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얽힌 에피소드와 프란츠 베르펠에 대하여...

 

 

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였다. 그녀가 미술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였다. 우선,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그림부터 간단히 살펴 보자. 그녀의 '바람 같은 삶'이야말로 '바람'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 1914년. (출처 : 위키백과)

 

 

폭풍처럼 강렬한 사랑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의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로 특유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주의 미술을 선보였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거친 붓 터치와 차고 어두운 색채에 실어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이 유독 격정적으로 읽히는 것은 그림 속의 연인이 바로 화가 자신과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알마 쉰들러를 모델로 하였기 때문이다. 알마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의 딸로 미술과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타고난 미모와 지성으로 뭇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스물두 살 꽃 다운 나이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 결혼하였고, 말러가 사망한 이후에는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하였으며, 다시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가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한 때 이 여인과 연인관계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바람의 신부>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그렇다. 알마 말러는 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의 아내였다. 자신의 직업 또한 '작곡가'였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음악도시 빈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첫 남편이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말러라는 성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 그녀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였다. 그녀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던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공연 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 가운데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 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고, 그 덕분에 그녀는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럽게)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The Kiss (Lovers), 1907–1908.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출처 : 위키백과)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한다. 무려 20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작곡가의 꿈을 접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지만, 첫 딸이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진다. 말러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쓴다. '천인 교양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바로 그 무렵에 그녀를 위해 쓰여진 곡이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구스타프 말러가 죽자, 알마 말러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한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였다. 그로피우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 또다른 남자가 오스카 코코슈카였다. 이 화가는 알마 말러가 건축가와 재혼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알마와 헤어지자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했고, 이내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되돌아 온다.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몸까지 다친 셈이었다. 그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 '알마를 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알마 말러에게 집착을 보였다. 심지어 오페라 공연을 갈 때에도 그 인형의 자리를 예약할 정도였다니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만하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편지를 썼는데, 70번째 생일날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고 하오. 대신 시인을 찾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으며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후세에 우리들의 살아있는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 줘요.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

당신의 오스카.

ps :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그토록 끈질겼던 코코슈카의 구애를 뿌리치고 1915년에 시작된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 출장과 새로 태어난 아들의 '친부 논란'등이 문제였다. 그때 친부 논란을 일으킨 남자가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베르펠이었다. 그는 이미 공공연히 알마의 애인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청산한 알마는 무려 10년 동안 베르펠과 동거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 그와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함께 한다. 유태인이었던 부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녔고, 알마는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프란츠 베르펠(1890∼1945년)

 

 

여담이지만, 몇 년 전에 나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알마 말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을 때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와 입을 맞추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빈을 떠날 때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날렵한 커피잔이 눈에 띄었고, 지금까지도 매번 그때 집어 든 그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다.

 

 

벨베데레 궁전(출처 : 위키 백과)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 말고도 에곤 실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 <포옹>등이 소장되어 있다.

비록 <바람의 신부>는 없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스> 속의 그 여자가 '말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주인공일 줄은 미처 몰랐다. 더군다나 어떤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내게는 몹시 낯선 이름의 소설가에 불과했던 프란츠 베르펠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줄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평생 동안 무려 30번씩이나 읽었다는 바로 그 소설가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이 '빈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이해해야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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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8-11-29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란츠 베르펠 같은 작가를 알게되는 경우가 바로 책을 읽는 묘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서로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되면 무슨 큰 비밀을 알아낸 것 처럼 마음이 막 설레이기도 합니다.
공연히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말이죠 ㅎㅎ

oren 2018-11-29 13:00   좋아요 1 | URL
프란츠 베르펠이 알마 말러의 세 번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사람이 갑자기 전혀 낯설지 않은 인물처럼 느껴지더군요. 그가 평생 동안 그토록 자주 읽었다는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대해서도, 알마 말러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그 작품의 주인공의 아내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니 더더욱 그랬겠다 싶더군요.^^

카알벨루치 2018-11-29 13:02   좋아요 0 | URL
이런 귀한 작가를 또 알게되면 또 다른 세계가 저에게 열려지는 것이니 얼마나 환상적인지요! 오렌님 덕분입니다 ㅎ

oren 2018-11-29 13:05   좋아요 1 | URL
일종의 ‘간통 같은 독서‘라고나 할까요? ㅎㅎ
http://blog.aladin.co.kr/oren/7172342

카알벨루치 2018-11-29 13:06   좋아요 1 | URL
오렌님 표현이 급진적입니다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8-11-29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란츠 베르펠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해요~ㅎ

oren 2018-11-29 13:01   좋아요 1 | URL
네.. 이번에 알고 보니 여러모로 관심이 가는 작가더라고요.^^
 

 

사람들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스치듯 마주친 '책에 관한 에피소드' 때문에 기어이 그 책을 읽는 경우는 얼마나 자주 있을까? 나로서는 그런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하지만 그런 인연 덕분에 읽은 책들은 보통스러운(?) 다른 책들보다 훨씬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그런 인연이 그만큼 각별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으로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단테의 『신곡』이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도무지 언제쯤이나 그런 책을 읽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마주친 '자막' 한 줄이 나를 어디엔가 단단히 옭아매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솟구쳤던 것이다.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를 볼 때였다.

