혐오감으로 저를 회상하리라 생각하며 떠난다면 아주 불유쾌할 겁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높은 산 위에 방금 올라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했다. 얼굴은 미소로 활기를 띠었다. 그녀는 다시 바자로프에게 한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에 응했다.

 

"지난 일을 떠올려서 뭘 하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솔직히 제게도 잘못이 있었어요. 애교를 부리진 않았다 해도 뭔가 다른 잘못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전처럼 친구로 지내요. 그건 꿈이었어요. 그렇잖아요? 누가 꿈을 기억하겠어요?"

 

"누가 그런 걸 기억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랑이란 …… 그건 위선적인 감정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뻐요."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이렇게, 바자로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둘 다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그들 자신도 모르는 일을 작가가 어찌 알겠는가.(271∼272쪽)

 

 

한편, 파벨과 바자로프의 갈등은 엉뚱한 데서 끝내 폭발하고 만다. 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장차 뛰어난 의사가 될 소양이 풍부했던 바자로프는 친구네 집에 머무는 동안 친구 아버지인 니콜라이의 후처 페네치카와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다. 그녀가 낳아 기르는 갓난아기가 아플 때 정성껏 돌봐주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어느날 아침 산책길에 정원에서 만나, 서로 함께 장미꽃 향기를 맡으면서 키스하는 장면이 우연히 파벨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파벨은 더이상 바자로프의 행동거지를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뿌리깊은 증오심과 경멸을 담은 상대방의 도발에 바자로프도 곧바로 결투에 응한다. 다음날 아침 곧바로 권총 결투가 벌어졌지만 다행히 파벨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 정도로 그치고, 바자로프는 이내 그곳을 떠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귀향한 아들을 맞이하게 된 바자로프의 부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얼마 전에도 아들이 친구인 아르카디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곁에 머물렀지만 그 기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이다. 그때 바자로프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서 고작 사흘밤만 묵고 나서 갑작스레 훌쩍 떠나고 말았다. 자바로프의 부모는 어쩌면 아직도 그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잠깐 그 때의 느닷없는 이별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다음 날 바자로프와 아르카디가 떠났다. 아침부터 온 집안이 침울한 분위기였다. ……  바실리 이바니치는 전에 없이 부산을 피웠다. 그는 눈에 띄게 허세를 부리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발을 쿵쿵 굴렀지만, 그의 얼굴은 삐쩍 말라버렸고 눈길은 끊임없이 아들 쪽을 스쳐지나갔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는 조용히 울었다. 남편이 아침 일찍 꼬박 두 시간 동안 달래지 않았다면 노파는 망연자실하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달 안에 꼭 돌아오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고 자기를 붙잡고 있던 포옹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바자로프가 여행마차에 올라탔을 때, 말들이 움직이고 방울이 울리고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젠 더 이상 배웅할 필요가 없고 피어올랐던 먼지도 가라앉았을 때, 티모페이치가 완전히 등을 구부리고 비틀거리면서 조그만 자기 방으로 되돌아갔을 때, 갑자기 쪼그라들고 낡아버린 것 같은 집에 노부부만이 남았을 때, 조금 전만 해도 현관 계단에 서서 힘차게 손수건을 흔들던 바실리 이바니치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머리를 가슴에 푹 떨어뜨렸다. "버렸어. 우리를 버렸어!" 그는 중얼거렸다. "우릴 버렸어. 우리와 있는 게 답답했던 거야. 이젠 혼자야. 이 손가락처럼 혼자 남았어!" 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만 편 한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백발이 성성한 자기 머리를 하얗게 센 남편의 머리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바샤,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이란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거예요. 그애는 매처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지만, 우리는 한 구멍 속에 난 버섯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하지 않지요. 나만은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215∼216쪽)

 

 