 

주인공인 카터(모건 프리먼)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 때문에 입원한 어느 날,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철학 교수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된 에드워드(잭 니콜슨)와 함께 병원을 뛰쳐나간 두 사람은 그 '리스트'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카터는 비록 자동차 정비공 신분이었지만 독서광이었던 덕분에 아주 박식했다.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별의별 문제들을 식은 죽 먹기로 척척 알아맞힌다. 정확히 어떤 장면에서였는지는 지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 불쑥 친구인 에드워드에게 농담삼아 던지는 말 하나가 내 가슴에 콕 박힐 때가 있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단테의 『신곡』은 읽어봐야 할 거 아냐?"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결국 단테의 『신곡』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기 전에 난생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을 땐 피렌체에 있는 '단테의 생가'를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럴 때조차 단테의 책을 읽어보리라는 다짐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 속에 나오는 배우의 대사 하나가 그토록 놀라운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영화와 책이 강하게 결부된 두 번째 경우는 2004년에 개봉했던 <투모로우>라는 영화를 볼 때였다. 그 영화에서는 두 청춘남녀가 도서관에 갖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한참이나 이어진다. 갑자기 뉴욕항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기상이변이 닥쳐 온 도시가 통째로 마비되기 때문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도서관에 꽃힌 무수한 책들을 불태우면서 추위를 견딘다. 그때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에미 로섬이 남자친구한테 건네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다음 대사는 물론 정확한 게 아니다.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을 대충 되살려본 것뿐이다.)

 

"아무리 춥다 해도, 니체의 책까지 불태울 순 없어."

 

나는 그 영화를 볼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니체의 책들은 제대로 읽어본 게 거의 없었다.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니체의 책들은 읽지 못했다. 아니, 읽고 싶어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내겐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니체의 책들을 단단히 붙잡고 읽게 된 계기는 물론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게 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체의 책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에미 로섬이 뉴욕의 어느 도서관 서가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 빼들었다가 '인류의 양심상' 도저히 그 책들을 불태울 수 없어 도로 제자리에 꽂는 장면을 늘상 함께 떠올리곤 한다.

 

세 번째로 생각나는 책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내가 이런 희귀한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맨처음으로 알게 된 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였다. 그 책 속에는 온갖 시인과 철학자와 역사가들이 남긴 인용문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독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루크레티우스였다. 그 시인만큼 '사물의 본성'을 제대로 간파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몽테뉴를 만날 때만 하더라도 루크레티우스의 책은 국내에서는 언감생심 번역될 생각조차 없을 무렵이었다. 내가 몽테뉴를 처음 만난 건 1980년대 초반이었고,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로부터 물경 30년이나 지난 2012년에야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몽테뉴의 소개 덕분에 그 책을 정말 각별한 심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몽테뉴 수상록』에 인용된 루크레티우스의 문장들까지도 다시 찾아볼 정도였다. (다시 만나고 거듭 만나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된 고대의 시인 이야기)

 

네 번째로 꺼내 들고 싶은 책은 토마스 만의 자전적 소설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내가 이 책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처음으로 발견한 건 『평생 독서 계획』이라는 책에서였다. 그 작품이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길래 그 소섫을 무려 30번씩이나 읽는 소설가가 있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나는 만의 소설을 그토록 많이 읽은 소설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소설가가 읽었다는 그 '횟수' 만큼은 또렷이 기억해 두었다. 그만큼 내게는 '횟수가 주는 인상'에 꽉 붙들렸던 셈이다. 물론 그 뒤로 내가 토마스 만의 소설 가운데 가장 먼저 찾아 읽은 소설은 결국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었다. 토마스 만이 쓴 뛰어난 단편들이 많았음에도 나는 기어코 다른 책에서 읽은 '에피소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셈이다.(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_뤼벡과 그 밖의 도시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6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내가 『평생 독서 계획』에 대해 리뷰를 썼던 게 벌써 8년 전의 일이다.(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30번씩이나 읽은 소설가의 이름을 여태껏 한 번도 자세히 뒤져볼 생각을 갖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 우연히, 혹시나 싶어, 검색창에 그 소설가의 이름을 넣어 봤더니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쓴 소설 몇 권이 우리말로도 버젓이 번역되어 나와 있을 정도로 그는 아주 유명한 소설가였다!(더군다나 그가 생전에 거쳐갔던 여러 도시들 가운데 내게도 무척이나 인상적인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프라하,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빈 등등.)

 

그런데 독일에서도 유난히 큰 도시였던 뤼벡을 (몇년 전 자동차를 빌려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쏘다녔던 '독일 일주 여행'에서) 깜빡 빼놓고 지나친 일은 지금 생각해도 몹시 후회스럽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무대가 바로 뤼벡이고, 토마스 만의 고향도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멍청한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끝으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즐겨 읽었던 바로 그 소설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프란츠 베르펠

 

1890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베르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의 운송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르펠은 얼마 뒤 라이프치히의 한 출판사에 들어간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틈틈이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 사이에 『세상 친구』, 『우리는』, 『서로』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내는데, 탁월한 표현주의 시인의 출현이라는 평을 얻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베르펠을 ‘다음 세대’를 이끌 위대한 시인으로 일컫기도 했다. 베르펠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첫 소설은 『베르디. 오페라 소설』(1924)이다. 음악가 베르디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오델로」가 작곡된 과정을 담고 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 빈에서 거주하고 있던 베르펠은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고, 1940년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전까지 장편소설 『고등학교 동창회』(1928), 『바바라 혹은 깊은 신앙』(1929), 『나폴리의 형제자매』(1931), 『무사 닥에서의 사십 일간』(1933), 『예레미아.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라』(1937), 『횡령된 천국』(1939) 등을 펴냈다. 희곡 작가로도 명성이 높아 1944년에 발표한 『야코봅스키와 대령』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1941)는 남프랑스에서 쓰기 시작해 망명지인 미국에서 완성, 발표한 작품이다. 또 다른 대표작 『베르나데트의 노래』(1941)는 배우 제니퍼 존스의 출연으로 영화화되면서 널리 알려졌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45년 세상을 떠났다.(알라딘 작가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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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처럼 살았던 <바람의 신부>, 알마 말러
    from Value Investing 2018-11-29 01:28 
    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붉은돼지 2018-11-29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곡도 니체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도 부덴브로크가도 읽지 못했습니다..ㅜㅜ
다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두 번 읽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듯합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쩌다 보니 마의 산을 두 이나 읽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ㅜㅡㅜ
다른 것은 몰라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지금도 뭐 바쁜 것은 아닙니다만.... 신곡은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습니다.

oren 2018-11-29 12:38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책과 맺는 묘한 인연을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읽은 책들과 내가 읽은 책들이 상당 부분 겹치는 경우는 별로 없을 듯해요. 그래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두 번씩이나 읽으셨다니,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단테의 <신곡>도 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래요.^^ 너무 서두를 건 없을 것 같고요. 죽기 전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엄청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책 이야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외

 

페크 님의 글에 적극 공감합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반복해서 보거나 들을수록 더 자세히 알게 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는 일견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유독 책의 경우에는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교과서를 열심히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요.)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쉽게 생각하자면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책들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서 빨리 다른 책을 펼쳐 봐야지 하는 생각을 품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데 책을 아주 많이 읽은 사람들이나 소설가 혹은 문학평론가들은 뜻밖에도 '반복해서 읽는 독서'에 대해서 너무나 자주 강조하고 있어서 깜짝깜짝 놀랄 때도 많더군요.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 저도 언젠가는 꼭 한 번 글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는데, 페크 님의 글 때문에 오래도록 묵혀 두고 있었던 그 생각이 다시금 꿈틀거리네요.

 

저 또한 반복해서 읽은 책들이라고 해봐야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로 빈약한 터여서, 제 경험담을 담은 글을 쓸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게 안타깝네요. 그 대신, 여태까지 책을 읽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반복해서 읽는 독서'에 관한 잊을 수 없는 문장들만이라도 몇몇 찾아서 인용문으로 덧붙여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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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독서란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다 그들의 머리를 도리어 산만하게 만든다.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몇몇 좋은 저자의 책을 골라 읽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 톨스토이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6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나보코프가 말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재독자(再讀者)다."(『문학 강의』 이 말은 어떤 책이든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읽을 때' 비로소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책 전체를 바라보며 문장 하나하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롤리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이 독서법을 권한다.(545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따라서 『롤리타』는 최소한 두 번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한 번은 험버트의 목소리로, 다른 한 번은 나보코프의 목소리로. 실제로 나보코프는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그것이 소설을 읽는 두 가지 방법이고 『롤리타』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읽어보자.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535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해설_시적 에로티시즘과 심미적 희열의 세계> 중에서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훌륭한 단편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을수록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93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 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296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독자로서 내 경험에 따르면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첫 번째 독서 어딘가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그 멋진 부패함에 이끌려 읽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는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에 이해를 덧붙일 수 있었다.

 

반면 『49호 품목의 경매』를 처음 읽었을 때 분노 자체였다. 그러나 두 번째 읽으면서 순식간에 그것에 사로잡혔는데 그 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고로 나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두 번 정도는 읽었으면 한다.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326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나는 문학 비평을 비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실 작가로서는 비평의 부재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도 없다. 내가 말하는 비평은 명상으로서의 비평, 분석으로서의 문학 비평이다. 논하고 싶은 책을 여러 번 읽을 줄 아는 문학 비평(좋은 음악을 끝없이 반복해서 듣듯, 훌륭한 소설 역시 반복해서 읽히도록 만들어졌다.), 시사성의 무자비한 괘종시계에 귀 기울이는 일 없이, 일 년 전, 삼십 년 전, 삼백 년 전에 탄생한 작품들을 논할 줄 아는 문학 비평, 어떤 작품의 독창성을 파악하여 이를 역사의 기억 속에 기록하고자 하는 문학 비평 말이다. 그런 명상이 소설의 역사를 수반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조이스, 프루스트 등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없으면 모든 작품이 자의적인 판단에 내맡겨지고 신속히 잊혀 버린다.(38쪽)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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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1-24 1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먼댓글 해 주셔서 먼저 감사드립니다.

재독에 관한 글이 이렇게 많군요. 어떻게 이런 글을 다 모아 놓으셨는지 존경스럽습니다. 물론 독서광이어야 가능한 일일 테지요.
덕분에 흥미롭게 읽었어요.
저도 재독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이 재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편소설을 일곱 번까지 읽어 본 것이 제 최고 기록입니다. 밑줄을 친 글을 여러 번 읽는 취미가 있을 뿐, 책 전체를 다 읽은 건
몇 권밖에 되지 않아요. 맘에 드는 책은 1년 뒤에 다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서울에 오늘 첫눈이 왔어요. 사진을 올렸으니 감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oren 2018-11-24 14:52   좋아요 5 | URL
재독에 관한 글을 따로 모아둔 게 아니어서, 어젯밤에 이 구절들을 찾느라 시간이 꽤나 걸리더라구요. 특히나 밀란 쿤데라의 문장 ˝좋은 음악을 끝없이 반복해서 듣듯, 훌륭한 소설 역시 반복해서 읽히도록 만들어졌다.˝ 라는 글은 예전에도 한번 생각나서 일부러 찾으려다가 실패했었는데, 이번에 페크 님의 글 덕분에 기어이 찾아 냈고요.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에는 ‘반복 독서‘를 워낙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어서,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훑어보느라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리더군요.^^