어딘가 실의에 잠긴 모습으로 불쑥 집으로 되돌아온 아들이 말했다. 육 주 동안 머무를 생각으로 왔으며, 공부를 하고 싶으니까 제발 아무런 방해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서재를 통째 내어주고, 아들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러던 아들에게 우울한 권태와 막연한 불안이 찾아오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사라졌다. 혼자 산책하는 것도 그만두고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찾아냈다. 군의(軍醫)로 복무하다 퇴역한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부상당한 농군을 힘겹게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진료를 직접 도와드리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바자로프가 아버지의 방으로 찾아가 '질산은'이 있느냐고 묻는다. 자신의 상처를 지져야 한다고 했다. 이웃 마을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환자가 나타났고, 일부러 간청해서 그 환자의 해부 실습에 참여했다가 그만 손가락을 좀 베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티푸스에 감염되었다면 때가 이미 늦었다는 게 문제였다. 손가락을 베었을 때만 하더라도 군의(郡醫)에게 질산은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사흘 째 되던 날, 아들은 이미 식욕도 잃고, 두통과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실리 이바니치는 말없이 아들을 간병했다.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아들 방으로 들어와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바자로프는 '훨씬 좋아졌다'고 말하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바실리 이바니치는 아내를 향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문 채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집 안의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모두 풀죽은 얼굴을 했다. 집 안은 이상한 정적에 휩싸였다. …… 바실리 이바니치는 아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아들을 피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저 다시 안락의자에 죽은 듯이 앉아서 이따금 손가락만 딱딱 꺾었다. 노인은 잠깐씩 정원으로 나와 형용할 수 없는 충격으로 장승이 되어버린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질문을 피하면서 다시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참다 못한 아내가 그의 손을 붙들고 거의 위협하듯이 발작적으로 말했다.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대답 대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웬일인지 미소 대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295∼296쪽)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바자로프에게 단 하나 남은 유일한 소망은 오딘초바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평생을 바자로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꿋꿋이 버티며 살아왔던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나 뜬금없는 '아들의 소원'이었지만 그 요청을 흔쾌히 들어준다. 소식을 들은 오딘초바는 독일인 의사까지 데려왔지만, 이미 환자는 죽은 사람 같은 창백한 얼굴과 흐릿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힘겹게 그녀에게 건네는 말 속엔 '다시 오지 못할 순간들'에 대한 깊은 회한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절박한 메시지가 함께 농축된 느낌을 준다.

 

"아,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데……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전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은 하나의 존재 형태인데, 나 자신의 형태가 이미 해체되고 있으니까요."

 

바자로프가 죽고 나서도 세월은 무심하게 흐른다. 그러나 마리노 마을의 지주 저택에서 일어난 몇몇 중요한 변화들(두 쌍의 합동 결혼식이 있었다. 아르카디는 오딘초바의 여동생 카챠와 결혼하고, 니콜라이는 후처 페네치카와 정식 결혼식을 올린다. 오딘초바는 정치가를 지망하는 유능한 법률가와 결혼한다. 파벨은 모스크바로 떠난다.)을 모두 합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삶에 끼친 극적인 변화에 비하면 턱없이 사소해 보인다. 바자로프의 무덤가 풍경을 묘사한 작가의 문장은 너무나 애통하고 가슴이 시려 계속 읽기 힘들 정도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정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나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온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이렇게 소설은 끝난다. 그런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엄청난 소란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바자로프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태도에 관한 문제였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의 장점을 너무 과장하고 미화했다는 주장을 펼쳤고,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작가가 바자로프를 통해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을 악랄하게 희화하고 중상모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은 당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두고 왜 그토록 엄청난 소란을 일으켰는지를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양쪽 진영이 극단적인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주장했던 내용들이 현대의 독자들에겐 그다지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사회·정치적인 소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살던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겪었던 온갖 삶의 애환들을 그린 세태 풍속 소설이나 연애 소설, 혹은 가족 소설의 요소들도 두루 지니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의 좋았던 한 때를 자주 회상하는 파벨과 니콜라이의 모습에서 차츰 스러져가는 러시아 특유의 귀족 문화에 대한 애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니콜라이가 자식 또래에 불과한 마을 처녀를 데려다 사는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토속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더구나 젊은 청년 바자로프가 그녀의 발산하는 젊은 매력에 홀딱 빠져 느닷없이 입맞춤을 시도하는 모습은 도리어 순수하고도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전도 유망한 의사 지망생이었던 바자로프가 늙은 부모에게 다소 쌀쌀맞게 대하고, 그 부모들은 아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헌신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태도 또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다.

 

투르게네프에게는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느껴지는 혁명적이고 테리리스트적이며 충격적인 기질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 대신에 (정말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 작품들에서 곧잘 느껴지는 특유의 토속적인 향수나 우수, 혹은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모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환자들을 돌보며 돈독하고 즐겁게 지낼 꿈에 잔뜩 부풀어 오른 바자로프의 부모들에게 들이닥친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얼마나 황당하고도 슬픈가. 이 대목에선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인력거를 끌던 김첨지가 억세게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몹시 들떠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그날 저녁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내의 죽음이었으니 말이다. 오딘초바와 바자로프의 지극히 조심스러운 사랑 접근법은 얼핏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든다. 은근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현실의 장벽 때문에 끝내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 안타까워하면서 이별한다는 점에 한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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