그런데 페크 님은 단편소설을 무려 일곱 번까지 읽으셨다니, 이미 ‘반복 독서의 묘미‘를 깊이 체험하신 듯싶네요. 저는 한 번 읽고 나서 손아귀에 꽉 붙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책들은 ‘필사를 하면서‘ 다시 읽는 고약한 습관이 있답니다. 그게 소설이든 수필이든 역사책이든 상관없이요. 그런 버릇을 들이다 보니, 그렇게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처음에는 어렴풋했지만) 나중에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물론 다른 책들을 읽을 욕심 때문에 ‘두 번째로 읽으면서 주요 대목을 필사하는 작업‘을 건너뛴 책들도 많았지만, 다시 읽으면서 필사한 책들은 결국 제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책이 되더군요.(예전에 이런 내용에 대해 쓴 글도 있었고요. http://blog.aladin.co.kr/oren/8201971)

제가 반복 독서의 묘미를 가장 최근에 맛 본 경험은 뜻밖에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답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수많은 국가와 도시와 지명과 강과 산들이 무수히 등장하기 때문에 맨 처음 읽을 땐 사건의 윤곽을 붙잡는 것조차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 방대한 책을 다 읽고 나자, 다시금 그 책 속으로 풍덩 빠져들고 싶은 열망이 생기더라구요. 그 속에 담긴 게 아무튼 어마무지하다는 걸 느꼈으니까요. 곧바로 두 번째로 읽기 시작하자마자 많은 것들이 진짜로 새롭게 드러나더라고요. 숱한 영웅들이 처음 읽을 땐 정말 따로따로 조각난 듯이 움직였는데, 두 번째로 읽기 시작하자 그 수많은 영웅들이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여기저기서 함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흥분되더라고요. 역사가이기 전에 철학자로 더 유명했던 플루타르코스의 진면목도 그때 뚜렷이 더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고요. 나중에 필사를 하는 동안에 그 인물들에 얽힌 ‘유명한 그림들‘까지 찾아 보고 나니까, 그 책이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뿌리깊이 스며 들어 있는가도 알게 되고요.

그런데 나보코프의 놀라운 작품인 『롤리타』와 같은 경우는, 그 책을 금방 읽고 나서 ‘이건 한번 읽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작품이야‘ 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기어코 그 책을 다시 붙잡지 못하고 다른 책으로 옮겨 간 아픈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네요. 그래서 그 책에 대해서는 ‘어떤 글‘도 도저히 쓰지 못하겠더라구요. 고작 한 번밖에 안 읽었는데 제가 무얼 끄적거릴 수 있었겠어요. 아무튼 ‘반복 독서‘만큼 권장할 만한 독서법도 드문 듯해요.^^

목나무 2018-11-24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 같은 경우는 발췌독도 하고 훑어보기식 독서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몇 번을 다시 읽더라구요.
어서 새로운 책을 빨리 만나기 위해 재독을 거의 안해본 저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려주신 글 보니 반복해서 읽는 게 오히려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페이퍼 잘 보고 갑니다. ^^

oren 2018-11-24 14:55   좋아요 4 | URL
저는 눈으로만 읽는 반복 독서를 일부러, 그것도 의식적으로 헀던 경우는 아주 드물었던 듯해요. 한번 읽고 나서 ‘이 책 속에는 너무나 풍성한 보물들이 가득하구나. 그런데 나는 고작 그 책 속에서 무얼 얼마나 건졌지?‘ 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은 두 번째로 읽으면서, 웬만하면 필사를 하기 시작하게 되더라구요.(‘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고, 나중에 얼른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라도 ‘메모‘는 꼭 필요하니까요.)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변신이야기>도 그랬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몽테뉴 수상록>, <도덕감정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과 같은 철학책에 대해서도 그랬었고요. 그게 나중에는 결국 소설이나 에세이로까지 번져나가더라구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돈키호테>, <마의 산> 등과 같은 방대한 소설들도 그렇게 해서 필사를 하면서 두 번씩은 읽었더랬지요. 그런데 ‘이 책은 분명 다시 읽으면서 필사까지 해 보고 싶어.‘ 했다가도, 잠시 방심하면서 다른 책들을 붙잡는 순간, 그 의지가 순식간에 물러지는 걸 여러 번 경험하기도 했어요. 나보코프의 『롤리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작품이 특히 생각이 나네요. 어차피 그런 작품들은 나중에 꼭 다시 읽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긴 합니다만.^^
 


거짓말만이, 그리고 그보다 좀 덜하지만 옹고집은 모든 기회에 억눌러서 나오지도 크지도 못하게 막아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그들과 함께 커 간다. 그리고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 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놀라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 몽테뉴

 

 * * *

 

몽테뉴가 남겨 놓은 '거짓말에 관한 기막힌 진실'은 생각날 때마다 거듭 곱씹으며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거짓말'을 두고 벌이는 격렬한 싸움에는 거의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매번 똑같은 교훈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몽테뉴의 재치있는 말까지 끌어들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그 교훈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도 가짓말을 하는 당사자는 '세상 사람들이 제발 속아 주기를 바라는 헛된 욕망' 때문에 한사코 거짓말을 붙들고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헛된 모래성을 더욱 높이 쌓아 올린다. 쌓으면 쌓을 수록 더욱 요란스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줄도 모르고. 거짓의 모래성을 쌓으면 쌓을수록 일반 사람들은 더욱 집요하게 진실에 매달린다. 정말로 '그것이 알고 싶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 만큼 우리의 심령을 자극하는 대상도 드물다.

 

몽테뉴는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거짓은 무수한 얼굴과 넓은 벌판을 갖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진실의 좁은 문을 외면한 채 거짓의 넓은 벌판으로 허허롭게 도망쳐 봐야 결국 헛수고일 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이름이 붙은 '혜경궁 김씨 사건'이 최근에 들어 또다시 폭발적인 관심을 끈다. 지극히 당연하다. 진실은 뻔한데, 아직도 당사자가 한사코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혜경궁 김씨라는 트위터의 계정주가 그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3의 인물이 그 트위터를 사용했다면? 이토록 혹독한 의심(?)을 받는 당사자는 진작에 자신의 핸드폰을 당당히 증거물로 내세웠을 테고, 그 계정을 사용한 제3의 인물이 따로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진작에 이실직고했을 게 아닌가. 혜경궁 김씨의 트위터를 다른 사람이 도용했다는 주장만큼 반박하기 쉬운 경우가 어디에 있을까. 그토록 쉬운 방법을 한사코 외면하면서까지 궁색한 변명을 자꾸만 내세우니 사람들은 더욱 더 '거짓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을 안쓰럽게 바라보게 된다.

 

작년 2월쯤에도 이와 똑같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oren/9165803) 그 때 내가 겨냥했던 대상들은 탄핵을 코 앞에 두고도 진실을 한사코 외면하고 거짓으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막말을 일삼던 대통령 변호인단의 몇몇 변호사들, 우병우, 인명진, 김문수 등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때 쓴 글이 궁금해서 다시 읽어 봤더니, 똑같은 제목의 글을 그대로 베껴 놓아도 좋을 만큼 '오늘날의 상황'에 너무나 잘 들어 맞아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는 그때 인용했던 마키아벨리의 문장들조차 하나도 버릴 게 없을 정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하는가 보다. 그때 쓴 인용문을 고스란히 반복해서 재인용한다.(잠시나마 과거를 회상할 겸 인용문에 덧붙였던 '나의 생각' 부분까지 그대로 살렸다.)

 

사람이 취할 현명한 태도의 하나는, 상대에 대해 위협하는 언사를 쓰거나 모욕하는 말은 절대로 삼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적의 힘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협하는 말은 도리어 상대를 더 조심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모욕을 하면 점점 더 분격을 돋구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을 곯려 주려고 마음 먹게 하는 결과가 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 (중략)

 

이 점에 대해서 아시아에서의 유명한 예를 들기로 하겠다 …… (중략)

 

위의 사실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대개 군대의 명지휘관이라든가 뛰어난 정치가란, 자기네끼리나 적을 향하고 있을 때나, 시민이나 병사들이 이 같은 모욕이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일이 없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 두는 법이다. 그것은, 적을 향해 이런 언사를 사용하면 지금 말한 것처럼 터무니없는 변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료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다가는 이 역시 그 결과가 더 엉뚱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누군가 뛰어난 인물이 나서서 어떤 수단을 강구해 두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어지게 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노예로 편성된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노예군이란 로마인이 병사들의 부족으로 고민한 결과 노예에게 무기를 들려서 편성한 것이었다. 그가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누구를 막론하고 서로가 상대를 노예 출신이라고 헐뜯는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명령한 일이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로마인은 남을 헐뜯거나 남의 수치를 비웃는 것은 지극히 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본심을 말할 때는 물론이고 농담할 때라도,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손상시키고 화나게 만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말(타키투스, 《연대기》XV,68)에 있듯이 '야비한 농담이란 그것이 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가시 돋친 뒷맛을 남기는 법'이다.(406∼408쪽)

 

 - 마키아벨리, 『군주론/정략론』, 《정략론》 제2권, <제26장 경멸, 험구를 일삼으면 미움을 산다>

 

(나의 생각)

 

역사를 살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토록 닮았을까' 싶은 대목을 마주치기 마련이다. 마키아벨리가 쓴 책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략론』제1권 제7장에 나오는 <탄핵권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또다른 대목에서는 '우병우'를 떠올리게 만들고, 어떤 대목에서는 '인명진' 혹은 '김문수'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있다. 다음 대목이 무려 500년 전에 마키아벨리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

 

"정계에만 들어가면 재야 때의 뜻은 어디로 가 버리는지."(274쪽)


제2권 제26장의 내용을 인용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대통령 대리인단을 떠맡은 일부 변호사의 '막말'이 생각나서이다. 그들은 그게 자신들한테 얼마나 불리한지조차도 모르는 듯하다. 하기야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장본인 또한 '일찌감치 접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아직도 아니라고?

 


 * * *

 


 

적을 향해 업신여기는 말을 자꾸 하다 보면 완전히 이긴 듯한 기분이 들거나 헛된 승리의 환상에 도취해 버린다. 그래서 우쭐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수가 흔히 있다. 이렇듯 헛된 승리의 환영에 도취하면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환영이 사람의 마음속에 깃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분수를 벗어나게 만들어 버리므로 어쩐지 미지의 훨씬 더 좋은 것이 잡힐 듯한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다가 모처럼의 확실한 성과조차 놓치게 되어 결국은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치고 마는 결과가 흔히 있다. 이런 환영에 들뜬 사람들은 자기의 국가마저 해치는 일이 매우 많은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고금의 실례에 비추어서 상세히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론만으로는 명확하게 이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네에서 로마 군을 격파한 한니발은 카르타고로 사절을 파견해서 승리를 보고하고 지원을 구하게 했다. 이에 대한 방침이 카르타고 원로원에서 심의되었다. 개중에서도 나이 많고 현명한 시민인 한논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이번 승리를 잘 이용해서 로마와 화평을 맺도록 합시다. 싸움에 이겼다는 것을 뒷받침으로 한다면 조건이 좋으므로 화평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이 쫓다가 지고 나서 화평을 맺으려 하면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리니까요. 왜냐하면 카르타고가 로마를 충분히 격파할 임이 있다는 것을 로마에 깨닫게만 해주면 그것만으로도 카르타고인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승리를 장악한 이 마당에서는 너무 많이 바라다가 결국에 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티투스 리비우스, 《로마사》XXⅢ,11∼13) 그런데 실제로는 이 제안이 채택되지 않았다. 이렇듯 화평을 맺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카르타고의 원로원은 한논의 제안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 오리엔트를 정복했을 때 …… (중략)

 

1512년의 일인데, 에스파냐 군은 피렌체에 미디치 가를 복귀시킨 다음 …… (중략)

 

자기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군대에 공격당하는 군주가 저지르는 실수 중 가장 큰 실패는 화목을 거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방 쪽에서 신청이 있었을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제시된 내용이 아무리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받아들이는 쪽이 유익한 조건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리자의 몸의 일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니발은 영광과 함께 16년간을 지낸 이탈리아를 뒤로 하고, 카르타고인의 요구에 따라 조국 구제를 위해 귀국해 보니, 눈에 비친 것은 하스드루발과 시파쿠스의 패전이고 누미디아 왕국의 상실이었다. 그리고 카르타고인은 그 성벽 속에 갇혀 꼼짝도 못하고, 겨우 구제의 길을 강구할 수 있는 것은 한니발 자신과 그 군대밖에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조국이 최후의 막다른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덮어 놓고 모든 것을 결전에 거는 것을 피하고 다른 수단을 써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조국을 구제할 길은 화평에 있지 전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자 순순히 평화를 구했다. 그런데 그의 화평 신청이 로마인에게 거부되자, 패전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전쟁을 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또 진다 하더라도 적어도 명예로운 패배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니발같이 기력이 충실하고, 또 무패의 군대를 이끈 명장이라도 패전을 당하면 자기 조국이 노예의 처지로 떨어지고 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쟁보다도 우선 화평 공작을 구했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한니발 정도의 기력도 없고 그의 경험의 발꿈치에도 못 따라가는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사람이란 자기의 희망을 어느 선에다 멈추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실패해 버리는 법이다. 그리고 제 실력을 냉정하게 측량해 보려고도 하지 않고 한없는 희망에 기대를 걸다가 결국은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408∼411쪽)

 

 - 마키아벨리, 『군주론/정략론』, 《정략론》 제2권, <제27장 너무 과하게 바라다가는 본전도 못 찾게 된다>

 

 

(나의 생각)

 

마키아벨리가 달아놓은 제목만 봐도 너무 웃긴다. "너무 과하게 바라다가는 본전도 못 찾게 된다"니. 하기야 지금이라도 너무 늦지는 않지 않을까, 이리저리 재면서 뒤늦게 '본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뭐? 아직도 아니라고?

 

(나의 생각_추가)

 

한니발의 사례를 날카롭게 통찰한 이 대목은 이재명 지사에게는 특히 뼈아프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판단하거나, 또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도지사직을 유지하거나, 최악의 경우라도 핍박받는 정치인으로서 훗날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는 오판으로부터 비롯된 듯한 '지금까지의 대응'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어리석은 짓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마키아벨리의 말대로, 한니발 정도의 기력도 없고 그의 경험의 발꿈치에도 못 따라가는 '혜경궁 김씨네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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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만큼 널리 퍼져 읽히는 이야기도 드물다. 이야기가 대체로 짧은 데다가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화는 아이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과 끊임없는 호기심 때문에 언제나 동화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든다. 그 동화책을 읽는 독자가 아이들 자신이 되었든, 아니면 온갖 다양한 목소리와 몸짓까지 섞어가며 과장되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애쓰는 어른이 되었든 상관없이.

 

그런데 가끔씩은 명백히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정작 어른들을 위해 쓴 작품들도 그리 드물지는 않다. 『걸리버 여행기』나 『로빈슨 크루소』, 혹은 『돈키호테』와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세계 명작 동화 목록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걸작이지만, 집필 동기나 작품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어른들을 위해 쓰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흰 토끼와 짝퉁 거북이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떨까? 이 유명한 이야기는 방금 내세운 작품들과 도리어 정반대의 길을 걷는 아주 특이한 작품이다. 틀림없이 어린이를 위해 쓰인 동화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으며, 어른들이 일부러 찾아 읽을 정도로 독특한 깊이를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마치 『어린 왕자』처럼 어른들한테까지 심오한 철학적 깨달음을 던져 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왜 이처럼 독특한 지위를 지닌 채 아이들과 어른을 동시에 오랫동안 매료시키는 것일까?

 

 -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1832년∼1898년)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이유는 우선 작가로부터 찾을 수 있지 싶다. 루이스 캐럴은 동화 작가였지만 정작 본업은 수학 교수였다. 루이스 캐럴은 필명이었고 본명은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졸업후 자신이 다녔던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수학 교수를 거쳐 학장까지 지냈다. 그는 평생 숫총각으로 지냈을 만큼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예의바른 사람이었고, 유쾌하면서도 수학을 사랑했던 따분한 학자풍의 교수였다. 그는 변덕이 심하면서도 여성스럽고 친절했고, 소아성애자로 의심받을 만큼 어린 소녀들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런 독특한 배경을 지닌 작가가 앨리스 리델이라는 실존했던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동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고, 작가는 이 작품 속에 자신이 지녔던 독특한 '수학의 세계'까지 은밀히 주입시켰다.

 

그의 작품이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의 관심을 유독 붙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편지나 일기에는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이 쓰여진 150년 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모든 나라의 보통 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식인들도 매혹시켰다. 가령 에드먼드 윌슨, W.H.오든, 버지니아 울프,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버트런드 러셀, 아서 스탠리 에딩턴 같은 논리학자와 과학자들, 그 외에 무수한 철학자, 언어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이 앨리스를 사랑했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평범한 독자들이 앨리스의 모험 속에 담긴 작가의 '수학에 대한 세계관'까지 두루 헤아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에는 무수한 전문 연구자들이 방대한 주석이나 새로운 해석을 끊임없이 덧붙여 왔다. 수학자 도지슨이란 정체성에 기초한 작품 분석은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얼마나 뜨거울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시간과 시간이 처한 곤경! 수학자 찰스 도지슨은 동화 작가 루이스 캐럴이었고, 그 경계를 횡단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속성이야말로 논리와 더불어 가능한 세계들을 구상하는 데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학적 장치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죠. 동사의 시제 표현, 구어적 요소, 꿈이라는 설정, 게임, 말장난(PUN)과 수수께끼, 난센스를 통해 다양한 계산과 과정이 전개되고 가세합니다. 시간은 확대되고, 연장되고, 비틀리고, 굴절하고, 팽창합니다. 그리고 축합되죠. 엘리스를 지하의 '놀라운 세상(Wonderland)'으로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흰 토끼의 회중시계입니다. …… 결국 물리학자들이 알려주듯이, 시간은 은밀한 방식으로 공간에 파묻혀, 공간과 결부돼 있었던 것이죠. 프리먼 다이슨이 말한 캐럴 우주 말입니다. 캐럴은 수학자였고, 엄격한 유클리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환상문학 작가였고, 이렇게 공상합니다. 토끼 굴 아래로 내려가면, 저 너머에 다른 세상이, 다른 공간이, 다른 시간이 존재할 거라고 말입니다.(9∼10쪽)

 

 - 루이스 캐럴 지음, 정병선 옮김,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존 테니얼의 삽화, <시계를 보고 있는 흰 토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모험심 가득한 여주인공 앨리스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이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보는 일이다. 1862년 어느 날, 도지슨(루이스 캐럴)은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을 데리고 템스 강 상류로 보트 여행을 떠난다. 세 아이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부총장 겸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학장이었던 헨리 조지 리델의 딸들이었다. 그들은 각각 열세 살, 열 살, 여덟 살이었는데, 열 살배기 소녀의 이름이 앨리스 플레전스 리델이었다. 소녀들은 보트 여행을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아저씨한테 조르고, 도지슨은 앨리스라는 아이가 모험에 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급기야 앨리스 리델은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고, 도지슨은 정말로 2년 만에 손으로 직접 쓴 이야기를 앨리스에게 선물한다. 그 수고본의 제목이 《앨리스의 지하 세계 모험》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65년에 도지슨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그 책을 대폭 개편해서 《앨리스의 놀라운 세상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번역으로 굳어진 이야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 도지슨이 직접 찍은 앨리스 리델의 7세 때 모습(출처:위키 백과).

    그녀는 82세까지 살았고(할머니가 되었고), 1934년에 죽었다.

    위키 백과를 살펴 보면 앨리스에 대한 다양한 사진과 기록들이 줄줄 나온다.

 

앨리스는 생각했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지 않아도 되고, 쥐나 토끼한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집이 좋았어. 토끼 굴로 글어오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래도, 참말이지 이상한 곳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동화를 읽을 때도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마치 동화 속 세상 같아! 내가 나오는 책을 써야 해. 반드시! 크면 한 권 꼭 쓰고 말 거야. 하지만 맙소사, 벌써 다 커버렸잖아. 게다가 여기서는 더 클 여지도 없어.' 앨리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슬펐다.

 

앨리스는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게 되는 걸까? 지금보다 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지. 할머니가 되지 않는 거니까. 하지만 그러면 맨날 공부를 해야 해! 으, 그건 싫은데!"(85∼86쪽)

 

 - 루이스 캐럴 지음, 정병선 옮김,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시간과 공간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실제 세계와는 아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앨리스가 모험을 겪었던 세상이 앨리스가 살던 현실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흰 토끼나 겨울잠쥐, 혹은 체셔 고양이나 털벌레 등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끊임없이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로서의 본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밀린 숙제를 떠올린다거나 수업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할까봐 늘상 걱정하는 어린이처럼. 그것은 마치 꿈을 꾸면서도 '현실 세계에서의 부채 의식'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과도 유사하다. 어릴 때 무척이나 자주 꾸었던 꿈들의 아련한 추억들을 앨리스가 좌충우돌하는 원더랜드에서 재발견하는 일은 어른 독자들에겐 여간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루이스 캐럴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그런 꿈들의 편린들을 그토록 쉽게 되살린단 말인가.

 

눈이 빨간 흰 토끼를 따라 토끼 굴로 들어간 앨리스는 '빠져나올 방법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낯선 세상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몸집에 비해 너무 작은 틈새로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다가도 어느새 이상한 음료를 마신 후에 몸집이 너무나 작아져서 자신이 흘린 '눈물의 소금 바다'에 빠져 쥐와 함께 그 속을 허우적거린다. 소금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만난 쥐와 함께 뭍으로 올라온 뒤로는 여러 동물들과 함께 몸을 말리는 방법을 논의한다. 뭍으로 오른 캐릭터들은 쥐를 비롯해서 오리, 도도, 진홍앵무, 새끼 독수리 등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코커스 경주에 나서고, 갑자기 달리기 경주를 멈추고, 모두가 승자라면서 다같이 상을 받아야 한다면서 소란을 피운다. 앨리스가 자그마한 틈새로 내다보았던 '멋진 정원'에 대한 욕망들은 어느새 까맣게 잊혀지고, 앨리스는 흰 토끼를 다시 만난다.

 

바로 그때 토끼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앨리스를 인지했다. 앨리스의 귀에 성난 어조의 외침이 들려왔다. "메리 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당장 집으로 가서 장갑과 부채를 가져와! 어서, 냉큼!" 앨리스는 깜짝 놀랐고, 토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부리나케 뛰었다. 토끼가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것이라고 말해줄 생각조차 안 든 것이다.(82쪽)

 

 - 루이스 캐럴 지음, 정병선 옮김,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나의 생각)

얼마나 우스운가! 앨리스가 토끼의 사정부터 미리 살피다니! 그리고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부리나케 '토끼의 심부름'을 수행하러 무작정 달려나가는 모습이라니! 마음씨 착한 앨리스의 '본연의 모습'을 이토록 재미있게 묘사할 수 있다니! 물론 앨리스는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한다. 이어지는 대목처럼.

 

앨리스는 달려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토끼가 날 제 하녀로 아는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인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 하지만 일단은 부채와 장갑을 갖다주는 게 좋겠어. 찾을 수만 있다면 말야." 바로 그때 작고 아기자기한 집 한 채가 앨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 (82쪽)

 

근심 많은 흰 토끼를 위해 부채와 장갑을 찾으러 갔던 앨리스는 거기서 눈에 띈 음료를 (이제는 모험심이 발동해서 부푼 기대를 안고) 마신 뒤에 방 안을 꽉 채울 정도로 몸집이 불어났다가, 방 안에 널린 자갈돌이 마룻바닥에서 케이크로 바뀌는 바람에 그걸 먹고 다시 몸이 작아져 그 집을 빠져 나온다. 울창한 숲에 다다른 앨리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맨 먼저 할 일은, 원래 크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 다음에는 어여쁜 정원으로 가야 하구." 바로 그때 거대한 강아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앨리스를 쳐다본다. 앨리스의 몸집이 어느새 '버섯만큼' 작게 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원더랜드에서는 새로운 캐릭터와 공간들이 뚜렷한 방향성도 없이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진다. 그곳에서는 흡사 꿈처럼 비논리적인 상황이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와 기이하게 뒤섞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관통하는 또다른 핵심은 넌센스이다. 현실의 세계가 커먼 센스, 즉 상식이 통하는 세계라면, 원더랜드는 '터무니 없는 말이나 생각'이라는 의미의 넌센스가 정상적인 것처럼 통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 앨리스는 모험적이면서도 당돌하고 당당한 소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토끼나 쥐, 털벌레나 고양이와도 얼마든지 곧바로(?) 대화가 통할 만큼 머리가 몹시 말랑말랑한 어린 소녀였다. 온통 넌센스로 가득한 원더랜드는 '따분한 현실 세계'에 지겨워 하던 앨리스에게는 (내심 불안하긴 하지만 이미 별탈이 없을 거라는 지레짐작까지 하면서)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몹시도 가변성으로 가득 찬 흥미 넘치는 넌센스의 세계였다. 그러니 앨리스가 넌센스로 가득한 '그들만의 대화' 앞에서 매번 당황하고 동요할 까닭은 없었다. 모험을 좋아했던 앨리스는 넌센스와 무의미에 능히 대응하고 수용할 만큼 충분히 어리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

 

"저기로 가면 ……" 고양이가 오른발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모자가 살고 있고, 또 저기로 가면 ……"(이번에는 왼쪽 발을 흔들면서) "삼월이(March Hare, 3월 토끼, 뜀박질 토끼)를 만날 수 있지. 아무 데로나 가. 다 미쳤거든."

 

"미치광이들은 싫어." 앨리스가 말했다.

 

"잘 안 될걸." 고양이가 말했다. "여기는 다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지."

 

"내가 미쳤다는 걸 어떻게 알지?" 앨리스가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야." 고양이가 대꾸했다. "안 그러면 네가 여기 왔겠어?"

 

앨리스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렇게 말을 더했다. "네가 미쳤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

 

"우선은 …… 개는 미치지 않았어. 인정해?"

 

"응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개는 화가 나면 으르렁거리고,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들지. 하지만 난, 나는 기분이 좋으면 으르렁거리고, 화가 나면 꼬리를 흔들어. 내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지."(133쪽)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이상하리만큼 나이를 먹어서 읽은 독자로서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 진귀한 동화가 태어날 무렵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려낸 작가의 서문 일부다.

 

 

찬란한 오후

느긋한 주항(航).

두 개의 노에 얹힌 가녀린 팔,

변변찮은 흉내.

쓸데없는 손짓.

그렇게 떠가는 우리의 소풍.

 

우악스런 삼총사가

그 꿈결 같던 오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지.

노를 젓느라 힘들어 죽겠는 아저씨한테.

허나 연약한 사람 한 명의 목소리가

셋의 아우성을 무슨 수로 당하리요?

 

프리마(Prima)의 고압적인 명령,

"시작하세요!"

세쿤다(Secunda)의 바람은,

"짱 재미있는 걸로!"

허나, 테르티아(Tertia)는 수시로 끼어드는 방해꾼.

 

(중략)

 

놀라운 세상 이야기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아저씬 기묘하고 기발한 사건을 지어냈고,

이제 그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행복한 탐험대원.

그리고, 지는 해.

 

세상의 모든 앨리스여!

이 놀라운 세상 모험을 즐겨주세요.

어린 시절의 꿈은 신비한 기억으로 저장되고,

이 이야기도 살포시 거기 놓이겠지요.

먼 나라에서 꺾어 온 꽃으로 만든,

순례자의 시든 화환처럼 말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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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1-21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의 글을 읽고 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동화 한 편 읽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요...
동화는 저처럼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이 읽으면 좋은 장르예요. 기발해서 배울 게 많죠.


oren 2018-11-21 23:31   좋아요 0 | URL
어린이를 위해 쓴 동화를 어른이 된 지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읽는 느낌이야말로 ‘갑자기 원더랜드에 떨어진 어른이 느낄 법한 이상한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어른이 되어서 동화책을 읽다 보니, 아이처럼 책 속 이야기에 온전히 풍덩 빠져 들지 못하고, 툭하면 ‘어른이라면 이런 유치한 생각은 하지 않을 꺼야‘ 라고 중얼거리게 되니까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문에 새삼 깨닫게 된 것도 있었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고픈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요. ㅎㅎ